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범 1년 반을 넘긴 통합 국민은행이 난항하고 있다. 중병설과 퇴진설이 나돌던 김정태 행장은 복귀했지만, 잡음은 좀체 끊이지 않는다. ‘살생부’가 나도는가 하면 3인의 부행장이 전격 사퇴했다. 경영실적은 눈에 띄게 악화됐고, 경영전략 수정에 따른 노조의 반발도 불 보듯 뻔하다. 옛 국민·주택은행 출신 간의 반목도 쉬 해소될 것 같지 않다. 한국 최대 은행의 진로는?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는 8월2일자에서 “패트릭 부회장이 증권사에 강경책을 편 엘리엇 스피처 뉴욕주 검찰총장과의 갈등으로 인해 사임했다”고 다른 해석을 내놨으나, 그의 사임은 내부 후계를 둘러싼 권력투쟁 가능성에 좀더 무게가 실리고 있다. 실제로 8월6일 메릴린치는 자카리아 대표가 올 연말 사임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예우는 갖췄지만 자카리아는 해고된 것이나 다름없다.
태평양 건너 먼 나라 얘기로나 들릴 법한데, 이런 사건이 이보다 한 달여 앞서 한국의 최대 은행인 국민은행에서 일어났다.
김정태(金正泰·56) 국민은행장은 7월16일 최범수·김복완·서재인 등 3명의 부행장으로부터 전격적으로 사표를 받았다. 김행장이 희귀 급성 폐렴으로 43일간 중환자실과 병실을 전전하면서, 그의 말대로 ‘저승 문턱’에까지 갔다 온 뒤에 처음 취한 조치였다.
은행 임원에게 임기가 없다는 것은 새로울 게 없는 얘기지만, 옛 국민은행과 주택은행의 합병으로 통합 은행장에 오른 지 1년여 만에, 그리고 사선(死線)을 넘나들다 복귀한 후의 첫 ‘작품’치고는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김행장의 이렇듯 충격적인 부행장 인사는 이미 예고됐던 게 사실이다. 김행장은 7월1일 행내 방송을 통해 ‘선전포고’를 한 바 있다. 이를 실행에 옮기기까지 대략 보름 정도 걸린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김행장의 의도에 대한 해석은 천양지차를 보였다. 특히 옛 국민은행과 주택은행 임직원들 사이에 해석과 인식 차이는 극명했다. 결국 그만큼, 꼭 그만큼의 차이가 이번 국민은행 인사태풍의 근원으로 자리한다.
김정태의 ‘선전포고’
7월1일은 국민은행의 월례조회가 있는 날이었다. 워낙 비중 있는 은행이다 보니 김행장이 주재하는 월례조회는 종종 신문지면에 소개될 정도다. 그래서 기자들도 매번 관심을 기울이게 마련이다. 이날 조회에서 김행장은 건강관리를 제대로 못해 은행에 누를 끼쳤다고 사과한 후 곧바로 포문을 열었다. 그는 자신이 병석에 누워 있는 동안 발생한 문제에 대해 또박또박한 어조로 언짢은 심기를 드러냈다.
“우선 문제점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우리의 톱 매니지먼트인 경영진 안에서마저 한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물론 다양한 목소리가 나오는 게 좋긴 하지만, 그것이 CEO와 가치관을 달리한다든가 조직을 혼란시키는 사례가 있다는 것에 대해 대단히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본부 일부 팀장 및 지점장 또는 RM(기업금융전담) 지점장 등 일부에서는 공개적으로 CEO나 은행전략 방향에 대해 비판하는 사례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일부에서는 주요 보직인사에서 균형이 이뤄지지 않은 것에 대해 불만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순간, 국민은행에는 정적이 흘렀다. 김행장은 이전에도 월례조회를 통해 은행의 각종 문제점을 지적하곤 했지만, 이날은 어딘지 모르게 톤과 질(質)이 달랐기 때문이다.
김행장은 월례조회를 조직의 분위기를 다잡는 데 활용해왔다. 기자들이 듣고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오히려 이를 이용해 조직의 잘잘못을 까발리고 직원들에게 변명의 기회마저 주지 않는 주도면밀함을 보여온 것. 김행장의 거침없는 연설은 계속됐다.
