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7월25일 학술단체협의회 주최로 ‘정전 50주년 국제평화 학술심포지엄’이 열렸다. 이 심포지엄에는 ‘한국전쟁의 기원’ 등의 저술을 통해 한반도 문제에 대한 미국 내 진보진영의 시각을 주도해 온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교수가 참석해, 북핵 위기에 대한 미국 외교정책의 미숙함을 강하게 비판했다.
- 그 발제문을 요약·정리해 게재한다<편집자>.
그 후 58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상황은 그때와 흡사하다. 한반도 전문가인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은 지난 7월 “미국과 북한이 빠르면 올해 안에 전쟁을 벌일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우리는 이미 현 상황에 대해 통제력을 잃은 듯하다”며 “북한의 핵 프로그램은 미국 도시들을 파괴할 핵무기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도대체 어쩌다가 이러한 재난상태에 이른 것일까. 미국이 그 동안 펼친 정책에는 어떤 문제가 있었으며, 우리가 놓친 대응책은 무엇일까.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래 한반도 문제에 개입해온 미국의 외교정책은 어떻게 해서 오늘날 이렇듯 치명적인 위험상황을 낳은 것일까.
혹자는 “그 동안 미국이 한반도에 기울인 노력은 모두 실패였다”고 단언한다. 한반도는 미군이 남한을 점령한 후 분단됐고, 미국은 김일성의 지위와 그의 정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곧 이어 벌어진 한국전쟁은 수백만의 인명피해를 낳고도 한반도를 통일시키지 못했다. 이후에도 미국은 북한과 평화조약이나 협정을 맺으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다. 북한을 철저히 무시하는 정책이 50년 동안 지속된 지금, 눈앞에 남은 것은 끔찍한 전쟁의 가능성이다.
특히 최근 10년 동안 미국과 북한은 마치 고양이와 쥐처럼 위험한 외교를 벌여왔다. 북한은 핵 프로그램과 미사일 개발을 카드로 사용해 왔고, 역대 미국 대통령들은 이에 대처하는 데 실수를 거듭했다. 이 글에서 필자는 최근 5년간의 주요사건들을 검토해 위기가 심화한 과정을 분석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북미관계의 근본적인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해서다.
1994년 핵위기의 전말
1994년 6월 미국과 북한 사이에 고조된 긴장상태는 현재의 상황과 매우 유사하다. 이 무렵 윌리엄 페리 장관과 애쉬턴 카터 국방차관보는 북한 영변에 선제공격을 가하면서도 제2의 한국전쟁을 피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진지하게 검토했다. 6월 중순까지 클린턴 행정부는 전쟁준비의 첫 단계 조치를 마련한다. 주한미군 1만여 명 증원, 아파치 헬기 급파, 브래들리 장갑차 추가배치 등이 그 골자였다.
미 합동참모본부는 클린턴 대통령에게 전쟁이 발발할 경우 예상되는 인적·물적 비용을 정밀하게 보고해야 했다. 이를 위해 5월, 각 지역의 미군 사령관과 4성장군들이 워싱턴에 모였다. 게리 럭 당시 주한미군 사령관은 전쟁이 일어날 경우 미군은 8만~10만, 한국군은 수십만 명이 사망할 것으로 추산했다. 더욱이 북한이 남한을 공격할 경우 민간인 사망자 수는 걷잡을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럭 사령관은 전쟁비용이 최소 5억달러에서 최대 1조달러에 이를 것으로 분석했다(걸프전에 소요된 비용은 600억달러였다).
분명한 것은 당시 클린턴 대통령과 백악관 참모들, 김정일 위원장과 평양의 지도부 누구도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평양은 위기를 벗어나는 동시에 미국인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드는 고도의 외교술을 발휘했다. 이미 수년 전 평양에 방문해달라는 초대를 받은 바 있던 카터 전 대통령이 그 수단이었다. 백악관으로부터 위기가 얼마나 심각한지 전해들은 카터 전 대통령은 1994년 6월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을 만났다. 이 장면을 중계한 CNN의 보도가 전세계에 타전되자 북미간의 위기는 성공적으로 해결됐다.
그 해 10월 맺어진 기본합의(이하 제네바합의)를 통해 북한은 NPT(핵확산금지조약)에 따라 흑연원자로를 동결하기로 결정했다. 북한은 이를 검증하기 위한 핵사찰에 응하는 대가로 한·미·일로부터 경수로를 공급받기로 했다. 경수로 구입비용 40억달러 또한 세 나라가 장기차관 형태로 제공하기로 했다. 미국은 흑연로 폐쇄로 인한 북한의 에너지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난방용 석유도 공급하기로 했다.
