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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의 삶

리얼리즘 사진의 대가 최민식

아래로 아래로 걸어내려간 ‘카메라의 렘브란트’

  • 김서령 자유기고가 psyche325@hanmail.net

리얼리즘 사진의 대가 최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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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과 부조리 고발

“나의 카메라 워크는 절대로 가난한 사람에 대한 동정심이나 호기심을 드러낸 것이 아니다.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에 대한 통찰과 분노의 고발인 것이다. 나의 사진은 고난과 시련을 겪는 인간으로서의 아픔 그 자체에 초점을 맞췄다. 그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사진 속에 담겨 있는 인물의 고통에 직면하게 하였다. 이것은 비참하고 불쌍하다는 동정의 의미보다 인간이 누려야 할 삶의 존엄성을 일깨워주는 아픔이었다.”

최민식의 사진론이다. 대단한 독서량을 자랑하는 만큼 글도 잘쓴다. ‘휴먼(Human)’ 12권과 여자들의 얼굴만 모은 ‘우먼(Woman)’ ‘사진이란 무엇인가’ 말고도 여러 권의 사진 에세이와 사진 평론집을 펴냈다.

지난해 서울 일민미술관에서 열린 그의 사진전을 대여섯 차례 보러 갔다. 그가 일흔을 훨씬 넘긴 노대가(老大家)라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했다. 다만 1950~70년대에 고달프고 비참했던 우리들의 모습, 50년 시간을 뛰어넘어 눈앞에 달려드는 수백점 사진 앞에서 나는 거의 고통을 느꼈다. 충격이었다. 콧날이 시큰해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사진이 숱했다.

갈가리 찢어져 살이 다 드러나는 러닝셔츠를 입은 사내, 듬성듬성 빠진 이빨을 드러낸 채 밝게 웃는 지게꾼, 그의 때 낀 손톱과 검정고무신, 머리와 몸에 비닐을 둘러쓰고 비를 피하는 생선장수 아낙, 마른버짐이 핀 아이에게 국수가락을 걷어 먹이는 젊은 엄마, 산발한 머리에 누더기를 입은 채 길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서양 만화의 주인공을 그려대는 계집아이들, 그들 곁에 놓인 초라하기 짝 없는 보퉁이, 머리에 둘러쓴 다 해진 수건, 엄마의 빈 젖을 파고드는 굶주린 아기, 까까머리 동생을 업고 지치고 때묻은 얼굴을 밧줄 위에 묻은 누나….



고달프고 굶주리던 이 시대, 외신기자도 아닐 텐데 우리들의 부끄러운 얼굴을 이토록 다양하게 클로즈업해놓은 최민식은 누구인가, 그는 왜 이들에게 렌즈를 들이댔을까. 누추한 입성에 지쳐빠진 표정들, 다 해진 누더기 속에서 눈부시게 약동하는 아이들, 아름답지도 위대하지도 않은 이들을 주목한 까닭이 뭘까…. 나는 의아하고 신기하고 또 고마웠다. 그들의 일그러지거나 무연한 표정은 나로 하여금 어떤 아름다움이나 위대함보다 더 큰 둔중한 감동을 맛보게 했다. 새삼 겸허하고 유순해져서 나는 놀란 눈으로 세상을 둘러봤다.

그는 출생지가 경북 안동이라고 하지만 원래 고향은 황해도 연안이다. 천주교도라 동네에 정착하기 어려웠던 아버지가 전국을 떠돌다 안동에서 어머니를 만나 혼인해 그를 낳았다. 아버지는 공식 학력은 전무했으나 한문을 잘했고 독서를 즐겼다. 어려서 씨름판에 나갔다가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다리를 절던 아버지는 글씨도 잘 썼다. 그래서 생업으로 택한 것이 도장공이었다. 남의 편지 같은 것도 대필해주고 병풍 글씨를 써주기도 했지만 그 시절 객지에서 도장을 파서 생계를 꾸리기가 쉬울 리 없었다. 그가 일곱 살 때 아버지는 다시 연안으로 돌아간다. 기차를 타고 갔다. 서울까지 기차를 타고 와서 다시 개성 가는 차를 타고 거기서 연안행 차를 바꿔 탔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밀레 같은 그림을 그려라”

초등학교 때 그가 가장 잘한 과목은 그림과 서예였다. 아버지를 닮았던가 보다. 일제 강점기였으니 담임이 일본인이었다. 그는 최민식의 재주를 아꼈다. 그가 그린 그림을 들여다보며 일본에 유학해서 그림을 배우면 훌륭한 화가가 될 거라고 말했다. 그 말은 소년의 가슴 깊이 들어와 박혔다. ‘훌륭한 화가’란 말은 맘속에서 때로 보석처럼 빛났고 때로 가시처럼 찔러 상처를 냈다.

“없는 살림에도 아버지가 어디선가 물감을 사오셨어요. 화가가 되려거든 밀레같이 가치 있는 그림을 그리라고 하시면서. 밀레의 ‘만종’을 어디선가 구해오시기도 했어요. ‘이 사람처럼 농사짓는 가난한 사람들을 그림으로 그려라’고 하셨죠. 아버지는 성당에 열심히 다니셨고 가톨릭 성인들의 얘기를 많이 해줬어요. 돈 보스코 성인의 축제 얘기도 아버지께 들었거든요.”

그러나 가난은 모든 것을 지웠다. 밀레의 그림을 흉내내 가까운 사람들에게 나눠주며 찬탄을 받았지만 그림공부는 언감생심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땅이 없는 그들 가족은 지주 밑에서 소작을 부쳐야 했다.

“당시 연백 땅이 거의 개성 사람들 소유였어. 4대 6으로 나눠 먹는데, 식구가 많으니 7개월만 먹으면 양식이 바닥나 버려. 나머지 5개월은 굶어야 하는 거지. 그런 배고픈 체험이 없었으면 내가 오늘날 이런 사진을 찍지 않았을 거예요. 부유한 집안에 태어나서 외국 가서 공부했다면 지금쯤 풍경이나 누드사진을 예술이라면서 찍고 있겠지….”

식량도 안 되는 농사일이 싫어 평남 진남포의 군수공장에 취직했다. 얼마 후 광복을 맞아 고향에 돌아오지만 그래도 서울로 가야 그림 공부할 길이 열릴 듯해 소년은 서울로 올라온다. 차비는 고모를 졸라 빌렸다. 첫 상경한 그는 나중에 자기가 찍고 다닌 사진 속 인물과 비슷한 모습이었으리라.

“6·25전쟁이 나기 3년 전이었어. 일단 과자공장에 취직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용산에 있는 작은 미술학원에 다녔어요. 그것만으로도 뛸 듯이 기뻤지. 그러나 낯선 곳에서 먹고 자고 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이라야지. 정말 안 해본 것 없이 다 했어. ‘화가’의 꿈을 가슴에 품은 채 식당과 빵공장과 두부공장을 전전했어. 넝마주이, 지게꾼 같은 막노동도 닥치는 대로 했고. 인쇄소에서도 일했지. 군고구마 장사도 하고 나중에는 역전에서 구두닦이도 했어. 온종일 장사해서 돈 몇푼을 벌어놓으면 밤에 깡패들이 와서 다 빼앗아가버리고. 그러느라고 학원도 제대로 못 다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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