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9월호

의문의 원주 어린이 유괴살해사건

자는 듯 숨진 아이, 홀연히 사라진 탈북자

  • 글: 강지남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layra@donga.com

    입력2003-08-22 14: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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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파트 복도에서 자전거를 타고 놀던 아이가 사라졌다. 열하루가 지난 후, 아이는 같은 층에 사는 한 탈북자의 집에서 싸늘한 시체로 발견됐다. 경찰은 다급하게 공개수배령을 내렸지만, 사라진 탈북자는 한 달이 넘도록 잡히지 않고 있다. 그의 행적을 뒤쫓았다.
    의문의 원주 어린이 유괴살해사건
    지난 8월1일 오후 강원도 원주시 명륜동의 한 임대아파트 단지. 관리사무소 앞 게시판에는 ‘타살의심 변사사건 용의자 수배’란 제목을 단 공개수배문이 붙어 있었다. ‘성명 박진철(가명·28). 키 168cm, 마른 편, 짧은 스포츠형 머리, 오렌지색 염색, 북한말씨 사용, 탈북자….’

    박진철은 여섯 살 난 어린이를 유괴, 살해한 혐의를 받고 수배중이다. 7월16일 이 아파트단지 ○○○동 1504호에 사는 유주영(가명·6)양이 사라졌는데, 그달 27일 오전 같은 동 1508호에 사는 박진철의 집에서 부패된 사체(死體)로 발견된 것이다. 이후 경찰은 공개수배령을 내리고 박진철의 행적을 쫓고 있다. 그러나 사건 발생 한 달이 다 되도록 그는 잡히지 않고 있다.

    과연 주영이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왜 박진철의 집에서 잠든 듯 누운 채 죽어 있었을까. 다음은 경찰과 주민 등의 증언을 통해 구성한 사건 당일 상황이다.

    “아기가 참 예쁘네요”

    초복인 7월16일, 원주에는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B사찰에서 지내던 주영이는 이날 오전 엄마 손을 잡고 오랜만에 원주시내로 나왔다. 주영이는 지난해 12월 사시(斜視) 교정수술을 받았는데, 이날 병원에서 수술경과를 검사하기로 돼 있었다. 안경까지 새로 맞춘 주영이는 오전 11시경 엄마가 살고 있는 명륜동 아파트로 돌아왔다.



    이날 점심메뉴는 삼계탕이었다. 초복인 데다, 평소 사찰에서 지내느라 고기를 먹지 못했던 주영이를 위해 엄마가 며칠 전부터 준비한 특별 메뉴였다. 엄마가 점심을 챙기는 동안 주영이는 1503호 아주머니가 아파트 복도에 쌀을 널어 말리는 것을 구경했다. 그때 박진철이 외출했다 들어오면서 주영이를 보고는 말을 건넸다.

    “누구네 집 아기예요? 참 예쁘게 생겼네요.”

    점심을 먹은 후 주영이는 1502호 아주머니 손자의 자전거를 빌려 타고 아파트 복도를 왔다갔다했다. 오후 2시가 좀 넘었을 무렵 엄마는 집 안에서 주영이를 몇 번 불렀지만 대답이 없어 밖으로 나왔다. 엘리베이터 앞엔 주영이가 타고 놀던 자전거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잠깐 사이에 애가 없어졌어요. 자전거 타고 복도를 왔다갔다하는 소리를 저도 집안에서 듣고 있었는데. 저랑 보살님(주영이 엄마), 보살님 댁에 계시던 학사님(B사찰에 기거하며 대학에 다니는 이모씨), 1507호 할머니가 모두 애를 찾으러 아파트 여기저기를 헤집고 다녔어요. 주영이를 찾으러 다닌지 30분쯤 지났을 때 그 사람 집에도 가봤죠.”

    1503호에 사는 김모씨의 말이다. 김씨는 엘리베이터를 혼자 탈 줄 모르는 주영이가 15층 어디엔가 있을 것으로 여기고 1501호에서부터 1510호까지 벨을 눌러 혹시 주영이가 있는지를 확인했다. 오후 3시경 1508호 박진철 집의 현관문을 두들겼더니 잠시 후 박진철이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냐고 묻길래 ‘애가 없어졌는데, 혹시 봤냐’고 했죠. 그랬더니 ‘애가 없어졌어요? 나는 못 봤는데…’ 하더라고요. 현관문 앞에서 집 안을 흘끔 들여다봤지만, 주영이가 안 보이길래 그냥 돌아섰죠.”

