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9월호

(주)제너시스 윤홍근 회장

“품질과 맛으로 승부수 던지면 고객은 반드시 반응합니다”

  • 글: 최희정 자유기고가 66chj@hanmail.net

    입력2003-08-22 17: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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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종 프랜차이즈 브랜드 비비큐(BBQ)로 프랜차이즈 업계에 돌풍을 일으킨 (주)제너시스의 윤홍근 회장. 어릴 적부터 간직해온 기업경영인의 꿈을 한시도 잊지 않으며 마침내 창업 8년 만에 닭고기 체인점 1600여 개를 일군 그의 성공 신화.
    (주)제너시스 윤홍근 회장

    한국 프랜차이즈 업계의 기린아로 평가받는 윤홍근 회장

    창업 8년 만에 닭고기 체인점 1600여 개를 일군 사람이 있다. 바로 토종 닭고기 전문체인점 비비큐(BBQ·Best Believable Quality)를 운영하는 (주)제너시스 윤홍근(尹洪根·48) 회장이다. 그는 소비자 입맛에 딱 맞는 치킨과 공격적인 마케팅 전략 등으로 프랜차이즈 업계에 돌풍을 일으킨 주인공이다.

    치킨전문브랜드인 비비큐로 대표되는 (주)제너시스는 닭을 숯불에 구워먹는 독특한 방식의 ‘닭익는 마을’, 우동·돈까스 전문점인 ‘U9’ 등의 브랜드도 보유하고 있다. 최근 경기침체가 장기화하면서 외식업체의 매출이 속속 떨어지는 와중에도 유독 제너시스의 브랜드들은 평균 15% 이상씩 매출이 오르고 있다. 지금도 수도권 지역을 대상으로 300여 명이 비비큐나 닭익는 마을 점포를 내려고 대기중이다.

    가맹점부터 활성화하는 마케팅 전략

    창업 이전에 철저히 시장분석을 하고 고객 입맛에 맞는 치킨을 개발해 어느 정도 성공을 예감했던 윤회장이지만, 10년도 채 안 된 기업이 연간 매출 3500억원을 달성하고 최근엔 중국 진출까지 성공적으로 이루어내자 연신 입을 다물지 못하는 눈치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처음 치킨전문점을 낸다고 했을 때 사업에 일가견이 있다는 사람마다 손사래를 치며 반대했기 때문이다.

    “비비큐는 오랜 기간 닭과 관련된 일을 하면서 쌓아온 노하우를 바탕으로 시작한 사업이기에 승산이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품질과 맛으로 승부수를 던지면 고객은 반드시 반응하거든요. 고객 니즈(needs)에 부응하는 맛을 찾아 유지하겠다는 것은 8년 동안 제너시스를 운영하면서 지켜온 저의 신념입니다.”



    치킨전문점 비비큐는 생긴 지 4년 만에 가맹점 1000호점을 달성했다. KFC나 맥도널드 같은 외국계 프랜차이즈가 판치는 외식업계에 한국 토종닭이 나타나 빠른 속도로 시장을 잠식한 것이다.

    현재 (사)한국프랜차이즈협회에 등록된 업체는 350여 개. 이 가운데 전국에서 1000여 곳 이상의 가맹점을 보유한 업체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제너시스는 1995년에 설립해 불과 8년 만에 가맹점 1600여 개를 보유하게 됐다. 롯데리아 점포가 800개 안팎인 걸 감안하면 비비큐 가맹점 수는 놀랄 만한 수치다.

    “프랜차이즈 업계에서는 일반적으로 가맹점 수 300개를 넘어서면 일단 한시름 놓는다고 합니다. 그때부터는 투자비를 건질 수 있고 마진도 생긴다는 거지요. 제너시스도 가맹점이 500개가 될 때까지는 본사는 손해를 보더라도 가맹점 주인에겐 월 평균 600만∼700만원의 수익을 보장해줬어요. 가맹점부터 활성화시켜놓고 보자는 전략이었죠. 다행히 그 전략은 착착 맞아떨어졌고 오늘의 제너시스가 있게 된 거지요.”

    물론 이같은 성공이 하루아침에 우연히 이뤄진 건 아니다. 기업경영인이 되겠다는 윤회장의 꿈과 기업경영에 대한 새로운 시각, 그리고 닭 관련 업계에서 ‘발바닥이 부르틀 정도’로 뛰어다니면서 얻은 현장경험, 이 삼박자가 맞아떨어지면서 빚어낸 성공이다.