“필요하다면 사업부 등 조직의 구조조정 등을 통해서라도, 또 여러 가지 인사를 통해서라도 이러한 조치들을 실시하면서 통합은행이 한 목소리를 내도록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사를 통해 문제를 풀겠다는 공개 선언이었다. 김행장은 병석에 있을 때도 ‘CEO나 은행전략 방향을 비판한’ 한 지점장을 색출했고, 출근하자마자 그를 보직해임했다. 김행장은 이날 ‘임원과 본부 일부 팀장, 지점장 또는 RM 지점장’을 구체적으로 언급했기 때문에 당연히 이들에게 시선이 쏠렸다.
이때부터 은행에는 이른바 ‘살생부’가 나돌기 시작했다. 다만 김행장의 말에 대한 옛 국민은행과 주택은행 임직원들의 해석은 조금 달랐다. 주택은행 출신들은 뭔가 사단이 났음을 직감하고 앞으로 불어닥칠 태풍을 예견한 반면 국민은행 출신들은 전반적으로 몸을 낮추긴 했으나, 이미 지점장 한 명이 정리된 만큼 그저 조직의 기강을 세우기 위한 김행장의 ‘언론플레이’쯤으로 이해했다. 이 때문에 주택은행 출신들을 만나면 살생부에 오를 만한 인물평을 심심찮게 들을 수 있었던 데 비해 국민은행 출신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애써 무시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꾀병이냐 화병이냐
김행장의 강경발언을 해석하는 시각은 다양하다. 그가 병원에 누워 있는 동안 언론을 장식한 국민은행 관련기사 중엔 별로 긍정적인 것이 없다. 이미 노출된 실적부진으로 인해 갖가지 설(說)이 난무했고, 이에 대한 책임론이 무성했다. 김행장은 결과적으로 이같은 사태가 앞서 언급한 한 지점장에 의해 시작됐다고 판단한 듯하다.
김행장의 입원 시기가 노무현 대통령의 방미 시점과 일치한 것도 갖은 루머가 확대, 재생산된 요인으로 꼽힌다. 그가 입원해 있는 동안 시중에 가장 많이 나돈 얘기 중 하나가 ‘꾀병설’이다. 김행장이 노대통령의 방미수행을 거부하려고 일부러 입원했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 주장은 그의 병세가 정말 좋지 않다는 소식들이 속속 전해지면서 쑥 들어갔다.
그러자 이번에는 ‘화병(火病)설’이 고개를 들었다. 김대중 정부 시절 김행장의 든든한(?) 정치적 후원자였던 이기호 전 경제수석이 대북송금 의혹사건으로 수감되면서 빚어진 얘기였다.
그러나 정작 김행장이 분통을 터뜨린 ‘CEO와 다른 가치관’ ‘조직을 혼란시키고 한 목소리를 내지 못한 사례’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7월23일 열린 국민은행 기업설명회(IR)에서 김행장은 “퇴임한 부행장들은 CEO와 경영철학·사상이 맞지 않았다”고 거듭 밝혔지만, 은행 안팎에선 여전히 이런저런 얘기들이 나돈다.
김행장이 병원에 누워 있는 동안 각종 투서가 정부 요로에 전달됐다는 얘기는 상당 부분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설사 투서가 정부에까지 전달되진 않았다 해도 최소한 은행 조직 외부로 전달된 것은 확인됐다. 이에 책임을 지고 옛 주택은행 출신 한 지점장이 보직해임을 당한 것이다. 그렇다면 ‘철학이 맞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 한 말일까. 사실 김행장이 구체적으로 제시한 ‘죄목’은 ‘철학과 가치관’이다. 이것이 ‘조직을 혼란시키는’ 상황으로 악화한 것이다.
이번에 퇴임한 부행장 세 사람은 합병 국민은행이 출범하면서 외부에서 영입된 최범수 전 부행장, 옛 국민은행 출신으로 영업 전반을 꾸렸던 김복완 전 부행장, 역시 옛 국민은행 출신으로 합병 은행의 전산통합을 진두지휘한 서재인 전 부행장이다.
이 중 서재인 전 부행장은 이번 사태와 직접적으로 관련됐다고 보긴 어렵다. 국민은행은 이미 올해 초 새 전산담당 부행장을 영입하기로 했기 때문에 서 전 부행장은 한시적인 임무를 맡고 있는 상황이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서 전 부행장이 옛 국민은행 출신이긴 해도 통합 국민은행이 전반적으로 옛 주택은행 시스템을 기반으로 합병했다는 사실이다.
