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힘으로 밀어붙이는 집단들 때문에 대통령 못해먹겠다”는 노대통령의 말은 왜 민주주의에 대한 중대한 도전일 수 있나. 민주주의의 핵심은 단체의 사회적 자치와 분권(分權)이기 때문. ‘미국식’보다 ‘프랑스식’에 더 가까운 우리의 민주주의 개념.
- 그 속에 숨은 이데올로기는 무엇인가.
최근 노무현 정권이 표방하는 ‘진보적’ 개혁 구상에는 유럽에서 공부한 사람들이 많이 참여하고 있다. 미국 유학파가 주를 이뤘던 역대 정권과는 대조적이다. 하지만 유럽에서 공부하면 진보적이고 미국에서 공부하면 보수적이라는 도식은 대단히 위험하다. 유럽은 진보이고 미국은 보수라는 주장은 더욱 위험하다. 획일적인 도식이 갖는 위험성 때문이다. 노무현 정권의 개혁이 어떻게 전개될지 아직 알 수 없으나 그를 사회주의적이라 보는 견해 또한 사회주의가 무엇인지 모르는 소치이거나 그리 비난해 다른 이익을 얻고자 함이다. 직접민주주의니 포퓰리즘이니 하는 비난도 마찬가지다.
“대통령 못해먹겠다”는 말
그런데 최근 노대통령은, 여러 단체가 힘으로 밀어붙이려 해 국가 권위가 흔들리고 있으며 대통령 못해먹겠다고 개탄을 했다. 여러 단체가 자기 주장을 하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또한 최근 사태가 과거에 비해 특별히 과도한 것도 아니므로 상식을 가진 이라면 그 말에 상당히 당황했으리라. 역사를 볼 때 어느 나라에서든 개인과 단체의 힘이 강해져 국가 권위에 도전하는 것은 민주화의 당연한 과정이다. 우리나라에서도 1987년 이후 그런 현상이 민주화의 핵심으로 등장했다. 이는 국가·단체·개인이 서로 연관되는 민주주의 논의에 있어 핵심이 되는 것인 만큼 눈여겨볼 가치가 있다. 민주주의의 핵심을 단체의 사회적 자치(또는 최근 유행하는 하버마스에 따르면 시민적 공공권)와 분권이라 본다면, 노대통령의 발언은 우리가 누구나 믿는 민주주의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 될 수 있다.
물론 누구도 노대통령이 민주주의자가 아니라고는 생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같은 민주주의라도 시대나 국가에 따라 모습은 다를 수밖에 없다. 간단히 말해 ‘유럽식 민주주의’와 ‘미국식 민주주의’의 차이다.
전자는 루소의 일반의사에 근거한 프랑스 대혁명 이래의 국가주의다. 여기서는 국가를 중심으로 해 그와 직접 대응하는 개인만을 문제삼고 개인이 조직한 단체는 무시한다. 그래서 1789년 프랑스 인권선언에서 개인 권리의 보장과 국가 권력의 분립이 없는 사회는 헌법을 갖지 않는다 했으며, 1884년까지 1세기 동안이나 모든 단체의 결성이 법으로 금지되었다. 그러나 사실 개인 권리의 보장이란 국가가 인정하는 범위에 한정된다는 점에서 부차적이었다.
따라서 이는 국민의 일반의사에 근거한 국가권력만이 정통이라 주장하는 ‘일원모델’이다. 원자화된 개인만을 법적 존재로 인정하며, 개인으로 구성된 단체의 사회적 자치나 분권은 부정한 것이다. 물론 그후, 특히 20세기에 와서는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대륙 여러 나라에서도 단체의 사회적 자치를 인정했으나, 그것이 종래의 국가주의 자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정도로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프랑스는 물론이고, 특히 독일에서 17~18세기 ‘공공 복지는 최고의 법’이란 가치 아래 국가절대주의 군주들에 의해 주창된 복지국가도 사실 법치주의를 포함한 민주주의 원리에 반대되는 국가주의적 사고였다. 물론 19세기 말부터 프랑스나 독일에서도 사회적 자치가 인정되기 시작했고, 특히 20세기 들어 복지국가는 과거의 그것과는 달리 민주적·사회적 성격의 것으로 변화되었으나, 국가가 주도하는 복지국가라는 기본 관념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이와 반대로 개인은 물론 그들로 구성되는 단체의 존재를 적극 용인하여, 그 사회적 자치도 민주주의의 정통성을 갖는다 보고, 그에 의한 사회적 법을 인정하는 다원적 모델이 미국식 민주주의다. 그런 사회적 자치의 주체인 단체의 권력은, 입법 과정에서 여러 단체의 이해관계 조정이 공공연히 행해지는 ‘로비’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그것은 사회적 자치의 법적 현상일 경우 소송당사자, 특히 법률가를 통한 판례로 드러난다. 미국 헌법을 낳은 핵심인 ‘연방주의자’에서 메디슨이 말한 다양한 이해 관계의 조정이 바로 그것이다. 연방제의 또 다른 핵심인 연방과 지방자치체의 분권 시스템도 사회적 자치의 하나라 볼 수 있다.
