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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 시론

‘同而不和’ 넘어 ‘和而不同’의 시대로

진보는 도덕적 우월감 버리고, 보수는 권력 강박증 벗어나라

  • 박효종 서울대 교수·정치학 parkp@snu.ac.kr

‘同而不和’ 넘어 ‘和而不同’의 시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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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주의자들에게 여유가 없는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권력이 있다가 없어진 상황에서 빚어진 금단(禁斷) 증상 때문인지 사소한 일에도 화를 내고 이념의 잣대를 들이대기에 바쁘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위협한다고 판단되는 진보주의자들을 겨냥해 구국운동을 벌이고 국가 정체성 사수(死守)를 외치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다. 국가의 원칙을 바로잡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두 사람의 천박한 발언으로 대한민국이 무너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우려가 아닐까. 진보주의자들의 잘못을 비판하는 데 열중한 나머지 밀(J. S. Mill)이 말한 ‘악마의 대변자(devil’s advocate)’를 허용하는 자유주의의 이상을 가볍게 취급하는 모습을 보인 것도 이 때문이다. 이제 ‘전투적 보수주의자들’이 출현해 인터넷·오프라인 가릴 것 없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공격적 진보주의자들’에 맞서 ‘전투적 보수주의자들’이 등장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지만, 그 바람에 공동체는 완연한 싸움판으로 변해버렸다.

‘좋은 삶이 무엇인가’에 대해 진보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이 팽팽히 대립하는 현실에서 해법은 있는가. ‘좋은 삶’의 의미를 다르게 이해하는 진보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이 공존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문제는 설사 ‘좋은 삶’이나 ‘정의’가 무엇인가에 대해 자신 있게 답변할 수 있더라도 진보주의자들 가운데 그 누구도 그와는 상이한 시각을 갖고 있는 보수주의자들에게 보수의 이념이 잘못됐다고 설득할 수 있는 ‘지적 자원’을 갖지 못한 것이 분명하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이다.

이처럼 좋은 삶이나 정의에 대한 보·혁의 시각이 크게 달라 어느 쪽이 우월한지 결론을 내릴 수 없을 때의 대안은 무엇인가. 좋은 삶이나 정의에 대한 비전이 ‘다름’을 넘어 모순성을 띠는 상황에서 중요한 과제는 ‘정의의 정치’보다 ‘평화의 정치’, 혹은 ‘모두스 비벤디(Modus Vivendi)의 정치’가 구현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한국 사회는 보·혁의 생각이 다르고 마찰이 심각해 다양성은커녕 투쟁성이 두드러진다. 흔히 자신의 생각과 다른 사람의 의견을 접하면, 그 의견이 ‘틀리다’고 말한다. 사실 여기서 ‘틀리다’는 ‘다르다’는 의미일 뿐인데, 우리는 그 ‘틀리다’를 ‘옳지 않다’는 것으로 왜곡해서 이해하는 것이다.

‘다르다’와 ‘틀리다’의 차이



왜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틀렸다’고 단정하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진보든 보수든, 사람들은 스스로 직면한 문제를 선과 악의 문제, 혹은 정의나 불의의 문제로 틀짜기를 하기 때문이다. 나이 먹은 세대는 젊은 세대를 ‘덜 익은 세대’로, 젊은 세대는 나이 먹은 세대를 ‘쉰 세대’로 낙인찍는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들은 같은 산마루에서 해를 바라보는 존재들이다. 젊은 세대는 뜨는 해를, 나이 먹은 세대는 지는 해를 바라보는 것이 다를 뿐이다. 또 진보주의자는 보수주의자를 없어져야 할 불의의 존재로 단정하는가 하면,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보수가 없는 진보는 무의미하고, 진보가 없는 보수도 존재이유가 없을 만큼 양자는 상호의존 관계임을 알아야 한다.

‘모두스 비벤디의 정치’가 가능하려면 평화와 공존의 필요성에 따라 이웃에게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가를 일러주고 싶은 욕구를 자제하거나 절제해야 한다. 한국 기업인들이 미국 기업인들과 함께 사업을 하기 위해 그들에게 배아줄기세포를 이용한 생명공학, 혹은 낙태에 관한 자신들의 견해를 피력하고 설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상업적 분쟁에 대한 상호 견해 차이를 해결할 수 있는 제도를 공동으로 마련하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진보주의자나 보수주의자가 같은 하늘을 이고 사는 것은 분명하지만 같은 신을 숭배할 필요는 없다. 또 같은 땅을 밟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같은 역사의식이나 도덕관, 정의관을 공유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점은 진보건, 보수건 그 누구도 강압적인 방식으로 상대방을 변화시키려 시도하는 것은 금물이라는 것이다.

원론적으로 말해 사람들은 정의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고 있고 정의감도 가지고 있지만, 각론적으로 정의의 내용에 대해서는 10인10색이다. ‘공적의 원리’를 중시하는 자유주의자와 ‘필요의 원리’를 중시하는 사회주의자, 혹은 ‘성장’을 강조하는 보수와 ‘분배’를 역설하는 진보는 부딪치게 마련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의’와 같은 가치를 강조한다면 각자가 자신의 정의관이 옳다고 강변하는 나머지 정의는 엄숙성을 잃고 위험한 것으로 변질될 것이다. ‘각자에게 그의 몫을 주라’고 규정하는 정의의 가치는 특정한 요구나 불만을 가진 사람들 모두에게 오·남용될 수 있기 때문에, 정의에 관한 과잉요구는 공동체를 파국(破局)이나 시민적 무질서 상태로 전락시킬 수도 있다. 350년 전 토머스 홉스는 크롬웰로부터 비롯된 영국의 내란(內亂)이 바로 이러한 문제 때문에 발생했다고 진단했다.

‘모두스 비벤디’를 주장한다고 해서 정의나 양심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이미 아우구스티누스는 “정의가 없는 왕국은 무엇인가, 대도적들인가!”라고 절규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정의는 이성적인 현상 못지않게 감성적인 현상이다. 정의를 은유적으로 표현한다면 ‘열정이라는 불꽃으로 점화되는 가연성 물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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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효종 서울대 교수·정치학 parkp@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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