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6월호

‘공천=당선’, 한나라당 5·31 영남 공천 요지경

“능력보다 ‘충성서약’ 주효, 약발 안 먹히면 의원 물먹이기!”

  • 이동훈 한국일보 정치부 기자 dhl3457@naver.com

    입력2006-06-07 11: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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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방선거 공천, 지역구 의원이 8할의 권한 가졌다”
    • “2등 골목대장은 1등 골목대장에게 고개 숙이며 반란 꿈꾼다”
    • 공천 헌금, ‘후불에 분납’도 가능
    • “공천 못 받으면 밥값 술값 장부 내놓을 수밖에”
    • 유력 정치인이 물먹는 이유 따로 있다
    ‘공천=당선’, 한나라당 5·31 영남 공천 요지경

    한나라당 지방선거 공천 금품 수수 의혹과 관련, 기자회견을 열고 있는 정동영 열린우리당 당의장. 지도에 표시된 것은 한나라당의 공천 잡음이 흘러나온 지역이다. 서울·경기와 영남에 집중되어 있다.

    영남지역에서 한나라당의 공천은 곧 당선을 뜻한다. 5·31 지방선거도 예외가 아니다. 부산·경남, 대구·경북 지역에서 구청장, 광역·기초의원이 되고자 하는 이들은 너도나도 한나라당 공천장을 받으려고 줄을 섰다. 문제는 후보 공천에 대한 상당한 권한이 지역구 의원과 위원장에게 있다는 점이다. 영남지역을 중심으로 공천 헌금 수수 의혹과 공천 불복, 탈당 등 갖가지 잡음이 흘러나오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 두 가지 기본 구도 때문이다.

    후보자들은 한나라당 공천을 받기 위해 해당 지역 의원들에게 사활을 건 줄 대기에 나선다. 그 과정에서 갖가지 해프닝도 줄을 잇는다. 공천의 이면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온갖 시스템이 작동하게 마련이다. ‘돈 공천’ 파문으로 어느 때보다 뒷말이 많았던 5·31 지방선거 공천. 영남 지역에선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최고의 기준은 ‘로열티’”

    “의원들이 8할의 권한을 가졌다.”

    지방선거 공천에 대한 지역 의원의 영향력을 여의도 정가 관계자들은 ‘8할’이라고 말한다. 거의 절대적이라는 얘기다. 특히 한나라당은 이번 지방선거부터 하향식 공천을 의욕적으로 도입했다. 기초단체장과 광역·기초의원에 대한 공천권은 중앙당이 아니라 시·도당이 갖고 있다. 결국 지역 의원의 권한 행사는 이전보다 더 자유로워졌다.



    의원을 향한 후보자들의 ‘충성경쟁’은 치열하고 뜨거울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의원들이 자신들 앞에 줄을 선 단체장·지방 의원 후보들 가운데 한 명을 낙점하는 가장 중요한 잣대는 무엇일까. 전직 영남지역 구청장 A씨는 단언한다.

    “자신에 대한 로열티가 공천 기준의 전부다. 자신의 입맛대로 요리할 수 있는 단체장을 앉혀야 한다는 것은 양보할 수 없는 기준이다. 능력은 그 다음이다. 훨씬 더 능력 있는 후보를 떨어뜨린 경우는 이번에도 비일비재했다. 영남에서는 한나라당 간판만 달면 (당선이) 되는데 능력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를 잘 아는 공천 희망자들은 자신의 능력이나 경력을 앞세워 홍보하지 않았다. 의원들을 찾아가 ‘충성서약’을 하는 게 급선무였다.

    기초단체장이 훗날 자신의 경쟁자가 될 것인지도 의원들로서는 후보자를 정하는 중요한 기준이다. 실제로 지난 국회의원 후보 공천 과정에서 기초단체장 후보가 현역 의원들과 경쟁한 일이 있었다. 영남지역 의원 보좌관 B씨의 얘기다.

    “지역 의원은 젊고 능력 있는 사람이 기초단체장을 맡는 걸 바라지 않는다. 지역 기반을 착실히 닦은 후 자신에게 도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의원으로서는 그 점을 가장 두려워한다.”

