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3월호

화려한 다도해, 깊고 진한 뻘맛 , 그리고 입심 좋은 사람들

봄이 오는 길목, 땅끝 해남에서 완도 갯돌밭까지

  • 글: 김기영 기자 사진: 김성남 기자

    입력2003-02-26 13: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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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東風이 건듣 부니 물결이 고이 난다. 돋 다라라 돋 다라라…’
    • 고산 윤선도의 어부사시사에는 풍류가 넘쳐난다. 풍류는 여유에서 나온다.
    • 해남과 완도에는 모든 것이 풍부하다. 개펄과 바다에서 나오는 싱싱한 해산물, 비옥한 땅에서 사시사철 재배되는 농작물, 입심 좋고 잘 웃는 사람들, 여기에 다도해의 그윽하고 화려한 풍광까지…. 윤선도의 고향, 땅끝으로 떠나보자.
    화려한 다도해, 깊고 진한 뻘맛 , 그리고 입심 좋은 사람들

    완도읍 정도리의 푸릇푸릇한 맥주보리밭 사이로 소몰이에 나선 아낙네들. 봄나들이라도 하는 양 사람도 소도 활력이 넘쳐 보인다.

    대륙의 끝 해남과 잇닿은 섬 완도를 찾은 이유는 봄을 느끼기 위해서였다. 북위 34도17분21초, 한반도 최남단 해남의 땅끝마을이라면 한반도 어느 곳보다 봄기운이 분명할 터였다.

    그런데 서해안고속도로에 들어서자마자 아침부터 찌뿌둥하던 하늘에서 눈가루가 날리더니 마침내 눈보라로 변했다. 눈은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굵어져 군산을 지날 즈음엔 폭설로 변하고 말았다. 봄을 찾아 떠난 여행길에 눈을 만나다니….

    6시간 가까이 달려 도착한 해남, 눈발은 여전했지만 내린 눈은 영상의 기온에 곧바로 녹아버렸다. 이 상태라면 잔뜩 부풀어 곧 터질 듯 여문 월동배추가 지천으로 널린 밭이나, 맥주보리가 푸릇하게 싹을 틔운 들판을 배경으로 봄 분위기 아스라한 사진을 찍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밤새 내린 눈이 영하의 기온에 하얗게 얼어붙어 있었다. 해남의 최고봉 대둔산 자락은 물론, 해남 읍내도 온통 하얀 눈을 뒤집어써 천지가 하얀데 어디서 봄을 담을 것인가. 다행히 해가 중천에 걸릴 무렵, 기온은 영상을 회복했고 산 정상과 응달을 빼고는 눈도 모두 녹았다. 아직 바닷바람이 차가웠지만 바람막 있는 양지에서 해바라기라도 할라치면 졸음이 몰려올 정도로 햇볕이 따스했다.

    본격적인 해남기행에 앞서 해남군이 자랑하는 명소 몇 군데를 둘러보았다. 먼저 황산면 우항리 공룡발자국 화석지. 수천만년 전 거대한 호수였다가 바다로 변했던 이곳은 금호방조제가 들어서면서 다시 호수로 탈바꿈했는데 그 와중에 오랜 세월 바닷 속에 잠겨있던 중생대의 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판암과 사암으로 이뤄진 퇴적암층에 선명하게 찍힌 공룡 익룡 물새 발자국이 바로 그것. 해남군은 자연상태로 방치됐던 공룡발자국 화석 지역을 세 곳의 전시관으로 꾸며 관광객을 맞고 있다. 화석지 곳곳에 서 있는 조악한 공룡모형이 눈에 거슬리지만 세계적 희귀 관광상품인 공룡발자국 화석을 직접 볼 수 있다는 즐거움에 참아줄 만했다.



    해남은 개펄에서 나는 해산물로 사철 풍성한 식단을 차릴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곳곳에 들어선 방조제로 자연 상태의 개펄이 줄어들면서 어민들은 소중한 천연자원도 함께 잃었다. 물론 방조제의 등장이 재난만 안겨준 것은 아니다. 방조제로 생겨난 인공호에 겨울 철새들이 날아들기 시작한 것. 아침 저녁 방조제 반대편으로 바닷물이 들고 날 때 인근 하늘을 새카맣게 뒤덮는 철새의 군무는 해남의 또 다른 자랑거리다.



    고천암 방조제로 난 길을 따라 땅끝마을로 내달리던 중, 길 옆 갈대숲에 똬리를 틀고 있던 짐승과 눈이 마주쳤다. 긴 목을 꼿꼿이 세우고 취재차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녀석의 정체를 확인하고자 길을 되돌렸다. 어디였던가. 놈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갈대숲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는데 한 마리 날짐승이 푸드득 날갯짓을 한다. 잿빛 몸에 군데군데 검은 줄무늬가 있는 새, 재두루미였다. 천연기념물로 해남 철새도래지에서도 매년 20여 마리밖에 볼 수 없는 희귀조다.

