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주당 내 ‘개혁신당’ 논의는 더 이상 없다.
- ‘통합신당’이냐 ‘리모델링’이냐, 두 가지 선택만 남았을 뿐이다.
- 신당추진파의 탈당 후 신당창당 강행 가능성이 남아있지만 당초 그들의 ‘희망’과는 거리가 멀다. 현재로서는 완전한 ‘불계패’다. 가장 큰 적은 내부에 있었다.
그는 이어 신당론이 불거진 4·24 재·보선 이후 중앙당과 지구당이 실시한 몇 차례의 여론조사로 화제를 옮겼다.
“바람직한 신당으로는 개혁신당의 지지도가 가장 높게 나온다. 그런데 내년 총선에서 한나라당을 이길 수 있는 당으로는 통합신당의 지지도가 가장 높게 나온다. 더구나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지지도가 추락하면서 개혁신당의 지지도도 함께 하락하고 있다. 지역구를 가진 나로서도 배지를 다는 데는 통합신당이 유리한 것 아닌가.”
그는 특히 수도권에 지역구를 두고 있는 의원들이 고민에 빠졌다고 전했다. 가장 큰 이유는 호남출신 유권자의 민심 때문이다. 수도권에서 민주당은 호남출신 유권자의 절대적 지지를 받아왔고, 따라서 수도권에서 민주당 후보는 당선 가능성이 높았다. 호남 민심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수도권 의원들의 당락을 결정짓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요즘엔 내년 총선에서 호남 유권자들이 어떤 선택을 할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는 “멀리 갈 것도 없이 16대 총선결과만 봐도 수도권에서 호남출신 유권자의 막강한 영향력을 알 수 있다”고 말을 이었다. 그는 “16대 총선만큼 치열한 선거는 일찍이 없었다. 특히 수도권에서는 2000표 이내 근소한 차로 당락이 결정된 선거구가 수두룩했다. 민주당의 표밭인 젊은층과 변함 없이 민주당을 밀어준 호남출신 유권자의 지지가 없었다면 더욱 참담한 결과가 나올 수도 있었다”고 말했다.
실제 2000표 이내에서 승부가 갈렸던 14곳의 승패를 따져보면 한나라당이 12곳에서 이겼고 민주당은 서울 용산과 인천 서구·강화을 두 곳에서만 당선자를 배출했다. 결국 16대 총선에서 민주당은 근접전을 벌인 선거구에서 패함으로써 사실상 선거 전체 판세를 그르치고 말았던 것이다. 이처럼 미세한 표차로 승패가 갈리는 수도권 정서상 호남에 기반을 둔 민주당을 버리는 이른바 탈(脫)호남 지향의 개혁신당을 만들 경우, 바람을 일으키고도 정작 당선자는 배출하지 못하는 최악의 상황도 발생할 수 있다는 게 이 의원의 현실적인 고민이었다. 그런데다 노대통령과 개혁신당파가 지금까지 민주당을 외면해온 영남 민심을 파고들었다는 분석은 나오지 않고 있다.
이 의원은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전략과 전술로 나눠 설명하면 신당의 전략은 영남에서 ‘의미 있는’ 의석을 확보하는 것이다. 전술적으로는 호남민심을 잃지 않는 것이다. 둘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이냐가 최대 관심사다. 개혁신당론이 통합신당론으로 돌아선 것은 신당이 추구하는 전략과 전술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를 고민한 결과다. 그래서 신당 추진세력의 의견은 민주당의 대다수가 참여하는 통합신당으로 모아지고 있는 것이다.”