    ‘과장 같은 신입사원’이 꾼 경영인의 꿈

    전남 순천이 고향인 그는 여수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조선대 무역학과에 진학했다. 무역학을 전공으로 택한 것은 어릴 때부터 키워온 ‘기업경영인’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다.

    초등학교 2학년 때쯤인가, 검정고무신과 허리춤에 대롱대롱 매단 ‘책보’를 등교 차림새의 표준으로 알고 있던 그에게 아버지가 사다주신 ‘운동화’와 ‘책가방’은 그야말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등에 딱 달라붙어 착용감이 좋고 책도 쉽게 넣고 뺄 수 있는 책가방을 보고 그는 ‘이렇게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물건을 만드는 회사를 가져야겠다’ 고 결심하고 그때부터 자신의 꿈을 기업경영인으로 정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미원그룹(현재의 대상그룹)에 입사한 후에도 그는 주어진 일만 하는 직장인으로 머물고 싶지 않았다. 회사는 돈을 받으면서 경영수업을 쌓을 수 있는 곳이라 여기고 업무관련 책을 읽고 일일이 현장을 뛰어다니며 현장감각을 익혔다. ‘주경야독’이라고 낮엔 일하고 밤에는 가축이나 사료 등에 관한 책을 읽고 그 분야의 지식을 쌓아나갔다.

    그가 미원그룹에 입사해서 처음 발령받은 부서는 사료곡물 수입부서. 이때부터 그와 닭고기와의 긴 인연이 시작된다.

    “입사 때부터 경영자의 시각과 마인드를 갖자고 다짐했어요. 그래서 ‘사장의 눈엔 이 기획안이 어떻게 비칠까?’ 늘 이런 고민을 하면서 일했죠. 밤 12시 안에 집에 들어간 적이 일 년에 몇 번 되지 않을 정도로 회사 일에 미친 듯 매달렸어요. 아마도 입사동기들보다 수십 배나 더 많이 일했을 겁니다. 덕분에 회사 윗사람에게 인정받았고 덤으로 ‘과장 같은 신입사원’이란 별명도 얻었죠.”

    그는 입사하면서부터 탁월한 사업수완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당시 사료곡물 수입 관행은 곡물상을 상대할 때 무조건 값을 깎고 보는 식이었다. 그는 이런 관행을 과감히 버리고 가격을 깎지 않는다는 전략을 세웠다. 대신 곡물상에게 고급정보를 달라고 요구했다.

    사료에 쓰이는 곡물은 주로 옥수수나 소맥 등으로 그 생산량과 가격은 수출국의 기호 변화와 정치경제적 상황에 크게 영향을 받는데, 그는 미리 이런 정보를 알고 곡물 가격이 저렴한 시기를 골라 수입하는 전략을 세웠던 것. 게다가 값을 깎지 않자 곡물상들은 앞다퉈 그에게 정보를 주었고, 그는 경쟁업체보다 싼 가격에 곡물을 구입할 수 있었다.

    능력을 인정받아 입사동기보다 빠르게 진급했지만 그는 여전히 배가 고팠다. 하루빨리 현장에서 실전경험을 쌓아가며 일을 배우고 싶었다. 기업경영인이 되기로 한 꿈을 가슴 속에 품고 있는 그에게 현장은 아주 좋은 배움터였기 때문이다.

    “이천 사료공장 총무과장으로 발령을 받았는데, 그때 회사 운영과 대리점 관리, 생산과 영업라인 업무 등에 대해 상세히 배웠습니다. 지금 제너시스를 운영하는 전략도 그때 현장에서 배운 경험이 큰 보탬이 되고 있어요.”

    부도업체 맡아 업계 매출 1위로 탈바꿈

    1994년 미원은 부도난 닭고기 도육업체인 ‘천호마니커’를 인수하면서 그에게 마니커 영업부장직을 맡겼다. 당시 그는 미원이 중국에 세운 사료공장에 사장으로 취임하기로 한 상태였는데 느닷없이 부도난 회사인 천호마니커로 출근하라는 것이었다. 내심 중국행을 기대했던 그였기에 실망이 컸지만 회사에서 정해준 일이니 어쩔 수없이 따라야만 했다.

    당시 천호마니커의 하루 평균 닭고기 판매량은 부도 전 5만수, 부도 후엔 1만수도 채 되지 않았다. 그가 출근해 보니 신입으로 보이는 영업사원 3명만 빈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다. 업무 파악을 해보니 제대로 된 서류는 하나도 없고 갚아야 할 미수금만 쌓여 있었다. 참담했다.

