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9월호

중국은 왜 고구려사를 삼키려 하는가

한국의 역사 主權에 대한 중국의 심각한 도전

  • 글: 이정훈 동아일보 신동아 차장 hoon@donga.com

    입력2003-08-22 13:25: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김정일 정권 붕괴시 옌볜 조선족자치주의 동요 막으려는 심모원려
    • “옌볜의 지식인 사회는 ‘술렁’, 그러나 한국의 학계와 정부는 ‘조용’”
    • 한국의 북방사 연구 저작물 분석하는 중국의 역사 연구기관들
    • 고구려를 중국 변방 정권으로 자리매김하려는 ‘東北工程’ 프로젝트
    • 日本, 발해는 중국사로 고구려사는 한국과 중국사 양쪽으로 분류
    중국은 왜 고구려사를 삼키려 하는가

    ‘고구려사는 중국사의 일부’라는 내용의 시론을 담고 있는 광명일보 인터넷판과 ‘동북공정’ 프로젝트를 소개하고 있는 중국변강사지연구 중심의 사이트

    지난해 초 기자는 교토(京都)에 있는 일본 국립박물관을 찾아갔다가 깜짝 놀랐다. 교토 박물관 벽에 걸려 있는 동북아시아 연표에 ‘한국 역사 속에 포함돼 있는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던’ 고구려사가 한국과 중국 역사 양쪽으로 분류돼 있고, 발해는 아예 중국사 쪽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인접 국가끼리는 영토와 역사 문제를 놓고 다투게 마련이다. 한국은 일본과 독도 영유권 문제로 다투고 있으며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시비를 놓고 외교 마찰을 빚기까지 했다. 그러나 일본은 한국과 중국의 역사 문제에 관해서는 ‘제3자’이다. 더구나 일본은 중국과 경쟁관계에 있는 데도 고구려사를 한국사와 중국사 양쪽으로 나눠 놓았고 발해사를 중국사로 분류해놓았다. 언제부터 일본이 ‘친중국’이 되었나?

    난생 처음 이러한 자료를 접하고 나자 상당히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아무튼 그 후 기자는 한국의 관련학자나 고위인사들을 만날 때마다 이 이야기를 꺼냈다. ‘어찌하면 좋으리까.’

    이제야 부활하는 北方史

    해군은 KDX로 나가는 신형 구축함을 건조하며 고구려의 위인 이름을 붙였다. KDX-Ⅰ 제1번함은 ‘광개토대왕함’, 제2번함은 ‘을지문덕함’, 제3번함은 ‘양만춘함’이다. 기자는 해군이 차후 건조할 함정에 발해 창시자인 대조영(大祚榮)의 이름을 붙일 계획이 없다는 것을 알고, 해군 관계자를 만날 때마다 “새로 짓는 함정 중 한 척에는 반드시 대조영이란 이름을 붙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이 먹혀든 것일까. 아무튼 해군은 KDX-Ⅱ를 건조하면서 애초 계획을 바꿔 현재 건조하고 있는 제3번함을 ‘대조영함’으로 부르기로 결정했다. 이미 건조된 KDX-Ⅱ 제1번함과 2번함은 ‘충무공 이순신함’과 ‘문무대왕함’이다. 제4번함은 ‘왕건함’, 제5번함은 ‘강감찬함’, 제6번함은 ‘최영함’으로 이름 지을 예정이다. 한반도에서 활약한 영웅의 이름만 붙이려던 애초의 계획을 바꿔 만주벌판을 누빈 호걸 이름을 넣기로 한 것이다.

    한편 육군은 지난 2000년 ‘천하제일군단’으로 불리던 제1군단의 별명을 ‘광개토군단’으로 바꾸었다. 이로써 우리는 해군의 ‘광개토대왕함’과 ‘대조영함’, 그리고 육군의 ‘광개토군단’을 갖게 되었다.

    사실 한국이 한민족 북방사에 눈을 돌린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그 이전까지 고조선에서 고구려와 발해로 이어지는 한민족 북방사에 대한 연구는 오히려 북한이 주도했다.