논리빈약 빗댄 이훈평의 ‘조약돌론’
2003년 4월28일 신주류측의 신당 추진 선언으로 시작된 민주당의 신당논의가 100일을 넘겼다. 그러나 신당논의는 제자리걸음만 되풀이하고 있다. 신주류측은 100일이 넘도록 ‘개혁신당→개혁적 통합신당→국민참여 신당→분열 없는 통합신당→민주당 해체 없는 통합신당’ 등으로 명칭을 바꿔가며 한편으로는 구주류측을 압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달래는 양동작전을 펴왔으나, 구주류측은 일관되게 ‘리모델링’으로 가자며 꿈쩍도 안하고 있다. 결국 신주류측은 8월 초 ‘당 해체·인적청산·이념정당 불가’라는 3원칙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구주류측 이훈평(李訓平) 의원은 이런 현상에 대해 조약돌론을 폈다. “바닷가에 나간 아이가 예쁜 조약돌을 주었다. 아이는 그 돌을 손에 쥐고 돌아가려다 욕심을 내본다. 좀더 예쁜 돌, 그보다 더 예쁜 돌을 골라본다. 해가 저물고, 집에 돌아가야 할 무렵 아이는 정말 예쁜 조약돌 한 개를 발견했다. 그런데 그 조약돌은 맨 처음 손에 쥐었던 조약돌이었다.”
신당논의가 원점으로 회귀한 근본적인 이유는 논리의 빈약과 전략의 부재다. 왜 굳이 신당을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해 논리가 명쾌하지 않았다. 신당추진파들은 늘 민주당의 이념과 정강정책을 승계할 것이며, 인위적인 인적 청산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신당추진은 개혁을 위해서라고 한다.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개혁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으니 지금의 민주당을 리모델링해서 쓰면 되지 않느냐는 당 사수파의 주장을 반박하기가 쉽지 않다. 신당추진파들은 논리에서 절대 열세를 보임에 따라 자신들의 정치개혁 싸움을 당권 싸움으로 전락시켰다.
그렇다면 신당파의 속내는 무엇일까. 한마디로 탈호남 신당이다. 민주당을 뛰쳐나가 개혁당, 친노 및 PK세력과 함께 지금까지와는 전혀 새로운 틀의 정당을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구주류와의 결별이 그 핵심내용이다. 개혁국민정당이 이 구상을 처음 제안했고, 지금도 주장하고 있다. 신주류 강경파들도 비슷한 입장이었다. ‘과거 단절’의 의지가 선명하게 드러날수록 신당의 지지층이 넓어질 것이란 판단이었다. 한마디로 ‘코드가 맞는 사람만 개혁호(號)에 승선시키자’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속내를 밖으로 드러낼 경우 기존 지지층인 호남 민심의 이반이 두렵다. 이 때문에 호남색깔을 벗자고 하면서도 동교동계 의원들을 ‘선별적’으로 추리려 했다. 동교동계의 수장격인 한화갑(韓和甲) 전 대표를 안고 가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탈호남을 하자면서 호남 일부를 끌어안자는 논리의 모순에 봉착하게 된 것이다. 탈당까지 불사하는 정치생명을 건 도전에 나서는 세력치고는 결의가 굳건하지 못했다.
여기에 그들은 준비 안 된 상태에서 거사에 착수했다. 신당을 추진할 작정이었으면 치밀한 전략을 세워 공론화와 동시에 번개처럼 몰아붙였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금, 조직, 반대파 제압 등 모든 면에서 준비가 부족했다. 당내 기반이 별로 없는 상태에서 누구누구는 안 된다는 배제론을 펴봐야 역공의 빌미만 제공할 뿐이었다.
“신기남한테 직접 물어봐요”
구심점도 없었다. 장군 없이 전쟁을 치러봐야 결과는 패배인 것과 똑같은 논리다. 여기엔 신당논의의 주축인 재선그룹의 지나친 라이벌 의식이 한몫을 했다. 누구 하나가 조금이라도 ‘튄다’ 싶으면 곧장 내부견제가 전개됐다. 재선그룹의 선두주자이자, 개혁신당론 3인방이라는 ‘천·신·정’(천정배·신기남·정동영 의원을 이르는 말)이 참석하는 모임의 풍경을 보자.
풍경 하나. 가장 먼저 밖으로 나온 신기남(辛基南) 의원이 기자들에게 둘러 싸였다. 그는 “신당의 궁극적 목표는 개혁신당이다. 신당논의가 여의치 않을 때는 뛰쳐나가겠다”고 말했다. 뒤이어 나온 천정배(千正培) 의원은 탈당논의가 어느 정도 이뤄졌느냐는 질문에 역정부터 낸다. “나는 신기남이 아니에요. 신기남한테 직접 물어봐요.”