    2파전이 벌어진 대구 모 지역 구청장 공천이 그랬다. 경력으로 봐선 어느 후보보다 C가 유리했지만 결국 D가 공천됐다. C의 화려한 이력이 오히려 걸림돌이 됐다. 이 지역 국회의원은 C의 공천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반면 D는 의원을 찾아가 “국회의원이 되는 것에 절대 관심 없다”고 거듭 강조했다. “구청장이 되면 지역구를 잘 챙기겠다”는 약속도 했다.

    부산의 한 구청장의 경우다. 그는 초선 의원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 인기도 그리 높은 편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구청장 재선에는 큰 하자가 없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공천 초기부터 그 구청장은 배제됐다. 대신 초선 의원의 의견을 잘 따른 현역 시의원이 공천을 받았다.

    2등 골목대장의 꼼수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이렇게 표현했다.

    “국회의원은 해당지역의 1등 골목대장이다. 구청장·시장 등 기초단체장은 2등 골목대장이다. 2등은 1등에게 고개를 숙이지만 한편으로 반란을 꿈꾸기도 한다.”

    기초 단체장은 해당지역에서 행정권을 갖는다. 그는 그 지역 공적 조직의 수장이다. 대민(對民) 접촉 범위나 횟수가 의원보다 넓고 활발하다. 의원으로서도 평소 단체장의 도움이 아쉬울 때가 많다. 특히 지역기반이 약한 초선 의원의 경우 단체장의 도움은 필수적이다.

    이런 기초 단체장을 의원이 제어할 수단은 지방선거 ‘공천권’이 유일하다. 이러니 지역 의원과 단체장 간의 관계는 미묘할 수밖에. 이런 미묘한 관계가 종종 갈등으로 폭발하는데, 총선과 지방선거를 전후해서다. 의원이 바뀌거나 단체장이 바뀌는 시기다. 총선에서 초선 의원이 등장하는 경우 전직 의원이 공천한 구청장과 양보 없는 기(氣)싸움이 벌어진다. 그 형국이 가관이다.

    2004년 영남의 한 지역구에서 벌어진 일이다. 그해 총선에서 한나라당 출신 초선 의원이 뽑혔다. 구청장도 한나라당 출신이지만 이 지역 전 의원이 공천한 사람이다. 구청장은 총선 과정에서도 초선 의원의 선거 운동을 돕지 않았다는 얘기가 돌았다. 구청장은 “낙하산 타고 공천받아 당선된 주제에…”라며 의원에 대한 불만을 지인들에게 토로했다고 한다. 둘 사이의 관계는 급속하게 틀어졌다.

    이후 구청이 주최한 행사에서 구청장은 직원들에게 “단상에 국회의원 자리를 마련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짬을 내 지역구 행사를 찾은 현역 의원은 당황했다. 지역 주민들이 운집한 행사장에서 이 의원은 자리를 잡지 못해 한동안 쩔쩔매야 했다. 결국 객석에 앉아 있다 행사 중간에 조용히 빠져 나갔다. 감정이 격앙돼 얼굴은 온통 붉어져 있었다. 그 모습을 단상에 앉아 있던 구청장이 지켜보고 있었다. 현역 의원에게 제대로 ‘물먹이기’를 한 것이다.

    2006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그 구청장은 끝내 공천을 받지 못했다. 초선 의원은 “절대 공천 못 준다”며 완강했다고 한다. 결국 그 구청장은 탈당하고, 무소속을 선언했다.

    영남의 또 다른 지역구. 환갑을 넘긴 시장은 아들뻘 되는 젊은 초선 의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쩌다 마주쳐도 ‘의원님’이란 호칭이 입 밖으로 잘 나오지 않았다. 두 사람의 만남은 늘 서먹서먹했다. 전화통화라도 할라치면 나이 든 시장은 젊은 의원에게 이런 식으로 응대하기 일쑤였다.

    “아 의원, 그건 그게 아니고….”

    그 또한 이번 지방선거에서 공천을 받지 못했다.

    단체장이 공천권을 쥔 초선 의원에게 고개를 숙인다 해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초선 의원은 자기 사람을 단체장으로 삼고 싶어한다. 전임자가 공천한 단체장이 아무리 자신에게 복종하는 자세를 보이더라도 내심 맘에 차지 않는다.