우리나라가 해방 후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들 하나, 적어도 위에서 말한 미국 민주주의 헌법의 영향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반대로 근대 유럽식 국가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최근 들어 미국식 국가관이 조금씩 나타나고 있는 점에서 우리 국가관이나 민주주의관도 변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반면 노대통령은 미국의 링컨을 가장 존경한다는 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럽형 국가관을 따르고 있는 듯하다.
19세기 프랑스인 토크빌(1805~59)의 저서 ‘미국의 민주주의’는 1835~40년에 간행된 것임에도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고전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책에서 토크빌은 미국 민주주의가 자유와 평등을 결합시킨 세 가지 이유를 들고 있다.
첫째, 청교도 식민으로 시작된 미국사회는 처음부터 평등하고 공화주의적이었으며, 신분제나 귀족 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역사적 조건, 둘째, 자유로운 법제도, 특히 영국의 정치문화를 계승한 지방자치와 단체 활동의 보장, 셋째, 관습화된 사회규범, 특히 정교분리에 의해 기독교가 내면화하여 자유의 남용을 억제하는 점 등이다. 법제도의 측면에서는 특히 사법의 역할, 연방제에 의한 분권시스템의 역할, 다원적 사회시스템-단체의 역할을 강조했다. 토크빌은 이러한 조건의 미국에서는 사회적 평등 위에 민주주의가 기능을 발휘하며, 활발한 상업활동과 정치적 자유가 낳는 끝없는 동요도 질서 속에 수렴돼 혁명이나 무정부 상태와는 멀어진다고 보았다.
반면 프랑스에서 민주주의가 무질서하고 폭력적인 이유는, 귀족세력이나 가톨릭의 집요한 저항에 부닥친 시민들이 어쩔 수 없이 혁명을 통해 권력을 얻고자 한 때문이라 했다. 토크빌은 이는 민주주의의 정통성이 아직 사회 전체에 침투하지 못한 과도기적 상황이라고 규정하고 평등을 정착시켜 질서를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는 미국에 비추어보면 민주주의와 혁명은 별개이고, 도리어 평등이 확립되면 될수록 혁명의 위험은 멀어진다고 보았다.
그러나 토크빌은 미국에서도 혁명, 무질서와는 다른 문제로서 ‘다수의 폭정’이나 ‘여론이 전제(專制)로 변할 위험성’이 있음을 지적했다. 즉 평등이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획일화하고 다수의 권위가 절대화하면, 정신의 자유는 질식하고 의견의 다양성은 상실된다는 비판이었다. 이러한 비판은 미국에 대한 분석을 떠나 민주사회와 귀족사회를 유형별로 논한 ‘미국의 민주주의’ 제2권에 분명히 드러난다. 특히 그는 민주사회의 특징인 개인주의와 물질적 행복에의 과도한 집착은 공공 의무와 사회적 연대를 잊게 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런 경향이 영미 정치문화와 대조적인 대륙의 집권제와 결합할 경우, 물리적 강제가 없어도 만인은 관료통제에 복종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러한 토크빌의 경종은 대중사회와 복지국가, 나아가 전체주의까지, 20세기의 정치를 예언한 것이었다.
토크빌의 유저(遺著) ‘구제도와 혁명’은 프랑스 혁명이 전제로 끝난 과정을 탐구한 것이다. 이 책은 혁명에 의한 역사의 단절을 강조하는 통설에 반해 프랑스 행정의 집권적 구조가 구제도에서 비롯됐으며, 혁명은 구왕정의 계속에 불과하다고 보아 그 연속성을 강조했다. ‘봉건잔재의 일소’라는 혁명의 과제 또한 실은 혁명 이전에 귀족이나 단체의 정치적 권리를 박탈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라 지적한 토크빌은, 관료지배하의 정치적 자유 상실이라는 구체제의 병폐가 혁명 후에도 치명적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토크빌은 몽테스키외의 사회적 인식과 관습에 대한 관심, 귀족 정신과 더불어 영미 제도 및 문화에 대한 적극적 관심을 물려받았다는 점에서 19세기의 몽테스키외라고도 불린다. 또한 동시대 영국의 존 스튜어트 밀과도 교류했다. 밀은 ‘자유론’에서 ‘다수의 폭정’이라는 토크빌의 미국 민주주의 비판을 발전시켰다.