    이는 김일성(金日成)이 정권의 정통성을 고조선과 고구려에서 찾으려 했고 이에 대응해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에서 남북통일의 기백을 이으려 했기 때문이다. 1994년 10월11일 북한이 식량난과 경제난이 심각한 가운데에도 단군릉을 완공한 것은, 그들의 정통성을 한민족 북방사에서 찾으려는 노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2002년에 열린 한·일 월드컵은 한국에서 한민족 북방사를 극적으로 부활시킨 일대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온 나라를 “대-한민국”이라는 함성으로 뒤덮은 붉은악마가 중국 신화에서 ‘전쟁의 신’이자 ‘군신(軍神)’으로 나오는 동방의 지도자 치우천왕(蚩尤天王)을 자신들의 상징물로 들고 나왔기 때문이다.

    사학계에서 정식으로 인정하는 학설은 아니지만 ‘한단고기(桓檀古記)’ 등에 따르면 한민족사는 환인이 다스리는 환국에서 환웅이 건국했다는 배달국으로, 그리고 단군이 세운 고조선으로 이어진다. 치우는 배달국의 14대 천왕으로 매우 용맹스러웠으며 중국인의 조상인 황제(黃帝)와 많은 전쟁을 치러 그들에게 공포감을 심어줬다고 한다. 그러나 치우는 황제와의 마지막 싸움에서 패하여 죽었다. 중국 민족은 이러한 치우를 군신으로 받아들여, 한(漢) 고조 유방(劉邦)은 전쟁에 나갈 때마다 치우천왕의 사당에 제를 올렸다고 한다.

    이러한 치우의 등장은 한국 민중이 갖고 있는 ‘대륙과 백두산에 대한 그리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한민족 북방사를 보다 분명히 규명하려면 철저한 학문적 연구가 뒤따라야 한다. 화약처럼 폭발하는 민중의 정서가 아니라 꼼꼼함과 인내로 상징되는 정치한 연구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한국이 중국과 수교한 것이 불과 11년 전이고 아직도 남북이 분단돼 있다는 현실은, 한민족 북방사를 연구할 충분한 인원과 자료를 확보하는 데 있어 제약 요인이 되고 있다. 그러는 사이 일본은 고구려사를 중국과 한국 양쪽에, 발해사는 아예 중국사에 넣어버린 것이다.

    최근 기자는 중국을 출입하는 한 사업가로부터 중국 공산당의 당보이자 당의 논리를 정확히 대변하는 것으로 정평이 난 ‘광명일보(光明日報)’에 ‘고구려는 중국 동북지역에 있던 변방민족의 왕조였다’는 내용의 글이 실렸다는 제보를 받았다. 이 사업가는 “옌볜(延邊) 조선족자치주의 지식인들은 이러한 내용 보도 이후 크게 ‘술렁’이고 있다. 그런데, 정작 한국에서는 학계와 언론계 모두 꿀 먹은 벙어리처럼 가만히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베이징(北京)에 있는 한국 언론의 특파원들은 이를 보지 못했거나, 보았더라도 별것 아니라고 무시한 것 같다. 아니면 중국 정부를 의식해 못 본 척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중국은 한국 특파원에게 6개월마다 비자를 갱신해주고 있어 중국에 불리한 기사를 쓴 특파원은 비자 만료를 이유로 언제든지 쫓아낼 수가 있다. 따라서 베이징 특파원들은 이 문제를 거론하기 어렵고 천상 한국에 있는 기자가 제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정일 정권 붕괴 이후를 대비(?)

    그는 옌볜에 있는 조선족 지식인들의 말을 인용해 이렇게 덧붙였다.

