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월호

망명한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의 기구한 가족사

“나는 남한 초대 항공사령관의 아들, 장택상 전 총리의 손자사위”

  • 입력2006-01-13 11: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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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는 아프다. 역사가 여전히 현실에 강한 힘을 미치는 땅에서는 더욱 그렇다. 2005년 5월 남한으로 망명한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이모씨. 그가 자신의 본가와 처가가 모두 대한민국 건국의 핵심역할을 담당한 가문이라고 밝힌 것으로 확인됐다. 한국 공군 창설의 주역인이영무 전 항공사령관의 아들은 어떻게 북한에서 최고지위에 오를 수 있었을까. 우파의 거두였던 장택상 전 총리의 딸과 사위는 왜 북으로 갔을까. 이씨는 왜 55년 전 떠났던 서울로 돌아왔을까. 시간을 넘어 반복되는 가혹한 역사의 아이러니 한 조각.
    망명한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의 기구한 가족사

    2005년 4월11일 평양 만수대의사당에서 열린 최고인민회의 11기 제3차 회의에 참가한 대의원들.

    한국의 초대 외무장관과 3대 국무총리를 지낸 장택상의 셋째딸 장병혜(73)씨는 2005년 10월말 신분을 밝히지 않은 한 젊은 남자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1964년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래 40여 년간 외국에서 생활하면서 다양한 일을 겪었지만, 그처럼 묘한 경험은 처음이었다. 남자는 “당신의 조카사위, 그러니까 월북한 당신 언니의 사위가 남한에 왔다. 당신을 만나고 싶어한다”고 말했다. 장씨가 “효선(가명)이 남편이 왔다는 말이냐”고 되묻자 남자는 “그렇다”고 답했다.

    장씨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귀가 번쩍 뜨였다고 말한다. 자신이 아직 성인이 되기 전에 헤어진 큰언니의 딸, 그러니까 불과 여섯 살 때 마지막으로 본 조카 효선이의 남편이 서울에 있다는 이야기였다. 장씨가 “조카는 어디 있나, 그 아이도 함께 탈북했느냐”고 묻자 남자는 “그건 아니다. 남편 혼자 내려왔다”고 답했다.

    평소 자주 가던 호텔 커피숍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전화를 끊은 후 장씨는 한참을 고민해야 했다. 1970년대 말 최은희·신상옥 부부 납치사건으로 뒤숭숭하던 무렵 일본에서 생활하던 장씨는 납치 미수를 경험한 적이 있었다. 갖가지 걱정이 앞선 장씨는 이런 일에 정통한 지인들에게 의견을 묻기도 했다. 결국 나가지 않는 것이 낫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전화를 걸었던 남자는 자신의 연락처를 남기지 않았다.

    고민 끝에 장씨는 약속장소에 아들을 내보냈다. 아들에게도 이들과 접촉하지는 말고 먼발치에서 어떤 사람들이 나오는지 지켜보라고 당부했다. 약속장소에 나갔다가 돌아온 아들은 “젊은 남자와 노인 한 명이 와서 한참을 기다리다 가더라”고 전했다. 노인은 큰 키에 서울말씨를 썼다고 했다. 그날 밤 장병혜씨는 묘한 불안감 때문에 친구집에 가서 잤다.

    과연 그 노인은 누구였을까. 정말 장씨의 조카사위였을까. 그가 장씨를 만나고 싶어한 이유는 무엇일까.



    반세기의 아이러니

    2005년 7월17일, ‘연합뉴스’와 ‘월간조선’을 시작으로 국내 언론들은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한 사람이 5월 무렵 제3국에서 한국으로 정치적 망명을 요청해 현재 국가정보원의 조사를 받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망명한 대의원은 북한의 군수경제를 총괄하는 제2경제위원회 산하 해양공업연구소의 연구원으로 활동했으며, 해양공업연구소는 명칭과 달리 주로 무기 개발, 제조 및 판매 업무를 하는 곳이라는 보도였다.

    최고인민회의는 북한 헌법이 규정한 최고주권기관으로 우리의 국회에 해당한다. 북한은 2003년 8월 제11기 최고인민회의 선거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비롯한 임기 5년의 대의원 687명을 뽑았다. 이후 국가정보원은 사실 확인을 거부했고, 북한은 관련보도가 나온 이튿날 곧바로 “우리 공화국의 영상(이미지)을 깎아내려 보려는 가소로운 모략책동”이라는 외무성 대변인 담화를 발표했다. 그러나 당국자들은 비공식적으로 북한 최고위 인사의 망명을 사실상 인정했다.