이처럼 토크빌은 생존 당시에는 범유럽에서 상당한 주목을 받았으나 사후 곧 잊혀졌다. 그러나 20세기 들어 대중민주주의가 발전하고 파시즘과 전체주의에 의해 민주주의가 도전받는 상황이 전개되면서, 특히 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국제적 영향력이 증대됨에 따라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는 미국에서 마르크스에 대항할 수 있는 민주주의의 사도로까지 여겨졌다. 특히 자치와 분권을 민주주의의 핵심으로 보는 그의 사상은 민주주의의 본질로 환영받았다. 그러나 정작 그의 조국인 프랑스에서는 최근까지 무시되었다. 프랑스의 반미 감정과 마르크스주의가 그 최대 요인이었으나, 보다 근본적인 요인은 앞에서 본 전통적 국가상과의 충돌에 있었다.
남북전쟁의 핵심 사안은 노예 해방이 아닌 북부 자본가의 이권 보장이었다. 미국 남부지역의 분리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대.
미국 역사는 콜럼버스가 인디언을 만나는 것으로 시작해 그 계승자들이 인디언을 철저히 말살하는 것으로 끝난다. 미국만이 아니라 캐나다, 남미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그것뿐인가. 미국 역사는 흑인 노예에 대한 인종차별, 가난한 이주 노동자의 고통과 함께 시작됐다. 그들 모두는 선거권도, 피선거권도 갖지 못했고 배심원도 될 수 없었다. 그래서 미국의 역사는 그들의 반항사로 점철되어 있다. 우리는 이를 하워드 진의 ‘미국민중저항사’에서 충분히 읽을 수 있다.
1700년대에 식민지 미국은 급속히 성장했다. 1700년에 25만명이던 식민지 인구는 1760년에 160만명으로 늘어났다. 농업과 제조업도 크게 신장됐다. 그러나 성장 이익의 대부분은 상류계층에 집중됐다. 미국의 헌법 제정을 둘러싼 혁명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나라에는 미국혁명이란 말이 별로 알려져 있지 않으나, 미국에서는 1763년부터 1788년까지를 그렇게 부른다. 이는 다시 1763~76년 독립선언을 발표하기까지의 전기와 그 후 국가가 성립된 후기로 나누어진다. 전기는 영국 정부와 미국 식민지 간 정치적 투쟁의 시기로 ‘혁명 논쟁기’라 불리며, 후기는 영국에서 독립한 미국이 최초의 헌법(초기 연방헌법 또는 혁명기 헌법)을 만들어 국가를 세운 시기다.
혁명논쟁은 영국의 식민 정책이 영국 헌법에 적합한가를 둘러싼 영국과 식민지 간 싸움이었다. 어느 쪽이나 당시 영국 헌법이 가장 자유주의적인 헌법임을 인정했으나, 영국은 명예혁명 체제의 의회주권을 강조한 반면, 식민지는 명예혁명 체제의 핵심인 자유와 재산의 불가침을 강조했다. 혁명논쟁의 불씨가 된 것은 영국측의 일방적 과세 강화였다. 식민지는 ‘대표 없는 과세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과세 위반이 배심제가 아닌 관료재판에 의해 정해지는 것에도 항의했다. 당시 식민지측이 근거한 사상은 유럽 대륙의 계몽주의 법학이었다.
1776년 미국 독립을 최초로 주장한 패트릭 헨리의 ‘상식’은 “어떠한 상태에서도 사회는 축복이다. 그러나 최선의 상태라 하더라도 정부는 단지 필요악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영국의 정치평론가 페인은 1066년의 노르만 정복까지 거슬러 올라가 영국 군주제의 위선을 폭로하며 미국의 독립을 주장했다. 1776년 출판된 그의 책은 25판이나 찍었다. 페인은 세무원, 교사 등을 거친 가난한 이주자로 최하층 민중을 대변했다. 그러나 그의 가장 큰 관심은 중간집단을 대변하는 데 있었다. 그래서 미국혁명 과정에서 민병대와 같은 최하층 민중들의 집단행동에 반대했다. 대신 그는 헌법 채택에 대한 논의에서 중앙정부를 지지하는 도시 기능공들을 대변했다.
1776년 7월4일 미국은 독립을 선언했다. “모든 사람은 나면서부터 평등하고 신에 의하여 양도될 수 없는 권리를 부여받고 있으며, 그 가운데는 생명, 자유 및 행복의 추구라는 권리가 있다는 진리를 우리는 자명한 것으로 주장한다.”