    “일제시대 만주로 나온 조선인들이 중국인과 더불어 항일 투쟁을 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항일 투쟁을 한 조선인 중의 하나가 김일성이었다. 그러나 마오쩌둥(毛澤東) 시절 조선족은 ‘조선족이 항일 투쟁에 참전했었다’는 것을 말하지 못했다. 특히 문화혁명 때는 소수민족을 탄압하는 분위기 때문에 더더욱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조선족이 ‘일제 침략기 조선인들이 중국인들과 더불어 가열찬 항일 투쟁을 벌였다’고 말하게 된 것은 덩샤오핑(鄧小平)이 집권하고 난 다음이었다. 그런데 개혁·개방이 많이 진척된 지금 중국 공산당을 대변하는 ‘광명일보’가 ‘고구려는 중국 역사의 일부분이다’라는 내용의 글을 게재한 것이다.

    추측컨대 중국은, 한국과 미국이 옌볜을 김정일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한 교두보로 이용할 것을 사전 차단하기 위해 이러한 글을 게재한 것 같다. 또 김정일 정권 붕괴 이후의 상황에 대비하고 있다는 느낌도 든다. 김정일 정권이 붕괴되고 한반도에 ‘통일’이라는 새로운 질서가 건설되면, 한반도의 4분의 1 크기(4만3547㎢)에 200만 인구를 가진 옌볜 조선족자치주가 동요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조선족자치주가 동요하면 시짱(西藏)자치구에 있는 티베트인과 신장(新疆·위구르)지구에 있는 회교도들도 술렁거릴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움직임이 커지면 중국은 5대10국(5代10國) 이후 새로운 분열기로 들어갈 수도 있다. 중국은 춘추전국시대 이후 수많은 분열을 겪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따라서 고구려는 원래 중국사의 일부였다고 미리 강조함으로써 김정일 정권 붕괴기에 있을지도 모를 조선족의 동요를 차단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 사업가의 전언과 해석이 사실인지의 여부는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중국이 한국 학자들이 수행한 고구려사 등에 대한 연구 자료를 대대적으로 수집해가는 것은 사실이다. 지난 8월6일자 ‘중앙일보’는 고구려와 발해 등 한민족 북방사를 연구해온 한국 학자들이 중국의 연구기관으로부터 ‘당신의 저작물을 중국어로 번역해도 좋겠느냐’는 연락을 받았다고 보도했다.

    이어 ‘중앙일보’는 ‘학자들은 중국 연구기관의 제의를 처음에는 좋은 뜻으로 생각했으나 곧 중국이 고구려사 등을 중국 역사에 편입시키기 위한 논리를 세우려 한다는 것을 알고 불쾌해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기사에서 실명이 거론된 한 학자는 이 보도가 사실임을 인정했다.

    중국은 왜 고구려사를 삼키려 하는가

    광명일보 인터넷판에 올라 있는 고구려사 관련 문제의 시론

    7월14일자 ‘중앙일보’는 소수민족사를 연구하는 중국 사회과학원 산하의 ‘중국변강사지연구중심(中國邊疆史地硏究中心, www.chinaborderland.com)’이 지난해 2월 ‘동북공정(東北工程)’이라는 프로젝트를 세웠다고 보도했다. 이 프로젝트는 5년간 200억위안(약 3조원)의 사업비를 들여 고구려에 대한 연구를 대대적으로 펼쳐 고구려를 중국 변방의 소수민족 정권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한다.

    ‘중앙일보’ 보도에 따르면 이 프로젝트의 계획서는 ‘중국의 동북지역은 근대 이후 전략적 요충지일 뿐만 아니라 특히 개혁 개방의 요구에 따라 이 지역에 대한 역사 연구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고 적고 있다고 한다. 이 보도를 접한 한국 학자들은, 고구려사를 중국 역사에 확실히 편입시켜 한반도 유사시 옌볜조선족자치주 등이 동요치 않게 하려는 중국측에 심모원려(深謀遠慮)라고 지적했다.

    사업가의 제보와 ‘중앙일보’ 보도를 통해 중국측에 고구려사를 흡수하기 위한 모종의 분위기가 있음을 감지한 기자는 문제의 ‘광명일보’ 기사를 찾아 나섰다. 기사는 ‘광명일보’의 인터넷판인 ‘광명망(光明網, www.gmw.com.cn)’의 ‘역사’ 부분에 6월24일자로 올라가 있었다. 기사의 제목은 ‘고구려 역사 연구의 몇 가지 문제에 대한 시론(원제 試論高句麗歷史硏究的幾個問題)’이고, 이 기사가 실린 사이트는 http://www. gmw.com.cn/gmw/gmwhomepage.nsf/documentview/2003-06-24-16-48256A22001B0C1248256D4F00003216?OpenDocument이다.