1994년 6월 핵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북한을 방문한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평양 주석궁에서 김일성 주석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CNN촬영)
2조. 양측은 정치적, 경제적 관계의 완전정상화를 추구한다.
1) 합의 후 3개월 내 양측은 통신 및 금융거래에 대한 제한을 포함한 무역 및 투자제한을 완화시켜 나간다.
2) 양측은 전문가급 협의를 통해 영사 및 여타 기술적 문제가 해결된 후에 쌍방의 수도에 연락사무소를 개설한다.
3) 미국과 북한은 상호 관심사항에 대한 진전이 이루어지면 양국 관계를 대사급으로 격상시킨다.
3조. 양측은 핵이 없는 한반도 평화와 안전을 위해 함께 노력한다.
1) 미국은 북한에 대한 핵무기 불위협 또는 불사용에 관해 공식보장한다.
미국과 북한은 서로를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에 양측은 상대방이 합의조건을 이행하는지 각 단계마다 검증하기로 합의했다. 이 조약은 2003년 혹은 그 이후까지 유효한 것이었다. 경수로 기본시설이 완공되면, 북한은 보관중이던 흑연로를 해체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단에 폐기장소를 공개하게 돼 있었다.
경수로 건설과 관련해 미국은 거의 경제적 부담을 지지 않았다. 의회의 반대를 이유로 미국은 50억달러의 건설비용 중 3000만달러만을 부담했고, 나머지는 한국과 일본의 몫으로 돌아갔다. 반면 미국이 3만7000명의 주한미군을 유지하기 위해 투입하는 직간접 비용은 연간 170억~420억달러 규모. 이것만 살펴봐도 제네바합의의 긍정적인 측면은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더욱 중요한 부분은 북한의 위협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외교조치의 기반이 마련됐다는 점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극적인 대북화해정책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제네바합의라는 배경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1998년, 매우 중요했던 한 해
1998년 2월 오랫동안 반체제 인사였던 김대중씨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취임사에서 “북한에 적극적인 화해와 협력 정책을 펼칠 것”이라며 햇볕정책에 대한 구상을 밝힌 그는 평양이 미국, 일본과도 우호관계를 맺도록 유도하겠노라고 선언하기도 했다.
김대통령의 행보는 대북 화해정책을 꺼린 전임 대통령들과는 확실히 다른 것이었다. 그는 곧 북한에 대량의 식량을 지원했고 남북 기업간 사업 교류의 장벽도 제거했다. 1998년 방미 중에는 북한에 대한 경제제재를 해제할 것을 미국측에 요구하기도 했다. 김대통령은 전임 대통령들이 추구해온 독일식 ‘흡수통일’ 방안을 거부하고, 대신 점진적인 연방제 통일 방안을 지향했다. 이 시기 남북의 두 정부는 연방제에 관한 공감대를 형성해가기에 이른다.
이렇듯 김대통령의 실험이 진행된 1999년까지의 1년 동안, 평양은 변화의 흐름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미국을 바라보는 북한의 태도 또한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북한은 오랫동안 미국이 남한으로부터 손을 떼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 시기에 이르러 “국제 역학관계(특히 중국과 일본)를 조율하는 중재기능을 위해서라면, 미국이 한반도에 남는 것을 용인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무렵 미 공화당은 또 다른 포인트에 주목하게 된다. 미국의 ‘국가미사일방어체제(NMD·National Missile Defense)’를 정당화할 근거가 되어줄 이른바 ‘북한의 미사일 프로그램’이 그것이었다. 1998년 8월말, 흥분한 언론들은 일제히 “북한이 일본 상공에 장거리 미사일을 시험발사했다”고 보도했다. 마치 이 미사일이 온 일본을 초토화하기라도 한 듯 엄청난 공황상태가 도쿄를 덮쳤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 북한이 1993년 5월부터 1998년 8월까지 미사일을 발사한 일이 없다는 사실은 간단히 잊혀졌다.