    이후 언론에는 국정원 당국자들이 이 인물에 대해 ‘현직’이 아니라 ‘전직’이라고 확인해줬다는 보도가 뒤를 이었다. 더욱 구체적인 정보가 탈북자 단체와 정부 관계자들 사이에서 조금씩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은 11월에 들어서였다. 국정원 안전가옥에서 조사를 마친 이 인물은 나이가 72세로, 당초에는 김씨 성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이모씨라는 이야기였다. 이 전 대의원은 최근에는 비교적 자유롭게 생활하고 있지만, 여전히 국정원의 강도 높은 보호를 받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무엇보다 눈길을 끈 것은 이 전 대의원이 설명했다는 본인의 가족사였다. 자신이 한국 공군의 창설멤버 가운데 한 사람인 이영무 전 육군 항공사령관의 아들이며, 장택상 전 총리의 손자사위라는 것이었다(이에 대해 탈북자 단체 관계자들과 정부 관계자들의 말이 약간의 혼선을 빚었다. 이 전 대의원이 장 전 총리의 사위라는 전언과 손자사위라는 전언이 엇갈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이 전 대의원은 본가와 처가가 모두 한국 정부 수립과 군 창설의 핵심을 담당한 가문인 셈이다. 이런 배경을 가진 인물이 북한에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라는 높은 지위에 올랐다는 사실, 그리고 반세기가 흐른 뒤 서울로 망명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공군 창설 7인 간부’

    망명한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의 기구한 가족사

    공군본부 홈페이지에 게시된 창설 7인 간부의 사진. 윗줄 오른쪽 끝이 이영무 초대 항공사령관이다. 왼쪽 끝은 광복 전 그와 함께 중국에서 활약했던 최용덕 전 공군참모총장.

    이 전 대의원의 아버지라는 이영무 전 사령관은 대한민국 공군사(史)에 이름을 남긴 주요 인물이다. 공군사는 1948년 미군으로부터 정식으로 간부교육을 받아 육군 내에 항공부대를 처음 조직한 일곱 명의 멤버를 ‘공군 창설 7인 간부’라는 이름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들 7인 간부 중 상당수는 이후 군에서 요직을 역임했다. 이 전 사령관은 바로 7인 간부 가운데 한 사람으로 공군본부 홈페이지에 사진이 실려 있다.

    7인 간부는 항공부대 창설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항공건설협회’라는 민간단체를 조직하기도 했는데, 그중 선배 축에 든 이 전 사령관은 협회의 부회장을 맡았다. 국가보훈처의 공식기록에 따르면 이 전 사령관은 광복 이전에는 독립군 양성을 추진하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추천을 받아 1925년 중국 운남육군항공학교를 졸업한 뒤 국민당 군대에서 활약했다. 광복이 되어 귀국한 후에는 1948년 조선경비대 보병학교와 경비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통위부(지금의 국방부) 산하 항공부대를 창설하는 데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이후 육군 산하에 배치됐던 항공부대는 1948년 연말에 이르러 육군 항공사령부로 개편되고, 이영무 초대 사령관이 취임한다. 창군 시기에 활약했던 원로 군 관계자들은 이 전 사령관을 “50대 중년답게 풍채가 두둑하고 키도 꽤 컸다. 인간관계가 원만해 두루 적이 없었던 사람”이라고 회고했다.

    망명한 이 전 대의원의 나이를 역산해 보면 그는 이 무렵 10대였다. 이 전 대의원은 이때 대구 경북중학교를 졸업했다는 전언이다(노태우 전 대통령과 같은 시기에 학교를 다닌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영무 사령관과 함께 근무했던 군 원로인사들 가운데 그의 아들이나 가족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당시 항공사령부가 경기도 수색에 있었는데도 그가 경북중학교를 졸업한 까닭이 무엇인지 또한 확인되지 않았다.

    공식 기록이나 당시 동료들의 회고를 통해 명확히 확인할 수 있는 이영무 전 사령관의 행적은 여기까지다. 이후 1949년 어느 무렵에 갑자기 종적을 감췄다는 것. 원로 군 관계자들은 1948년 10월 여수·순천사건 이후 대대적으로 불었던 군내 좌익소탕 바람에 희생됐다는 소문이 있었다고 전한다.

    장지량 전 공군참모총장은 “그 무렵 아까운 사람들이 소리도 없이 끌려가는 경우가 많았다. 구체적으로 무슨 혐의가 있었는지, 정말 좌익이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지금처럼 영장을 제시해 데려가서 정식으로 재판받는 시절이 아니었기 때문에 동료들도 감히 확인할 엄두를 못 냈다”고 회고했다.