그러나 그 ‘모든 사람’에서 인디언, 흑인 노예, 그리고 여성은 제외됐다. 독립선언에서는 영국 왕이 노예 반란과 인디언 습격을 선동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제퍼슨은 영국 왕이 아프리카에서 식민지로 노예를 실어왔고 “이러한 저주스러운 상행위를 금지하거나 제한하려는 모든 합법적 시도를 억압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러한 비난은 흑인노예의 증가와 이에 따른 흑인반란의 위협에 대한 공포를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독립선언에 포함되지 않았다. 실제로 제퍼슨 자신은 죽을 때까지 수백명의 노예를 소유했다. 독립선언에 서명한 사람의 69%가 영국 치하에서 식민지 관리를 지낸 사람들이었다.
미국 독립선언의 사상은 1689년에 출판된 로크의 ‘제2 정부론’까지 거슬러올라간다. 당시 영국은 전제군주제에 반대하여 명예혁명으로 의회정부를 수립한 상태였다. 비단무역과 노예무역에 대한 투자, 대부나 저당 등으로 상당한 소득을 올리는 부자였던 로크는 국내외 상업자본주의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해 혁명을 옹호했다. 혁명에 의한 의회최고권의 확립, 법의 지배의 확립은 재산을 가진 자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로크는 캐롤라이나의 고문으로서 40명의 부유한 지주, 귀족들에 의해 운영되는 노예소유자의 정부를 제안했다.
혁명논쟁을 거쳐 독립 후 제정된 미국 헌법은 급진파인 각주 분권주의가 온건파인 연방 집권주의에 패배하는 과정을 통해 성립됐다. 그것은 토크빌이 지적했듯이 성문 경성헌법, 연방제, 권력분립제, 사법부의 우위를 내용으로 한 것이나, 그 핵심은 재산권을 비롯한 인권의 보장과 민주주의를 조화시키는 것에 있었다. 그러나 그 내용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유의할 점이 있다.
사실 영국군에 대한 식민지 미국의 승리는 독립에 대한 열망이 아니라 사전에 무장을 한 민중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군대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과 사회적 지위를 주었던 것이다. 당시 군복무는 의무제였으나 5파운드를 내면 면제되었다. 전쟁 기간에 식민지를 통치한 대륙회의는 지연과 혈연을 통해 파벌과 계약으로 결합된 부자들에 의해 지배됐다. 대륙회의는 돈을 빌려준 부자들에게 더 많은 이득을 보장해주겠다고 약속했다.
‘미국 헌법의 경제적 기초’를 쓴 비어드는 1787년 헌법 제정을 위해 필라델피아에 모인 55명 대다수가 변호사로, 대부분이 토지, 노예를 소유하고 제조업 또는 해운업을 운영하는 부자였고, 그 중 반이 이자놀이를 했으며, 40명이 정부 발행 채권을 소유하고 있었음을 밝혔다. 그들 대부분은 강력한 연방정부 수립에 이해관계를 갖고 있었다. 즉 제조업자는 보호관세를, 대부업자는 변제시의 지폐사용 금지를, 토지 투기꾼들은 인디언 토지의 보호를, 노예주는 노예 반란과 도망에 대한 보호를, 채권 소지자는 정부가 조세를 통해 그를 변제할 것을 요구했다. 한편 비어드는 노예, 노동자, 여성, 그리고 빈민이 헌법위원회에 대표를 보내지 못한 점도 지적했다.
미국 헌법이 제정 되고 나서 권리장전으로 알려진 일련의 수정안이 통과되었다. 그 제1조는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7년 뒤 그에 반하는 치안유지법이 통과되어 반정부적인 언론은 위법시되었다.
노대통령이 존경한다는 링컨은 우리에게 노예해방론자로 알려져 있으나, 그의 노예제 폐지는 북부 지역 사업가에게 경제적 이익을 주기 위한 것에 불과했다. 링컨은 노동자 출신으로 처음에는 노동자를 대변하였으나 차차 중·상류 계층을 위한 정책을 폈다.