    “그렇다고 그냥 신입사원 얼굴 보면서 마냥 손놓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좀 허황되다 싶은 전략을 세웠습니다. 3개월 내에 5만수를 판매하겠다고 하니 아무도 믿지 않더군요.”

    그러나 그는 매달 닭고기 판매량 1만수를 늘려나갔고 1만수이던 판매량을 6개월 만에 10만수로 만들어냈다. 그가 장담했던 것처럼 마니커는 폭발적 성장세로 업계 매출순위 1위를 넘볼 정도가되었다.

    물론 빠른 시간 안에 이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일일이 대리점주들을 찾아다니며 닭고기 판매 활로를 열어줄 것을 부탁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회사에서 사료부문 관리를 맡았던 것과 마니커 영업부장으로 재직한 경험은 윤회장을 닭고기에 대한 정보와 지식으로 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스스로 ‘타고난 영업맨’이라고 자부할 만큼 영업능력도 탁월했다.

    그냥 마니커 영업부장으로 있어도 충분히 먹고 살 만큼은 됐으나 그는 거기서 눌러앉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회사에 입사해 몸 사리지 않고 일한 것은 한 회사를 제대로 운영해보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다.

    그동안 실전에서 얻은 경험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사업다운 사업을 한번 펼쳐보자는 욕망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하루 20만 마리나 되는 닭고기를 대리점에서 모두 다 처분할 수는 없었다. 또 다른 판매처가 절실히 필요했다.

    “그때 생각난 것이 치킨전문점이었어요. 치킨은 모든 사람이 즐겨 먹는 음식이기 때문에 잘만 하면 장사가 될거라고 판단했던 거지요. 당시 우리나라 외식업 프랜차이즈는 KFC나 맥도널드 같은 외국계 기업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순수 국내 치킨전문점으로 프랜차이즈 업계에 새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싶었어요.”

    4년 만에 비비큐 가맹점 1000개 돌파

    그러나 윤회장의 이런 바람은 회사 중역들과의 이견으로 갈등을 빚게 된다. 윤회장은 치킨이라는 상품에 걸맞은 소형점을 주장했고, 회사측은 회사 이미지에 맞는 대형 프랜차이즈를 주장했던 것. 일부 중역들의 계속적인 반대에 부딪쳐 치킨전문점 사업 자체가 무산될 위기에 처했지만 그는 그냥 물러설 수만은 없었다. 미원이라는 브랜드 이미지, 미원연구소가 개발한 맛, 마니커 생산라인 등 성공적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는 사업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중대 결심을 했죠. 제가 직접 치킨전문점을 운영하기로 하고 제너시스(창세기)라는 회사를 설립했어요. 치킨전문점 이름은 비비큐라고 지었고요. 매뉴얼을 만들고 시스템을 구축했으며 가맹점 교육도 철저히 준비했습니다. 가맹점 지원을 위해 초기부터 본사 직원을 30명이나 두는 모험도 했죠.”

    (주)제너시스 윤홍근 회장

    치킨대학에서 교육받는 비비큐 가맹점주들과 담소하는 윤회장

    처음엔 주위에서 “왜 하필이면 닭고기냐? 주위에 보이는 게 죄다 치킨전문점인데 장사가 되겠느냐”고 미심쩍은 시선을 보내는 이들이 많았다. 전문가들도 치킨시장은 이미 포화상태라면서 비관적 전망을 내놓았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치킨시장을 무주공산으로 본 것. 틈새만 잘 파고들면 대박을 터뜨릴 수도 있는 사업이 바로 치킨전문 프랜차이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때까지는 치킨을 그저 술안주로만 취급하는 호프집이 대부분이었어요. 호프집에서 치킨을 판매하면 온 가족이 이용하기는 힘들죠. 그런데 치킨은 어린이들과 주부들이 좋아하는 음식이잖습니까? 바로 이런 점에서 승산을 확신했죠.”