    공군 창설 7인 간부 가운데는 이영무 전 사령관과 후일 공군참모총장을 지낸 최용덕 장군 두 사람만이 중국 출신이었다. 대한민국 공군사는 공군의 뿌리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추천으로 중국 국민당 군대에서 활약하며 ‘본토 수복’을 꿈꾸던 인물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이영무 전 사령관은 대한민국 공군의 뿌리 중의 뿌리인 셈이다. 그런 그가 왜 좌익 혐의를 받게 된 것일까.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분명한 것은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한 이후로는 그를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다. 당시 동료들은 “계속 감옥에 있다가 인민군이 서울에 진격했을 때 풀려 나왔고 이후 가족과 함께 북한으로 갔다는 소문이 바람결에 들려온 적이 있다”고 전했다. 강제납북인지 자진월북인지도 분명치 않다는 이야기였다. 이 전 대의원도 관계기관에서 10대 후반이던 전쟁 중에 북한으로 갔다고 진술한 바 있다.

    남로당원이던 장택상의 사위

    드라마틱하기로는 이 전 대의원의 처가로 알려진 장택상 전 총리의 장녀 장성애(가명)씨의 운명도 못지않다. 1910년대 말에 태어나 경북고녀를 졸업한 재원인 장씨는, 1940년 식산은행에서 서기로 일하던 민경식(가명)과 결혼한다. 기구한 것은 남편인 민씨가 광복 후 남조선로동당 지하당원으로 활약했다는 사실. 남로당 지하당 임시총책을 지낸 박갑동씨의 책 ‘서울 평양 북경 동경’은 민씨가 자신과 동료들에게 비밀 아지트를 제공하며 협력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시기는 그의 장인인 장택상 전 총리가 초대 수도경찰청장으로 재직하며 ‘좌익 척결’의 최전선에서 싸우고 있을 때다. 1960년대 씌어진 장 전 총리의 자서전이나 회고록 곳곳에는 5남5녀인 자식들에 대한 이야기와 사진이 등장하지만, 장녀 성애씨에 대한 언급은 한 군데도 찾아볼 수 없다.

    민씨는 일제 강점기에 관비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도쿄의 제국대학에 유학해 경제학을 전공한 수재였다. 광복 후 산업은행에서 경리계장 자리까지 승진한 그는 6·25전쟁이 발발해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당시 그간의 지하당 활동 공로를 인정받아 한국은행 총재에 임명되기도 했다는 전언이다. 이후 민씨는 인민군이 퇴각할 무렵 가족을 이끌고 월북했다고 장성애씨의 형제들은 전했다. 당시 이들 부부에게는 여섯 살짜리 딸과 네 살짜리 아들이 있었다. 이 딸이 바로 이 전 대의원의 부인이라는 민효선씨다. 장씨의 형제들은 조카 민씨가 “유난히 총명하고 귀염성이 많은 아이였다”고 떠올렸다.

    민씨 부부가 월북 이후 어떻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다소 엇갈린다. 서울에 있는 장씨의 형제들은 “1990년대 초반 남북간 해빙무드가 조성될 무렵 몇 가지 소식이 들려왔다”고 말한다. 부부와 일가족이 모두 1950년대 후반 대대적인 남로당 출신 숙청 시기에 처형됐다는 소식이었다.

    이 무렵은 1956년 제3차 조선로동당 대회를 계기로 ‘김일성 1인체제’의 막이 오르면서 박헌영과 이승엽을 비롯한 남로당 계열 핵심 인사들이 간첩혐의로 유배되거나 처형된 시기다. 이 때 민씨 일가도 함경도에 있는 탄광에 끌려가 고생하다가 결국 일가족이 모두 산속 오두막에 갇혀 끔찍한 방법으로 죽임을 당했다고 들었다는 것이 가족들의 설명이다.

    그러나 박갑동씨의 책에 나오는 설명은 이와는 다르다. 1950년대 후반 다른 남로당 출신은 모두 지방으로 추방당했지만, 민씨만큼은 중앙당 간부부장을 지내던 박금철의 도움으로 간신히 평양시내에 남을 수 있었다는 내용이다. 그때까지 중앙당에서 일하던 민씨는 이후 중앙통신사 외신번역원으로 신분이 강등되긴 했지만, 강제로 유배된 다른 남로당 동료들에 비하면 운이 좋은 경우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민씨 일가에 대한 다른 기록은 더는 발견할 수 없었다.