남북전쟁은 남북 지배계층간 전쟁이었다. 북부 지배계층이 원한 자유노동, 자유토지, 자유시장에 남부의 노예제는 상치되었다. 이는 남북전쟁이 끝난 뒤에도 24개 북부 주 가운데 19개 주가 흑인의 투표권을 부정했고 흑인의 경제적 사정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음에서도 알 수 있다. 결국 남북전쟁은 미국의 자본주의를 크게 성장시키면서 흑인과 함께 백인까지도 노예로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이처럼 미국 헌법은 연방헌법 제정 후 많은 변화를 거쳤고 지금도 다양한 논쟁이 진행중이다. 그를 크게 보면, 국가의 경제 개입과 국가로부터 개인 및 단체의 자유를 어떻게 보장할 것이냐는 것이다. 미국의 진보파는 국가가 경제에는 강력히 개입하되(복지주의) 개인과 단체의 자유는 보장해야 한다(민주국가)는 이중기준을 주장한다. 반대로 보수파는 국가는 최소한의 것이어야 하고 특히 시장의 자유를 보장하며(시장주의) 개인의 자유보다 종교적· 도덕적 가치를 회복해야 한다(도덕국가)고 주장한다. 이를 각각 민주당과 공화당이 대표함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 두 가지 대세에 대해 경제와 자유 어디에서도 국가는 철저히 불개입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복지국가에 대한 비판은 현재 우리나라 기업에서 곧잘 인용하는 신자유주의의 선구인 하이에크로 대표된다. 그는 1944년 누진과세와 사회복지정책에 의한 소득재분배를 비판하면서 계획이 집단주의로, 다시 전체주의로, 그리고 결국은 독재로 빠진다고 경고했다. 즉 복지국가가 ‘거대하고’ ‘강력한’ 국가를 초래하여 인권을 침해한다고 본 것이다.
미국의 민주주의는 왜 강한가
토크빌에 이어 미국 민주주의를 옹호한 한나 아렌트는 미국을 전통에서 해방된 개인, 그 개인이 자유로운 의사를 표명할 수 있는, 공적 생활에 기초한 공화제의 원리를 체현한 나라라고 본다. 그녀 또한 소수 인종에 대한 차별을 인정하나, 이는 자유의 영역인 ‘정치=공공권’과는 무관한 사회의 영역으로 본다. 그녀가 정치의 이상으로 삼은 고대 그리스의 공공권이란 생물적 욕구로부터 해방된 자유로운 사람들이 언론과 설득에 의해 자유롭게 활동하는 공간을 뜻한다. 반면 가정이라는 사적영역에서 가계가 추구되는데 아렌트는 근대국가에 와서 가계가 가정을 뛰어넘어 국가의 관심사가 되어 사회적 영역이 나타났고, 인종차별과 같은 폭력은 그런 영역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아렌트는 두 가지 근대시민혁명인 1776년 미국 독립혁명과 프랑스 대혁명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보았다. 즉 물질적으로 결핍된 상태나 물리적으로 억압된 상태로부터의 해방을 뜻하는 소극적 개념은 ‘Liberation’과 자신의 정신적 활동의 단서를 스스로 만들고 인간으로서의 존재를 스스로 형성해가는 능동적 개념인 ‘Freedom’으로 구별했다. 고대 그리스와 미국에서는 ‘Freedom’이 중심이었으나, 근대 유럽국가에서는 ‘Liberation’이 중심이 됐고, 이는 전체주의로까지 이어졌다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다.
프랑스의 전통적 국가주의는 드골의 ‘강력한 대통령제’를 통해 현실화 됐다. 드골의 동상을 바라보고 있는 파리 시민들.
아렌트에 의하면 프랑스혁명기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는 자유로운 활동을 가능케 하는 인간관계를 무시하고, 개인의 마음속 문제인 동정을 통일적 원리로 삼아 인간을 일반의지를 갖는 공동체로 조직하려 한 시도였다. 이러한 ‘동정에의 열광’에 근거한 정치는 폭력적 충동을 인간의 자연적 본능으로 보았다. 그래서 인민을 하나의 육체처럼 움직이고 하나의 의지를 갖는 것처럼 행위하는 영혼으로 변모시켰다. 어떤 이성적 제약도 받지 않는 이 육체는 스스로에게 동화할 수 없는 것들을 폭력으로 파괴했다.
프랑스혁명의 국가주의적 실체
이처럼 폴리스적 자유와는 공존할 수 없는 자연적 폭력을 해방시킨 프랑스혁명에 비해 미국혁명은 ‘자유의 창설’이라는 본래 목적을 잃지 않고 계속 추구했다. 미국에도 빈민은 존재했으나 프랑스에서처럼 비참하지는 않았다. 미국에서 경제적 격차는 정치가 아니라 사회문제로 여겨져 빈곤으로부터의 해방 요구에 의해 혁명 방향이 결정되거나 변질되지 않았다. 노동자들의 관심도 빈곤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자유의 창설에 대한 참여였다.