특히 서 전 부행장은 김행장과 광주일고 동기동창으로 통합 국민은행에서 악역을 자처하며 전산통합을 진행해왔기 때문에 김행장과는 각별한 사이다. 결국 전산통합 과정에서 불거진 옛 국민은행측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새 부행장 선임을 약속한 상황에서 6월27일 감사원의 국민은행 감사 결과가 확정·발표되자 이에 대해 책임을 물은 것으로 해석된다. 감사원은 국민은행이 현금자동입출금기(ATM) 등 10개 품목을 계약하면서 총 2659억원의 구매계약을 수의로 체결했다고 지적했다.
입원한 지 43일 만인 지난 6월17일 국민은행에 출근한 김정태 행장
그간 국민은행 안팎에선 통합 은행의 모든 영업점을 관리하는 김 전 부행장이 옛 주택은행 출신 지점장들을 차별한다는 얘기가 심심찮게 들렸다. 옛 국민은행 출신인 김 전 부행장이 국민은행 출신 지점장만 싸고돌았다는 것. 그가 은행의 경영전략에 대해 여러 차례 불만을 표시하는 광경이 직원들에게 목격됐다는 얘기도 있다.
김 전 부행장은 문제의 7월1일 월례조회 후 김행장을 찾아 이같은 소문들에 대해 해명하고 사과했다는 설도 있으나 사실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눈길을 끄는 것은 김행장과 김복완·서재인 전 부행장이 모두 광주일고 동문이라는 점. 김행장과 서 전 부행장은 1965년 광주일고를 졸업했다. 1962년에 졸업한 김 전 부행장은 두 사람에게 3년 선배가 된다.
최범수 전 부행장과 관련해서는 보다 정치적인 해석들이 나오고 있다.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 금융개혁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한 최 전 부행장은 영입 케이스여서 옛 국민이나 주택 어느 한쪽에 치우칠 만한 여건은 아니지만, 김행장과 ‘철학이 맞지 않는’ 대표적인 인물로 지목됐다.
더구나 옛 주택은행 출신들 사이에는 최 전 부행장이 차기 행장 자리를 염두에 두고 움직인다는 설이 유포되기도 했다. 최 전 부행장이 이를 위해 독자적인 세력 구축을 시도했다는 소문도 들렸다. 이는 최 전 부행장과 같은 라인에 있던 한 팀장이 최 전 부행장과 함께 보직을 잃었다는 점에서 설득력을 얻었다.
김행장은 기업설명회에서 “이번 부행장 인사는 문책이 아니다”고 해명했으나, 최 전 부행장의 퇴임 배경을 놓고 행내에서 떠도는 말들을 정리해보면 그의 해명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우선 김행장과 ‘철학이 맞지 않는다’는 데 대해서는 최 전 부행장도 대체로 인정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 전 부행장이 퇴임 후 몇몇 인사들과 만나 “김행장과는 상식이 다르다”고 했다는 것. ‘철학’과 ‘상식’으로 표현만 좀 다를 뿐이다.
또한 최 전 부행장은 은행의 각종 경영전략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김행장과 적지 않은 견해차를 보여왔다고 한다. 국민은행 임원진이 각종 현안에 대해 토론을 벌이고 의견을 모으는 자리는 매주 화요일 열리는 경영협의회다. 여기에서 나온 얘기들은 CEO인 김행장이 최종적으로 의사 결정을 하는 데 활용된다. 최 전 부행장은 이 자리에서도 ‘코드 차이’를 자주 드러냈다는 것이다.
국민카드 둘러싼 ‘혈투’
김행장은 병석에 있던 43일 동안 최 전 부행장과 ‘철학과 상식’이 다르다는 것을 더욱 절감한 듯하다. 당시는 국민은행이 매우 중요한 의사결정을 앞두고 있던 시점이다. 국민카드 흡수가 그것이다.
기업설명회에서 김행장 스스로도 “좀더 빨리 의사결정을 하지 못해 아쉽다”고 평가한 이 문제는 5월30일 일단락됐는데, 당시 김행장은 입원중이었다.
여러 정황을 감안하면 당시 외부기관에 의뢰한 국민카드 컨설팅 결과는 이미 도출돼 있던 상태였다. 그러나 김행장이 갑자기 몸져누우면서 CEO의 생각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는 바람에 의사결정이 예상보다 많이 지연됐다. 이와 관련, 김행장은 오래 전에 국민카드의 흡수합병 방침을 굳혔지만, 최 전 부행장이 당시 이런저런 이유로 의사결정을 미뤘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최 전 부행장이 국민카드 흡수합병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당시 그는 “모든 리포트는 끝났다”며 “이제 행장의 결정만 남았다”고 했으나, 행장이 직접 결정해야 할 사안과 쟁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한 적이 없다.