    기사의 작성자는 ‘변중(邊衆)’으로 되어 있었는데, 변중이 실존 인물인지 아니면 ‘중국 변방에 사는 민중’이라는 뜻의 가공 인물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 시론의 주제는 한마디로 ‘고구려족은 중국 변방 소수민족의 하나였으므로 고구려는 중국 역사의 일부분이다’라는 것. 이 시론은 ‘철저히’ 중국 자료에만 의존했고 중국과 고구려 관계에만 초점을 맞춰 분석하려고 한 흔적이 보인다.

    이 시론을 읽어본 한 관계자는 “이 시론은 고구려가 신라 백제와 전쟁과 외교를 통해 맺어온 관계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거론하지 않았다. 오직 중국 왕조와 고구려 사이에 있었던 관계에만 초점을 맞춰 분석했기 때문에, 이 시론을 읽어본 중국인은 ‘고구려는 한국과 전혀 상관없는 중국 역사의 일부분이구나’ 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고 본다. 바야흐로 한국은 일본의 역사 왜곡만 문제 삼던 시절에서 중국의 역사 왜곡에도 눈을 돌려야 하는 시절로 진입했다”고 말했다.

    ‘광명일보’ 시론의 억지

    이 시론은 ‘내 것은 내 것이고 네 것도 내 것’이라는 식의 궤변을 펼치고 있었다. 첫 번째로 눈에 띄는 억지는 중국과 고구려는 원래 한 나라였다면서 수나라와 당나라가 고구려와 벌인 싸움을 ‘이민족 정복전쟁’이 아닌 ‘통일전쟁’으로 묘사한 점이다. 예컨대 같은 민족인 고구려와 백제·신라가 상대를 흡수하려고 벌이는 전쟁은 ‘통일전쟁’이라고 하고 이민족을 흡수하려는 전쟁은 ‘정복전쟁’이라고 하는 게 일반적인데, 이 시론은 정복과 통일을 의도적으로 혼동시켰다.

    이 시론이 담고 있는 두 번째 억지는 왕건이 세운 고려는 고주몽이 건국한 고구려와 전혀 상관이 없다고 한 것이다. 시론은 당나라의 통일전쟁 성공으로 고구려는 다시 중국의 품 안으로 들어왔는데 한반도에서 고구려의 후손임을 주장한 왕건이 고려를 세움으로써 다시 고구려사를 뺏앗아갔다고 주장한다. 시론은 그 근거로 고구려는 중국 역사서에 ‘고려’로 나오는데 왕건이 이를 도용해 한반도에 세운 나라를 ‘고려’로 명명했다고 지적한다.

    또 고구려는 고씨가 왕위를 이어간 ‘고씨 고려’이고 왕건의 고려는 ‘왕씨 고려’로 분명히 다르다고 전제한 뒤, ‘왕씨 고려’의 고려가 ‘고씨 고려’를 이으려면 왕건은 왕씨가 아닌 고씨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왕건이 진짜로 고씨 고려를 이었다면 후손에게 십훈요(훈요십조)를 남길 때 “나는 고씨 고려의 후예다”라고 말했어야 하는데, 그같은 말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시론은 또 왕건은 “삼한 산천의 보호에 의지한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 왕씨 고려는 고구려를 잇지 않은 것이며 한 발 더 나가 왕건은 낙랑 시절에 있던 한족(漢族)의 후예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왜 국가를 왕족 관계로만 보느냐”는 문제를 일으킨다. 시론은 아마도 유(劉)씨 성으로 이어지던 한나라(前漢)가 멸망했다가 다시 세워졌을 때, 후한(後漢)의 황제가 전한과 같은 유씨였다는 중국적 특징에서 이러한 논지를 찾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국가는 왕실의 성이 같아야만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수나라의 황실은 양(楊)씨 성을 썼고 당은 이(李)씨 왕조였다. 그러나 지금 중국은 수와 당이 모두 중국의 법통을 이어온 국가라고 주장한다.