미국에도 인민은 존재했으나, 그것은 프랑스처럼 자연적 충동에 의해 하나의 의지를 갖는 육체처럼 행동하는 것이 아닌, 복수성을 보증하는 자유로운 결합체를 의미했다. 이는 제퍼슨이나 메디슨 같은 초기 대통령들이 정치적 자유의 본질을 복수성에서 구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들은 상이한 의견을 갖는 사람들 사이의 교환이 있음으로 인해 비로소 상대를 변론에 의해 설득하고자 하는 활동의 계기가 생긴다고 보았다. 일반의지가 지배하는 여론에는 다양성이 포함될 여지가 없으나, 미국 공화제는 처음부터 전원일치의 허구가 거부되고 논의를 통해 개인적인 이성의 잘못을 교정하면서 공공생활권을 세우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상이한 의견을 가진 당파들에 의해 구성된 것이 미국 통치형태의 특징이다.
아렌트는 자신의 자유로운 활동이 아닌, 다른 존재에 의해 형이상학적으로 규정된 삶의 방식을 인간성에 반하는 것으로 보고 이를 거부한다. 형이상학적 원리에 의해 일원적으로 지배되는 세계에는 복수성에 근거한 인간성을 발전시킬 여지가 없다. 따라서 종교적, 초월적 권위에 의해 외부로부터 정당화된 중세 기독교 세계의 통치체제는 인간성에 반한다. 그래서 아렌트는 근대혁명 속에서 탈형이상학적, 세속적인 정치권력 창설의 계기를 발견한다.
그러나 현실 혁명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자기 통치의 근거를 자신이 창설한 자유가 아닌, 어떤 형태의 신적 원리에서 구한 혁명정권은 형이상학에 빠져 자유로운 활동을 위한 공간을 스스로 파괴했다. 그래서 ‘일반의지’의 표현이라는 여론에 의해 자기 통치를 신성화하고자 한 로베스피에르를 비롯한 혁명가는 좌절했다. 앙시앙 레짐의 절대군주제로부터 자기를 해방하고자 한 그들은 절대군주를 대신하는 새로운 절대자를 실체적으로 창출하고자 했다.
그러나 식민 미국에서는 그 지배자인 영국에서 이미 절대군주제가 사라지고 ‘법에 의해 제한된’ 군주제가 실행된 탓으로 ‘법을 초월한 절대적 지배자’라는 환상에 빠지지 않았다. 반면 더욱 강력한 권위를 갖는 절대자를 인민에서 구한 프랑스에서는 자신의 절대성과 동화될 수 없는 것을 파괴하고자 하는 ‘정치 이전의 자연적 폭력’으로 변질되었다. 인민이라는 이름으로 절대화된 군중의 폭력은 절대군주제를 붕괴시켰으나, 동시에 같은 폭력에 의해 혁명 정부 자체가 파괴되었다.
아렌트는 정치에서 절대자가 담당하는 기능을 두 가지로 본다. 하나는 인간에 의한 법제정을 둘러싼 악순환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시작’이라는 악순환이다. 첫째는 입법의 타당성·합법성을 외부, 즉 ‘더욱 고차원의 법’에서 구하는 것으로서 인위적 법을 언제나 다른 권위에서 구하는 악순환이다. 그러나 그 또한 언제나 불완전하므로 결국 자신의 이름으로 새로운 시작을 선언하게 된다. 바로 ‘인민의 이름’으로.
혁명에서 절대자는 이 두 가지 악순환을 피해 합법적 통치체제를 수립할 것을 요구받는다. 근대 초의 절대군주제는 중세 기독교 세계의 신적 합법성 차단과 세속권력 수립을 위해 생긴 것으로 중세적 권위의 잔재가 아니다. 절대군주제 대신 프랑스 혁명에서는 군중=인민이 절대자로 나타났다. 이는 법에 구속되지 않는 자연적 폭력을 해방시켰다.
반면 미국에서는 인민이 권력의 담당자로 여겨졌으나 법의 원천으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대신 법은 풀뿌리 차원의 인민의 의지를 넘어서는 초월적·보편적인 것으로 여겨졌고, 그 법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혁명 과정과 함께 갱신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즉 Freedom의 영역을 새롭게 창설하고자 한 혁명운동의 과정 자체가 법의 원천이며, ‘보다 높은 법’은 언제나 새로 생성되는 것이었다. 실체화되지 않고 언제나 자기생산을 계속하는 법이 ‘인민에 의한 통치’를 구속하고, ‘정치 이전의 폭력’을 봉쇄하는 메커니즘이 생김에 따라 미국 혁명은 절대자를 둘러싼 세속적 형이상학에 빠지지 않았다. 즉 절대자가 실체적으로 표상화되지 않았기에 권력이 폭력으로 변하지 않은 것이다.