    결국 ‘현 단체장의 공천 배제, 제3자 공천→현 단체장 조직의 반발→단체장의 탈당과 무소속 출마’라는 절차를 밟는다. 이번 지방선거에서도 공천 잡음이 터져 나온 곳은 예외 없이 이런 공식을 따랐다. 지방의원들은 1, 2등의 싸움에서 눈치를 본다. 대부분은 공천권을 쥔 의원 쪽으로 기울지만 끝까지 단체장과 힘을 합쳐 지역 의원과 한판 기 싸움을 벌이기도 한다. 단체장을 따라 집단 탈당하는 사례가 이런 경우다.

    무소속의 힘?

    결국 이런 사정 때문에 이번 영남지역 기초단체장 선거는 한나라당 대 무소속의 대결구도가 많았다. 지역별로 무소속 연대까지 결성됐다. 이들 가운데는 처음부터 무소속으로 뛴 이들도 있지만 한나라당 공천에서 탈락하자 무소속으로 돌아선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들이 “한나라당 공천 기준이 불합리하다”며 동시에 “한나라당의 자만과 지역 정치구도의 구태를 막아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는 이유는 그래서다.

    ‘공천=당선’, 한나라당 5·31 영남 공천 요지경

    5·31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공천에 실패한 뒤 불출마 선언을 한 경주시장 출마 희망자의 홍보 간판을 철거하고 있다. 영남지역에서 한나라당 공천은 곧 당선을 뜻한다.

    이들 가운데 주목받는 이들은 역시 해당 지역구 현역 의원의 눈 밖에 나는 바람에 공천을 받지 못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한 현직 단체장들이다. 이들은 단체장으로서 다져온 기반을 근거로 현역 의원과 한판 승부를 벌이는 셈이다. 지역 의원도 무소속으로 출마한 단체장을 제압하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그렇다면 무소속 후보들은 힘을 얼마나 발휘할까. 대도시에서는 대체로 별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기초 단체장 선거의 경우 유권자들이 후보를 비교하기보다는 정당을 보고 투표하는 경향이 많기 때문이다.

    물론 예외도 있다. 부산의 이인준 중구청장은 두 차례나 무소속으로 출마해 한나라당 후보를 누른 저력이 있다. 이번에도 무소속으로 3선에 도전했다. 그러나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다. 대개의 도시지역 기초 단체장, 기초·광역 의원 선거에 출마한 무소속 후보들에겐 힘겨운 싸움이 예상된다.

    한 구청장 후보는 “서울 등 대도시의 기초단체장 선거는 주로 정당 지지율과 광역시장의 지지율에 연계돼왔다”며 “아무리 지역 기반을 다져왔다고 해도 지역 주민들 가운데 구청장 이름을 기억하는 이가 몇 명이나 되겠느냐”고 말했다. 현직 구청장이 자신이 다져둔 조직을 움직이더라도 ‘무소속’이라는 타이틀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서울의 경우 한나라당은 2002년 이명박 서울시장을 당선시키면서 구청장 25곳 가운데 22곳을 싹쓸이 했다. 이런 상황이라 무소속이 들어설 여지는 적다는 게 대체적인 의견이다.

    하지만 농촌지역은 사정이 다를 것으로 본다.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도시지역의 경우 바람이 한번 불면 그것으로 끝이다. 줄줄이 2번(한나라당)을 찍는다. 하지만 농촌지역은 사정이 다르다”고 말했다. 그는 농촌지역 무소속의 힘을 “10원짜리가 보통예금에 쌓여 있는 꼴”이라고 표현했다. 농촌은 지역 단체장이 종친회 같은 각종 모임을 통해 지역민들과 ‘그물망’ 인연을 맺고 있다. 가끔 한 번씩 얼굴을 내비치는 의원보다 단체장의 영향력이 더 클 수 있다. 특히 지역에 막 뿌리내린 초선 의원이라면 지역에 터 잡고 성장해온 단체장의 기반에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까닭에 현직 단체장을 잘라낸 해당 지역 의원들은 이번 지방선거에서도 일찌감치 지역에 내려가 어느 때보다 열성적인 선거운동을 벌였다. 만약 무소속의 반기를 든 단체장을 제압하지 못한다면, 그래서 무소속 단체장이 자기 지역구에 들어선다면 의원의 남은 의정활동이 극도로 피곤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공천엔 동문(同門)도 없다

