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버지니아 식민지 의회. 독립혁명 당시 페트릭 헨리가 “자유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사자후를 토한 곳이기도 하다.
400여 년 가까운 세월의 풍상을 견뎌온 고색창연한 건물은 허름하면서도 경외심을 불러일으킨다. 1607년의 이주자들 또한 이 자리에 돛폭으로 얼기설기 지붕을 이은 천막 교회를 짓고 로버트 헌트 신부의 집전으로 예배를 보았다. 신대륙 최초의 영국 국교회였다.
교회당 앞에는 제임스타운 식민지의 주역으로 역사에 기록된 존 스미스의 동상이 제임스 강을 굽어보며 당당하게 서 있다. 강폭이 넓은 제임스 강은 도도히 흐른다. 강은 그 옛날에도 이렇듯 도도한 흐름으로 이주자들을 맞았을까. 첫 이주자의 한 사람으로 훗날 지사가 된 조지 퍼시가 “강물의 수심이 6피트가 넘어 강가 바로 가까이에 배를 정박하고 나무에 닻줄을 매었다”고 쓴 걸 보면 제임스 강은 늘 수량이 이렇게 풍부했던 모양이다. 이주자들은 어쩌면 그 도도함에 압도돼 강 이름을 포우하턴에서 제임스로 바꾸었는지도 모른다.
첫 이주자, 근대 자본주의 첨병
첫 이주자들은 정착지로 로어노크에 이어 다시금 섬을 택했다. 왜일까. 런던의 버지니아 식민회사가 이주자들의 손에 들려보낸 ‘식민지 건설 지침’을 읽어보면 그 까닭을 짐작할 수 있다. 정착지 선정 지침만 추리면 다음과 같다.
● 정착지는 항해 가능한 강 연안, 물산이 풍부한 곳으로 할 것.
● 강은 육지 깊숙이까지 항해 가능하되, 정착지는 강어귀에서 적어도 100마일 이상 떨어진 곳으로 정할 것.
● 이런 조건을 충족시키는 강이 여럿일 경우에는 서북항로의 발견에 용이하 도록 서북쪽으로 굽은 강을 택할 것.
● 정착지가 섬이 아니고 육지일 경우 적의 육로 공격시 쉽게 철수할 수 있도록 가능한 한 강 연안으로 정할 것. 또한 적이 해로로 공격해올 경우 총을 쏘아 격퇴할 수 있도록 강폭이 너무 넓지 않은 지점을 택할 것.
● 어떤 경우에도 정착지와 강 연안 사이에 원주민이 거주하지 않도록 할 것.
내륙으로 진출하는 교두보 기능을 하면서 내륙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당시 신대륙 경영의 맞수인 스페인 식민자들의 공격에 기민하게 대처할 수 있는 곳. 이런 지정학적 요건을 충족시키는 곳으로 섬이 제격이었던 것이다. 지침에는 이밖에 인적 자원 운용 방식, 정착지의 구도, 인디언과의 교류시 주의사항 등도 구체적으로 실려 있다.
이런 세심함은 새삼 버지니아 식민자들의 성향을 되돌아보게 한다. 신분상으로 그들은 월터 롤리처럼 신대륙 식민사업으로 일확천금을 꿈꾼 귀족과 젠틀맨 계층이 주축을 이뤘다. 그러나 날로 팽창하는 제국 경영의 실무를 맡은 이들의 의식은, 이 치밀한 지침이 말해주듯, 이미 역사의 주도세력으로 부상한 중산계층의 가치로 철저히 무장하고 있었다. 그들은 막스 베버가 로빈슨 크루소의 의식에서 발견한 저 ‘내면의 수도사(internal monk)’에 의해 나날의 사고와 행동이 통제되는 근대 자본주의의 첨병, 바로 그 선구자들이었다.
첫 정착자 60% 사망
1606년 12월20일, 첫 이주자 144명이 세 척의 배에 분승해 영국을 떠났다. 선단의 항해 책임은 경험 많은 크리스토퍼 뉴포트가 맡았다. 그는 존 화이트와 함께 로어노크 식민지의 구원 항해에도 참여한 적이 있어 신대륙의 뱃길에 밝았다. 국왕 제임스 1세는 런던의 버지니아 식민회사에 식민사업 특허를 내주며 세 가지를 특히 당부했다. 금을 찾을 것, 아시아로 가는 서북항로를 찾아볼 것, 로어노크에서 사라진 이주자들의 행방을 탐문할 것 등이었다. 로어노크 식민지 건설 실패 이후 2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식민지 건설 목적은 변화가 없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