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찰이 변했다. 변해도 많이 변했다. 과거의 검찰이 아니다.
- 정치인, 기업인, 권력층 가릴 것 없이 검찰이 빼든 칼에 추풍낙엽이 되고 있다. ‘원칙과 정도’의 결과인가, ‘앞뒤 재지 않는 독선’의 부산물인가. 검찰은 왜 달라졌고,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
유력인사들을 줄줄이 소환 또는 구속한 검찰의 ‘중단없는 전진’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관심거리다.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참여정부 출범, 검찰인사와 정치적 중립 확보 방안을 주제로 한 노대통령과 평검사들의 대화, 검찰인사 태풍 등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검찰이 예전과 확연히 달라졌다는 얘기다. 정말 그럴까. 6개월째로 접어든 참여정부 검찰의 ‘독립지수’는 얼마나 될까.
“오늘 오전 11시경 민주당 정대철(鄭大哲) 대표에 대해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 혐의로 사전 구속영장을 청구했습니다.”
7월18일 오전 서울 서초동 서울지검 6층 신상규(申相圭) 3차장 검사실. 서울지검 특수2부가 맡고 있는 쇼핑몰 굿모닝시티 분양 비리 사건 수사를 총지휘하고 있던 신차장은 수사 브리핑을 듣기 위해 모인 수십명의 기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당시 정대표는 굿모닝시티 대표 윤창열(尹彰烈·구속)씨에게서 사업상 청탁과 함께 4억원을 받은 혐의를 받고 있었지만, 수차례의 검찰 출두 요구에 불응하고 있던 상태였다. 신차장은 정대표에 대한 사전 영장 청구 사실을 밝히면서 이례적으로 ‘굿모닝시티 수사 관련 검찰 입장’이라는 보도자료까지 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정대표 관련 의혹에 대해서는 정대표 본인의 진술이 없어도 범죄혐의에 대한 소명자료가 충분히 확보됐다고 판단돼 사전 영장을 청구하는 것입니다. 또 정대표가 전화 소환과 1, 2, 3차 서면 소환에 모두 불응해 검찰조사를 받을 의사가 없음을 밝힌 이상 일반적인 형사사건 처리 절차에 따라 처리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게다가 초대형 상가분양 사기사건으로 분양 피해자만 3000여 명에 이르는 상황이기 때문에 하루라도 빨리 이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이 필요해 더 이상 수사 진행을 늦출 수 없습니다.…이 사건 수사는 어떤 정치적 배경도 없으며, 검찰은 이 사건 수사를 ‘원칙과 정도’에 따라 엄정하게 진행해왔습니다.”
단호해진 검찰의 수사 의지
‘살아있는 권력’으로 불리는 집권여당 대표에 대한 검찰의 사전 구속영장 청구는 검찰 안팎에서 이례적인 일로 받아들여졌다. 검찰은 특히 “정대표 조사 없이도 혐의 입증이 충분해 ‘조사를 위한’ 체포영장이 아닌 구속영장을 청구했다”고 강조했다. 범죄혐의가 확실하다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원칙대로 처리한다는 것이었다.
8월5일 정대표가 검찰에 출두했을 때도 검찰은 정대표가 윤창열씨에게서 받은 4억원의 대가성을 집중조사했고, 정대표에게서 “(순수한 정치자금으로) 도와달라며 4억원을 먼저 요구했다”는 진술을 받아내는 ‘성과’를 올렸다.
검찰은 정대표의 향후 처리와 관련해서도 “국회에서 체포동의안이 부결된다고 해서 곧바로 불구속 기소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방침도 정해진 게 없다”고 밝히고 있다. 현역 국회의원인 정대표를 구속하기 위해서는 회기 중에는 국회 동의가 필요하고, 현재 정기국회와 임시국회가 번갈아가며 계속 끊이지 않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흐지부지하게 처리하지는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정치권에 대한 검찰의 이례적인 ‘행보(行步)’는 7월31일 또 다른 성과를 가져왔다. 굿모닝시티 인허가 관련 청탁과 함께 1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탁병오(卓秉伍) 당시 국무총리 비서실장을 구속수감한 것.