    자신에 대한 로열티가 절대적 기준이 되다 보니 두 명의 국회의원이 한 명의 기초단체장을 공천해야 하는 경우엔 의원 간 다툼도 종종 벌어진다. 다선(多選)과 초선(初選)이 지역을 분점하는 경우엔 다선의 뜻대로 단체장 공천이 이뤄진다. 문제는 초선들이 분점하는 경우다. 시장 공천을 놓고 해당 지역에 소속된 두 의원이 날카롭게 대립했던 경남 진주시가 대표적이다. 진주고 선후배인 최구식(진주 갑), 김재경(진주 을) 두 의원은 진주시장 공천자를 두고 정영석 현 시장 지지와 반대로 갈라섰다.

    “현 시장에게 공천을 안 주기로 합의해놓고 김 의원이 갑자기 말을 바꿨다.”(최 의원측)

    “최 의원이 현 시장을 배제하고 특정 인사를 밀려고 해서 반대했을 뿐이다.”(김 의원측)

    결국 현 시장이 공천을 받는 것으로 결론이 나기까지 두 의원은 심각하게 갈등했다. 최 의원은 공천이 끝난 뒤 한나라당 의원들에게 편지를 보내 끝까지 아쉬움을 드러냈다. 그가 보낸 편지 내용은 대충 이렇다.

    “진주시장 공천 문제로 염려를 끼쳐 송구합니다.… 제 기준은 대선(大選)이었습니다. 대선 국면에서 권력의 위협에 맞서 버틸 수 있는 사람이냐,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진주 시민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장 잘못 뽑아도 진주는 망하지 않는다. 하지만 대통령 잘못 뽑으면 망한다. 나라 망하면 진주도 자동적으로 망하기 때문이다.’… 이번 선거는 대선과 관련해 너무나 중요한 선거입니다. 약점 있는 사람, 약점 잡힐 위험 있는 사람, 탈당 가능성 있는 사람은 원천 배제해야 합니다. 1%의 위험이라도 배제해야 합니다.”

    최 의원 편지의 요지는 자신이 특정 인사의 공천을 반대한 것은 대선을 염두에 두고 새로운 인물을 충원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맞는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일각에선 “최 의원의 현 시장 공천 반대는 경남 지역구 정치인 E씨 인맥에 대한 저항”이라는 해석을 내놓는다. “현 시장이 2004년 총선 당시 최 의원의 당선을 발 벗고 돕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의원 협박하는 공천 희망자

    과연 공천의 잣대가 로열티말고는 없을까. 공천 초기 김덕룡·박성범 의원의 서울발(發) 공천 헌금 파문은 특히 영남 지역 한나라당 의원들을 곤혹스럽게 했다. 시선이 자연히 영남지역으로 쏠렸기 때문이다. “‘공천이 곧 당선’인 영남에서는 더 심하지 않겠느냐”는 얘기들이 나왔다. 갖가지 추측이 나돌았다. “드러나지 않을 뿐 구청장(공천 헌금)은 기본 4억~10억원에 달한다”는 얘기가 나오기도 했다.

    때를 맞춰 영남 의원의 보좌진이 공천대가로 금품을 수수한 사실이 적발됐다. 영남지역의 공천 헌금은 드러나지 않았을 뿐 공공연한 사실이 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당사자 격인 영남지역 의원들은 이런 시선조차 억울하다는 주장이다. 한 영남지역 초선 의원의 말이다.

    “너도나도 공천을 받기 위해 눈을 부라린다. 조금이라도 돈을 받고 미는 낌새가 보이면 난리가 나는 게 이 지역이다. 그런데 어떻게 공천 헌금이라는 게 있겠나.”

    오히려 더 몸을 사릴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대구 동구에서는 이런 분위기 때문에 오히려 지역 의원들이 구청장 공천을 주기로 내정한 한 후보가 결국은 공천을 못 받는 일이 벌어졌다. 주성영·유승민 의원은 현 구청장 대신 공직자 F씨에게 구청장 공천을 주기로 내정했다. F씨는 공직까지 사퇴했다. 하지만 공천 헌금 파문이 터지면서 의원들은 오해를 받을까봐 몸을 사렸다. 현 구청장의 반발도 있었다. 결국 공천은 제3자에게 돌아갔다.