    경찰이 출동해 주변 탐문을 하고 주영이 엄마와 주민들이 우왕좌왕하던 오후 5시경 박진철은 복도로 나와 주민들에게 “아이를 찾았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해질 무렵, 박진철은 술에 취한 채 아파트를 나섰다. 경비원 김모씨는 “그날 저녁 박진철이 말도 못하게 술에 취한 상태로 경비실 앞 계단에 주저앉아 있었다. 파출소에서 경찰이 와서 박진철을 타이르며 실랑이를 벌이다가 그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로 올라갔다”고 회상했다.

    엄마가 신기지 않은 살색 스타킹

    “으악, 맞어. 주영이가 맞어!”

    7월27일 오전 10시경. 1508호 창문을 깨고 안으로 들어갔던 아파트 주민 이모씨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파출소 경찰이 “수색영장이 없어서 안 된다”고 말렸지만, 1508호에서 나는 악취를 참다 못한 주민들이 이씨에게 1508호에 들어가 봐달라고 부탁했던 것. 이씨의 말이다.

    “파출소 경찰과 관리사무소 직원, 그리고 주민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제가 창문을 깼습니다. 썩은 냄새가 확 퍼지더라고요. 끔찍했습니다. 보살님이 행여라도 맨발로 흙 밟을까 애지중지하며 곱게 키운 아이인데, 그렇게 저 세상으로 가다니….”

    주영이는 안방에서 베개를 베고 누운 채 숨져 있었다. 빨간색 치마에 흰색 저고리를 입고 양말을 신었는데, 주영이의 다리에는 엄마가 신기지 않은 살색 스타킹이 약간 흘러내린 채 신겨져 있었다. 양말과 머리띠는 방안에 놓여 있었고, 주영이가 신었던 노란색 슬리퍼는 화장실에서 발견됐다.

    부검 결과 주영이는 7월16일 오후 2시경 사망한 것으로 추정됐다. 점심 때 먹은 삼계탕이 거의 소화되지 않은 채 위 속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부패 정도가 심한 데다 별다른 외상이 발견되지 않자 경찰은 질식에 의한 사망으로 잠정 결론을 내렸다.

    8월6일 오전 B사찰을 찾았을 때 주영이 엄마 김모(66)씨는 막 주영이의 제사를 마친 뒤였다. 절에서는 49제 때까지 매주 제사를 지낸다. 이날 제사상에는 주영이가 평소 좋아했던 초콜릿과 과일이 올랐다. 김씨는 “49제 때까지 절에서 주영이에게 사죄하기로 했다”며 눈물을 훔쳤다.

    김씨는 주영이의 친엄마가 아니다. 주영이는 첫돌이 지난 후 부모가 이혼을 하자 이 사찰에 맡겨졌다. 독실한 불자이자 주지스님의 친구인 김씨는 주지스님과 함께 주영이를 애지중지 길렀다. 넉넉치 않은 절 살림이었지만, 주영이가 갖고 싶어하는 장난감, 먹고 싶어하는 음식을 가리지 않고 해주었다. 주영이는 태어날 때부터 사시였는데, 주지스님은 주영이를 데리고 침으로 사시를 고친다는 침의(鍼醫)를 찾아 비행기를 타고 부산까지 서너 차례 다녀왔을 정도다.

    주영이는 천성이 밝고 정이 많은 아이였다. 불자들이 절을 찾는 날이면 신이 나서 겅중겅중 뛰어다녔고, 제 손으로 음식을 싸서 불자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그런 주영이가 네 살 되던 해, 김씨는 주영이의 말 한 마디에 모녀 인연을 맺었다.

    “주리(김씨가 키우는 강아지 이름) 할머니, 나는 엄마가 없으니까 할머니를 엄마라고 할래.”

    탈북, 송환, 재탈북

    경찰은 박진철을 검거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어려운 점이 많다. 박진철이 혈혈단신 탈북한 까닭에 남한에 친척이나 특별한 연고지가 없는 데다, 그와 친하게 지낸다는 동료 탈북자가 단 한 명도 나타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탈북자 교육기관인 하나원 동기생들은 이구동성으로 “박진철은 혼자 행동하기를 좋아하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다”고 했다는 것.