‘김정일이 미사일을 발사했다’는 소식은 곧바로 도널드 럼스펠드를 자극했다. 럼스펠드는 곧 미사일 방어를 위한 태스크포스를 이끌게 됐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북한은 미사일에 장착할 수 있을 만큼 작은 핵탄두를 생산할 기술을 갖고 있지 못했다. 핵탄두 대신 화학·생물학 물질을 싣는다 해도 미국 영토에 닿을 만한 속력이나 사정거리가 나오지 않았고, 미사일이 대기에 진입할 때 발생하는 열을 막을 기술도 없었다. 미사일 발사지역은 직원들을 위한 막사 하나 없는 척박한 공간이었다.
일련의 사건을 거치면서 북한은 미국의 대북정책에 대해 다시 한번 의문을 갖기 시작한다. 한반도 전문가인 셀리그 해리슨은 “이 무렵 북한은 미국이 제네바합의를 이행하지 않으려 한다고 판단하고 인내심을 잃어버렸다”고 주장한다. 1998년 북한 외무성 장관은 해리슨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군 장성들과 원자력계 지도자들은 핵 프로그램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당신네들 (미국)이 신의를 보여주지 않으면, 결과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를 것입니다.”
한편 클린턴 행정부가 제네바합의를 이행할 수 없었던 가장 큰 요인은 이른바 ‘깅리치 혁명’ 때문이었다. 클린턴 대통령의 대북 유화정책을 줄곧 비난해 온 공화당이 1994년 선거를 통해 하원을 장악하면서 제네바합의에 대한 비난여론이 비등하게 된 것이다.
분위기가 반전되자 경수로 핵심부품을 공급하는 시기는 2005년까지 연기됐다. 더욱이 미국은 당초 약속과 달리 핵 위협을 중단하지도 않았다. 최근 ‘원자력과학자 회보’에서 공개된 자료에 따르면 1998년 미 국방부는 노스캐롤라이나의 세이머 존슨 공군기지에서 북한을 향해 장거리 핵 공격을 감행하는 모의훈련을 실시했다.
또한 1998년 10월 레이먼드 아이레스 미 해병대 중장은 “북한이 공격준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명백해지면, 미국은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선제공격을 감행하는 계획을 갖고 있다”고 연설했다. 그는 이어 “이 경우 북한이라는 나라 자체를 없애고 남한에 재편시키기 위해 미 해병대의 ‘모든 전력’이 전장에 투입될 것”이라 말했다. 이러한 발언에 대해 북한은 “우리는 그들을 모두 전멸시킬 것”이라고 격하게 반응했다.
험악해진 분위기 속에서 1998년 가을 미 국무부는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외교 정책을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검토 작업을 맡았던 윌리엄 페리와 웬디 셔먼 대북정책조정관은 1999년 가을 강석주 북한 외무성 제1부외상 등을 만나기 위해 평양을 방문했다. 강석주와 측근들은 이들의 방문에 흡족해 하는 듯 보였다. 1999년 6월 서해교전이 일어나고 20명의 북한 군인들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지만, 들끓는 분위기 속에서도 김정일은 사고 조사 후 유례없이 사과를 공표했다.
1999년 10월 페리 조정관은 한반도에 대한 외교정책을 전면 재검토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에는 상당기간 동안 남한과 북한의 공존을 가능케 만든 ‘포용정책의 정수’가 담겨 있었다. 미국은 먼저 북한에 대해 50년간 지속된 경제봉쇄를 완화하는 급진적인 정책을 폈고, 북미 외교관계의 물꼬를 텄으며, 북한에 경제적 지원도 했다. 이에 대한 대가로 북한은 제네바합의 준수노력, 미사일 실험 중지, 중동에 대한 미사일 수출 중단 등에 대해 미국과 지속적으로 대화를 나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포용정책은 살아 남았고, 한국과 미국은 대북정책에 있어 협력할 수 있었다. 이는 ‘북한은 붕괴하지 않으므로, 그들의 현 실체를 인정하고 협상에 임해야 한다’는 인식에서 나온 결과였다. 그러한 인식은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으로 열매를 맺었다. 회담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으로부터 “미군의 한국 주둔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발언을 이끌어냈다. 이런 면에서 김대중 대통령의 정책은 종전 반세기 만에 나타난 의미 있는 시도였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지속된 동북아시아의 긴장구도를 해결할 단초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치명적인 선거
남북정상회담과 대북정책에 대한 미국의 재검토는 북한과 미사일협상을 시작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이 무렵 북한은 사정거리가 500km 이상인 모든 미사일의 제조, 배치, 수출을 기꺼이 포기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외교 관계자들은 ‘(클린턴 대통령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요구를 받아들일 의사를 보여준다면) 김위원장은 미사일기술통제체제(MTCR)에 가입하는 데 동의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MTCR은 북한이 갖고 있는 모든 미사일의 사정거리를 300km 이내로 제한해 일본이 위협을 느끼지 않게 만드는 장치였다. 그 대가는 북한에 대한 10억 달러 상당의 장기 식량원조였다. 쉽게 말해 미국은 북한을 MTCR에 가입시키고 김정일과 정상회담을 갖는 대가로 연간 10억달러를 지불하게 되는 셈이었다. 부시 행정부의 한 관계자(북한에 반대하는 입장을 가진)에 따르면, 미사일을 방어하기 위해 마련되는 NMD에는 그때까지 지출한 돈만 이미 600억달러가 넘었다.