검찰은 탁실장이 서울시 정무부시장으로 있던 2002년 4월경 서울시청 3층 자신의 집무실에서 굿모닝시티 관계자인 송모씨에게서 “굿모닝시티에 대한 건축심의가 잘 통과되도록 영향력을 행사해달라”는 청탁과 함께 현금 1000만원을 받은 혐의라고 전했다. 탁실장은 특히 청탁을 받은 직후 송씨에게 “주무부서에 확인해 알아봐주겠다”는 말까지 했다는 것.
탁실장은 7월30일 오후 ‘자진출두’ 했지만, 그 내막을 알고 보면 사실상 검찰에 강제구인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검찰은 7월29일 밤 탁실장에 대해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알선수뢰 혐의로 체포영장을 청구했다. 그리고 다음날 오전 고위공직자에 대한 인신구속을 사전보고토록 한 규정에 따라 강금실(康錦實) 법무장관은 탁실장에 대한 체포방침을 고건(高建) 총리에게 보고했고 탁실장은 이날 오후 검찰 수사관들과 함께 자진출두 형식으로 검찰에 출두한 것이다.
그리고 이날 오후 탁실장에 대한 체포영장이 발부되자 검찰은 소환조사 중이던 탁실장에 대해 체포영장을 집행했다. 다시 말하면 조사 도중에 탁실장을 검거했다는 얘기다. 검찰 관계자는 “법에 따른 당연한 절차”라는 입장을 보였지만, 차관급인 현직 총리 비서실장에 대해 검찰이 체포영장을 발부받아 강제구인한 것은 사실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일이었다.
정치인이나 고위공직자 등 이른바 ‘거물급’ 인사들을 소환할 때는 검찰이 그 시기나 방법을 놓고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해왔던 게 지금까지의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탁실장의 수뢰 액수도 지금까지의 수사관행으로는 불구속 수사 기준에 해당하는 수준이었지만, 검찰은 탁실장 조사에서 혐의가 드러나자 곧바로 그를 구속했다.
탁실장 구속은 정치권에 대한 검찰의 고강도 수사 의지를 알리는 ‘신호탄’으로 여겨지고 있다. 앞서 대검찰청은 6월30일 전국 55개 지검 지청의 특별수사 전담 부장검사들을 불러 ‘전국 특수부장회의’를 열고 비위 정치인과 고위 공직자에 대한 처벌 수위를 한층 강화하는 기준을 마련했다.
이날 회의의 핵심은 정치인이나 고위 공직자의 금품수수 행위에 대해 법정형이 낮은 알선수재가 아닌 알선수뢰와 조세포탈 혐의를 적극 적용하고, 이른바 ‘떡값’ 관행에 대해서도 직무관련성과 대가성을 엄격히 따져 엄벌한다는 것. 특히 국회의원 등 고위공직자 금품수수의 경우 그동안은 5000만원 이상 금품을 수수했을 때에만 구속영장을 청구했지만, 앞으로는 1000만원 이상이면 사안에 따라 영장을 청구하기로 했다. 탁실장은 이 ‘기준’에 따라 구속된 첫 케이스였다.
권노갑 구속도 ‘원칙 수사’의 결과
정대철 대표와 탁병오 실장에 대한 원칙적인 처리는 검찰 안팎에 신선한 ‘충격’으로 여겨지고 있다. 서울지역에 근무하는 한 특수부 검사는 “검찰 독립이라는 말 자체가 그동안의 과오를 인정하는 말이기 때문에 좀 거슬리는 면이 없지 않다”면서도 “지금은 현장에서 특별수사를 진행하는 데 ‘걸림돌’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면서도 “탁실장 구속 사건은 그 과정이나 내용을 볼 때 검찰 내부에서도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라는 얘기가 많이 나왔었다”며 “관련 수사팀이 아니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아무리 기준을 강화했다고 해도) 예전 같으면 불구속 기소 하지 않았겠느냐는 의견이 많다”고 전했다.
유력 시민단체의 관계자도 “최근 검찰의 사건 처리를 보면 검찰이 달라졌다는 느낌을 갖기에 충분하다”면서 “이런 기조가 계속 유지된다면 검찰이 국민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큰 버팀목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현대 비자금 150억원+α’ 사건에 대한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의 수사 역시 ‘성역 없이’ 진행되고 있다. 검찰은 7월22일 노무현 대통령이 ‘대북송금 의혹사건’ 새 특검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한 직후 본격 수사에 착수한 뒤 관련자들을 상대로 강도 높은 수사를 벌이고 있다. 이 과정에서 현대측이 비자금 150억원을 이익치(李益治) 전 현대증권 회장을 통해 박지원(朴智元) 전 문화관광부 장관에게 전달한 경위와 함께 2000년 4·13 총선 당시 거액의 현대 비자금이 정치권에 유입됐다는 정황이 포착돼 수사가 확대됐다.