다만, 국민카드를 흡수하는 방안에 대해서는 “지금의 어려운 상황을 감안해 재무적인 측면을 의사결정의 중요한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측과 “신용카드업의 특성을 감안해 좀더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의사결정이 이뤄져야 한다”는 측이 팽팽히 맞서왔다.
이같은 논리대결은 국민카드와 국민BC카드, 옛 국민은행과 주택은행 간의 대립축을 형성하며 갈등양상을 빚었다. 최 전 부행장이 어느 쪽의 입장을 두둔했는지는 몰라도 그와 라이벌 관계에 있던 윤종규 부행장이 재무적인 관점에 무게를 실은 것은 분명하다. 윤 부행장은 당장의 차입비용 절감효과가 큰 국민카드의 흡수합병 방안을 지지했다. 이는 이번 부행장 인사를 김행장의 후계 문제와 연관지으려는 인사들이 눈여겨보는 대목이다.
윤종규 부행장은 김행장의 설득으로 국민은행에 몸을 담았다. 재무파트와 함께 IR을 맡아, 김행장을 대신해 실질적으로 국민은행의 ‘입’ 노릇을 하면서 얼굴이 많이 알려졌다. 윤 부행장의 경력은 화려하다. 1980년 공인회계사 시험, 1981년에는 행정고시에 잇따라 합격했고, 동아건설 워크아웃 프로젝트 총괄책임자, 예금보험공사 운영위원, 삼일회계법인 부대표 등을 지냈다.
특히 전남 나주 출신으로 광주상고를 졸업, 김행장과 같은 지역 연고를 갖고 있다(최 전 부행장은 경남 하동 출신으로 경남고를 졸업했다). 국민은행에 들어온 후에는 연구경력을 살려 국민은행 연구소를 맡다가 국민카드 사장으로 자리를 옮긴 조봉환 부행장의 바통을 이어받아 은행의 전략부문을 책임졌다.
전략과 재무라는 조직의 두 핵심 영역을 두 부행장이 나눠가진 것을 보면 국민은행에서 이들 두 사람이 차지하는 비중을 짐작할 만하다. 호사가들의 ‘지역갈등론’은 무시하더라도 업무보직의 특성상 경쟁구도에 있었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국민카드 처리 문제를 놓고 두 부행장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으면 김행장은 한 쪽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고, 이는 다른 한 쪽의 침몰을 의미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후계자 양성론이 불씨
신용카드 연체로 촉발된 가계대출 문제가 시장의 주요 관심사안이 됐고, 이로 인해 국민은행은 적자로 내몰렸고, 세계 경제의 회복기미는 보이지 않고, 애널리스트들은 어떤 식으로든 빨리 의사결정을 하라고 아우성이고…. 이런 상황이다 보니 국민카드 문제는 그만큼 파괴력이 커질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이를 둘러싼 두 부행장의 경쟁은 어느 한 쪽의 퇴진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해석이 나온다.
그렇다면 이 문제가 최 전 부행장이 ‘차기’를 노렸다는 설과는 어떻게 연관되는 것일까. 이는 김정태 행장의 병이 생각보다 심각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그래서 병석에서 일어나더라도 정상적으로 업무를 수행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는 말이 떠돌면서 확대, 재생산된 측면이 있다.
김행장은 통합 국민은행이 출범하자마자 후계 문제를 언급한 적이 있다. 지난해 4월17일 김행장은 능률협회 주최 조찬강연회에서 차기 은행장과 후계 문제에 대해 공개적으로 언급했다. 국민과 주택의 통합 과정에서 양 은행 간의 갈등이 극심했기에 이에 쐐기를 박기라도 하려는 듯 김행장은 거침없이 소신을 밝혔다.
“두 은행이 합병하면 두 은행 출신들이 교대로 행장을 맡아 영원히 화합하지 못하는 경우를 봤다. 그러니 국민은행은 생각처럼 화합이 안 된다고 판단되면 은행 정관을 바꿔서라도 양 은행 출신들이 몇십년간 은행장을 못하도록 할 수도 있다. 조직원의 10% 정도는 외국인으로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도 한다. 합병은행이 화합을 이루지 못하면 경영자는 밖에서 데려와야 한다. 경영자로서 내게 남은 일이 있다면 후계자를 찾아서 양성하는 것이다. 빨리 후계자를 양성하고, 떠날 때는 빨리 떠나야 한다.”
