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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 균형자’ 元祖, 광개토대왕의 교훈

‘동아지중해’ 모델 발판으로 ‘중핵 조정’ 역할 장악하라!

  • 글: 윤명철 동국대 겸임교수·고구려사 ymc0407@yahoo.co.kr

‘동북아 균형자’ 元祖, 광개토대왕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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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두 임금이 추진한 국가 발전전략은 무엇이었으며, 그 구체적인 모델은 어떠한 형태로 실현됐을까. 중간과정에서 발생한 위기와 문제점을 어떻게 극복했는가. 이를 살펴보는 일은 21세기의 한국이 앞으로 동아시아의 지역화 과정에서 검토하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작업이 될 것이다.

외교망과 물류망을 통제하라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이라는 시호를 받은 고구려의 왕 고담덕(高談德). 그가 활동하던 4세기 말과 5세기 초의 동아시아는 세계질서와 지역 내 질서가 급변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21세기의 이 지역과 상당 부분 흡사하다. 광개토대왕이 통치한 고구려는 단순히 땅이 넓은 국가가 아니라 광범위한 영향력과 다양한 흐름을 하나로 통합해내는 비전을 가진 제국이었다. 무엇보다 이 시기의 고구려는 국제질서의 미묘한 변화와 시대상황을 간파하고 시대정신을 읽는 데 성공했다. 우선 큰 그림을 그려놓고 정확한 시기를 선택해 필요한 지역에서 단계적으로 정책을 추진했으며, 해당 시기마다 성과를 유효 적절하게 재활용하는 지혜를 보여줬다.

당시 고구려의 해외활동 가운데 우선 눈여겨볼 것은 북쪽과 요동의 서쪽 지역, 동해와 타타르해로 이어지는 동쪽 방면을 모두 포함해 감행한 ‘북방 공격’이다. 특히 요동지방의 장악은 고구려에 있어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뛰어난 가치가 있었다. 이를 통해 잠재적 적국인 화북세력(중국)을 군사적으로 위협할 수 있었으며, 몽골 지역에 있는 유목세력과 연계가 가능해져 정치적 조정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서기 402년, 광개토대왕은 요하를 건너 지금의 조양 지역에 있는 연나라 숙군성(宿軍城)을 점령한다. 요서의 조양을 지나면 곧 만리장성의 종점인 산해관을 넘어 북경이다. 지금으로 보면 압록강 하구나 두만강 하구 같은, 사람으로 치자면 목에 해당하는 전략적 요충지를 장악한 것이다. 이로써 국제사회에서 고구려가 차지하는 위상과 비중은 비약적으로 향상됐고 외교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다.



요동은 생산지이자 물류 거점이었던 까닭에 경제적으로도 전략지구였다. 안시성과 건안성이 있던 안산은 지금도 철과 마그네슘 같은 지하자원이 풍부한 지역이다. 철은 무기와 농기구를 만들고, 남방에 수출하는 북방 유목민의 말과 교환할 수 있는 고부가가치 상품이었다. 해양적 가치도 무시할 수 없다. 요동반도의 남단(지금의 다롄, 여순)을 장악함으로써 요동만, 서한만, 대동강 하구, 경기만을 잇는 황해 동안 연근해 항로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른바 황해 중부 이북의 바다를 안전한 내해(inland sea)로 만들어 영역권으로 삼고 산둥반도 등 아래의 남부 지역과 해양교섭을 벌이는 데도 유리한 지점이다. 요동을 장악함으로써 광개토대왕은 황해의 외교망과 물류망을 상당 부분 장악할 수 있었다.

한편 이 시기 고구려는 직할지인 북부여 일대도 영토로 편입시켰다. 부여는 고구려를 비롯한 한민족 국가의 뿌리였으므로 정통성과 계승성을 가진 제국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수복해야 하는 원향(原鄕)이었다. 서기 411년 광개토대왕은 친정군을 이끌고 동부여마저 복속시키기에 이른다. 이로써 동만주와 연해주 일대의 육지뿐 아니라 연해주 남부 바다 일부와 동해 항로 일부도 고구려의 영역에 포함됐다.

이러한 북방 행동은 광개토대왕이 국력을 총동원해 수행한 국가 과제였다. 이 같은 움직임이 단순히 영토 확장을 위한 것이 아니었음은 당시 만주가 지닌 의미를 되새겨보면 분명해진다. 고조선을 계승한 고구려에 있어 만주를 확보하는 일은 일종의 수복(多勿) 행위였다. 정치 군사·경제 차원에서도 엄청난 가치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와 중국은 이 지역을 두고 끊임없는 갈등과 전쟁을 벌여왔다. 만주는 곧 재편될 세계 질서 혹은 동아시아 질서 속에서 모든 나라의 힘이 충돌할 개연성이 가장 높은 지역이었다. 또한 한민족이 통일을 이룬다면 엄청난 지각변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지역이었다.

광개토대왕은 대륙의 몇몇 전략적인 ‘목’을 장악하고, 국력을 강화해 고구려의 위상을 높이는 한편, 자연스럽게 동아시아 삼핵(三核 혹은 三極), 즉 북방·중국·동방이라는 삼각체제의 한 부분을 확실하게 차지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북방은 동아시아의 정치적인 상황과 실질적인 위협 정도, 선대부터 추구해온 국가 목표 등을 고려할 때 가장 급박한 과제였다. 그러나 이 시기 고구려의 해외활동 가운데 남방으로 진출하기 위한 집요한 시도 또한 무시할 수 없다. 군사행동과 외교정책을 살펴보면 북방 못지않게 남방에도 국력을 쏟아부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과연 남방 진출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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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윤명철 동국대 겸임교수·고구려사 ymc0407@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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