    우습게도 시론은 지금의 한국 또한 왕씨 성의 고려와 이씨 성의 조선을 이어온 나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왕건은 고구려 왕실의 피를 이은 것이 아니라 그 법통을 이었다는 의미로 고려를 건국했는데 시론은 이 점을 간과하고 있다. 3척동자도 지적할 수 있는 허점을 ‘중국 공산당의 당보’는 버젓이 내놓은 것이다.

    세 번째로 시론은 ‘명나라 황제는 이성계를 조선왕에 책봉함으로써 조선이라는 국호를 하사하였다. 조선이라는 이름 때문에 고려의 후예인 이씨 왕조는 중국인이 건국한 기자조선(箕子朝鮮)-위만조선(衛滿朝鮮)-한사군-고구려에 그 맥을 대게 되었다. 여기에 왕씨 고려가 고씨 고려를 도용해간 것이 보태짐으로써, 중국이 기자조선 이후 동북지역에서 만들어온 역사가 몽땅 한국사로 넘어가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대단히 심한 억지이다. 시론은 중국역사서에 나오는 고조선을 단 한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복생(伏生)이 편찬한 중국의 역사서인 ‘상서대전(尙書大傳)’에 보면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은(殷)을 멸망시키고 감옥에 갇힌 기자를 석방시키자 그는 이를 탐탁찮게 여겨 조선으로 달아났다. 무왕은 이 소식을 듣고 기자를 조선왕으로 봉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한서(漢書)’ 지리지 연조(燕條)에도 “은나라가 쇠하자 기자가 조선에 가서 예의와 농사·양잠·베짜기 기술을 가르쳤다”는 내용이 있다.

    ‘상서대전’과 ‘한서’의 묘사대로라면 기자가 오기 전 이미 중국 동쪽에 ‘조선’(이성계의 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고조선으로 표현한다)이 있었다는 것이 되는데, 시론은 단 한 번도 고조선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이렇게 유리한 사료만 인용하고 불리한 사료를 배제한 시론 저자의 태도는 이 시론이 특수 목적을 위해 쓰여졌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다민족 국가 유지 위한 심모원려

    ‘광명일보’ 시론에 대해 제보해준 사업가는 “이 시론은 단순히 고구려사를 중국사에 편입하기 위해 쓴 것 같지는 않다. 이 시론은 중국과 고구려는 통일전쟁을 치른 같은 국가였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지금 중국 땅에 살고 있는 조선족들에게 ‘당신들은 지금의 고구려인이요. 당신들은 중국 사람이란 말이오’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고 진단했다.

    지금의 중국은 전인구의 92%를 차지하는 한족(漢族)과 55개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다. 중국을 구성하는 대표적인 소수민족은 좡족(莊族) 만족(滿族) 후이족(回族) 먀오족(苗族) 위구르족(維吾爾族) 이족(彛族) 투자족(土家族) 멍구족(蒙古族) 등이다. 조선족은 전체 소수민족의 2.6%, 192만명으로 소수민족 중에서는 14번째로 많다. 현재 중국은 소수민족 우대 정책을 펼침으로써 소수민족의 독립 분규를 피해나가고 있다.

