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故) 김주석씨가 1944년 진해 일본군 헌병대에서 한국인 출신 시게미쓰 헌병 오장에게 고문받는 장면을 묘사한 삽화.
이글을 쓸 것인가를 놓고 많이 망설였다. 내 아버지를 고문한 친일 인사를 고발하는 행위로 비쳐져 자칫 죄없는 그의 후손에게 커다란 상처를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겪은 일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과거사 규명 차원에서 의미있는 일이라는 생각에 결심했다. 또한 항일운동을 한 죄로 고통의 나날을 보낸 아버지의 삶을 더함과 뺌 없이 공개하는 일이 잘못된 행동은 아니라고 믿는다.
나의 아버지 김주석씨는 17세이던 1944년 치안유지법 위반 등의 혐의로 체포되어 경남 진해 일본군 헌병대에서 한국인 출신 일본군 헌병에게 모진 고문을 당했다. 그 후유증으로 1993년 12월31일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아버지는 지팡이에 의지하고도 얼마 걷지 못하는 하반신 장애인으로 생활했다. 17세의 나이에 만신창이의 몸이 되어 평생을 살아야 했다니! 그것도 항일운동을 한 죄로 같은 동포의 손에 의해 그렇게 됐으니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 아버지는 헌병대 유치장에서 고문당하며 피부병, 심장병까지 얻어 평생 병을 안고 사셨다. 아버지는 결국 “차라리 다리를 절단했으면 좋겠다”고 말한 적도 있을 정도로 매일 다리의 통증을 겪으시다 숨을 거두셨다.
아버지는 생전 한시도 당신을 그렇게 만든 친일 헌병을 잊지 못했다. 평생 그의 소재를 수소문했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1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난 8월 나는 아버지가 그토록 다시 만나고자 했던 그 헌병을 찾을 수 있었다. 신기남 전 열린우리당 의장 부친 신상묵씨였다.
지난 8월 신문에서 “신 의장의 부친 신상묵씨가 일제 시대 전북 출생-대구사범학교 졸업-교사 출신 일본군 헌병 오장 시게미쓰 구니오며 진해 일본군 헌병대에 근무하면서 항일운동가 두 사람을 고문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아버지는 1983년 혹독하게 고문당한 상황을 100여쪽의 삽화와 글로 생생하게 묘사한 자서전을 남겼다. 그 자서전에 수도 없이 등장하는, 아버지를 고문한 한국인 출신 일본군 헌병 오장이 바로 시게미쓰다.
치안유지법 위반 기록
아버지는 자서전과 함께 1944년 치안유지법, 군사보호법 위반으로 부산형무소에 투옥됐음을 입증하는 교도소 기록을 남겼다. 그 교도소 기록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인 1998년 내가 부산교도소측으로부터 확인받은 것이다. 교도소측은 겉장에 치안유지법 위반 사실만 기록했는데, 뒤에 첨부된 일제시대 기록을 보면 치안유지법 외에 군사보호법도 위반한 것으로 돼 있다. 이 자료를 아버지 생전에 구해드리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1944년 당시 아버지에게 적용된 치안유지법, 군사보호법은 일본제국주의에 반기를 들고 반(反) 국가활동을 한 시국사범을 잡아들일 때 사용되던 것이었다. 내가 알아본 바에 따르면 치안유지법은 1925년 3월 일본 귀족원을 통과해 일본 본토와 식민지 한국에서 시행된 법으로, 주요 골자는 ‘국체(國體)를 변혁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결사를 조직하거나 사정을 알고 이에 가입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에 처하며 협의 선동한 자도 중형에 처하도록 한다’는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