김정일에게 핵미사일은 ‘상품’이었으며 가장 좋은 외화벌이 수단이었다. 그리고 클린턴 대통령은 그 미사일을 모두 사들이길 원했다. 2000년 11월 무렵 클린턴은 평양 방문을 위한 모든 준비를 마쳤고 협상에 참여할 관계자들 또한 짐을 꾸린 상태였다. 그러나 국가원수가 중요한 헌법상의 위기가 있을 수 도 있는 시점에 나라를 비우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라는 지적에 부딪혔다.
2000년 대선이 조지 부시 후보의 승리로 마무리된 후에도, 클린턴 대통령은 여전히 북한을 방문하려는 듯했다. 필자는 2000년 12월22일 다른 학자들과 함께 서울에서 김대중 대통령을 만났다. 김대통령은 클린턴의 방북일정에 대한 백악관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었다. 며칠 후 미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필자는 클린턴이 방북일정을 취소했다는 조간신문의 헤드라인 기사를 읽었다. 차기 부시 행정부가 북한과의 협상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만약 클린턴이 방북해 평양과의 협상안에 서명했다 해도 부시는 그것을 따르지 않았을 것이다.
새 정부는 1990년대 후반 한반도에서 어떠한 진전이 있었는지 토론에 들어갔다. 김대중 대통령은 2001년 3월 부시 취임후 백악관을 찾은 첫 외국 국가원수라는 기록을 남기며 부시 신임 대통령을 만났다. 그 하루 전날 콜린 파월 국무장관은 기자들에게 “클린턴 행정부가 북한의 미사일을 봉쇄하는 방향으로 협상을 진행하려던 중이었다”고 말했다. 부시 대통령은 김대통령에게 대북강경노선을 취할 방침임을 밝혔고, 회담은 ‘외교적 재앙’으로 치달았다.
노벨평화상 수상으로 한껏 고무돼 있던 김대통령은 이 무렵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001년 4~5월경 (서울을) 답방해 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대통령은 한국으로 돌아온 후 부시와의 만남이 매우 당황스러운 일이었음을 털어놓았다. 두 번째 남북정상회담 계획과 햇볕정책은 곤경에 처했다. 평양은 갑자기 예정돼 있던 남북 장관급 회담을 무산시켰다.
부시 행정부는 과거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이 펼치던 정책을 더 선호했다. 부시 행정부의 구성원들은 2002년 한국 대선에서 과거로의 회귀가 이루어지길 간절히 바랐을 것이다. 이들이 북한과 맞서야 할지 포용정책을 택해야 할지 토론을 계속하고 있던 2002년 4월, 임동원 전 국정원장은 평양을 방문해 김대중 대통령의 최근 판단을 전달했다. 9·11 이후 미국의 세계전략이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으며, 특히 북한은 미국의 무력공격 대상에 포함될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였다. 이는 그해 9월 선포된 미국의 외교정책을 정확히 예측한 경고신호였다.
북한은 이후 몇 달 동안 왕성한 외교활동을 벌이며 대책을 강구했다. 남한과의 고위급 회담을 정비하고 끊어진 철로를 재연결하며 수출자유지역을 설립하는 등의 조치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8월에 러시아 푸틴 대통령과 회담을 가졌고, 이어 9월에는 전례 없이 일본의 고이즈미 총리가 평양을 방문하기로 했다. 일련의 과정에서 북한의 외교관계 정상화는 멀지않은 듯 보였다.
