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좋은 학군을 찾아 이사하는 가정이늘면서 서울 강남의 초등학교 교실은 어디나 만원이다.
“중산층과 상류 중산층의 많은 가정이 부부와 자녀를 위해 세상과 보조를 맞추라는 위협을 받고 있다. 그들은 경제가 어려워도 자녀를 좋은 학교에 보내야 한다는 고민에 빠져 있다. 그들은 자녀를 좋은 학교에 보내려고 주거비용이 상대적으로 높은 지역으로 이사한다.”
얼른 읽으면 특목고나 서울대, 연·고대 같은 명문대 진학을 위해 너나없이 서울의 강남으로 전학하려는 한국의 세태를 꼬집는 말 같다. 그러나 미국 하버드대 법학 교수 엘리자베스 워런과 매킨지 컨설턴트 출신의 아멜리아 워런 티아기가 저술한 ‘맞벌이의 함정-중산층 위기와 그 대책’이라는 책에 나온 대목이다. 사랑스러운 자녀를 ‘학교 폭력이 덜한 학교’ ‘상급학교 진학률이 높은 학교’에 보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선진국에서도 있는 일이다.
파산법에 정통한 법대 교수와 공교육 컨설턴트 출신인 두 저자에 따르면 미국에서도 부(富)의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그 원인 중 하나가 중산층이 자녀교육에 과도하게 투자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중산층은 실제로 무너지고 있다. 이들은 더 좋은 교육환경을 찾아 집값이 비싼 지역으로 이사하고, 공교육기관보다 학비가 비싼 사교육기관에 자녀를 보낸다. 약간의 경제적 여유밖에 없는 중산층이 무리하게 교육에 투자하다보니 가계가 부실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미국처럼 경제력이 탄탄한 나라도 교육문제로 중산층 붕괴 현상을 겪고 있는데, 한국은 더 말할 것도 없다. 한국이 미국보다 10년 뒤져 있다고 후한 점수를 매긴다면 10년 뒤 한국은 미국이 경험한 중산층 붕괴에 직면할 것이다.
교육비용의 착시현상
중산층이 자녀를 위해 돈을 쏟아붓는 것은 ‘교육비용의 착시현상’ 때문이다. 가정의 경제력과 자녀 교육비 지출 비중을 자녀 나이에 따라 그래프로 그려보자( 참조). 자녀가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 아버지는 회사에서 차장, 부장으로 뛰고 있다. 경제활동이 가장 왕성할 때다. 때마침 자녀가 대학입시라는 큰 관문을 눈앞에 두고 있어 부모는 사교육에 과감하게 투자한다. 부모들은 ‘아이가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만 교육비를 지출하겠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는 착각이다. 자녀 교육비는 대학 입학 후에 더 많이 들어가는 게 한국의 현실이다. 대학등록금은 늘 물가상승률을 훨씬 상회하는 수준으로 상승한다. 현재 대학 재학생은 등록금으로만 매월 50만~80만원(사립대학)을 내야 한다.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다. 비싼 대학 교재비, 취업용 영어 학원비, 기본이 되어버린 해외 어학연수비, 배낭여행비, 늘어난 용돈 등을 더하면 대입 준비로 많은 사교육비를 지출하는 중·고등학교 재학 때보다 훨씬 초과한다. 요즘엔 학력 인플레이션이 심해서 석사학위가 예전의 학사학위와 같아 자녀가 대학원까지 간다면 교육비는 가볍게 예상치를 뛰어넘는다.
이때쯤이면 아버지는 사회적으로 명예퇴직이니, 정년이니 하는 문제에 직면한다. 가정 경제력은 하강기에 들어선다. 높은 언덕을 남겨놓고도 작은 언덕을 빨리 넘느라 에너지를 소진한 마라톤 선수처럼 아버지는, 중산층은 무너지는 것이다.
경제학에는 특별히 ‘과소비’란 정의가 없다. 단지 소득수준에 비해서 소비가 지나치하면 ‘과소비’한다고 말한다. 연 수입 20억원의 부자가 1억원짜리 외제차를 사는 것은 과소비가 아니다. 5000만원 연봉자가 2000만원짜리 국산 중형차를 사는 것이 과소비다. 이런 기준으로 볼 때 교육 분야의 최대 과소비 계층은 중산층이다. 중산층은 자기보다 경제적으로 못한 빈곤층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향하는 부자와 견주려고 한다. 부자와 견주려고 하는 데서 중산층의 무리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