검찰 수사는 그러나 8월4일 정몽헌(鄭夢憲) 현대아산이사회 회장의 자살이라는 갑작스런 ‘암초’에 부딪쳤다. 특히 검찰이 현대 비자금 사건과 관련해 7월26일과 31일, 그리고 자살하기 직전인 8월2일까지 모두 3차례 정회장을 집중조사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정회장의 자살이 검찰 조사와 적지 않은 연관성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제기됐다. 이런 추측은 ‘검찰이 정회장을 상대로 2000년 4·13 총선 당시 현대 비자금 수십억원의 정치권 유입 여부에 대해 집중 조사했다’는 동아일보의 특종 보도(8월5일자)를 통해 사실로 확인됐다.
당시 검찰은 이런 사실을 부인했지만, 이미 드러난 범죄혐의에 대한 후속 수사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정회장의 장례식까지 잠시 수사를 중단했던 대검 중수부는 정회장의 장례가 끝난 며칠 뒤인 8월15일, 마침내 권노갑(權魯甲) 민주당 전 상임고문을 구속수감했다. 권 전 고문의 혐의는 2000년 4·13 총선 당시 200억원이 넘는 현대 비자금을 받았다는 것. 검찰의 ‘원칙 수사’가 불러온 정치권 사정 태풍의 ‘신호탄’이었다.
검찰은 지난 3월 열린 ‘전국 검사들과의 대화’ 이후 급격히 변화했다는 평을 받는다.
최회장 등의 혐의는 무려 1조5587억원 상당의 분식회계. 2002년 1월 SK글로벌의 2001 회계연도 결산과정에서 관련 서류를 위조해 1조1881억원의 은행 채무를 누락시키고 1500억원 상당의 허위매출 채권을 만들어 이익을 부풀렸다는 것이었다.
당시 검찰은 최회장 등을 형사처벌하면서 수사결과를 발표했지만, 수사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 사건과 관련해 검찰이 4월18일 이남기(李南基) 전 공정거래위원장을 제3자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한 것. 검찰은 이 전 위원장이 자신이 다니던 사찰에 10억원을 기부하도록 SK그룹측에 외압을 행사했다고 설명했다. 이 전 위원장은 SK텔레콤의 KT 지분 매입으로 기업결합 심사가 진행되고 있던 2002년 7월12일 김창근 SK 구조조정본부장을 집무실로 불러 서울시내 모 사찰에 10억원을 기부하도록 압력을 행사했다는 게 검찰의 수사결과였다.
김본부장은 당시 이씨의 요구를 최태원 SK㈜ 회장에게 보고했으나 최회장은 특정 사찰에만 기부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면서 거절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김본부장은 이씨가 기부를 독촉하자 SK텔레콤에 자금을 마련토록 한 뒤 2002년 9월 10억원짜리 수표 1장을 모 신도 계좌를 통해 입금했다고 검찰은 밝혔다.
그 뒤에도 SK 수사의 ‘여진(餘震)’은 계속됐다. 4월22일에는 SK건설이 추진중이던 종합 리조트 사업 인허가와 관련해 5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김영희 전 남양주시장이 검찰에 구속됐다. 김 전 시장은 2002년 5월 SK건설 임원 김모씨로부터 “자회사인 (주)정지원이 추진중인 경기 남양주시 오남읍 리조트 사업과 관련해 인·허가 및 교통영향평가 등에서 편의를 봐달라”는 청탁과 함께 5000만원을 받았다고 검찰은 밝혔다.
김 전 시장의 혐의는 법원에서도 그대로 인정됐다. 법원은 6월25일 “민선 시장으로서 청렴해야 할 의무를 저버리고 자신의 권한을 이용해 대기업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점을 감안할 때 실형선고가 불가피하다”며 김 전 시장에 대해 징역 3년에 추징금 5000만원을 선고했다.