    이렇게 시작한 비비큐는 독특한 맛과 공격적인 마케팅 전략에 힘입어 나날이 성장해 갔다. 한 달에 가맹점 25개를 개설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업계 최초로 고적대와 도우미를 동원해 이벤트 행사를 펼쳐 주위 사람들의 눈길을 모았다. 본사 직원이 전국을 돌면서 각 점포에 일주일간 상주해 점포 운영의 기틀을 잡아주곤 했다. 그때부터 사업은 활기를 띠기 시작했고 1995년 말 처음 시작할 때 16개이던 가맹점이 1996년 6월엔 100호점, 4년 뒤인 1999년엔 1000호점이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100호점이 탄생하기까지 순탄치만은 않았어요. 본사도 계속 적자였고요. 일부 가맹점 사장들이 프랜차이즈 시스템을 이해하지 못하고 맛과 신선도가 좀 떨어져도 좋으니 원가를 낮춰달라고 요구하기도 했어요. 초창기에 그들을 일일이 만나 설득하는 작업이 힘들었습니다.”

    윤회장은 비비큐 치킨전문점 사업을 시작하면서 무엇보다 교육분야에 과감히 투자했다. 정성들여 개발한 제품을 소비자들을 직접 상대하는 가맹점이 똑같이 만들어 제공하는 것이 성공의 열쇠가 될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좁은 사무실이었지만 한 귀퉁이를 따로 떼내 교육장을 만든 것도 이 때문이다. 자그마한 이 교육장은 현재 이천에 있는 ‘치킨대학’으로 탈바꿈했다.

    매일 닭고기 한 마리 먹으며 맛 테스트

    치킨대학은 치킨에 관한 교육은 물론 외식업 프랜차이즈에 관한 교육을 담당하는 곳으로 제너시스가 운영하고 있다. 가맹점 주인이나 창업을 희망하는 사람들은 이곳에서 전문연수팀으로부터 점포 운영과 관련한 각종 노하우를 전수받으며 조리 실습과정을 배운다. 대개 부부동반으로 입소해 2주간 집중교육을 받으며 고객 서비스에 관한 체계적 교육도 받는다.

    치킨대학에 대해 윤회장은 “맥도널드가 햄버거대학을 세우고 지속적 교육을 통해 세계시장을 공략했던 것처럼 제너시스는 치킨대학으로 국내 프랜차이즈는 물론 세계시장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할 것으로 확신한다”며 남다른 열의를 보이고 있다.

    또한 더 나은 닭고기맛을 위해 연구원 모두 석·박사 출신으로 구성했다. 닭고기의 맛을 좋게 하기 위해 모든 닭은 생산단계에서부터 살코기 깊숙이 양념이 스며들도록 만들었다. 닭고기는 양념이 살코기에 잘 스며들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해 주사기 500여 개를 사용해 조직 내에 양념이 골고루 스며들게 하는 인젝션 기법을 이용했다. 또 모든 치킨에 국내에서 생산되는 신선육만 사용하도록 했다.

    “제품 하나를 개발하면 2만여 명의 일반인에게 맛보도록 합니다. 치킨은 불특정 다수를 위한 음식이므로 성과 연령, 지역이나 계층에 상관없이 모든 이의 입맛에 맞아야 합니다. 따라서 맛 테스트와 표준화가 무엇보다 중요한 거지요. 저 역시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매일 닭고기 한 마리 정도를 먹습니다. 제 자신이 맛에 확신이 서야 소비자들에게 권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죠.”

    가맹점 사장들과 유대를 강화한 것도 성공의 요인이었다. 가맹점이 살아야 본사가 산다는 각오 아래 가맹점 위주의 경영을 실천했다. 본사 잘못으로 가맹점이 폐업할 경우 내장 공사비의 최고 50%를 돌려주는 리콜제도 실시했다. 1998년엔 가맹점 사장 100명으로 구성된 가맹점 경영위원회를 만들어 가격결정 등 중요한 정책결정에 참여토록 했다.

    그러나 ‘순풍에 돛단배’처럼 별탈 없이 승승장구하던 그의 사업에도 시련이 닥쳐왔다. 외환위기는 그에게도 고통이었다. 사료값이 급등해 재료로 사용하는 닭고기값이 치솟은 것은 물론이고 밀가루·오일값도 덩달아 뛰는 바람에 원가가 30∼50%까지 오른 것이다. 그나마 현찰이 없으면 재료를 구할 수조차 없었다. 급기야 가맹점 사장들도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준비하는 자만이 기회를 잡을 수 있다’고 그는 위기를 기회로 살릴 줄도 알았다.