    박진철과 친분이 있던 유일한 사람은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탈북자 이모씨다. 경찰에 따르면 이씨와 박진철은 호형호제(呼兄呼弟)하는 사이로, 박진철이 드물게 마음을 터놓고 지낸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나 지난 6월, 박진철이 이씨에게 칼을 휘두르기까지 하며 대판 싸운 후 둘 사이는 틀어졌다. 경찰에 따르면 이씨가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있는 박진철에게 ‘자리를 좀 잡으라’고 충고하자 ‘당신이 무슨 상관이냐’며 덤벼들었다는 것.

    이씨는 이 일을 매우 괘씸하게 여겨 박진철을 경찰에 신고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씨는 기자와의 전화통화를 거부했고, 이씨의 부인은 “우리는 박진철이라는 이름 석 자밖에 모른다. 같이 밥을 먹은 적도, 이야기를 나눈 적도 없다”고 잘라 말했다.

    박진철은 1975년 함경도에서 태어났으며, 지난해 4월 한국에 들어왔다. 3개월간 하나원에서 교육을 받은 후 7월9일 원주로 내려와 명륜동 임대아파트에 자리를 잡고 남한생활을 시작했다. 북한에서는 약 7년간 군 복무를 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는 술에 취하면 “나는 북한 인민군 하전사 출신이다. 군대에 있을 때 머리를 심하게 맞아 수술을 했다”고 말하곤 했다.

    박진철은 탈북과 북한 송환을 반복하면서 서너 차례 탈북을 시도했고, 1년 정도 중국에 머물다 한국으로 오게 됐다고 한다. 그런 그가 남한 사회에 자리잡은 지 1년 만에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된 것이다.

    경찰이 사라진 주영이를 단순 미아로 간주하고 있는 사이, 박진철이 아파트 단지에 다시 모습을 나타낸 것을 여러 주민들이 목격했다. 주민들에 따르면 박진철은 주영이가 숨진 날로부터 2∼3일 후인 18일 혹은 19일 오후에 아파트로 돌아왔다. 몇몇 주민들은 박진철이 아파트 입구의 편의점 탁자에서 라면과 소주를 먹는 모습을 목격했다.

    주영이 엄마 김씨는 한 불자로부터 주영이를 찾는 전단지를 받기로 해 1층으로 내려갔다가, 술에 취해 고꾸라져 있는 박진철을 봤다. 김씨는 “전단지를 받고 집에 들어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박진철이 15층 복도에서 마구 소리지르는 것을 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날 이후 박진철을 봤다는 주민은 아무도 없다.

    이후 박진철은 원주에서 한 시간 가량 떨어진 충북 제천으로 건너가 두 개의 사건을 저질렀다.

    7월20일 오전, 그는 제천 시내에 있는 한 미용실에 들어가 자신을 조선족이라고 소개하고 “가족과 떨어져 혼자 한국에 왔는데 일자리를 좀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미용실 여주인은 그를 측은하게 여겨 여러 군데 전화를 해 일자리를 알아봐주고 점심도 사줬다. 여주인의 환심을 산 박진철은 “사실 나는 탈북자”라고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박진철은 이 미용실에서 짧은 스포츠형 머리를 오렌지색으로 염색했다.

    그러나 미용실을 나가기 직전, 박진철은 메고 있던 노트북 가방에서 23cm짜리 과도를 꺼내더니 여주인에게 “여기 누워!”라고 위협했다. 박진철이 미용실 문을 잠그기 위해 잠깐 눈을 뗀 사이 여주인은 뒷문으로 도망쳤고, 그는 가방을 놔둔 채 그대로 달아났다.

    이틀 후인 22일 오후 6시경. 제천경찰서에는 여중생 강간치상사건이 접수됐다. 이날 정오경 시내로 가려고 정류소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여중생이 과도로 위협하는 사내에게 끌려가 인근 옥수수밭에서 두 차례 강간을 당하고 6시간 동안 붙들려 있었던 것. 사내는 오후 5시30분경 여학생의 가방끈을 잘라 손발을 묶은 후 달아났다. 경찰이 박진철의 사진을 여학생에게 보여주자 “이 사람이 분명하다”고 했다.