    땅끝마을의 일몰을 보기에 앞서 ‘어부사시사’의 작가 고산 윤선도의 자택인 녹우당(사적 167호)을 찾았다. 해남 윤씨의 종가로 아직도 종손이 살고 있는 이곳은 남도 전통가옥의 옛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한참 개보수중이어서 진면목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대둔산을 배경으로 아름드리 고목 사이에 정숙한 조선여인이 앉은 자태처럼 차분하게 자리잡은 고택을 보노라니 들떴던 마음이 착 가라앉는 듯했다.

    해남에서는 어느 길로 달려도 땅끝마을로 통한다. 일몰을 보기 위해 달려간 땅끝전망대, 바닷바람이 매서웠지만 일몰을 보기 위해 찾아온 연인, 가족으로 사방이 소요하다. 다도해 사이로 떨어지는 해는 장관이다. 붉은 기운이 연보라색으로 변하더니 마침내 시린 푸른색으로 바닷속으로 사라지면서도 해는 자신의 위엄을 알리고 있었다.

    늦은 저녁식사를 하려 대흥사 입구 한정식집 전주식당을 찾았다. 해남군청이 지정한 우수음식점인 이곳의 주 메뉴는 표고버섯전골과 표고전. 전골에서 표고를 건져 시금털털한 묵은 김치에 싸서 먹는데, 어울릴 것같지 않은 두 음식의 조화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30가지 이상의 반찬이 순차적으로 나오는데 표고의 은근한 맛과 남도 젓갈의 짭짤하고 칼칼한 맛에 취하다 보면 저도 모르게 과식을 하고 만다. 주인 김성환씨는 “남도음식의 특징은 정성이다. 밑반찬부터 표고요리까지 엄격하게 관리하는 것이 맛의 비법”이라고 말했다.

    다음날 아침은 대둔산 산행으로 시작했다. 대둔산 정상에서 다도해 일출을 보기 위해서였다. 다도해에서 뜨고 지는 해였지만 일출의 감동은 일몰의 그것과는 다른 장쾌함을 담고 있었다.



    완도대교를 건너자 날씨는 한결 푸근해졌다. 해남의 맥주보리가 막 싹을 틔웠다면 완도에서는 제법 푸릇푸릇한 것이 완연한 봄기운을 느끼게 한다. 취재진이 완도에 들어설 무렵, 마침 물때가 바뀌어 서둘러 개펄 일을 끝내고 들어오는 아낙네의 행렬로 해안가 도로가 소란스러웠다. 석화를 양동이 가득 머리에 이고 개펄을 빠져나오던 한 아낙은 “설날 도시에 간 자식들이 오면 나눠먹으려고 석화를 캐러 나왔다. 이걸로는 큰 돈이 안 된다”고 수줍게 말한다.

    도시인에게 완도는 다도해해상국립공원의 중심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완도를 비롯, 청산도 보길도 신지도 조약도 등 크고 작은 섬이 완도군을 구성하고 있다. 이들 섬은 제각각 천혜의 해수욕장을 품고 있다. 청산도는 영화 ‘서편제’ 촬영지로 유명하다.

    완도읍 정도리 구계등 해변은 사시사철 방문객이 끊이지 않는 곳. 이곳 해변의 갯돌은 청환석이라 불리는데 얼핏 제각각인 듯하지만 둥글둥글한 돌이 850m 해변에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어 그 자체가 장관이다. 바닷물이 밀려들고 날 때 나는 ‘자그락 자그락’ 소리는 마치 갯돌들의 속삭임 같다. 늦은 점심을 위해 찾은 해남읍내 용궁해물탕집. 이곳 역시 해남군이 지정한 남도 별미집이다. 해남 개펄에서 나는 30여 가지 해산물로 끓인 이곳 해물탕의 개운한 맛에 혀가 알알하다. 주인 박인성씨는 “신선한 재료를 쓰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는 흉내낼 수 없는 맛”이라며 해물탕에 해남의 뻘맛이 살아 있다고 자부한다.

    어느덧 해남 완도를 찾은 셋째날의 해는 기울고, 취재진의 발걸음이 바빠졌다. 추사 김정희가 쓴 편액이 남아 있는 대흥사와 달마사 등 해남의 고찰을 찾아서도 한가로이 산사의 정취에 빠져 있을 여유가 없었다.

    땅끝 해남과 다도해의 절경, 완도 개펄에서 만난 아낙들, 어느 식당을 들어서도 한결같은 맛깔스러운 음식…. 봄이 오는 길목에 찾은 남도는 방문객을 한동안 흥취에 젖게 하는 묘한 매력을 품고 있었다.



    화려한 다도해, 깊고 진한 뻘맛 , 그리고 입심 좋은 사람들

    출어 준비가 한창인 완도항. 섬과 섬을 잇는 여객선도 분주히 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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