이 말대로라면 김행장은 통합 국민은행의 출범과 함께 후계 문제를 염두에 뒀다는 얘기다. 비록 이날 발언이 두 은행 출신들의 반목과 소모적 경쟁을 사전에 차단하고, 부행장들의 건전한 경쟁을 유도하기 위한 정치적 발언이었다 해도 결과적으로는 외부 영입 인사들이 상대적으로 힘을 얻는 계기가 됐다는 점은 부인하기 힘들다.
실제로 이 무렵부터 ‘영입인사 중에서 행장을 뽑는다면…’이라는 ‘화두’로 여러 얘기들이 오갔다. 그 과정에서 윤종규·최범수 부행장이 자연스레 부상했다고도 볼 수 있다.
합병 국민은행의 차기 행장, 즉 김정태 행장의 후계자를 양성하는 것은 결코 만만하게 볼 일이 아니다. 김행장은 병치레를 하기 전 몇몇 인사들과의 만남에서 “옛 국민이나 주택 출신이 행장이 되면 당연히 반대편에서 싫어할 것이고, 영입 인사를 뽑으면 양쪽에서 다 반대할 테니 난감하다”고 털어놓은 적도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런 분위기에서 김행장의 와병이라는 돌발상황이 예상보다 빨리 ‘결전의 막’을 올린 셈이다. 설사 차기 행장 자리에 욕심이 있는 인물이라 해도 속마음을 드러내긴 쉽지 않다. 김행장이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데다, 여러 면에서 뛰어난 조직 장악력을 검증받았기 때문이다. 합병 이전에 강성 일변도였던 옛 국민은행 노조도 통합 후에는 큰 목소리를 낸 적이 없다.
하지만 김행장의 입원이 길어지면서 금융권과 언론 등에서는 ‘이제 후임을 찾아야 할 시점이 아니냐’는 논의가 쏟아졌고, 이같은 분위기는 두 부행장의 경쟁을 예상보다 빨리 가시화시켰다. 마침내 ‘서바이벌 게임’이 시작된 것이다. 이들 두 부행장뿐 아니라 국민은행 외부 인사들까지 차기 국민은행장을 위해 뛰기 시작했다는 얘기도 들려왔다.
경영실적 악화도 큰 짐
외부 인사들이야 논외로 치더라도 국민은행의 두 부행장이, 김행장이 자리를 비운 사이 은행의 경영전략을 놓고 어떤 양상으로 충돌했는지 명확하게 드러난 것은 많지 않다. 그러나 김행장도 시장에서 나도는 자신의 퇴임설과 갈등설 등에 대해 소상하게 듣고 있었으며, 이와 관련한 내용은 복귀 후 첫 월례조회에서 분명하게 언급됐다.
“저는 우리 KB국민은행, 통합은행의 초대행장으로서 은행 역사에 불행한 전통은 절대 만들지 않을 것을 여러분 앞에 약속합니다. 우리가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바람직하지 못한 방향으로 역사를 만든다면 먼 훗날 우리의 후배들에게도 불행을 안겨주게 됩니다.”
그는 ‘불행한 전통과 바람직하지 못한 방향’이 무엇인지 특별히 부연하진 않았지만, ‘초대행장’이 임기를 못 마치고 물러나는 상황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업무에 복귀한 김행장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특유의 뚝심을 내보이고 있다. “기(氣)가 제대로 돌아오지 않고 있다”며 농담을 던지면서도 자신의 경영전략을 비판한 지점장을 찾아내 가차없이 징계했다. 자신의 선언대로 ‘가치관이 달라 같이 일하기 힘든’ 임원들도 정리했다. ‘불행한 전통’을 만들지 않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는 듯하다.
김행장의 이같은 면모는 막강한 조직 장악력과 끈질긴 기질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줬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생존이 완전히 담보된 것으로 판단하긴 어렵다는 게 금융권의 중론이다.
무엇보다 그를 짓누르는 것은 경영실적이다. 국민은행은 올해 상반기에 407억원의 적자를 기록했다. 1/4분기엔 739억원의 흑자를 냈으나 2/4분기에는 도리어 1146억원의 적자를 냈다.
상반기 적자의 가장 큰 원인은 역시 대손충당금이다. 신용카드와 가계부문 대출의 부실, 그리고 SK글로벌 문제 등 은행권이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사안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특히 소매금융 부문이 절대적인 포지션을 차지하는 국민은행으로서는 충격이 갑절로 커질 수밖에 없다.