    제천서 형사들은 22일 밤부터 사흘간 원주 명륜동 아파트에 잠복했다. 이때 형사들은 박진철과 같은 층에 사는 여자아이가 없어졌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여자아이와 박진철을 연관지어 생각하지는 않았다. 제천서 형사 김모씨는 “1507호 베란다를 통해 박진철의 집에 들어갈까 했으나, 베란다 창문이 잠긴 데다 수색영장도 없어서 그렇게 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후회스럽다”고 했다.

    경찰은 제천에서 일어난 사건들로 미루어 박진철이 주영이를 성폭행 대상으로 삼기 위해 납치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경찰에 따르면 박진철은 지난 5월, 나흘간 일한 적이 있는 횟집에서 여주인에게 스킨십을 유도하는 등의 행동을 보였다.

    횟집 주인 이모씨에 따르면 박진철은 이씨의 아내나 처제 옆을 지나칠 때마다 의도적으로 자기 몸을 갖다대는가 하면, 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주워주겠다며 달려와 뒤에서 껴안기도 했다. 이씨는 “박진철이 횟집을 그만둔 후 아내와 처제로부터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박진철의 통화기록을 조사하던 경찰은 그가 4∼5월에 한 매춘부에게 10여 차례 전화한 사실을 알아냈다. 매춘부 유모씨는 “박진철이 두 번 찾아온 적이 있고, 명함을 가져가더니 종종 전화를 걸어 ‘사귀고 싶다’는 등의 말을 했다”고 진술했다.

    “죽음 각오한 정신력으로 살아남겠다”

    박진철의 소재를 추적하던 제천경찰서 형사들은 강원도 평창에 있는 한 레미콘 회사에서 그의 노트를 발견했다. B5사이즈의 스프링노트에 10장 정도 글이 쓰여 있었다. 내용은 일기라기보다는 새해를 맞이한 각오와 다짐, 미래에 대한 설계 등에 가까웠다.

    “죽음을 각오하여 이 땅을 밟은 정신력으로 살아남아 남한 정착생활에서 성공할 뿐 아니라, 10년 후 나의 사업에서도 성공한다. 2006년부터 매해 1000만원씩 저금하여 10년 후에는 1억 이상 예금 통장에 저금한다. …다가오는 2003년을 어떻게 맞이하여 보낼 것인가? 이때까지 살아온 관념과 사고방식을 모두 털어버리고 새로운 시각에서 새 출발을 시도하는 게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모든 것을 뛰어넘어 당당하게 걸어가는 모습을 보일 것이다. …인간은 성급했기 때문에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고, 게으르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지상낙원에 가지 못한다는 것을 항상 생각하여 참고 나아가야 한다. …1분 1초를 귀중하게 아껴 적극적으로 자기인격과 능력을 개발하는 데 이용해야겠다….”

    박진철은 2004∼2005년까지 대학에 진학해 기술을 배우려는 계획도 세운 것으로 보인다. 그는 “대학교에 입학하면 교육비가 30만원씩 나올 것이다. 이중 11만원을 잘라내 저금하여 목표한 돈을 모은다”며 앞으로 몇 년간의 저축계획까지 짜뒀다.

    그러나 박진철의 남한사회 적응은 순탄치 않았던 듯하다. 경찰에 의하면 그는 한 직장에 발을 붙이지 못했다. 2∼3일 혹은 길어야 일주일 정도 일을 한 후 사소한 이유로 사장과 다투고 그만두거나, 아무 말 없이 출근하지 않기도 했다. 횟집 주인 이씨는 박진철이 출근한 지 나흘째 되던 날 있었던 일을 들려줬다.

    “오전 8시쯤 내 휴대전화로 전화를 했어요. 뜬금 없이 ‘오늘 출근해도 되느냐’고 묻길래 ‘당연히 출근해야지 무슨 소리냐’고 되물었죠. 그런데 수신상태가 안 좋아서 전화가 자꾸 끊겼어요. 대여섯 번 다시 전화를 했는데, ‘사장님, 왜 자꾸 전화를 끊는 거예요? 저 무시하는 거예요?’라며 버럭 화를 내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우리 아파트가 산 밑에 있어 통화권 이탈이 자주 나온다’고 했지만 못 알아듣는 것 같았어요. 아마 ‘통화권 이탈’이란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나봐요. 그러더니 제가 가게에 도착하자마자 ‘그만두겠습니다’ 하고는 일당을 챙겨 나가버렸어요.”

