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덜란드 삽화가 테오도르 드 브리가 1590년 존 화이트의 그림을 판화로 옮긴 작품, ‘원주민 모녀.’
그러나 이들에 앞서 신대륙에서 식민의 꿈을 펼쳐보려는 많은 노력이 있었다. 영국의 신대륙 건설은 선구자들의 희생과 좌절, 그리고 이에 굴하지 않는 도전정신을 밑거름으로 이뤄진 것이다. 이 여명기 역사에서 가장 주목받는 것은 엘리자베스 조정(朝廷)의 풍운아 월터 롤리(Walter Raleigh)가 지금의 노스캐롤라이나 로어노크섬에 건설하고자 했던 식민지다.
롤리는 1585년과 1587년 두 차례에 걸쳐 식민 원정대를 로어노크에 보냈다. 그러나 첫 원정대는 가혹한 환경을 견디지 못하고 불과 10개월 만에 영국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두 번째 원정대는 후속 원정대가 당도했을 때 이미 종적이 묘연한 상태였다. 수차례의 수색과 탐문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행방을 끝내 알 수 없어 역사의 미스터리가 되고 말았다.
이 시기에 영국은 바야흐로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하고 대서양의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함으로써, 유럽의 뒤처진 섬나라에서 해양제국을 꿈꾸는 신흥 강국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영국이 대서양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는 데 신대륙 개척을 향한 롤리의 꿈과 집념이 견인차 구실을 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여왕을 기려 자신이 버지니아라고 명명한 땅에 ‘롤리시(The City of Raleigh)’를 건설, 자신의 이름도 함께 남기려 했던 롤리의 꿈은 이렇게 무산되고 말았다.
롤리의 식민 사업은 실패했지만, 그의 꿈은 후세에 위대한 유산으로 남아 ‘멋진 신세계’를 건설하는 원동력이 됐다. 영원한 제국 건설을 향한 그의 비전은 ‘언덕 위의 도시’를 세우고자 한 존 윈스롭의 희원(希願)에, 다니엘 분의 서부 개척 신화에, 조지프 스미스가 이끈 몰몬교도들의 유타 장정에, 20세기 우주 탐험의 열망에 어른거리고 있다. 그 유산의 직접적 상속자인 노스캐롤라이나 사람들은 롤리의 비전과 정신을 기려 1792년, 노스캐롤라이나의 중앙 부근에 주(州)의 새로운 행정수도를 건설하고 그 이름을 ‘롤리’로 명명했다.
‘팍스 아메리카나’의 始原으로
롤리의 ‘사라진 식민지’ 신화를 찾아 로어노크섬의 롤리 요새 사적지(Fort Raleigh National Historic Site)를 돌아보려 노스캐롤라이나의 채펄힐을 떠난 것은 2002년 8월 하순 무렵이었다. 인근의 듀크대에서 1년간 연구년을 보내기 위해 이곳에 도착한 직후였다.
이곳 사람들은 채펄힐, 더럼, 롤리를 잇는 삼각형의 지역을 흔히 ‘연구 삼각지’라 부른다. 채펄힐의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 더럼의 듀크대, 롤리의 또 다른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를 주축으로 연구소가 많이 들어서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의학, 생명공학 분야 연구가 활발한 이 지역은 캘리포니아의 실리콘밸리와 더불어 미국에서 고급 연구 인력의 밀도가 가장 높은 곳이다. 자신의 이름을 딴 도시를 중심으로 한 지역이 미국 최고의 연구 단지를 이루고 있다는 걸 알면 엘리자베스 궁정의 진정한 르네상스인이던 롤리 또한 흐뭇해하리라.
롤리를 벗어나니 어디를 보나 평탄한 초원과 숲이다. 병풍처럼 도로의 양쪽을 에워싼 나무숲 너머로 하늘이 푸르다. 도로변의 나무는 곧게 뻗은 북미의 미송이나 전나무 등 침엽수가 주종을 이룬다. 햇살은 여전히 여름의 열기가 배어 있다. 이렇게 3시간 넘게 달린 후 단조롭던 풍경이 달라진다고 생각한 순간, 홀연 길이 트이면서 긴 다리가 환상처럼 펼쳐진다. 야생동물 보호지대로 유명한 앨리게이터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다. 왼쪽 멀리 앨버멀만(灣) 쪽으로 하얀 파도가 눈부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