    이 사업가는 “소련이 경제적으로 무너졌을 때 소련 안에 들어와 있던 소수민족이 CIS 국가로 독립해 나갔다. 그후 러시아는 소련이 누렸던 초강대국 지위를 잃고 2등 국가로 추락했다. 다민족 국가인 중국은, 소련처럼 경제가 추락하고 소수민족마저 독립해 2등 국가로 전락할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중국은 소련의 전철을 밟지 않고자 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중국이 육지를 통해 국경선을 맞대고 있는 나라는 러시아 북한을 포함해 14개국인데, 이 나라들은 하나같이 중국보다 못살고 있다. 독립된 주변 국가들이 잘산다면 중국 변방에 있는 소수 민족은 ‘우리도 독립해서 잘살아보겠다’고 할 터인데, 주변국가들이 가난하니 중국은 이들을 붙잡아둘 명분을 갖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2차 북핵위기가 높아지면서 미국의 힘에 의해 한반도가 한국 중심으로 재통일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통일된 한반도가 빠른 시간 내에 지금의 한국처럼 잘살게 된다면, 중국 내의 소수민족들이 자극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 중국은 이러한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고구려가 중국 역사의 일부라는 시론을 공산당 당보에 게재한 것이다.”

    이 시론은 마지막 부분에서 그 의도를 명확히 드러낸다. 시론은 ‘고구려는 중국사의 일부이다. 학술 세계에서 따져야 할 고구려사 문제를 정치문제화 하려는 경향에 단호히 반대한다’고 적고 있다.

    지금 적잖은 조선족이 한국을 찾아와 취업하고 있다. 조선족과 한국의 만남은 한민족 북방사 복원 움직임과 맞물려 한국 사회에 ‘고구려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시론은 이러한 한국의 분위기에 반대한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한 전략가는 “옌볜 조선족자치주가 중국의 일부이고 조선족이 중국인이라는 현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따라서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에 맞서 ‘조선족은 한국인’이라는 주장을 펼친다면, 이는 한·중간에 불필요한 마찰만 일으킨다. 한국이 한반도를 재통일하려고 할 때 중국을 협조자가 아닌 반대자로 돌아서게 할 가능성만 높이는 것이다”라며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을 따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시론에 숨겨져 있는 중국의 탁월한 동화(同化·assimilation) 능력을 배워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과거 중국은 앞선 문화를 토대로 고구려족은 물론이고, 중원을 침범해 왕조를 세웠던 몽골족(元)과 여진족(淸)을 동화시켜 영토와 문화의 지평을 넓혔다. 지금은 소수민족 우대정책으로 수많은 소수민족을 껴안고 이들을 동화시켜나가고 있다. 이제 한국도 주위를 향해 동화정책을 펼쳐야 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지금 한국이 동화시켜나갈 대상은 이민족이 아니라 동일민족이다. 한국인의 피를 이어받은 한국계에는 남한에 살고 있는 한국인과 북한에 살고 있는 북한인(그리고 탈북자), 중국에 살고 있는 조선족, 구소련의 영토에 살고 있는 고려인, 미국·일본 등 자유 세계에 살고 있는 해외동포가 있다. 이러한 범(汎)한국계의 주류는 역시 남한에 살고 있는 한국인이다.

    지금 한국인과 가장 잘 융합되고 있는 것은 해외동포일 것이다. 조선족과도 비교적 융합이 잘 되고 있다. 조선족은 한국에 저임금 노동자로 진출해 큰 마찰 없이 한국인과 융화되고 있다. 구 소련권에 있던 고려인들은 세력이 작아서인지 한국과 적극적인 접촉이 없는 상태다. 그러나 고려인과 한국인은 서로에게 호감이 있어 융합에 큰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한국이 앞으로 통일의 대상으로 삼으려고 하는 북한인이다.

    한국에 들어온 탈북자 중에는 한국사회에 쉽게 동화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정부로부터 정착금을 지원받기까지 하면서도 이들 일부가 한국사회에 합류하지 못하고 불평분자가 되는 현상은 왜 생기는가.

    한국사회가 탈북자를 흡수하는 데 실패한다면, 이는 통일 후 북한인과 융합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으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한국은 경제적으로 성장했고 북방사 복권 분위기가 일고 있는 만큼, 상대적으로 소수인 한국계를 융합하기 위한 우대 정책을 펼쳐야 할 것이다. 이것이 통일 한국을 만들고 한국 역사를 지키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한국의 同化정책은 있는가

    흥미로운 것은 주요국가들이 하나같이 ‘동화’에 적극적이라는 사실이다. 지난 6월15일 영국의 ‘가디언’은 ‘군주제의 미래에 관한 위원회가 영국 왕은 더 이상 영국 교회(성공회)의 수장직(Supreme Governor of the Church of England)을 유지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결론을 내놓았다’고 보도했다.