    의문의 원주 어린이 유괴살해사건

    숨진 지 열하루 만에 발견된 아이는 여섯 번째 생일날 장례식을 치렀다.

    박진철은 출근 첫날부터 손님상에 내가는 음식 순서를 메모하는 등 의욕을 보였다고 한다. 이씨에게는 “회 뜨는 기술을 배워 가게를 차리고 싶다”고도 했다. 그러나 설거지할 때 주방세제를 사용하지 않아 이씨에게 핀잔을 들었다. 박진철은 “한번도 세제를 사용해본 적이 없다”며 당황해했다고 한다. 하루는 두세 시간 늦게 출근을 하더니, 점심을 차리기 시작하자 혼자 쓱 나갔다가 한 시간쯤 후에 돌아왔다.

    “‘늦게 출근한 게 미안해서 혼자 밥 먹고 왔다’고 하더라고요. 뻔히 자기 눈으로 밥 차리는 걸 보고도 말입니다. 여하튼 이해가 잘 가지 않는 행동을 종종 했어요. 그리고 술을 참 좋아하더군요. 회를 안주 삼아 함께 술을 마신 적이 있는데, ‘탈북할 때 고생 많이 했다’고 했어요.”

    주영이가 사라진 다음날인 17일과 18일, 박진철이 이틀 동안 일한 원주시 중앙동의 한 떡집 직원은 “첫날은 면접이 끝나고 돌아가라고 했는 데도 ‘일하는 걸 배우고 싶다’며 서너 시간 일을 거들었다. 그런데 이튿날엔 일에 집중하지 않고 자꾸 들락날락했다. 새벽 5시에 출근하는데, 소주 냄새가 심하게 났다”고 했다.

    경찰 관계자는 “박진철이 다니다 그만둔 직장이 강원도에서만 스무 군데가 넘는다”고 말했다. 주민들은 박진철이 늘 생활정보지를 들고 다녔다고 했다. 같은 동에 사는 한 주민은 “박진철에게 ‘무슨 책을 그렇게 많이 끼고 다니냐’고 물었더니 ‘시험 쳐서 취직하려 한다’는 대답을 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박진철은 노트에 써놓은 계획대로 살진 못했다. 제천 미용실에 두고 간 가방에서는 두 개의 통장이 나왔는데, 정부에서 정착금이 입금되는 대로 돈을 빼내 쓴 듯하다. 저축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통장 잔액은 몇 만원도 채 되지 않았다.

    아파트 주민들은 박진철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던 듯하다. 그가 종종 술을 마시고 아파트 단지 안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다녔기 때문이다. 특히 지난 6월 탈북자 이씨와 소동을 벌인 뒤로 주민들은 그를 ‘요주의 인물’로 간주했다. 관리사무소의 한 직원은 “처음 아파트에 입주했을 때는 순박한 청년 같아 보였다. 하지만 점점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직장도 잡지 못해 좌절한 듯했다. 올해 들어서는 술 취한 모습을 많이 보였다”고 말했다.

    젊은 탈북자들의 방황

    현재 한국에 살고 있는 탈북자는 지난 6월말 기준으로 3728명이고, 이 가운데 사망자와 이민자를 뺀 실 거주인원은 3479명이다. 탈북자는 1998년 이후 급격히 늘었는데, 1998년 72명, 1999년 148명, 2000년 312명, 2001년 583명으로 가파르게 증가했다. 그리고 지난해에는 2001년의 두 배에 가까운 1141명이 한국에 들어왔다.

    탈북자 중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연령대는 20대와 30대. 지난해 기준으로 각각 29.2%, 32.3%였다. 즉 전체 탈북자의 60% 이상이 20∼30대인 것이다. 따라서 사회활동이 왕성한 이들 20∼30대 탈북자들이 한국 사회에 잘 동화하느냐가 탈북자 문제의 핵심이다.