유신헌법 뿌리 된 드골식 대통령제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국가들은 19세기 토크빌이 주문한 미국식 민주주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8세기 루소의 일반의사에 근거한 국가주의는, 프랑스 근대헌법의 확립기라 할 제3공화제 이래 ‘일반의사의 표명으로 여겨진 법의 최고성’이라는 관념하에 철저한 의회중심주의로 전개되었다. 그것은 1958년 제5공화제 이후 대통령 중심주의가 확립됨으로써 더욱 강화되었다. 즉 대통령 중심주의라 해서 전통적 국가상이 파괴된 것이 아니라, 대통령은 국민이 선출한 만큼 일반의사를 더욱 철저히 반영한다고 여겨, 오히려 전통적 국가상을 더욱 강화하는 쪽으로 귀결된 것이다.
바로 이 프랑스 제5공화제 헌법이 우리나라 유신헌법의 모델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드골식 대통령제나 유신 대통령제는 모두 국민의 일반의사를 근거로 삼아 성립됐다. 두 정권 모두 비정상적으로 끝났지만,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국민투표에 의한 절대적 지지라는 일반의사를 그 정당성의 토대로 삼았다.
프랑스의 경우 제3~4공화제의 의회중심주의에서는 강력하고 안정된 다수파가 형성되지 못한 결과 전통적 국가상이 희망한 집권적 민주주의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러던 것이 드골에 이르러 다수가 지지하는 대통령과 의회 다수파가 일치하면서 집권적 민주주의가 가능해진 것. 바야흐로 루소의 ‘일반의사’가 완벽하게 정치 현실화하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물론 유신헌법 제정 당시 우리에게 그런 사상적 모색이 있었다고는 볼 수 없으나, 여하튼 당시 지배 세력이 더욱 강력한 대통령제를 희망한 것은 분명했고 국민 여론 역시 (권력에 의해 일방적으로 조작된 것이기는 하나) 절대적 지지를 보인 것이 사실이었다.
대통령제 채택에는 복지국가와 관련한 논점도 작용했다. 복지국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강력한 대통령제가 필요하다는 공론이 모아진 것이다. 의원내각제의 수상보다 공선된 대통령이, 복지국가의 부작용으로 지적되는 이익단체나 자본의 힘 행사에 더 강력하게 대항 할 수 있다고 믿어졌다. 그러나 복지국가 또한 ‘보호자로서의 국가’라는 고전적 국가주의의 연장선이다. 왜냐하면 ‘개인 없이 국가 없고 국가 없이 개인 없다’는 국가주의적 사고는 여기서도 유효하기 때문이다.
한편 1970~80년대 프랑스에서는 전통적 국가상에 근본적 변화가 찾아왔다. 첫째, 헌법재판소에 의한 위헌심사기능이 강화되면서 일반의사인 법률에 대한 도전이 나타났다. 즉 인권선언의 모국이랄 수 있는 프랑스에서 인권선언이 강제력을 갖지 못하다가 처음으로 ‘일반의사의 표명으로 간주된 법률보다 우월한 인권’이 재판을 통해 담보된 것이다. 특히 헌법재판소가 개인의 권리를 적극 인정함에 따라 개인주의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면서 종래 그를 중시하지 않던 사회주의자들도 ‘사회주의는 개인주의’라는 주장을 펴기 시작했다. 물론 새롭게 주장된 개인주의란 자립한 개인을 전제로 하여 국가-개인으로만 구성된 종래의 사회관 대신 자유로운 개인에 의해 맺어지는 자율적 관계를 창조하는 사회관 그것이다.
복지국가와 ‘국가로부터의 자유’
둘째, 1968년 5월 혁명 이래 사회 여러 분야의 자치관리가 강조되면서 특히 1981년 미테랑 정권 후 지방분권화가 이루어졌다. 사실 이는 프랑스 대혁명 이전부터 전통이 되어 온 중앙집권주의를 근본적으로 변혁시키는 새로운 움직임이었다. 이는 단순히 헌법에 대한 관념의 변화에 그친 것이 아니라, 프랑스 역사 자체에 대한 새로운 평가로 이어졌다. 즉 프랑스의 민족주의 사관은 물론 마르크스주의 사관까지도 1793년 성립된 자코뱅 정권의 국가주의를 대혁명의 핵심으로 보아온 것에 대해, 자코뱅의 국가주의는 1789년 대혁명과는 다르며 대혁명의 본질은 그 자체에서 찾아야 한다는 주장, 또 대혁명 전체에 대한 회의적이고 부정적인 평가까지도 함께 제기되었다.