풍경 둘. 한참 신당논의가 이뤄지고 있는 가운데 정동영(鄭東泳) 의원이 개인일정을 이유로 먼저 자리를 떴다. 모임이 끝난 뒤 신의원은 정의원을 한껏 비꼰다. “우리끼린 개혁신당 얘기하다 지역구만 다녀오면 바뀌는 것 같고…. 자꾸만 말이 달라지니 신뢰성이 있어야지. (정의원) 옆에 있으면 이제 사진에도 안 잡히데.”
비단 세 사람뿐 아니라, 이곳저곳에서 딴 목소리들이 중구난방으로 쏟아져 나왔다. 신당추진모임 의장인 김원기(金元基) 고문이 아무리 ‘다 함께 가는 신당’이라고 해봐도 그 말은 이강철(李康哲) 대구시지부장의 ‘동승 불가 대상’ 거론에 묻혀버렸다. 노대통령이 부산 지인들에게 “단 10석을 얻더라도 개혁신당을 해야 한다”고 언급한 진의가 무엇이냐에 대해서도 김원기 고문이나 정대철(鄭大哲) 대표가 “확대재생산된 것”이라고 하면 신기남 의원이 “노대통령이 고스란히 속내를 드러낸 것”이라며 딴 목소리를 냈다.
시기를 잘못 선택한 것도 악수(惡手)였다. 신당을 만들 생각이었다면 대선 승리 직후, 늦어도 노대통령 취임에 즈음해 고삐를 죄었어야 했다. 그렇게 못할 바에는 내년 4월 총선 공천 과정에서 물갈이를 통해 환골탈태하는 모양으로 신당 효과를 거두는 게 나을 뻔했다. “기회를 놓쳤다”는 내부반성이 많지만 만시지탄(晩時之歎)일 뿐이다.
노대통령이 당정(黨政) 분리라는 이유로 신당에 의도적으로 거리를 유지한 것도 실패의 한 원인일 것이다. 몇 차례 청와대를 찾은 정대표에게 노대통령은 “신당문제는 당에서 알아서 하라”고만 말했다. 우리 정치사에서 쿠데타를 일으킨 사람이거나 3김씨 제외하곤 몇 달만에 정당다운 정당을 만든 사람은 없었다. 뚜렷한 리더도 없고, 대통령이 적극성을 보이지 않는 가운데 새로운 집권당을 만든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5월9일 부산개혁추진위원회 발족식에 참석한 신기남 의원, 조성래 위원장, 정동영 의원(앞줄 왼쪽부터)
MBC가 8월8일 일반 시민 1005명을 상대로 ARS조사를 벌인 결과 ‘바람직한 신당 방식’에 대해 응답자들은 민주당 개혁 후 외부 인사 영입(27.6%), 민주당 그대로(22.1%), 개혁신당(16.8%), 통합신당(15.5%)의 순으로 응답했다. 민주당을 사수하거나, 리모델링해 외부인사를 영입하자는 구주류측 논리가 50% 이상의 지지를 받은 것이다.
신당 논의 초반기인 5월의 ‘한겨레신문’ 조사에선 신당이 ‘민주당을 해체하고 개혁당을 포함한 당내외 인사가 헤쳐 모여 만든’ 개혁신당 형태가 될 경우 39.3%의 지지율을 보였고, ‘민주당을 중심으로 외부인사를 영입해 개조한’ 통합신당은 34.3%의 지지율을 보였다. 그러나 어떤 형태가 되든 기존 민주당 지지율 35.9%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일반 국민을 상대로 한 이 두 여론조사만 보면 100일 전과 비해 별로 달라진 것이 없고, 오히려 개혁신당에 대한 여론은 악화됐다. 100여 일 동안 신·구주류가 지지고 볶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신당론이 각종 매스컴을 뜨겁게 달구었건만 국민들의 관심은 되레 시들해진 것이다.
