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4월20일 교황으로 선출된 베네딕토 16세에 대한 평가의 일부다. 모두 사실이다. ‘신앙교리성’은 가톨릭 신앙의 심화를 촉진하고 순수성을 수호하는 교황청 기관이다. 베네딕토 16세는 교황으로 선출되기 전까지 신앙교리성 장관으로 24년을 지냈다.
베네딕토 16세, 즉 요셉 라칭거는 1927년 4월16일 독일 오버 바이에른 마르크틀 암 인에서 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경찰관이었다. 부모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지라 그는 태어난 지 네 시간 만에 세례를 받았다. 아주 빈곤하진 않았지만 어릴 적부터 절약하면서 수수하게 살아야 했다. 그는 “부유함 속에서 찾을 수 없는 즐거움이 바로 여기에서 생겨난다. 가족들은 아주 작은 일에도 기뻐할 수 있었다. 서로를 위하여 생활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모른다”고 회상했다.
그의 집안에서 종교는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식사 때마다 기도했고 학교 수업에 지장이 없는 한 날마다 미사에 참례했다. 기나긴 묵주기도도 가족과 함께 바쳤다. 집안은 절대적인 반(反)나치 분위기였지만, 라칭거는 신학교 재학 중 히틀러 청년단에 거의 강제로 가입했다. 청년단에 출석하면 신학교의 학비가 감면됐기 때문이다.
6년 동안 뮌헨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라칭거는 학문으로서의 신학에 매료된다. 신앙의 역사라는 거대한 세계에 돌입하는 것이 멋진 일이라고 생각했다. 1951년 사제 서품을 받은 그는 잠시 일선 본당에서 사목 활동을 맡기도 했으나 이내 신학자의 길로 들어선다. 보나벤투라의 역사신학에 관심을 가진 그는 토마스 아퀴나스보다 아우구스티누스에 기울었다.
그는 뮌헨, 튀빙겐, 레겐스부르크의 여러 대학에서 신학교수로 이름을 날렸다. 1962년부터 3년에 걸쳐 열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기간 중 그는 프링스 추기경의 추천으로 전문위원으로 활약했다. 1977년에는 대주교 서품을 받으면서 뮌헨 프라이징 대교구장을 맡았다. ‘진리의 협조자’가 사목 표어였다. 그후 교황 바오로 6세는 그를 추기경에, 1981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신앙교리성 장관에 임명했다. 또한 그는 국제 성서위원회와 국제 신학위원회 위원장을 맡았으며 추기경단 수석 추기경으로 요한 바오로 2세의 장례 절차와 ‘콘클라베’를 주도했다.
필자가 교황 베네딕토 16세와 처음 만난 것은 1991년 6월로 라칭거 추기경 사제 서품 40주년 기념 미사에서였다. 독일 뮌헨 중심가에 자리잡은 성 미카엘 대성당에서 미사가 끝나자 추기경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한국에서 온 법학교수인데 추기경의 대담집 ‘신앙의 현재상황(Zur Lage des Glaubens)’을 번역해도 되겠느냐, 한국어판 서문을 써줄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추기경은 “편지를 써 로마로 보내라”고 했다.
당시 필자는 알렉산더 폰 훔볼트 재단 초청으로 독일에서 연구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법학을 공부하러 간 독일에서 제일 먼저 구입한 책이 바로 ‘신앙의 현재상황’이다. 이 책은 1984년 라칭거 추기경이 교황청 신앙교리성 장관을 맡은 지 2년 후 비토리오 메소리라는 저명한 이탈리아 저널리스트와 가진 대담집으로 ‘라칭거 리포트(The Ratzinger Report)’라는 영역본으로 더 유명하다. 대담에서 추기경은 잃어버린 것의 회복을 주장했고 1960년대 후반의 가톨릭 문화에 대해 비관적인 시각을 보였다. 이에 대한 찬성과 반대 의견이 가톨릭 내부에서 격렬하게 불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