셋째, 1986년 대통령 다수파(사회당)와 의회 다수파(보수연합)가 대립해, 일반의사가 다시 분열됐다. 혼란이 초래되리라는 걱정도 없지 않았으나, 일반적 여론은 오히려 호의적인 방향을 취했다.
넷째, 다원적 사회 단위인 단체의 적극적 활동으로 인해 국가와 단체의 갈등이 더욱 심화됐으나 이를 전통적 국가관의 시각에서 부정적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국가-사회의 관계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 사회가 서서히 그 주도권을 갖게 됐다는 긍정적 평가가 나왔다. 이는 이른바 다양한 사회단체를 전제로 그 협조를 주장하는 ‘다극(多極) 공존형 민주주의’의 국가상을 낳게 되었다.
이런 상황 변화와 함께 1980년대에 와서 토크빌은 프랑스에서 재발견됐다. 특히 1981년 프랑스 사회당 정권이 초기에는 국유화정책에 의한 국가규제 강화를 주장하다 지방분권정책이나 언론 규제의 완화(자율적 규제)로 전환하자 콘-타뉴지는 ‘국가 없는 법’이라는 저서에서 집권적·일체적·전원일치적 유럽 민주주의가 미국 민주주의의 ‘대응적·탄핵적·분쟁해결적’인 구조로 변화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미국에서 법률가의 역할과 그 양성기관인 법과대학원이 중시되는 데 반해, 프랑스에서는 관료의 역할과 그 양성기관인 국립행정학원(ENA)이 중시되는 것의 차이점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물론 반발도 있었다. 한때 유명한 좌익이었다 드골 정권에 참여한 레지스 드브레는 미국의 경우 사회가 국가를 지배하는 민주주의가 강조되는 데 반해, 프랑스에서는 이해관계의 대립과 조건의 불균등을 법률의 우위에 의해 억제하는 공화주의가 강조될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특수성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에서 ‘국가로부터의 자유’를 강조해 헌법을 제정한 것은, 프랑스와 같이 봉건적·신분적 사회질서로부터 개인을 해방시키는 존재로서의 국가 역할이 필요치 않은 때문이었다. 신대륙에는 앙시앙 레짐이 존재하지 않았고, 식민 본국인 영국 또한 이미 청교도혁명과 명예혁명으로부터 1세기가 지난 터였던 것이다.
가정은 좋고 노조는 나쁜가
한국은 유럽도, 미국도 아니다. 우리는 유럽식 국가와 개인의 대극구조를 경험하지 못했고, 미국식 국가와 개인-단체의 조화도 경험하지 못했다. 특히 그 어느 경우에든 개인의 자립이라는 민주주의의 기반이 강조되나, 우리에게는 그런 개인주의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개인주의를 지극히 반사회적인 이기주의라는 식으로 비난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다.
흔히 현대 복지국가에 있어 개인주의는 시대착오적인 것이라는 비판을 한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사회주의자조차 개인주의에 대해 새로운 평가를 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비판해야 할 것은 개인을 해방시키고 보호하는 역할을 국가에서만 구하는 국가주의의 입장이지 개인을 민주주의의 핵심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또 혹자는, 한국형 복지국가는 가정·이웃·직장 등의 공동체를 중시해 한국적 집단주의의 장점을 살려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그런 공동체가 위에서 말한 민주주의의 핵심 주체인 단체와는 다르다는 점이다.
공동체란 독일어로 게마인샤프트라는 공동사회를 말하며, 단체는 게젤샤프트라는 이익사회를 말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가족·이웃·직장과 같은 공동사회는 본래부터 좋은 것이나 노동조합과 같은 이익사회, 즉 단체는 이기적이고 힘으로만 밀어붙이기에 나쁘다는 인식이 있다. 이는 개인을 해방시키는 수단으로 발전해야 할 단체가 여러 요인에 의해 제대로 발전하지 못한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단체의 핵심은 자율과 독립의 확보에 있는데, 우리의 단체는 아직도 그것을 충분히 체질화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가족·이웃·직장이 국가 이상으로 개인을 억압하는 기능을 담당해왔음에도 주목해야 한다. 따라서 그런 공동체를 기반으로 한 복지국가는 그야말로 국가주의를 강화하는 것 이상이 아니다. 단체 또한 그 자체가 개인의 인권을 억압해서는 안 되며 내부 구성 또한 철저히 민주적이어야 한다. 가정은 물론 직장도 민주적이어야 하며, 노동조합이나 각종 협회도 철저히 민주적이어야 한다. 그런 민주적 단체만이 국가, 개인과 함께 민주주의 사회의 한 주체로 자격을 인정받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