SK 수사 파문이 잦아들 무렵, 당시 수사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사건의 본질인 SK그룹의 부당 내부거래 및 분식회계 사건을 마무리한 뒤 수사과정에서 드러난 다른 범죄혐의에 대해 어떻게 할지 많은 논의가 있었습니다. 이남기 전 위원장이나 김 전 시장 부분은 어떻게 보면 ‘곁가지’일 수 있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그만둘 수는 없다는 게 수사팀의 중론이었습니다. 그렇게 덮었다가 언제 누구한테서 그런 부분이 불거질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죠. 게다가 이 전 위원장 등에 대한 혐의는 이미 수사 초기 최태원 SK㈜ 회장의 사무실 등에 대한 압수수색 과정에서 포착된 것이었습니다. 지금의 검찰 분위기에서 이런 부분을 덮을 수도 없고, 덮어서도 안 된다는 것을 확인한 수사였습니다.”
검찰이 이렇게 확연히 변한 이유는 뭘까. 가장 큰 이유는 참여정부 출범 이후 크게 달라진 검찰 내부의 분위기 때문이다. 대검의 한 간부는 최근 검찰의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그동안 검찰이 정치적이라는 오명(汚名)을 얼마나 많이 뒤집어썼습니까. 솔직히 말해 그런 부분이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어서, 더 가슴앓이만 해왔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평검사들은 이런 검찰의 불명예를 벗어 던지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증거법에 따라 법논리로 ‘뭐든지 나오면 끝까지 간다’는 의식이 평검사들의 저변에 깊이 깔려 있다는 얘기죠. 평검사들은 몇몇 잘못된 선배 검사들이 검찰 전체를 욕되게 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들로서는 실제 그런 부분이 없다고 할 수도 없는 상황이어서 답답할 따름입니다.”
‘특수통’으로 불리는 검찰의 한 고위간부 B씨는 “검찰의 장기적 발전이라는 큰 틀에서 볼 때 현재 검찰의 방향이 맞다”고 얘기했다. 그는 나오는 대로 증거와 원칙에 따라 수사하는 풍토가 자리매김하는 데는 지난 3월 있었던 노무현 대통령과 ‘전국 검사들과의 대화’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분석했다. 당시 노대통령은 전국 평검사 대표 30명과 만나 공개토론을 벌이면서 검찰 수사에 대한 정치권의 ‘입김’을 배제해줄 것을 요구하는 검사들에게 “검찰 수사권 독립은 확실히 보장하겠다. 정치권에서 어떠한 간섭도 없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
B씨는 말을 이어갔다.
“노대통령과 평검사들의 토론회 당시의 분위기가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검찰 수사에 대한) 대통령의 뜻이 그러한데 장관이든 누구든 그 뜻에 맞춰지는 것 아니겠나. 이제는 ‘법 정책적 판단’보다는 ‘법 원칙’에 따라 갈 수밖에 없다. 잘못된 일은 언젠가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게 현재 사회 분위기 아닌가…검찰도 여기에 따라갈 수밖에 없다.”
지방에 근무하는 차장급 검사 C씨도 같은 얘기를 한다. C씨 역시 공안부와 특수부를 오가며 ‘잔뼈’가 굵은 베테랑 검사다.
“과거의 특별수사는 수사범위와 방향을 미리 정해 큰 ‘줄기’를 뽑고 곁가지는 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런 방식으로 수사하면 언론과 국민들이 가만히 있지 않죠. 예전에는 ‘곁가지’로 취급되던 부분도 지금은 수사가 끝난 뒤 언론에 드러나면 곧바로 축소 은폐 수사라는 얘기가 나오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얘기죠.”
그는 공안·특수·강력·마약 등 이른바 ‘인지(認知)수사’도 앞으로는 고소 사건처럼 처리할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일반 고소 사건에서 고소인이 여러 가지 주장을 하면 일일이 확인해 사실 여부를 가리는 것처럼, 인지 사건 수사에서도 ‘언론과 국민’이라는 고소인이 제기하는 주장과 의혹에 대해 모두 확인할 수밖에 없다는 것. C씨는 “이런 상황에서 외압이나 청탁을 받거나 부탁을 받았다고 압력을 행사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특검과의 미묘한 신경전
1999년 도입된 특별검사제도 검찰의 원칙 수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옷로비 의혹사건’과 ‘조폐공사 파업유도 사건’으로 시작된 특검 수사는 2001년 말 ‘이용호 게이트’ 특검 수사와 지난 4월 ‘대북송금 의혹사건’ 특검 수사로 이어지면서 이제는 빼놓을 수 없는 하나의 수사기관으로 자리잡았다.