그러나 고이즈미와 김정일의 만남은 부시 행정부의 반대에 부딪혔다. 북일 회담이 발표되기 수일 전 존 볼튼 국무차관은 서울에서 “북한은 악(惡)으로 가득찬 국가”라고 비난했다. 제임스 켈리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는 9월초 도쿄를 방문해 북한이 우라늄을 농축하는 등 새로운 핵 프로그램을 보유하고 있다는 증거를 제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이즈미는 본래 계획을 그대로 추진해 나가는 등, 1945년 이후 미·일관계에서 한번도 볼 수 없었던 ‘독립적인 행보’를 보여주었다.
2002년 핵위기의 시작
그러던 2002년 10월, 다시 한번 핵위기가 불거졌다. 이후 상황은 1994년 위기 때 벌어진 일련의 사태를 그대로 재연한 것이었다. 북한은 마치 대본이라도 있는 듯 예측가능한 절차를 밟아나갔다. 차이가 있다면 이번에는 그 속도가 훨씬 빠르다는 점이었다. 북한은 1994년 핵위기 때는 1년이 넘게 걸려 취했던 조치들을 2002년 12월 단 한 달 만에 처리했다.
북한은 IAEA 사찰단의 감시를 거부하고 봉인을 뜯어냈으며, 30MW의 원자로를 열어 새로운 연료봉을 적재했다. 그들은 다시 IAEA를 ‘미국의 도구’라 비난했고, NPT 탈퇴를 선언했다. 그리고 2003년, 북한은 1994년에 그랬듯이 8000개의 폐연료봉을 재처리하겠다(혹은 했다)고 협박하고 있다.
부시 행정부가 초기 클린턴 정부의 혼란스러운 정책을 그대로 재연하고 있는 것 또한 1994년과 닮은 꼴이다. 협상불가론과 직접담판 불가피론, UN 안보리 상정방침과 중국의 거부권 행사에 대한 염려, ‘협박하는 자에게 보상을 줄 수는 없다’는 원칙론과 ‘방치하면 북한은 핵 보유국이 될 것’이라는 우려 등 갖가지 상반된 목소리가 혼란스럽게 쏟아져 나왔다.
사태 초기 미국의 새로운 대응책으로 제시됐던 ‘맞춤 봉쇄’라는 용어는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취소됐다. 2002년 12월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안보보좌관이 이 용어를 사용하자 콜린 파월 국무장관이 급히 이를 부인했던 것. 북핵 문제에 대한 워싱턴의 과도한 집착은 혼란과 방향상실로 귀결됐다. 결국 북한은 상황을 자기 의도대로 끌고 나간 셈이다.
그 사이 조지 부시 대통령이 “미국은 북한을 침입할 의도가 없다”고 거듭 말했지만 이를 ‘절대로 공격하지 않겠다’로 받아들인 사람은 많지 않았다. 국방부 강경론자들은 클린턴 시절 작성됐던 시나리오를 되살려내고 싶어했다. 영변에 ‘제한 공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이들에게는 김정일이 미국의 이라크전 준비에 방해가 된다는 사실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2002년 9월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문제를 UN 안전보장이사회와 IAEA에 제기하면서 이라크 문제는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북한도 일촉즉발의 위기에 처했다. 부시 대통령은 ‘악의 축’ 국가들에 대한 일련의 계획을 갖고 있었다. 첫 대상은 사담 후세인, 다음은 북한, 그 다음은 이란이었다.
강경책과 온건책을 오가는 혼돈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양자회담과 다자회담을 둘러싼 혼란을 봐도 그렇다. 켈리의 방북 이후 부시 행정부는 “북한과는 ‘핵 프로그램 제거’에 대해서만 대화를 할 것이며 그 형식은 다자회담이어야 한다”는 원칙을 밝힌 바 있다. 그러나 2003년 4월 부시는 입장을 바꿔 베이징에서 ‘사실상의 양자회담’을 갖는 데 동의한다.
북한이 원하는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지난 4월 베이징에서 열린 3자회담을 살펴보자. 사실상 북미 양자회담이었던 이 테이블에서, 북한은 체제인정과 원조를 보장받는 대가로 ‘핵 프로그램과 미사일 수출을 모두 포기’할 용의가 있음을 미국에 전했다. 이 또한 핵미사일 보유 포기를 대가로 최대한 좋은 조건을 얻어내려 했던 1993년 11월의 협상 내용과 그대로 닮은 꼴이다.