민주당 대의원들은 단연 리모델링을 선호했다. 주간 ‘시사저널’이 8월5일 민주당 대의원 1021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전화 여론조사 결과 ‘바람직한 신당 방식’을 묻는 질문에 응답자의 55.5%가 ‘민주당을 그대로 두고 외부세력을 영입하는 것(리모델링)’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보도했다. 이에 비해 ‘민주당의 기득권을 버리고 외부세력과 새 당을 만드는 방식’을 지지한 응답자는 42.8%였다.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이런 몇 개의 여론조사에서 노대통령의 지지율이 동반하락했다는 것이다. 노대통령의 낮은 지지율이 신주류측이 추진한 신당의 동력을 앗아버린 것으로 볼 수 있는 맥락이다. 현재 각종 여론조사에서 노대통령의 지지율은 30%대에 정체돼 있다. 취임 반년이 안 됐는데 명예롭게 퇴장하지 못한 역대 대통령들의 임기 말 지지율과 비슷한 것이다.
‘시사저널’의 민주당 대의원 조사를 보면 내년 총선까지 노대통령의 지지율은 상승(30.6%)하기보다는 하락(37.1%)할 것이고, 총선에 노대통령 간판(35.6%)보다는 민주당 간판(56.7%)을 내세우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금과 같은 분위기에서 ‘대통령당’을 새로 만들었다간 낭패를 보기 십상이라는 판단을 선택하게 하는 대목이다.
민주당 신주류측 한 소장파 의원은 이렇게 정리했다.
“우리가 당초 원했던 개혁신당의 구심은 크게 셋이다. 첫째는 영남지역의 노대통령 추종세력이고, 둘째는 노대통령의 386세대 측근들, 셋째는 민주당 신주류다. 이들 3대 세력이 결집해 사실상 ‘노무현당’을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대통령과 신당논의가 지지를 받지 못한다면 신당은 성공할 수 없다. 이제 문제는 이들 3대 세력이 설 땅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당이 리모델링될 경우 영남지역 출신과 386 측근들은 민주당에 안착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만약 상향식 공천을 하게 되면, 신당을 만들려 했던 신주류 의원들이 지역구의 호남 당원들의 견제를 이겨내고 공천을 받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자칫 노무현 정권의 토대세력 모두가 공멸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이 신주류측 소장파 의원의 우려는 구주류측에겐 반가운 현실이 되고 있다. 구주류측 의원들은 펄펄 되살아나고 있다. 작년 대선 때 노대통령을 적극 돕지 않았다며 인터넷 살생부에 ‘역적’으로 기재된 정균환(鄭均桓) 총무, 박상천(朴相千) 최고위원, 한화갑 전 대표가 대표적 인물이다.
정총무는 최근 기자를 만나자 “요즘처럼 격려전화가 오거나, 팬레터를 받은 적은 일찍이 없었다”며 밝은 표정을 지었다. 그는 4선이란 중량감에도 불구하고 “리모컨이 있어야 움직이는 사람”이란 비아냥거림을 들었으나 신당추진파에 결사 항전하는 과정에서 “의외로 정치력이 있네”하는 반응을 이끌어냈다.
“당내 최고의 이론가이나, 당 대표는 절대 될 수 없는 사람”이란 평을 들었던 박최고위원은 ‘민주당 정통성을 지키는 모임(약칭 정통모임)’ 회장을 하면서 현장 전투지휘자로서의 능력을 평가받았다. 그는 기자회견 때마다 “개혁신당이란 민주당내에서 민주당을 죽이려는 것”이라며 신당창당 논리를 조목조목 비판했고, 그의 논리는 구주류측의 ‘바이블’이 됐다. 그의 전당대회 소집론에 대해서는 신주류측도 대응논리가 없어 한동안 막막했다는 후문이다.
한 전 대표는 지난 2월23일 대표직을 사퇴한 뒤 한때 정치적 위기에 봉착하는 듯했으나, 신주류측과 각을 세우는 과정에서 명실상부한 포스트 DJ로 떠올랐다. 그래서인지 그는 8월 초 당무회의 참석을 계기로 당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냈고, “내년 총선에서 국민들에게 표를 달라고 하려면 ‘탈(脫)노무현’을 내세워야 할 판”이라고 거침없는 비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신당추진파에 맞서는 구주류의 일사불란한 대응은 다름아닌 신주류의 오합지졸 조직력 때문에 빛이 난다. 구주류는 당의 최고의사기구인 당무회의 때마다 좌석 배치며, 의사진행발언 순서까지 논의한다.
