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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에세이

발견의 미학

발견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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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열차와 열차 역의 존재에 대해 새롭게 눈을 뜨게 해준 것은 인상파 화가들, 마네와 모네다. 한 달이면 두어 번, 심지어 서너 번까지 서울역사를 찾는 나는 열차 출발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열차를 타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기다리는 동안, 신청사 2층 라운지 벤치에 앉아 저 아래 펼쳐진 플랫폼과 그 사이를 오가는 발길과 그 모든 것을 감싸고 있는 저 높은 천장과 벽의 투명한 철골 구조를 예술품을 감상하듯 하나하나 음미한다. 아니, 그것이 예술품이 아니고 무엇이랴. 모네의 생 라자르 역이 아니었어도 그것들은 나에게 그런 의미를 던질 수 있었을까?

열차와 마찬가지로 나에게 깊은 인상을 주는 것은 다리다. 강의 이쪽과 저쪽을 이어주는 다리, 바다의 이쪽과 저쪽을 이어주는 대교. 열차보다도 자주, 아니 매일 나는 다리를 건너며 전율한다. 하나의 다리가 거기 놓여 있기까지 그것이 거느리고 있는 장치와 풍경에 열광한다. 우아한, 또는 단아한 난간들과 그 사이를 별처럼 수놓은 가로등불들, 출렁이는 물결 속에 듬직하게 곧추 서 있는 기둥들, 그리고 무엇보다 창공을 분할한 아치 탑들의 행진.

나는 초고속 열차를 타고 부산, 또는 서울로 향할 때 목적지에서 할 일을 깡그리 잊어버리고 열차라는 하나의 공간에서 짧은 삶을 산다. 그렇듯 하나의 다리를 통과하는 동안, 이쪽에서 저쪽으로 가는 목적을 던져버리고 오로지 다리, 그 자체 예술품을 감상한다. 그래서 어느 날에는 자유로를 타고 홍대 앞으로 가다가 오직 한강에 놓여 있는 다리들에 홀려 내처 팔당까지 내달리거나, 거꾸로 홍대 앞에서 강변북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석양에 더욱 붉게 빛나는 방화대교에 홀려 다리를 건너 영종대교까지 이르고 만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혈육이나 지인의 초대를 받아 출발할 때 제일 먼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내가 건널 수 있는 다리들이다.

대천 어머니에게 가는 길에는 7000m가 넘는 서해대교가 있고, 송파 막둥 오라비에게 가는 길에는 열 개도 넘는 다리들 중 청담대교가 있다. 그리고 아침저녁 직장인 동아대학으로 가는 광안리 푸른 바닷길에는 백색의 아름다운 건축물인 광안대교가 있다. 바다같이 넓은 한강변을 달릴 때와 마찬가지로, 이제는 진정 드넓은 바다 위를 달리며 나는 겨드랑이에서 비죽비죽 날개가 돋아날 듯 기분이 마구 상승하는 것을 느낀다.

열차의 경우처럼 내가 다리에 심취하게 된 계기가 예술 작품에서 비롯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나는 도쿄 근대서양미술관에서 모네의 뿌윰한 안개에 싸인 ‘워털루 브리지’를 만나기 이전에 ‘다리 위에서’(1990)라는 단편 소설을 썼으니 말이다. 소설 ‘다리 위에서’는 다리를 매개로 한 현상학적 환원을 그린 작품이다. 나와 너, 의식과 무의식, 현실과 공상의 연결, 즉 ‘이어줌’을 상징한다.



열차와 열차역, 그리고 다리 등 우리의 삶을 편리하게 해주는 문명의 시설은 누가 보고 누가 느끼느냐에 따라 차가운 철근 콘크리트 건축물의 옷을 벗고 하나의 시학, 하나의 예술로 존재한다. 태양은 매일 묘지 위에, 또 바다 위에 떠오른다. 문제는 무엇을, 어떻게 보는가다. 헤밍웨이는 1925년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를 쓰면서 이렇게 적었다. “세상이 무엇인가를 알려고 하기보다 그 속에서 어떻게 사느냐가 나의 관심사다.”

발견의 미학
咸貞任
●1964년 전북 김제 출생
●이화여대 불문학과
●작품 : 소설집 ‘이야기, 떨어지는 가면’ ‘동행’‘당신의 물고기’ ‘춘하추동’, 산문집 ‘하찮음에 관하여’ ‘인생의 사용’ ‘나를 사로잡은 그녀, 그녀들’, 장편소설 ‘행복’ 등
●現 동아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일상보다 강력한 것은 없다. 일과 옷과 가구와 마누라, 전쟁의 공포까지 한입에 꿀꺽 삼키는 것이 일상, 습관의 힘이라 했다. 예술은 그 막강한 일상과 습관의 벽에 반하는 유일한 힘이다. 불어오는 봄바람 속에 내 눈의 예술, 내 삶의 미학을 돌아볼 일이다. 그리하여 매일 입 속으로 중얼거려볼 일이다. 나는 내 영혼을 찾으러 떠난다!

신동아 2006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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