북한은 베이징의 협상 테이블에서 ‘대담한 제안’을 제시했지만 제임스 켈리 대표는 이를 무시했다. 파월 장관은 “미국이 북한과의 관계정상화를 위해 노력하고 기본적인 안보를 보장한다면, 북한은 핵무기와 미사일을 버릴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켈리는 기자들에게 전혀 다른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한 북한측 참석자가 자신에게 “북한은 이미 두 개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으며 부시의 대응에 따라 이를 다른 나라에 내다팔 수도 있다”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1991년 이래 북한이 핵무기를 카드로 활용하는 방식은 영리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특히 지난 베이징 회담에서는 거의 예술의 경지였다. 상대방을 혼란에 빠뜨리기 위한 허세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사실 북한은 핵무기나 핵물질을 다른 국가 혹은 테러리스트에게 팔 경우 평양도 무사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내다판 물건이 미국을 공격하는 데 쓰이기라도 하면 북한은 결국 망하게 될 거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베이징 회담에서 북한은 다시 ‘공갈 카드’를 꺼내 들었고, 여기에 말려든 켈리는 부시 행정부를 다시 한번 혼란에 빠뜨렸다. 회담 내용은 즉시 전세계로 퍼져나갔지만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구체적 계획은 전혀 없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 회담에서 북한이 보여준 ‘허세 전술’도 이미 전례가 있었다는 점이다. 클린턴 정부의 관료를 지낸 한 인사에 따르면 1993년 북미 회담에서도 북한은 핵무기 보유사실을 미국에게 슬쩍 흘린 바 있었다. 그러나 당시 미국의 협상대표들은 이 이야기를 아예 무시해버리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했다. 10년 뒤 부시 행정부의 인사들이 북한측 이야기를 언론에 유출시켰던 것과는 전혀 다른 대응이었다.
북한이 원하는 것은 사실 간단하다. 클린턴 전 대통령이 지키지 못한 1994년 10월 제네바합의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 합의에서 미국은 북한과의 관계를 정상화하는 동시에 북한을 위협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는 부시에게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 듯하다. 그에게 북한과의 외교란 ‘정말로 끔찍해 돌아보기도 싫은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뒤에는 북한과의 외교를 거부하는 공화당 사람들이 버티고 있다.
이라크에서 불법적인 전쟁을 자행했던 이 그룹은 이번에는 김정일 정권을 전복시키고 싶어한다. 9·11 이후 가장 뛰어난 탐사보도 전문기자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세이무어 허쉬는 백악관 전략회의에 참석한 한 인사가 김정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고 전했다.
“그들은 김정일의 목을 원한다. 협상이나 대화 같은 이야기에 혼란스러워 하지 말라. 백악관은 ‘계획’을 갖고 있다. 이라크 다음엔 김정일이다. 김정일은 또 다른 히틀러다.”
진정한 위험은 어디에 있는가
진행과정이 같다면 해결방법 또한 같게 마련이다. 10년 전 위기의 해결책을 살펴보면 현재의 위기 또한 답이 보인다. 북한의 핵 프로그램을 무력화하고 중장거리 미사일을 모두 ‘사들이면’ 된다. 북한체제를 인정하고 핵 공격을 하지 않겠다는 서면약속을 해주고 경제원조와 투자 등 간접적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선언하면 되는 것이다.
윌리엄 페리 전 장관은 1998년에서 2000년 사이에 클린턴 정부와 평양을 오가며 양측의 의견을 전달하고, 북한의 미사일을 모두 사들이는 계획을 추진하는 작업을 담당했다. 1998년 북한이 알루미늄 원심분리기용 알루미늄통과 우라늄 농축기술을 도입하고 있다는 정보가 보고됐지만, 페리의 외교적인 움직임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클린턴 행정부가 정권인계 과정에서 부시 행정부에게 ‘북한이 파키스탄으로부터 우라늄 농축기술을 수입하고 있다’는 정보를 전달했다는 내부관계자의 전언은 충격적이다. 부시 행정부는 ‘북한이 핵 시설 건립을 추진하는 듯하다’는 증거를 확보한 2002년 7월까지 북한문제에 관해 별다른 행보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많은 전문가들은 북한이 우라늄 농축기술 도입을 숨겨온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북미관계가 정상화되고 미사일 협상이 완료되면 해결될 수 있는 문제였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미국은 18개월 동안 북한의 우라늄 농축기술 수입에 관한 정보를 무시했다. 그러고는 2002년 10월 ‘북한의 핵 시설 건립’ 문제를 들어 강경하게 대응하기로 결심했다. 부시는 ‘해결 가능한 문제’를 ‘엄청난 위기’로 바꿔놓고 말았다.