1/4분기에 6565억원의 충당금을 쌓은 국민은행은 2/4분기에 무려 두 배 가까운 1조1367억원을 충당금으로 전입시켰다. 국민은행의 설명대로 적자의 가장 큰 이유는 충당금 적립에 있지만, 은행 관계자들은 “표면적으로 적자를 낸 것보다는 그 내용이 좋지 못하다는 게 문제”라고 지적한다. 이에 대해 국민은행은 “충당금 적립 전 영업이익이 정상적으로 유지·확대되고 있다”고 반박하지만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국민은행의 2/4분기 충당금 적립 전 영업이익은 1조685억원으로 1/4분기 1조210억원과 비교하면 4.7% 증가했다. 그러나 이는 지난해 상반기와 비교하면 1.3% 성장에 그친 결과다. 2/4분기의 이자부문 이익은 1조3351억원으로 1/4분기의 1조2767억원에서 4.6% 증가했으며, 지난해 상반기와 비교하면 10.1% 늘었다. 이자부문만을 놓고 보면 언뜻 국민은행측의 설명이 맞아들어가는 듯하다.
국민카드 흡수합병을 둘러싼 논란도 국민은행 ‘파워게임’의 배경으로 작용했다. 합병 반대 시위를 벌이는 국민카드 노조원들.
또 다른 실적지표인 예대금리차(NIS)와 순이자마진율(NIM)을 보더라도 상황은 긍정적이지 못하다. 올 상반기의 원화 예대금리차는 3.78%로 지난해 말의 3.92%에서 0.14%p 떨어졌다. 은행합병 후 과정을 보면 더욱 확연히 드러난다. 지난해 1/4분기 4.11%에서 4.03%로, 다시 3.96%에서 3.92%로 분기별로 계속 떨어지는 추세다.
순이자마진율도 지난해 1/4분기 3.46%에서 시작해 이후 각 분기별로 3.41%, 3.35%, 3.39%, 3.20%, 3.22%를 기록해 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다. 합병 후 지난 1년 6개월을 놓고 보면 원화예대금리차는 0.33%p, 순이자마진율은 0.24%p 하락한 셈이다.
이런 상황 때문에 상당수 금융인들은 신용카드 대란과 가계부문 부실증가, SK글로벌 충당금 등 은행권 공통의 현안을 제외하더라도 국민은행의 영업전선에 분명히 이상징후가 있다고 분석한다. 이에 대해 한 외국계 은행 고위 관계자는 “애초부터 김행장의 합병 논리는 많은 모순을 안고 있었다”고 지적하며 “최근 김행장의 행보는 이를 수정하려는 시도가 아닌가 보여진다”며 조심스레 관측했다.
“김행장의 최근 경영전략을 보면 비용절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따라서 옛 국민·주택은행의 합병 때 앞세웠던 합병논리를 철회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에도 시장에서 많은 논란을 낳았던 점포 구조조정이나 인력감축 등이 이에 해당된다. 1년6개월을 허비한 김행장이 이같은 전략 수정으로 어떤 성과를 낼지 두고 볼 일이다.”
지난 7월23일 기업설명회에서 김행장은 “기업전담점포(RM) 40개를 포함해 총 120개의 점포를 연내에 축소하겠다”고 밝혔다. 여기에 수반되는 인원감축도 강하게 시사했다.
소매은행과 소매은행이 손잡는 국민·주택은행 합병 당시 김행장은 중복점포 문제와 관련해 “현재 이익을 내고 있다면 점포가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것은 문제되지 않는다”는 논리를 내놓았다. 당연히 인원감축도 없었다. 이는 합병에 반대하는 노조를 설득하기 위한 수단으로도 활용됐다.
하지만 이제는 생각이 달라졌다. 김행장의 생각이 적중하지 않은 이유를 굳이 꼽자면 경기가 급격히 나빠지면서 개인 파산이 잇따랐고, 이것이 대형 소매은행인 국민은행에 유독 더 큰 충격을 줬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CEO가 이런 위험에 대비하지 못하고 1년 반을 허비한 것에 대해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얘기도 나온다.
이런 마당에 기존 합병논리를 전면적으로 수정할 경우 또 다른 불씨가 잉태될 수 있다는 데 공감하는 이가 적지 않다. 노조의 반발은 불 보듯 뻔하다. 옛 국민은행 노조는 이미 몇 차례 성명을 내면서 김행장의 점포 축소 방침에 반기를 들고 있다. 안팎의 책임론, 그리고 노조의 반발. 사실상 ‘제2의 창업’에 가까운 김행장의 서바이벌 게임은 이제 시작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