    영국은 1534년 헨리 8세 때 수장령(首長令)을 선포해 로마교회(가톨릭)로부터 독립하며 성공회를 만들었는데 이때부터 영국 왕은 성공회의 수장을 맡아왔다. 그런데 군주제의 미래에 관한 위원회는 500년 가까이 된 이 전통을 깨뜨려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왜 이런 주장을 펼친 것일까. 이유는 ‘다양한’영국인을 포용하기 위해서다. 영국은 대항해 시대가 열린 후 세계 각지로 진출해 광대한 식민지를 개척해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되었다. 이 시기 다양한 종교를 믿는 다양한 인종이 대영제국의 깃발 아래 들어왔다. 이들 중에는 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독립해 국가를 이룬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다양한 종교를 믿는 다양한 인종이 영국의 국민으로 남았다(런던 시내에 가면 흑인과 터번을 두른 인도계 사람을 많이 볼 수 있다).

    위원회는 영국 왕은 이렇게 다양한 종교를 믿는 다양한 인종의 영국인을 대표하는 국가원수가 되어야 하므로 성공회 수장직은 내놓아야 한다는 결론을 도출한 것이다.

    위원회의 이러한 결론은 이른바 ‘잡종 우세론’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잡종 우세론은 단일 혈통보다는 다른 혈통을 흡수해 후사를 이어가는 것이 보다 뛰어난 민족을 만들 수 있다는 이론이다.

    프랑스 역시 비슷한 방향을 지향하고 있다. 프랑스 정부에서 나오는 모든 공문서에는 앞가슴을 드러낸 옷차림으로 3색의 프랑스 국기와 장총을 높이 쳐들고 있는 미모의 젊은 백인 여성이 실루엣으로 새겨져 있다. ‘마리안(Marianne)’으로 불리는 이 여성 그림은 프랑스 대혁명 이후 프랑스의 상징이 되었다.

    그런데 지난 8월초 프랑스 하원은 ‘오늘의 마리안들(Mariannes d’Aujourd’hui)’이라는 제목으로 이슬람과 흑인 여성 등을 모델로 한 마리안 사진 13장을 청사 앞에 내걸었다. 다양한 인종의 프랑스인을 포용해 동화시키겠다는 의지를 내비친 것이다.

    다민족 국가를 지향해 영토와 문화 지평을 넓혀 세계 최고에 이른 미국은 다민족이라는 국가 특성을 유지하기 위해 강력한 법률로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을 억제하고 있다.

    한 전략가는 “범한국계를 주도하는 한국인은 순수 혈통주의를 버리고 이국적인 한국계를 포용해 동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통일을 수월하게 하는 지름길이며 한국문화와 역사의 지평을 넓히는 방안이다”라고 말했다.

    한 중국 전문가는 이렇게 말했다.

    “중국이 공산당 대변지인 ‘광명일보’에 고구려사는 중국사의 일부라는 시론을 싣고 중국공산당의 미래를 제시하는 사회과학원 산하 연구소가 ‘동북공정’이라는 프로젝트를 만들었다면, 고구려가 중국의 일부라고 주장할 것은 중국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이라는 뜻이다.

    이에 대해 한국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은 학계를 중심으로 북방사 연구를 심화하고 문화적으로 포용력을 넓히는 것이다. 만약 한국이 이러한 노력에 실패한다면 치우천왕의 깃발은 태워버리고 광개토대왕함과 을지문덕함, 양만춘함, 그리고 대조영함을 침몰시키며 광개토군단을 해체하여야 할 것이다.

    바야흐로 동북아는 ‘역사전쟁’시대로 진입했다. 고구려인은 슬기롭게 대처하지 못해 나라를 잃었다. 그런데 1400여 년이 지난 지금 또 어리석게 대처한다면 우리는 고구려사마저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