지난 4월24일 베이징에서 열린 3자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출발하는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차관보(오른쪽)
2002년 6월 한국에서는 서해교전이 벌어졌다. 어부들이 더 많은 꽃게를 잡기 위해 벌이던 경쟁이 교전으로 발전할 만큼 남북한 사이의 긴장이 높아져 불안하기 짝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선제공격’과 ‘역 선제공격’의 순환논리는 동북아 전체를 즉각 전쟁으로 몰아넣을 수도 있다. 이른바 ‘전쟁 억제’를 위해 한반도에 배치된 무기들은 상상을 초월한다.
한국에서 근무했던 한 미군 퇴역장성의 전언에 따르면, 미군은 북한이 휴전선 인근에 배치한 1만문의 포를 제압할 수 있는 대응 무기체계를 배치했다고 한다. 이 전언이 사실이라면, 그 동안 ‘이 포대가 있는 한 남한이나 미국이 자신들을 공격하지 못할 것’이라 믿었던 평양의 군 지도부는 이제 새로운 억제책을 확보하려 할 것이다. ‘대응에 대한 맞대응, 그에 대한 새로운 맞대응’이 끊임없는 상승작용을 하는 형국이다.
북한은 미국보다 악한가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의 취임식은 5년 전 김대중 대통령의 취임식에 비해 그 분위기가 어두웠다. 북핵 위기 첨예화와 한미 관계의 악화가 그 원인이었다. 필자는 취임식 다음날 다른 미국인들과 함께 노대통령을 만났다. 세 명의 저명한 전문가가 노대통령을 앞에 두고 ‘대북 외교’ 강의에 열을 올렸다.
전직 외교관이었던 한 전문가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노대통령에게 쓴 소리를 던졌다. 미국은 ‘북한의 안보와 생존을 보장하겠다’는 노대통령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미국이 이미 북한 체제를 혐오스러운 것으로 규정했다”고 전했다. 노 대통령은 “국제 문제를 풀어갈 때, 적에게 모든 비난을 쏟아 부어 대화를 중단시키는 것이 옳은 방법은 아닌 것 같다”며 부드럽게 답했다.
부시는 이라크 점령과 남북한 관계조정이라는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떠맡게 됐다. 부시 정부가 대북외교에 있어 10년 전과 비슷한 모습을 보이자, 무력해진 미국 언론은 진지한 탐사보도 대신 한반도 위기를 풍자하는 만화를 그리는 데 만족했다. 2003년 1월13일 ‘뉴스위크’는 ‘닥터 이블(Dr. Evil)’ 김정일의 얼굴로 커버를 장식했었다.
그러나 더 크고 무서운 악(evil)은 어디에 있는가. 핵확산금지체제의 주요원리는 ‘비핵국가가 핵무기 보유국으로부터 위협을 당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미국, 영국, 소련은 1968년 비핵국가들을 NPT에 가입시키기 위해 “핵무기로 희생된 사람들을 돕겠다”고 공표한 바 있다.
1996년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는 ‘핵무기의 사용이나 위협은 ‘궁극적 악’으로 취급하겠다’고 결정했다. 핵의 사용은 자위(自偉)적인 목적일 때만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특정한 ‘자위조치’가 과연 극한적인 상황에서 이뤄졌는지, 혹은 합법적인지 비합적인지는 누가 결정할 것인가. 재판소의 결정에 따르면 북한이 핵개발을 하는 것은, 핵보유국인 미국이 북한을 협박하는 것보다 훨씬 정당해 보인다.
북한은 생존에 위협이 찾아왔음을 다시 직감하고 있다. 이 불안정한 정세 속에서 북한이 모험을 감행하기를 기대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난국을 풀어갈 유일한 방법은 김대중, 빌 클린턴, 김정일이 함께 추진해가던 예전 체제로 돌아가는 것이다. 현재 상황에서 이득을 본 사람(혹은 국가)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이 체제의 수혜자는 그저 ‘진정한 안보는 핵무기의 배치에 있다’고 믿는 강경론자들뿐이다.
북한 정권이 성립된 이래 ‘자주권’은 북한 사람들에게 생명이나 다름없었다. 자주적 주권을 지키는 일이야말로 체제를 유지하는 근간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국이 북한 영토를 ‘해방’시키려고 했을 때 결과는 참혹한 실패였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은 이번에도 자주권에 대한 북한의 집념을 무시하고 있다. 주권 존중은 국제평화유지와 관계개선의 필수조건이지만 부시는 대신 암살과 체제 교체(Regime Change)를 강행할 분위기다.
