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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아버지

아버지의 독립운동과 나의 두꺼비 축구단|이기준

  • 글: 이기준 한국공학한림원 회장·전 서울대 총장

아버지의 독립운동과 나의 두꺼비 축구단|이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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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아버지와 함께 자주 동네 목욕탕에 들렀다. 목욕을 하고 난 뒤 아버지는 설농탕이나 아이스크림을 사주시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들려주시곤 했다. 그 중에서도 나는 ‘인간은 뭇 동물과 달라서 의롭고 역사에 남을 만한 보람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말씀과 내게 주신 현판에 새겨진 ‘사천추(史千秋)’의 뜻을 지금도 마음에 간직하고 있다.

나로 말하자면 대학보다는 산업계에서 일하고 싶은 의욕이 더 강했고, 실제로 그 쪽이 더 적성에 맞겠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미국에서 공부할 때도 산업공학과에서 제조업 경영에 대한 강의를 듣기도 했다. 나중에 회사에 다니거나 혹은 경영을 맡게 되면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모교 강단에 선 이유는

그 무렵 한국에서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을 중심으로 외국에 나가 있는 과학자들을 유치하는 정책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었다. 봉급도 서울대의 6만원선에 비해 4배나 되는 25만원을 줄 뿐 아니라 아파트까지 제공하니 아내 입장에서는 이를 마다하고 대학을 선택한다는 것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서울대 교수가 되는 일이 쉬운 것도 아니었다. 새로운 자리를 배정받기가 쉽지 않을 뿐 아니라 신임 교수 채용에는 전체 학과 교수의 동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학문별로 원로 교수들 사이에 경쟁이 심하던 터라 새로운 자리가 화공분야에 돌아가도록 다른 분야에서 쉽게 용인해줄 분위기도 아니었다. 그 중에서도 영향력이 큰 원로 교수 신윤경 박사의 찬성을 얻어내는 일이 중요했는데, 이재성 교수에 의하면 의외로 신 박사가 이기준을 데려오는 일에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아 뜻밖이라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신 박사가 나의 교수 임용을 찬성했던 데에는 아버지와의 인연이 크게 작용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독립운동으로 다년간 옥고를 치른 공을 인정받아 해방 후 정부 수립과 초대내각 구성 당시 이시영 부통령의 추천으로 상공장관에 지명되었으나 극구 사양하셨다. 대신 아버지는 해방 직후 혼란기에 국내 공장들이 난장판이 되는 것을 막고, 산업발전의 토양을 마련한 뒤 기술지도를 해주기 위해 오늘날의 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전국공업기술연맹을 결성하여 책임을 맡고 있었다.

‘진짜 박사’와 ‘가짜 박사’

그러던 중에 해방 후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딴 신윤경이 귀국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인들조차 도쿄대 박사나 교토대 박사보다는 독일 박사를 훨씬 높이 쳐주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 인재가 시베리아와 만주를 거쳐서 해방조국에 나타났지만 일반 시민이나 관료들은 전문 분야 박사학위에 대한 이해가 없던 시절이었다. 더구나 가을철임에도 허름한 여름 양복을 입고 나타난 이 가난한 박사는 사람들에게 호기심의 대상일 뿐이었다.

“당신이 바로 그 모르는 것 하나 없는 ‘박사’란 말이지요? 그럼 이거 하나 물어봅시다.”

사람들은 공학박사인 그에게 전공과는 상관도 없는 잡다한 질문들을 해댔고, 그가 신통한 대답을 하지 못하자 단숨에 ‘가짜 박사’로 낙인을 찍어버렸다. 박사(博士)란 글자 그대로 모든 분야에 박학다식(博學多識)해서 모르는 게 없는 사람이라고 믿었을 만큼 우리네 학문풍토가 척박했던 것이다. 일면식도 없었던 이 ‘가짜 박사’를, 당시 우리나라 유일의 연구소였던 중앙공업연구소 초대 소장을 맡고 있던 안동혁 박사에게 추천해준 사람이 바로 내 아버지였다.

내가 훗날 서울대 화공과를 졸업하고 나서 연말연시를 맞아 신 교수댁에 인사를 갔다가 아버지 얘기를 꺼냈더니 “그럼 그분이 아버지라고 왜 진작 얘기하지 않았느냐?”며 놀라워했다.

그런 인연으로 신윤경 박사는 나를 서울대 화공과로 데려오겠다는 이재성 교수의 요청에 고개를 끄덕여주었던 것이다. 요즘식으로 표현하자면 내가 서울대 교수로 부임할 수 있었던 데에는 아버지의 배경이 어느 정도 작용한 셈이다. 어쨌든 이재성 교수가 미국에 있던 나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내 ‘왜 서울대로 와야 하는지’를 설득하는 바람에 일단 마음을 굳혔지만 문제는 아내를 설득하는 것이었다.

‘나도 미국에서 편하게 살고 싶다. 그러나 이 나라는 내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된다. 하지만 한국은 다르다.’ 대략 이와 비슷한 논리를 내세워 아내에 대한 설득작전에 나섰던 것 같다. 그러나 안살림을 맡은 아내에게 서울대 교수 자리는 그리 매력적이지 못했던 모양이다. 나는 아내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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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기준 한국공학한림원 회장·전 서울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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