검찰이 더 이상 ‘꼬리 자르기’식 수사를 할 수 없는 이유의 한가운데에 특검이 놓여 있다고 보는 사람이 많다. 특검을 거치면서 검찰 수사에서 밝혀지지 않은 모든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 실제 특검에서는 누가 언제 누구를 만나 밥을 먹고 골프를 쳤는지, 누가 어떤 일로 누구와 통화를 했는지까지 모든 게 다 드러났다. ‘정책 판단이 필요한 특별수사는 선을 긋고 해야 되며, 나오는 대로 다 하려고 하면 끝이 없다’는 말은 이제 지나간 옛이야기가 돼버린 셈이다.
적당한 선에서 수사를 끝내는 것, 이른바 ‘구(舊) 특수’와 나오는 대로 다 밝히는 ‘신(新) 특수’ 사이에서 검찰은 고민을 거듭했다. 하지만 검찰이 내린 답은 결국 하나, ‘신 특수’였다.
지방에 있는 한 소장검사는 “특검이 생긴 이후에는 검찰 수사가 최종적인 것이고 끝이라는 생각이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에 그에 따른 엄청난 책임감과 부담감을 검찰 스스로 느끼게 됐다”고 말했다.
검찰 고위간부 출신의 한 변호사는 “이제는 시대가 변했다”고 했다. 검찰이 수사 단서를 잡고도 꼬리 자르기를 했을 경우 그 뒷감당을 하기가 어렵다는 것. 예를 들어 검찰 조사를 받은 사람이 “내가 검찰에서 이러저러한 범죄혐의에 대해 얘기를 했는데 검찰이 수사를 안하더라”고 언제든지 떠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수도 없이 제기됐던 ‘정치검찰’ 문제에 대해서도 이제는 벗어날 때가 됐다는 검찰 내부의 위기의식도 한 원인이 됐다. DJ정권 초기에 터진 ‘심재륜(沈在淪) 대구고검장 항명 파동’ 당시 심고검장은 검찰 수뇌부를 향해 ‘정치검찰’이라는 직격탄을 날렸다. 이어진 ‘세풍(稅風)’ 사건과 ‘총풍(銃風)’ 사건 수사, 2000년 말 불거진 안기부 예산 불법 전용사건 수사와 각종 선거사범 수사에 이르기까지 정치검찰 시비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
‘진승현(陳承鉉) 게이트’와 ‘정현준(鄭炫埈) 게이트’ 수사에서도 정관계 및 검찰 고위 인사들의 이름이 끊임없이 거론되면서 축소 편파 수사 의혹이 제기됐다. 게다가 수천억원대의 주가조작과 횡령 및 비자금, 정관계 비호 의혹이 어우러진 이들 대형 게이트 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는 ‘예외 없이’ 재수사로 이어졌다.
문민정부 시절 12·12 사건과 5·18 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는 정치검찰 논란의 대표적인 사례다. 문민정부 초기 검찰은 전두환(全斗煥)·노태우(盧泰愚) 두 전직 대통령이 연루된 이들 사건에 대해 12·12 사건 관련자들에겐 기소유예 처분을, 5·18 수사에서는 ‘성공한 쿠데타’라는 논리로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검찰은 재수사에 나서 두 전직 대통령을 군사반란의 수괴로 처벌했다.
1960년 3·15 부정선거 반대 시위대 발포 사건은 정치검찰 논란의 시초로 여겨진다. 당시 시위대에 발포를 명령한 지휘책임을 물어 마산지청장 서모씨가 구속됐으며 검찰총장을 지휘하는 자리에 있던 법무부장관 홍모씨도 3·15 부정선거에 직접 개입한 혐의로 구속됐다. 3공화국 때는 법무부 검사들이 유신헌법 제정에 직접 참여했으며, 5공화국 때는 시국 공안사건의 거의 대부분이 정치권력의 뜻대로 처리됐다.
그러나 참여정부 6개월을 맞은 검찰이 진정으로 독립한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갖는 시각도 적지 않다. 서울고검에 있는 검사장급 간부 D씨의 얘기를 들어보자.