예를 들어 의사봉을 쥐고 있는 정대철 대표의 좌우에는 박상천 최고위원과 최명헌(崔明憲) 고문이 앉고, 의사진행발언은 장성원(張誠源) 의원이 맡는다. 신주류측 당직자인 이상수(李相洙) 총장은 전직 총장인 유용태(劉容泰) 의원이 철저히 마크한다는 식이다. 이에 대해 당내에서 ‘오랜 세월 야당으로 싸워온 구주류의 저력’이라는 평가도 있고,‘생존의 위기에 몰린 절박한 몸짓’이라는 평가도 있지만 어느 쪽 주장이 맞든 구주류의 단결력과 결단력은 돋보인다. 이젠 구주류측에서 스스럼없이 리모델링형 민주당에 절대 참여할 수 없는 신주류측 인사를 거명한다. 신주류측이 두어 달 전 ‘신당 동승 배제’ 대상을 꺼냈던 것을 상기해 볼 때는 역(逆)인적청산론인 셈이다.
너무도 조용한 ‘천·신·정’
신주류측 한 의원은 발등을 찍는 듯한 통탄을 내뱉었다. “신당논의에서 누구를 쳐내자고 말하기 전에 구주류 3인방부터 쳐냈어야 했다. 잘못 건드렸다가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죽었을 사람들에게 정치적 부활의 기회만 줬다.” 세 사람의 최고위원과 상임고문직을 떼 당내 논의를 신주류측이 주도했어야 뒤탈이 없었을 거라는 뒤늦은 후회였다. 신주류측이 신당모임을 열려면 정총무가 정국 현안을 들어 원내대책회의나 의원총회를 소집하고, 박최고위원은 현안 때마다 최고위원회의를 소집해버리니 신주류측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와는 거꾸로 신당논의는 신당추진의 선봉에 섰던 ‘천·신·정’ 등 신주류 강경파, 개혁신당파들에게 정치적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
이들은 “신당의 성격은 명확히 개혁신당이다. 통합은 많은 사람의 합류를 이끌어내기 위한 방법일 뿐이다. 추진 과정에서 신당에 동참하지 않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배제되지 않겠느냐”는 주장을 되풀이해왔다. 영남의 개혁신당추진기구 출범식 때는 나란히 참석해서 “4·24 재·보선 결과는 민주당을 발전적으로 해체하라는 요구가 드러난 것이므로 민주당 리모델링론이나 통합신당론은 폐기돼야 한다”며 개혁신당이라는 창당 방향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천·신·정’은 신당의 상징처럼 여겨져 왔고, 때문에 ‘천·신·정’의 거취 문제는 단연 관심사다.
그런데 세 사람이 요즘 눈에 띄지 않는다. 조용히 지내고 있다. 민주당 신당논의는 신·구주류 사이에 막바지 협상이 진행중인데, 그 무대 주변에서 ‘천·신·정’의 그림자는 발견할 수 없다. 세 사람의 조용한 움직임에 대해선 여러 해석이 따라다닌다.
지금 논의되는 신당론은 리모델링과 별 다를 것 없는 통합신당이다. 여기에 서울 강서갑(신기남), 경기 안산(천정배), 전북 전주(정동영) 등 세 사람의 지역구는 모두 민주당 전통 지지층이 초강세인 지역이다. 신당에 대한 여론은 이들 지역주민과 유권자의 바닥에서부터 점차 악화되고 있다는 말도 들린다. 신주류측 동료 의원들 사이에서조차 “고향 박대한 놈 치고 잘 되는 놈 없다”라며 우려 반, 비난 반의 목소리가 나온다. 세 사람 모두 호남 출신이란 점을 겨냥한 것이다.
