2003년 3월호

담배가 정신분석이론을 낳았다?

  • 글: 표정훈 출판칼럼니스트 medius@naver.com

    입력2003-02-25 18:36: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담배가 정신분석이론을 낳았다?
    세상에서 가장 하기 쉬운 일이 무엇일까? 미국 작가 마크 트웨인은 담배를 끊는 일이라고 말했다. 금연의 어려움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그 말에 고개를 가로저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다음 말을 들으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담배 끊는 일은 평생 수천 번이라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평생 수천 번이라도 끊을 수 있는, 아니 수천 번 결심해도 못 끊는 담배. 그런 담배만큼 말 많고 탈 많은 물건도 드물다. 무엇보다, 국민 건강에 최대의 적이라 할 수 있는 담배를 국가가 나서서 판매한다는 사실보다 심한 모순이 또 어디 있을까? 일종의 중독성 인체 유해물질을 제조·판매하는 한편으로 국민 건강을 염려하는 형편이니 정말 모순은 모순이다. 그런 비판에 대해 한국담배인삼공사도 할 말이 있다고 한다. 바로 ‘담배로 잃은 건강, 인삼으로 되찾자’는 말인데, 물론 우스갯소리다.

    또 다른 자살행위, 흡연

    흡연이 몸에 해롭다는 말은 오래 전부터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었다. 하지만 담배와 흡연자들이 ‘공공의 적’으로까지 지탄받게 된 것은 적어도 국내에선 최근의 일. 그러나 이미 대세는 기울었다. 바야흐로 박해받는 자의 심정을 느끼지 않고 담배를 피우기는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현실이 그렇기 때문일까? 담배를 주제로 하는 책들이 전에 없이 다양해졌다. ‘3.3인치의 유혹, 담배’(나무와숲)는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는 병가(兵家)의 격률을 확인시켜주는 책이다. 지기지피(知己知彼)가 아니라 지피지기(知彼知己)라는 점이 예사롭지 않다. 싸움에선 일단 적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걸 말해주는 듯하다. 담배를 적으로 삼고자 할 때 지피를 위한 좋은 책이다.



    아일랜드의 신문기자가 쓴 이 책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저자가 골초라는 사실. 골초가 쓴 금연 메시지라니, 어불성설이나 자가당착이 아닐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비록 부제에 금연 메시지라는 말이 나오긴 하지만, 이 책에서 적극적으로 금연을 권하는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담배에 대해 많이 알수록 금연의 성공 가능성도 커진다는 신조를 유지한다고 볼 수 있다. 중요한 내용 몇 가지를 살펴보자.

    담배가 강한 중독성을 지니고 있다는 건 모든 사람들이 다 안다. 이와 관련하여 놀라운 사실은 담배 때문에 고통받은 사람일수록 끊기 어렵다는 점. 폐암수술을 받은 사람들의 50%, 심장마비를 일으켰던 사람들의 70%가 치료 후 다시 흡연을 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담배는 어느 정도로 무서운 걸까.

    영국의 통계학자 프랭크 덕워스 박사는 1점에서 8점까지 특정 행위의 위험 정도를 측정했다. 자살이 가장 위험한 8점. 이 기준에 따르면 35세 남성이 하루 20개비의 담배를 피우는 행위는 위험도가 6.9점이다. 암벽등반의 위험도는 4.2점. 탄창에 탄환 한 발만 넣고 돌려가며 자살을 감행하는 러시안룰렛의 위험도가 7.2점. 요컨대 흡연은 사실상 자살행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말보로맨의 경고

    이 책엔 담배 하면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떠올릴 코미디언 고 이주일씨와 관련 있는 내용도 있다. 금연을 권하던 그의 기침 섞인 목소리가 아직 귀에 쟁쟁한데, 그처럼 유명인이 세상을 떠나면서 사실상의 마지막 메시지로 금연을 권한 경우는 드물지 않다. 배우 율 브린너도 이씨와 마찬가지로 투병생활중 TV 공익광고에 출연해 금연을 권했다. 그리고 말보로 담배 광고의 모델 웨인 맥라렌은 스턴트맨 출신으로 광고 촬영을 위해 25년간 하루 30개비씩 담배를 피웠다고 한다. 1992년 51세의 나이에 폐암으로 세상을 떠난 그가 사망하기 전 남긴 한마디는 다음과 같다. ‘담배가 당신을 죽일 것입니다. 내가 바로 그 산 증인입니다.’

    담배산업이 전세계적으로 밀수나 불공정 가격거래 등 불법행위와 깊이 연루돼 있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암 연구소 또는 학술지에 소속된 유명한 과학자들을 매수해 흡연에 대한 사실을 왜곡시키는 거대 담배회사들의 행태, 건강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학설이 나오기만 하면 전술적으로 반박하는 기사들을 언론에 발표해 찬물을 끼얹는 파렴치함 등이 이 책에서 지적된다. 그 때문일까. 미국에선 담배회사들의 행태가 못마땅해 담배를 끊겠다는 사람이 더 많다고 한다.

    담배산업에 초점을 맞춘 책으로 ‘담배, 돈을 피워라’(들녘)가 있다. ‘씨앗에서 연기까지 담배산업을 해부한다’는 부제가 결코 허풍이 아니다. 특히 첫 흡연이 개인의 자발적 선택이 아니라 담배산업계가 조장하는 이미지 세뇌에 따른 타율적 행동이라는 지적이 인상적이다. 담배업자들의 유일한, 최대의 관심은 예비 소비자들의 잠재의식을 자극해 행동을 유발하는 결정적인 순간, 즉 시용결정(trial decision)에 있다는 것. 예를 들어보자.

