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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대 중국 싼샤댐을 가다

잦은 안개가 구름 이동 차단…황사 가속화 우려 “올 6월 댐에 물 채운 뒤 동북아 환경재앙 징후”

  • 글: 조창완 중국 전문 프리랜서 chogaci@hitel.net

세계 최대 중국 싼샤댐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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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쑨원의 권고는 국민정부를 이끌던 장제스(蔣퉿石)에게도 깊이 각인돼 장제스의 국민정부는 1932년 직접 싼샤를 측량해 관련 보고를 만든다. 당시의 후보지는 거저우바(葛洲?)나 황링먀오(黃陵廟) 등이었다. 1944년에는 미국 수리 전문가 싸판치(薩凡奇·John Lucian Sovage)가 싼샤댐의 개발안을 만들었지만 국민정부가 대만으로 피신가면서 댐 건설은 유보됐다.

홍수는 이데올로기와 상관 없다. 중국 공산당이 대륙을 지배하기 시작한 1949년 이후에도 계속해서 홍수가 발생하자 중국의 행정부 격인 국무원은 1950년 창강수리위원회(長江水利委員會)를 발족시켜 대책 마련을 서둘렀다. 그러던 중 1954년에 20세기 최대 홍수가 찾아왔다. 둥팅호(洞庭湖)에서 우한(武漢)에 이르는 지역은 완전히 초토화됐다. 새로운 치수책에 대한 갈증도 커져만 갔다.

먼저 지금의 싼샤댐 건설지역보다 조금 하류에 제방인 거저우바를 만들자는 대책이 수립되었고, 1958년에 마오쩌둥(毛澤東)이 그곳을 방문해 제방 작업을 점검했다. 하지만 거저우바에 착공한 것은 그로부터 10년도 더 지난 1970년 12월30일이었다.

1980년 덩샤오핑(鄧小平)은 충칭에서 지금의 싼샤댐 자리인 싼더우핑(三斗坪)까지 순례했다. 이후 싼샤댐의 가능성은 급속히 타진됐다. 1989년 7월 장쩌민(江澤民)이 싼더우핑을 방문했고 1990년 7월에 국무원 산하에 싼샤댐심사위원회(三峽工程審査委員會)가 만들어졌다.

1992년 4월3일 7차 중국 전인대에서 1767명 찬성, 177명 반대, 664명 기권으로 싼샤댐 건설 안건이 통과됐다. 싼샤댐 건설에 가장 적극적인 인물은 리펑(李鵬)이다. 모스크바대학 수리공정과를 마친 그는 싼샤에 대한 집착이 대단했다. 그는 1987년 공산당 최고 위치인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에 오르기가 무섭게 싼샤댐 건설을 강조했고, 그의 오랜 꿈은 1994년 12월14일 국무원 총리의 신분으로 싼샤댐 건설을 발표하면서 현실화됐다.



이후 기초공사인 1기공정(1994~97년)이 마무리됐다. 물 채우기와 더불어 70만㎾짜리 발전기가 2개 가동하는 2기공정(1998~2003)도 최근 완료됐다. 3기공정은 수몰지역 주민 40만명의 이주, 환경보호 및 재해방지 공사, 175m까지 수위 올리기 사업 등으로 구성되며 2009년 마무리된다. 사실상 2기공정이 싼샤댐 공사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이번에 마무리가됐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국, 댐의 긍정적 부분만 외국에 공개

지금까지 싼샤 공정은 예정된 시간에 맞추어 진행됐다. 또 그 성과들도 가시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면 싼샤의 미래는 어떠할까. 필자가 싼샤댐 현장을 취재한 결과 분명히 드러난 사실은 “중국 정부가 애써서 부정적인 요소를 무시하고, 댐의 긍정적인 부분만을 이웃 국가들과 세계에 공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싼샤댐은 이창에서 충칭까지 662km가 넘는 긴 ‘수조’를 가진 댐이지만 창강에서 차지하는 부분은 그리 크지 않다. 창강의 발원지는 칭하이(靑海)성 서부 고지대인 커커시리(可可稀立). 이곳에서 발원한 창강은 서서히 지류를 형성해, 칭하이에서는 퉁톈허(通天河)로 불린다. 하늘과 통하는 강이라는 의미를 담음으로써 신성함을 부여했다. 이 강은 쓰촨에서는 진사(金沙)강으로 불리다가, 충칭에서 자링(嘉陵)강을 만나 본격적인 세 불리기에 들어간다.

필자가 충칭을 처음 찾은 것은 1999년 겨울이었는데, 구두닦이들, 대나무 장대에 짐을 묶어 운반하는 운반노동자(搬運工)들, 구릉에 세워진 낡은 건물들로 상징되는 당시 충칭은 너무나도 가난한 도시라는 느낌을 갖게 하기에 충분한 곳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충칭이 변모하기 직전의 풍경이었다. 충칭은 싼샤댐 건설로 새로운 도약의 기틀을 준비하고 있었다. 졔팡바(解放?)나 사핑바(沙坪?) 등은 물론이고, 공항으로 가는 길목 주변은 급속한 개발을 앞두고 있다. 이후 매년 충칭이 변하는 모습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싼샤댐 건설 이후 충칭은 창강 물류의 핵심기지이면서 서부 대개발의 전초적 위치라는 양축이 맞물리는 곳이 됐다. 서부 대개발의 중심기지를 놓고, 청두(成都)와 경쟁하던 충칭은 자오톈먼(朝天門)이라는 부두 하나로 모든 것을 압도했다. 싼샤댐 이전엔 3000t급 배도 근근이 올라왔는데 댐 완성으로 수량이 풍부해지면서 1만t급까지 올라올 수 있게 됐다. 지난 6월 수위가 110m임에도 화물을 가득 실은 수십t짜리 트럭 스무 대 가량을 실은 배들이 거침없이 창강을 누비고 있었다.

싼샤댐의 건설 목적에서 물류 부분은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한다. 중국은 덩샤오핑이 실권을 장악한 후 홍콩과 맞붙은 광저우(廣州) 등 주장(珠江)을 우선적으로 개방했다. 이후 1990년대를 기점으로 상하이 등 창강 삼각주 지역이 개발되고, 1990년대 후반 들어서는 베이징, 톈진 등 진허(津河)만까지 개방의 바람이 불었다.

이 결과 동부와 서부의 소득격차는 빠른 속도로 벌어졌다. 자연히 지역간 갈등이 발생했고, 호구(戶口)제도를 통해 농촌인구의 도시진입을 막던 정책은 갈수록 어려워졌다. 이 때문에 중국 정부는 서부 대개발을 통해 지역 격차를 해소하는 한편 동남부에서 빚어지는 과잉 개발을 막으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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