여기에 한나라당 탈당파 및 개혁당 등 당 밖 신당추진세력의 압박수위는 점점 높아가고 있다. 한나라당 탈당파 모임인 ‘지역주의 타파 국민통합연대’(이하 통합연대)는 8월10일 “민주당이 의미없는 신당놀음을 계속한다면 우리는 8월20일 이후 독자적인 신당 창당을 추진할 것임을 명확히 밝힌다”고 말했다. 한시라도 빨리 당을 박차고 나오라는 공개요구인 동시에 개혁신당 창당의 데드라인 선포였다.
이부영(李富榮) 의원은 “한나라당 대 도로 민주당의 싸움은 내년 총선에서 한나라당의 승리를 보장하는 최악의 시나리오”라고 주장했고, 김영춘(金榮春) 의원은 “민주당 신당논의가 현금(기득권)을 너무 챙기려다 밑천(초심)까지 까먹었다”고 악평했다. 개혁당 김원웅(金元雄) 유시민(柳時敏) 의원도 “정치권 밖 개혁신당 추진세력 결집체인 신당연대와 독자적으로 신당 추진 일정을 진행해나갈 것”이라고 거들었다.
당 밖 신당추진세력은 신당이 명실상부한 전국적 개혁정당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서는 민주당 신주류와 한나라당 탈당파, 개혁당의 3자 연대라는 ‘화룡점정(畵龍點睛)’ 의식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개혁세력이 지역을 떠나 연대해 신당을 창당했다는 점을 국민에게 보여주는 데 3자 연대만큼 효과적인 이벤트가 없다는 논리다. 현실적으로는 자칫 한나라당을 탈당한 의원들과 2명의 개혁당 의원 등 당 밖 세력만 ‘낙동강 오리알’로 전락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천·신·정’ 세 사람은 끝내 신당의 방관자로 남을 것인가. 본인들은 “신당 협상을 지켜 볼 때가 아니냐”고 말을 아끼지만 주변에선 “세 사람의 침묵은 때를 기다리는 ‘태풍의 눈’”이라고 말한다.
정의원은 한때 ‘선도(先導)탈당 불가피론’을 말해왔고, 지금도 그 기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는 게 주변 의원들의 전언이다. 신의원도 오래 전부터 “구주류와의 합의가 가능하겠는가. 결국 최종 선택은 분당(分黨)밖에 없는 것 아니냐”고 판단해 왔다. 천의원은 언젠가부터 “분당은 피한다”는 현실노선으로 돌아섰지만 전국정당화라는 본질을 포기한 건 아니다. 그리고 그 때는 멀지 않은 시기에 올 것이라고 전망한다.
당내에서도 ‘천·신·정’ 3인방이 선택할 길은 단 한 가지밖에 없다는 견해가 많다. 민주당을 탈당해 개혁신당을 추진하고, 개혁신당의 사실상 목표인 부산·경남 교두보 마련에 순교하는 길밖에 없다는 것.
작년 대선 때 노대통령 만들기에 적극 나섰던 신주류이면서도 개혁신당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온 김경재(金景梓) 의원은 기자와 만나 3인방의 거취 문제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내가 3인방이라면 부산·경남에서 출마하겠다. 뱉어놓은 말이 너무 많아 도저히 주워담을 수 없는 지경이 됐다. 대중적 인기가 높고, 개혁성향을 인정받고 있는 그들이 부산·경남에서 출마한다면 부산·경남 유권자들도 고민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50대 젊은 정치인들이다. 60대의 김원기 고문과는 다르다. 뭔가 새롭게 도전할 수 있는 젊고, 그런 만큼 노무현이 걸었던 길을 가야만 살 길이 보일 것이다. 3인방이 거취를 결정해준다면 민주당이 통합신당이 되더라도 영남에서 의석을 얻고, 일정 부분 지역구도를 타파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꼭 낙선한다는 법도 없다. 또 설사 낙선하더라도 노대통령이 지역구도 타파에 기여한 그들을 중용하지 않을 리 만무하다.”
김의원은 이어 당 밖의 신당출현은 민주당으로서 무척 바람직하다는 논리를 폈다.