    “가맹점 사장들에게 편지를 보낸 것만 해도 15번 가량 될 겁니다. 그들이 없으면 우리 사업도 끝장이기 때문이죠. 저는 함께 원가절감에 노력하고 그래도 절감이 안 되는 부분은 납품회사, 본사, 가맹점이 서로 분담하는 방식으로 위기를 극복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 결과 경쟁 체인점들이 가격을 대폭 올린 데 반해 비비큐는 5% 인상으로 인상폭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이런 점 때문에 비비큐는 다른 업체들이 침체에 빠져들 때도 오히려 성장하는 괴력을 발휘했다. 여기에다 사무실에서 거리로 밀려나온 실업자들의 창업 붐도 일조했다. 현재 퇴직자들이 운영하는 비비큐 가맹점 비중은 전체 가맹점의 40% 가량이나 된다.

    곤란을 겪은 일은 또 있었다. 1998년 제너시스에 대해 이루어진 세무조사가 그것이다. 윤회장은 그와 관련, 회사 관계자의 고의탈세는 아니었다고 운을 뗐다. 가맹점이 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인테리어를 공급받을 수 있도록 하는 과정에서 일처리가 서툴러 탈이 났다는 것이다. 다행히 성실하게 답변하고 준비해 무사히 위기를 헤쳐나갔다고 한다.

    또 여름엔 닭을 공급받는 공장에 물난리가 나서 닭들이 모두 폐사하는 바람에 재료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는 일도 벌어졌다. 재료공급이 안 되자 가맹점은 당장 장사를 멈춰야 할 상황에 부딪쳤다. 윤회장은 직원과 함께 흙더미에 파묻힌 공장에 뛰어들었다. 덕분에 2주가 걸릴 거라던 피해복구가 3일 만에 끝났다.

    “제가 너무 앞만 보고 산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이런 저를 묵묵히 따라준 아내와 회사 직원들이 고마울 따름입니다. 나중에 회사를 운영하면 직원들에게 업계 최고 대우를 해주고 복리후생에도 힘쓰겠다고 다짐한 적이 있어요. 직원들이 모두 내 일처럼 열심히 뛰어준 덕분에 제너시스가 우뚝 설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사정이 허락한다면 사택도 지어 사원들의 내집 마련 부담을 덜어주고 싶습니다.”

    그는 창립 이후 임직원의 임금을 매년 10%씩 올려주고 있다. 2001년 40%를 인상했고 2002년엔 30%를 올렸다. 대졸초임 사원의 연봉은 연말 특별상여금을 포함해 2800만원이고 8년차 직원은 5000만원 정도 된다고 한다. 회사 주식 20%도 직원들에게 무상으로 지급했다.

    중국에 5000개 매장 열 계획

    제너시스는 1999년 비비큐가 안정을 되찾자 사업다각화 일환으로 한식 닭고기 패밀리레스토랑인 ‘닭 익는 마을’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러나 ‘한식은 손맛’이란 편견에 부딪쳐 비비큐보다 성장속도가 더뎠다. 당연히 가맹점 주인들의 불만이 터져나왔다. 서둘러 닭고기도 삼겹살과 갈비를 대체할 수 있는 음식이란 것을 알리기 위해 닭 익는 마을을 ‘참숯 닭불구이 전문점’으로 특화시켜 위기를 돌파해나갔다. 2003년엔 젊은층을 타깃으로 한 돈까스·우동 전문점 ‘U9’을 외식시장에 새로 선보였다.

    뿐만 아니라 ‘프랜차이즈의 세계화’를 내걸고 올 초에 중국으로 진출했다. 중국 최대 민간기업인 희망그룹에 비비큐 브랜드와 경영 노하우를 주고 로열티를 받기로 했다. 지난 6월 상하이 1호점을 오픈한 것을 필두로 2010년까지 중국 전역에 5000여 개의 매장을 연다는 야심찬 계획도 세워놓고 있다.

    “제너시스가 중국에 진출한 의의는 자원이 부족한 국내 경제에 무형자산인 브랜드와 기술을 판매하여 로열티를 받는다는 데 있습니다. 계약에 따른 러닝 로열티까지 합산해보면 2010년까지 비비큐가 벌어들이는 외화는 2억2000만달러로 예상됩니다. 이는 자동차를 한해 133만대 수출하는 것과 같은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줄 겁니다.”

    특유의 사업감각과 현장에서 익힌 노하우, ‘하면 된다’는 확신이 서면 밀어붙이는 뚝심으로 동네 구멍가게 정도로밖에 인식되지 못했던 치킨전문점을 매출 규모 3500억원의 그룹으로 성장시킨 제너시스의 윤홍근 회장. 닭고기 사랑과 프랜차이즈에 대한 열정이 다음에는 어떤 형태로 나타나 세인들을 놀라게 할지 그가 그리는 미래 청사진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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