    가족을 남겨두고

    확실한 것은 이 전 대의원의 부친이라는 이영무 전 사령관이나 장모인 장성애씨, 장인인 민경식씨 모두 북한에서 높은 지위에 오르지는 못했다는 사실이다. 국가정보원의 북한 주요인물 파일을 비롯해 관련기관의 인물리스트 어디에서도 이들의 이름은 확인할 수 없다. 이 전 사령관의 경우 당시로서는 드물었던 조종사였으므로 어떤 식으로든 주요 직위에서 일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기자가 접촉한 인민군 출신 인사들 중에는 그의 이름을 아는 이가 없었다. 민씨 부부의 경우 숙청에서 살아남았다 해도 남로당 출신이라는 한계가 두고두고 족쇄가 됐을 것으로 보인다.

    열 살 이상 나이 차이가 나는 이 전 대의원과 부인이라는 민효선씨가 어떻게 만나 결혼하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확인되지 않았다. 이 전 대의원은 전쟁 후 중국 하얼빈에 유학해 공과대학을 졸업한 뒤 박사학위를 취득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간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이 전 대의원은 이후 제2경제위원회 산하 해양공업연구소 연구원으로 활동하면서 주로 미사일 등 군사무기의 개발 및 제조, 대외판매 업무를 담당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1970년대에 출범한 제2경제위원회는 북한의 군수경제를 총괄하며, 내각보다 더 강력한 권한을 갖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남측 창군멤버의 아들이자 남로당 인사의 사위라는 열악한 ‘출신성분’에도 불구하고, 이 전 대의원은 무기개발과 군수경제 분야에 대한 전문지식, 중국 유학 경험으로 얻은 탁월한 어학실력에 힘입어 전형적인 테크노크라트로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과의 군사기술 협력, 대만과의 무기거래 시도 등이 그가 담당한 분야였다고 한다. 1990년에서 98년까지 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지내는 등 승승장구했지만, 2000년대 들어 담당하던 업무에서 큰 문제가 발생했고 이에 따라 출장차 나온 중국 현지에서 귀국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후 여러 가능성을 타진하며 해외에 머무르던 그는 2005년 5월에 이르러서야 중국에 있는 한국 관련기관에 망명을 요청한 것으로 전해진다. 북한에 있는 가족들은 끝내 데리고 나오지 못한 혈혈단신 망명이었다.

    망명한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의 기구한 가족사

    장택상 전 총리의 회고록에 실린 가족사진. 장녀인 장성애씨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평양에서 관료로 생활했던 한 탈북인사는 “출신성분이 좋은 사람은 빠져나갈 수 있는 실수도, 이씨 같은 인물이 저지르면 벗어나기 어려운 것이 평양 권력사회의 분위기”라며 “그의 망명 결심에도 그러한 배경이 일정부분 작용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오히려 평양으로 돌아가면 가족의 안위에 더 큰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 아니겠느냐는 이야기였다. 한 정부 관계자는 “망명 직후에는 대만과 북한간 핵무기 거래설 등 그가 가진 정보에 관심이 집중됐지만, 권력중심에서 고급정보를 많이 접한 것도 아니고 시간도 많이 흘러 의미가 작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말했다.

    ‘신동아’는 이상의 내용에 대한 이 전 대의원의 생각을 듣기 위해 국정원측에 공식적으로 의사를 타진했다. 그러나 국정원 홍보관리관실은 “탈북인사에 대해 어떠한 확인이나 언급도 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고 밝혔다. “확인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이 전 대의원의 의사가 궁금하다는 것”이라고 거듭 요청했지만 국정원측의 답변은 변함이 없었다.

    “만날 이유가 없다”

    장병혜씨가 약속장소에 나가지 않자, 10월말 전화를 걸었던 익명의 젊은 남자는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고 한다. “왜 나오지 않았느냐”는 그의 질문에 장씨는 “신분도 밝히지 않은 사람을 신뢰할 수 없기 때문에 나가지 않았다”고 답한 뒤, “통일부 장관이든, 국정원장이든, 대통령이든 공식적인 절차를 거쳐 요청하라”고 선을 긋고 전화를 끊었다. 그후로 12월 중순 현재까지 그 남자는 다시 연락을 하지 않았다.

    기자는 장씨에게 “10월말 호텔 커피숍에 나온 인물이 효선씨의 남편이 분명하다고 해도 만날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장씨의 반응은 예상외로 단호했다. 언니 가족이 끔찍한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 10년 동안 극도의 분노를 겨우겨우 억누르며 살아왔다는 이야기였다. 설령 그가 조카사위라고 해도, 자신이 망명을 택하는 순간 아내와 자식은 엄청난 고초를 겪으리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혼자 빠져나온 사람이라면 만날 이유도 없고 인정할 수도 없다고 거듭 못 박았다. 숨을 고르는 장씨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반세기가 넘는 시간이 지났지만 역사는 여전히 현실이었다. 그리고, 그만큼 고통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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