    미국의 거대 담배회사들은 담배를 교양·자신감·자유 등 긍정적 이미지와 연관짓는 마케팅 및 브랜드전략을 구사한다. 여성에 대해서는 날씬함의 이미지를 담배와 연관짓는 전략을 펼친다. 실제로 1927년 럭키스트라이크 담배는 비만여성과 담배 피우는 늘씬한 여성을 대비시켜 매출을 1년 사이 3배로 늘렸다.

    물론 1990년대 들어와 미국에선 담배 광고가 어렵게 됐고, 담배업계는 2460억달러라는 엄청난 배상합의금을 내놓아야 했다. 그렇다면 담배산업은 이제 사양산업이 될 것인가? 저자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 오히려 새로운 경쟁자의 담배시장 진입이 어려워짐으로써 기존 회사들의 위상이 강화됐다는 것. 더구나 3.5달러짜리 담배 한 갑엔 배상합의금(41센트), 변호사수임료(5센트), 주 정부측 변호사경비(4센트)까지 포함돼 있으니, 담배회사들이 배상합의금에 개의치 않는 게 당연하다.

    담배회사들의 교묘한 상징조작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미국에서 여성 흡연율을 높이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사람이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의 조카 버네이스라는 점이다. 그는 담배회사로부터 여성 고객 공략법을 조언해달라는 의뢰를 받고 이렇게 말했다. ‘담배를 자유의 상징으로, 그래서 흡연을 일종의 승화된 구애로 여기게 하라.’ 버네이스는 19명의 늘씬한 신인 여배우들이 뉴욕 맨해튼에서 담배를 집은 손을 흔들며 ‘자유의 횃불’이라고 소리치는 광고를 제작하기도 했다.

    혹시 프로이트가 버네이스에게 영향을 미친 건 아닐까? 사진 속에서 늘 담배를 든 프로이트고 보니 그런 의구심이 이유 없어 보이지 않는다. 프로이트는 24세에 담배를 피우기 시작해 말년에 구강암으로 서른 번의 수술을 하면서도 담배를 놓지 않았던 골초 중 골초다. 그런 프로이트를 주제로 한 책이 ‘프로이트와 담배’(뿌리와이파리)다.

    이 책의 핵심은 빈에 거주하던 프로이트가 베를린의 동료의사 빌헬름 플리스와 교환한 편지들. 1887∼1904년 둘 사이엔 무려 300여 통의 편지가 오갔는데, 프로이트가 고민을 털어놓고 플리스가 답하는 식이었다. 프로이트의 고민은 ‘담배를 끊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로다’였다. 일시적으로 담배를 끊은 프로이트는 금단현상으로 울증(鬱症)을 보이기도 하고, 담배를 금지하는 플리스에게 욕구불만을 드러내며 반박글을 써보낸다. 잠시 금연할 때 프로이트가 늘어놓은 푸념. ‘전보다는 건강해졌네만, 그렇다고 행복해진 건 아닐세.’

    정신분석가인 저자 필립 그랭베르는 두 사람의 편지를 통해 프로이트의 담배에 대한 집착을 정신분석학적으로 조명한다. 결론은 프로이트의 삶과 학문이 일관되게 담배와 밀착돼 있었고, 나아가 담배야말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론을 낳게 했다는 것. 결론에서도 짐작할 수 있지만, 저자는 결코 금연 권장 목적으로 이 책을 쓴 게 아니다. 그는 한국 독자들을 위한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가벼운 문학적 산책과 진지한 이론적 분석을 오가면서 나름으로는 애쓴 이 책에서, 한국의 흡연자 독자들이-비흡연자도 환영이다-작은 즐거움이라도 발견한다면 지은이로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다.’

    ‘뻐끔 담배’는 ‘건강 흡연법’

    마지막으로, 담배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쓴 담배 이야기로 ‘담배 이야기’(지호)가 있다. 저자 김정화씨는 한국인삼연초연구원에서 20년 넘게 재직중인 명실상부한 담배 박사. 저자의 이력답게 이 책은 담배에 관한 모든 것을 정리해보려는 야심을 보여준다. 담배를 끊지 못하는 독자들에게 저자가 제시하는 ‘건강 흡연법’이 눈길을 끈다. 먼저 공초 오상순이나 처칠 수상처럼 담배연기를 깊이 들이마시지 않는 이른바 ‘뻐끔 담배’ 혹은 ‘입담배’ 흡연법이 있다. 그리고 담배를 3분의 1만 피우면 니코틴을 4%만 흡입하게 되며, 그때까지만 피우는 게 담배 맛도 좋다는 점을 감안한 ‘긴 꽁초 남기기’ 방법이 있다.

    흡연인구 1300만명에 담배 판매인이 17만명에 달하는 나라. 성인남성 흡연율 68%에 30대 흡연율이 75%를 넘는 세계 최상위 담배소비국. 바로 대한민국이다. 개인적으로 커밍아웃을 하자면 필자도 30대의 75%에 속한다. 이 자리를 빌어 ‘이번엔 반드시 담배를 끊겠다’고 나 자신과 약속해본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