1950년 한국전쟁에서 북한을 완전히 제압하려 했던 미국의 시도는 결국 종전 이후 북한이 강력한 군사국가가 되는 결과를 낳았다. 50년이 지난 지금도 이는 여전하다. 북한이 결국 핵무기를 보유하게 되면 더 이상 국제사회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진다. 과연 이는 누구의 탓일까. 북한이 국제사회의 문제아였던 것은 지난 반세기 동안 변함이 없었다. 상황이 달라진 것은 부시 대통령이라는 새 골칫거리가 등장한 이후였다. 이쯤 되면 북한이 보유하게 될 핵무기를 ‘부시의 핵폭탄’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듯하다.
과연 미국은 북한을 굴복시킬 수 있을 것인가. 압박과 위기감이 계속되면 북한은 과연 무릎을 꿇을까. 핵 위기가 첨예해지자 북한 대변인은 “우리는 미국과 어떤 관계도 없이 지금껏 잘 살아왔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며 “북한은 이런 상황에 항상 적응해왔다”고 말했다. 아홉 번에 걸쳐 평양을 방문한 바 있는 에슨 조던 CNN회장은 1999년 하버드대에서 열린 관련강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북한 사람들이 기아에 허덕이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면 여러분은 북한이 살아남을 수 없으리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확신한다. 수세기 동안 북한은 자기들 방식대로 어려움을 헤쳐왔다. 미국, 혹은 다른 어떤 국가도 북한 체제의 붕괴를 강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필자 또한 에슨 회장의 생각에 동의한다. 김일성과 그의 동료들은 1930년대 만주에서 일본군과 생사를 건 게릴라전을 벌이며 성장했다. 1948년 이후 50년 동안 북한 체제를 지배해온 것은 바로 그들이었다. 미국 관료들은 이런 북한 체제의 기본적인 특성을 이해하지 못한다. 적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벌인 전쟁에서 미국은 늘 많은 국민의 목숨을 희생해야 했다.
부시는 북한을 모른다
북한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단순히 김일성과 김정일을 분석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뒤에는 기나긴 세월동안 외부세계와의 대립을 숙명처럼 체화해 온 사람들이 있다. 북한의 아주 평범한 시민이었던 주도일과 이오송을 예로 들어보자. 아마 미국 정부의 누구도 이들을 알지 못할 것이다.
주도일은 항일기간 동안 만주에서 세 아들을 잃었고, 그의 어머니는 굶주려 죽었다. 이오송은 전쟁에서 아버지와 두 누이를 잃었다. 오늘날 북한의 지도부를 구성하고 있는 것은 주도일, 이오송 같은 이들의 자손이다. 가혹한 삶을 견뎌내고 살아온 사람들은 대개 만만찮은 상대다. 필자는 결국 이런 사람들이 조지 부시의 생사를 결정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페리 장관이 지적하듯 북한은 그리 간단히 사라질 나라가 아니다.
한반도의 평화는 ‘고립 없는 봉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는 1971~72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중국과 수교를 시작할 무렵 채택했던 정책이었다. 미국과 남한은 북한과 교류협력을 하고, 북한이 고립으로부터 벗어나도록 유도해야 한다. 동시에 ‘북한의 안전 보장’에 대해 확신을 심어주어야 한다.
다시 반세기 전으로 시계바늘을 돌려보면 부시 대통령이 전임자들의 경험에서 얻어야 할 교훈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1950년 늦여름 트루먼 대통령은 북한을 단순히 봉쇄시키는 대신 완전히 ‘제압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러나 그 결과 막강한 전력을 가진 중국군과 전투를 벌여야 했다. 전쟁 전반기에 미국은 서울을 수복하며 엄청난 기쁨을 누렸지만, 북한지역 점령을 위해 벌어진 후반기 전투에서는 남북전쟁 당시의 ‘불런 전투’ 이래 최악의 패배를 맛보았다. 이와 함께 트루먼 행정부도 파멸했다.
조지 부시 대통령이 북한을 잘 아는 전문가들, 학자들, 정책 결정자들의 충고를 무시한 채 계속 북한과의 대치상태를 이어간다면, 트루먼처럼 그에게도 쓰디쓴 실패가 찾아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