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지자체 교류, 못마땅”
미즈노씨는 경북 고령군에 있는 고천원 유적지도 한국이 날조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고사기’ ‘일본서기’의 신화에는 ‘고천원(高天原)’이라는 세계가 등장한다. 신화의 세계는 천계(天界)인 ‘고천원’, 지상계(地上界)인 ‘위원중국(葦原中國·후시와라노 나카쓰구니)’, 지계(地界)인 ‘황천국’이라는 삼층 구조로 되어 있다. ‘고천원’은 왕권 지배의 정당성·신성성(神聖性)이 유래하는 천상의 신성한 세계였다.
그런데 최근 이 ‘고천원’ 유적이 한국에서 복원(?)되어 주목을 받고 있다. ‘고천원’이 있는 곳은 한국의 동남부 경상북도 고령군이다. 여기에는 ‘고천원고지’라고 새겨진 비석(높이 6m, 폭 2m)과 ‘고천원의 시비(詩碑)’, ‘일본의 와카비(和歌碑)’ 등이 세워져 있다. 이 ‘고천원’은 고령군에 있는 ‘가야대학교’라는 지방대학의 캠퍼스 안에 있다. 왜 ‘고천원’이 대학 구내에 있는가 하면, ‘고천원=고령’이라는 주장을 전개하는 가야대학교 총장 이경희씨 때문이다.”
원래 고천원이 고령에 있었다는 학설은 고령군에 사는 향토사가 김도윤(金道允)씨가 그의 논문에서 주장한 것으로, ‘일본서기’에 나오는 소시머리(曾尸茂梨)는 우두산(牛頭山)으로 우두산이 가야산의 ‘우수리(牛首里)’에 해당한다고 한 것이다. 다시 미즈노씨의 주장이다.
“‘고천원’이 한국에 있다는 주장은 김(김도윤)씨의 학설 이전에 존재했다. 실은 ‘우두산’은 한국의 여기저기에 존재하고, 식민지 시대에는 강원도 춘천에 있는 우두산이 ‘고천원’에 비정되었고, 이기동(李沂東)의 ‘고천원은 조선인가’에서는 경상남도 거창군에 있는 우두산을 근거로 거창군이 고천원이라고 되어 있다. 요약하면 ‘고천원’은 ‘우두산’의 위치에 따라 아무렇게나 변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엉터리 근거에도 상관없이, 이 수상한 ‘고천원’에서는 매년 ‘고천원제(高天原祭)’라는 행사가 벌어져, 일한 우호에 대대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미즈노씨의 이런 지적은 무모한 측면이 있다. 한국에 산재한 우두산은 모두 실제로 고천원과 관계가 깊기 때문이다. 중국의 사서인 ‘삼국지’에 따르면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을 때 중국 동부의 제나라, 노나라 사람들은 물론 서부의 진나라 지역 사람들이 노역을 피하여 조선(고조선) 지역으로 흘러들어왔다. 이들은 파도처럼 춘천을 거쳐 거창, 고령 등 한반도 전역으로 이동했는데, 이들이 지나간 자리에 ‘우두산’ 또는 ‘소시머리’라는 지명이 남게 된 것이다. 이들은 중국에서부터 소머리를 신성시했다.
이들은 한반도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5세기 초엽의 일왕 응신기(應神期)에 이르러서는 백제의 도움을 받아 대거(120현의 백성) 일본 열도로 이주했다. 이들이 바로 ‘바다’를 뜻하는 의미의 ‘하타(秦)씨족’으로, 6세기부터는 교토(京都)의 광륭사(廣隆寺) 주변에 중심을 두니 그곳이 바로 ‘우즈마사(牛頭麻佐)’라 부르는 곳이다. ‘우즈마사’는 소머리를 뜻하는 말이다. 또한 한국어로 ‘우두머리’를 뜻하기도 한다.
고천원이 한반도의 ‘우두산’과 관련이 있음은 일본 고대사 전문가인 오오와 이와오(大和岩雄)씨의 엄청난 저서와 논문을 읽지 않더라도 일본 학자들 대부분이 인정하는 일이다. 전공이 아닌 한일 고대사 분야에서 초라한 지식을 동원하여 사실을 왜곡하는 사람은 바로 미즈노씨이다. 그는 한술 더 떠 한국의 고대사 유적 전반을 폄훼하기에 이른다.
“이상, 한국의 ‘수상한 유적’을 조망해보았다. 이런 유적은 조금만 검토해봐도 쉽게 마각을 밝힐 수 있다. 이러한 유적들로 인해 한국인은 일본에 대하여 문화적 우월감을 느낀다. 물론 한국 학계에서도 이러한 유적은 학술적 근거가 있는 것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도 일본의 자치단체와 교류단체가 일한 우호를 명분으로 이러한 유적지를 방문하는 것은 우려할 만한 현상이다. 이런 유적은 ‘일본과 일본인, 일본문화의 루트는 모두 한국이다’라는, 한국인의 기호에 맞는 역사인식에 의해 만들어진 것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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