    그러나 20∼30대 탈북자는 한국 사회에 적응하는 데 있어 다른 연령대보다 더 큰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 세브란스병원 정신과 전우택 과장은 “40∼50대들은 새로운 것을 배우겠다는 의욕이 그리 크지 않고, 10대들은 한국 사회에 적응하는 데 별다른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20∼30대들은 포기하기에는 너무 젊고, 새로운 것을 배우고 적응하기에는 한국 사회의 장벽이 높다”고 설명한다.

    전우택 과장은 1997년 탈북자 적응에 관한 논문(‘탈북자들의 주요 사회배경에 따른 적응과 자아정체성에 관한 연구’)을 발표했는데, 이 논문에 따르면 탈북자의 학력, 북한에서 군복무 경험, 당원 여부 등은 탈북자의 정신건강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이는 남한에서의 현실적인 삶, 특히 지금 당장의 수입과 그에 대한 만족도가 탈북자의 정신건강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산대 이기영 교수(사회복지학)는 “젊을수록 한국 사회에 대해 기대를 많이 하는데, 막상 한국에 와서는 절망을 맛보게 된다”고 말한다.

    “이들은 탈북 후 중국에 머물면서 자본주의 사회를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거기에서는 생존 자체가 불안하기 때문에 사회문화적 갈등이 그다지 표출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국에 들어와 생활이 안정되면서 사회주의 체제에서 몸에 밴 생활태도와 습관, 사고방식 등이 남한 사회에서 마찰을 일으키면서 문제가 되는 거죠. 남한 사람들이 내게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구나, 이러다 언제 돈을 모을 수 있겠는가, 언제 제대로 정착할 수 있겠는가 하는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허허 들판으로 나온 송아지’

    만약 박진철이 주영이를 살해한 장본인이라면, 이는 두 번째 탈북자 살인사건이 된다. 첫 번째 사건은 지난 4월 서울 거여동에서 일어났다. 탈북자 윤모씨가 동거녀였던 박모씨와 박씨의 언니, 그리고 박씨의 남자친구 등 세 명을 살해한 후 태국으로 달아난 것. 현장에서 “박씨와 남자친구의 관계를 더 이상 못 보겠다. 박씨 때문에 망쳤다”란 윤씨의 메모가 발견된 점으로 미루어 윤씨는 개인적인 치정 혹은 원한 관계 때문에 살인을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탈북자가 저지른 범죄는 탈북자를 범죄자 집단의 한 카테고리로 묶을 만큼 많이 발생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탈북자와 관련된 어두운 뉴스가 종종 보도되는 것을 보면 이들이 한국 사회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할 경우 쉽게 범죄의 나락에 빠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지난 7월 중국에서 들여온 마약을 국내에 유통시킨 혐의로 구속된 탈북자 박모씨는 한국에 온 후 유흥업소 등을 전전하다 정착금을 날리고 마약범죄조직에 가담하게 된 경우다.

    박진철은 7월23일 자신의 휴대전화로 자신의 휴대전화에 12번 전화를 걸어 ‘이루어질 수 없는 통화’를 시도한 뒤 더 이상 휴대전화를 사용하지 않고 있다. 24일경 어느 산속 암자에 나타나 하룻밤 묵어가기를 청했다가 거절당한 후 박진철의 행방은 더 이상 경찰의 수사망에 걸려들지 않았다.

    무엇이 그가 꿈꾸던 대로 남한 사회에 적응하는 것을 방해했을까. 박진철의 노트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다.

    “남한 사회는 극단적인 개인주의에 기초한 자본주의 국가이다. 코 꿰었던 송아지가 갑자기 놓여나서 푸른 들판으로 나온 격이다. 매어놓았던 송아지가 놓여나서 허허 들판으로 나오니 아주 자유스럽고 편안하여 보이지만, 그 내면세계를 보면 엄청 위험한 길을 동반하여야 하는 모험인 것이다. 때문에 냉철한 판단력과 분별력이 있어 사회를 냉정하게 받아들이고 활용해나갈 때에만 자기 인생을 공고히 다지고 이끌어 나아갈 수 있다….”

    사라진 박진철은 그저 흔해빠진 강력 범죄사건의 용의자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탈북자가 한국 사회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사회문화적 갈등으로 인해 삶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다 결국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만 것일까. 그렇다면 주영이를 죽인 이는 과연 누구일까. 박진철은 어디에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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