“사실 검찰이 정말 정치권 등으로부터 독립했느냐를 판단하려면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은 사건, 다시 말해 이렇게도 저렇게도 처리할 수 있는 한계선상에 있는 사건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봐야 합니다. 이미 언론과 국민의 표적이 되고, 누구나 의심하는 사안에 대해 ‘원칙대로’ 처리하는 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현 정부 들어서 아직 검찰의 독립성 여부를 판가름할 만한 사건이 없었다는 얘기다. 그는 말을 이었다.
“나오는 대로 하는 식의 수사는 시간이 많이 걸리면서 지지부진해지고 초점이 흐려지는 경향도 있습니다. 현재의 특별수사가 여러 검사가 함께 매달리는 팀제로 진행될 수밖에 없는 것도 나오는 모든 것을 해야 하기 때문에 분야별로 나눠서 할 수밖에 없는 거죠. 또 다른 문제는 현재 분위기에서는 수사 검사에 대한 통제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나오는 대로’ 수사도 부작용 있다
나오는 대로 하는 검찰의 수사가 갖는 ‘부작용’을 걱정하는 검찰 내부의 목소리도 들려온다.
대표적인 경우가 SK그룹 수사나 대검 중수부의 현대 비자금 수사. 원칙대로 하다가 일부 ‘뜻하지 않은’ 결과가 나왔다는 데에는 검찰 내부에서 별다른 이견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SK 수사의 경우 수사결과 발표 직후 SK그룹 전체가 위기를 맞으면서 주가와 환율, 금리 등 경제 전반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경위야 어떻든, 현대 비자금 수사에서는 정몽헌 회장의 자살이라는 최악의 상황까지 맞이했다.
그래서 특별수사에서는 여러 가지 가치판단이 필요하며, 판단에 따라서는 더 가지 않아야 할 부분이 있다는 지적도 있다. 지방의 한 검사장은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경험이 많은 윗사람과 어느 정도 조율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사건의 본류도 아니고, 파헤치다 보면 사회의 분열을 조장하거나 경제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까지 수사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했다. 검찰은 항상 ‘공익(公益)’을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수사범위와 방향에 대한 일정한 조율은 필수적이라는 것. 이런 의미의 사전 조율이라면 원칙 수사론과 전혀 배치되는 것도 아니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또 다른 검찰 중견간부는 이렇게 얘기한다.
“수사 검사의 독자적인 처리나 주관 있는 수사도 중요하지만, 부장검사나 차장검사 등의 ‘경험’을 완전 배제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제 개인적인 견해로는 인지 수사부서의 경우 오히려 윗선에서 강력한 통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인지 부서에는 검사는 가장 평범한 성격을 가진 검사가 배치되는 게 최선입니다. 독선적인 성격은 꼭 사고를 치거든요.”
그는 독선적인 검사가 사고를 쳤던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했다. 특수·강력 등 인지 부서에서 적지 않은 기간 동안 검사생활을 해온 E검사. 그러나 그는 어떤 사건을 내사하는지 직속 부장에게조차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다. 행여나 윗선에서 자신의 마음대로 수사하지 못하게 할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참다못한 부장검사는 E검사에게 “도대체 무슨 사건을 내사하고 있느냐”고 따지듯이 물었지만 E검사는 “그냥 알아보고 있는 중이니 나중에 보고하겠습니다”라고만 말한 채 항상 묵묵부답이었던 것. E검사는 얼마 뒤 결국 ‘사고’를 치고 검찰을 떠났다고 한다.
결국 이런 잡음을 없애는 게 가장 중요한 것이고, 그것이 검찰의 독립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 아니겠느냐는 게 그의 설명이다.
‘원칙과 정도’ 지속될까
이런 부작용과 걱정 어린 시각에도 불구하고 참여정부 6개월, 검찰의 독립지수는 상당히 높다는 게 검찰 안팎의 일반적 평가다. 문제는 앞으로 정치사회적으로 민감한 어떤 사건이 발생한다 해도 검찰이 오직 ‘원칙과 정도’에 입각해 처리하는 모습을 지속적으로 보여줘야만 이런 호의적인 평가가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치권이나 내외부의 압력으로부터 검찰이 완전히 독립해 국민들 앞에서 최고의 수사기관으로서의 위상을 확고히 정립할 수 있을지, 아니면 최근의 자성 노력이 또다시 ‘물거품’이 될지는 검찰 스스로 만들어가야 할 ‘영원한 숙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