“당 밖에 신당이 하나쯤 있는 것은 여러 모로 바람직한 일이다. 신당의 인기가 올라가면 시간이 무르익어 민주당과의 당 대 당 통합 문제가 자연스럽게 거론될 것이다. 당 대 당 통합이 여의치 않더라도 연합공천이나, 정책공조 얘기가 나올 것이다. 어떤 경우를 선택하더라도 그들은 미션을 발휘할 수 있다. 괜시리 통합신당으로 말을 바꿔 눌러앉을 경우 당내 공천정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들로선 선택의 길이란 없다. 사즉생 생즉사(死卽生 生卽死), 죽으려 해야만 살 길이 열린다.”
이처럼 개혁신당이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민주당에서 이젠 통합신당론마저 후퇴하는 양상이다. 갑작스럽게 터져나온 권노갑(權魯甲) 전 고문의 현대 비자금 수수 파문 때문이다. 검찰의 칼날이 전 정권의 핵심을 파고든다면 구주류는 도덕성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고, 권 전 고문이 2000년 총선에서 386 등 신주류 핵심들에게 선거자금을 지원했다는 얘기가 기정사실처럼 돼 있어 신주류도 자유롭지 않은 상황이다.
권 전 고문이 긴급체포된 다음날인 8월12일 의원총회. 신당파 핵심인물 중 한 사람인 이상수 사무총장은 동료 의원들에게 “신당이 잘 안될 것 같다”고 말했다. 이총장이 “지역구나 열심히 관리해야겠다”고 침통한 표정을 보이자 옆에 있던 김경재 의원은 “이제 신당이니 구당이니 따질 때가 아니다. 당이 단합해서 총선을 치를 수 있도록 생존하는 게 우선이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이번 사건이 역으로 정치개혁과 신당추진의 계기가 되지 않겠느냐”(이재정·李在禎)는 자위(自慰)섞인 기대도 없지 않다. 아무튼 신·구주류 양측은 당분간 “분열은 곧 공멸”이라는 인식 아래 내부 권력투쟁을 자제할 것으로 보인다. 대신 당 차원에서 검찰과 대립각을 세우는 등 외부와 전선을 형성할 가능성이 높다. 이에 따라 신당 논의는 신·구주류 양측이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는 수준으로, 즉 신주류가 주장하는 획기적 신당보다는 구주류의 현상유지형 리모델링으로 귀착될 확률이 높다. 중도파인 조순형(趙舜衡) 의원이 내놓은 “리모델링에 가까운 통합신당론”이 힘을 얻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신당파의 한 핵심의원은 “당명을 ‘통합민주당’으로 개정하는 전당대회를 치르고 외부인사를 대거 영입하는 선에서 당을 추스르자는 목소리가 힘을 얻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여전히 개혁신당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시각은 남아있다. 노대통령이 개혁신당 추진의 사실상 동력이었다는 점에서 ‘노대통령의 정치적 결단이 무엇이냐’에 주목하는 것이다. 물론 “노대통령이 직접 나설 것으로 보는 것은 무리”라는 게 대체적인 정치권 주변의 시각이다. 원칙과 절차에도 어긋나고 무엇보다 명분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최대 이슈는 노대통령의 당적 이탈 문제다. 노대통령은 현재 민주당의 평당원이다. 이 고리를 끊을 경우 노대통령은 여야로부터 자유로운 입장이 된다. 이는 곧 새로운 정치조직, 신당 창당에 나서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노대통령을 잘 아는 인사들은 노대통령의 개혁신당 창당설을 단칼에 자른다. 노대통령은 누구보다 현실감각이 있고, 내년 총선에서 제1당이 돼야만 나머지 재임기간이 수월하리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여권의 한 관계자는 “노대통령이 민주당을 탈당하더라도 그 시기는 총선 이후가 되지 않겠느냐”고 내다봤다.
이 때문에 한나라당 탈당파와 개혁당, 당 밖 신당연대가 3자 연대해 독자적인 개혁신당을 만들더라도 총선 전 당 대 당 통합이나, 정책연합 또는 연합공천 등의 절차를 밟을 것이라는 전망이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