    한나라당 관계자는 “초기 지방선거 때와 비교하면 공천 헌금은 많이 사라진 것이 사실”이라며 “이번의 공천 헌금 파문이 공천 헌금을 아예 없애는 분기점이 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또 다른 관계자는 “형태만 바뀌었을 뿐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전언이다.

    “지역구 운영에 적지 않은 돈이 들어간다. 사무실 임대료에 직원 월급… 조직을 운영하는 경비가 만만치 않다. 후원금만으로 긴축 경영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구청장 시의원 구의원이 십시일반 비용을 분담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공천 헌금을 ‘선불’에 ‘일시불’이 아닌 ‘후불’에 ‘분납’으로 내는 셈이다. 지역 의원의 스폰서 역할을 자임함으로써 공천을 받는 것이다.

    공천이란 목표는 같지만 공천 헌금과 반대의 수단이 동원되는 경우도 있다. 공천 희망자가 의원을 협박하는 경우다.

    영남의 한 지역구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 구청장 공천을 희망한 G씨가 공천이 임박한 시점, 지역구 의원을 찾아와 두툼한 노트 한 권을 내밀었다. 노트를 들여다본 의원은 깜짝 놀랐다. 의원이 지역구에 내려올 때면 G씨는 의원이 먹은 밥값과 술값을 계산하곤 했다. 큰 금액은 아니었던 터라 의원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노트에 언제 어디서 누구와 술을 마셨는지 빼곡히 기록돼 있었고, 그때마다 G씨가 계산한 술값이 1000원 단위까지 상세히 적혀 있었다. G씨는 이것을 들이대며 “공천을 못 받으면 이것을 (세상에) 내놓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고 한다. 의원의 코를 꿴 것이다.

    보좌관은 힘이 세다

    영남지역에서 터져 나온 공천 헌금 파문에는 공통점이 있다. 하나같이 보좌관이 개입돼 있다는 점이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영남지역의 경우 의원들이 지역구를 찾는 횟수가 수도권에 비해 훨씬 적다. 머무르는 시간도 마찬가지다. 그렇다 보니 지역에 상주하는 보좌관이나 지역구 사무소의 사무국장들이 지역에서 의원을 대리하는 경우가 많다.

    ‘공천=당선’, 한나라당 5·31 영남 공천 요지경

    한나라당 관계자들은 “초기 지방선거 때와 비교하면 공천 헌금이 많이 사라졌다”고 말하지만 일부에선 “형태만 바뀌었을 뿐 공천 헌금은 여전히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자연히 지방선거에서 이들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분위기가 암묵적으로 형성돼 있다. 의원이 초선이어서 보좌관이나 사무국장이 지역 사정에 더 밝으면 그런 분위기는 더 심해진다.

    4월초 김덕룡·박성범 의원의 공천비리가 터졌을 당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렸던 초선 김명주(경남 통영·고성) 의원은 자신의 보좌진이 공천과 관련해 돈을 받은 사실이 나중에 드러나면서 망신을 톡톡히 당했다. 한나라당 고성지역 연락사무소장인 한모씨는 당시 도의원 공천이 확정됐던 조모씨로부터 사무소 운영비 명목으로 다섯 차례에 걸쳐 1700만원을 제공받는 등 공천 신청자 4명으로부터 13차례에 걸쳐 5500여만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다. 돈을 건넨 조씨도 같이 구속돼 공천을 반납했다.

    대구에서도 곽성문 의원의 보좌관 권모씨가 지방선거 출마예정자 신모씨로부터 3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다. 권씨는 신씨에게서 미국 여행경비조로 300만원을 받은 혐의도 있었다.

    부산시당 위원장인 재선(再選) 김병호 의원도 지역사무소 사무국장이 구청장 공천 탈락자로부터 금품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다. 이 사무국장은 김 의원의 처남이다. 김 의원은 이번 지방선거 부산시당 공천심사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래서 “공천 결과 전체를 믿을 수 없다”는 불신감이 지역에 확산되기도 했다.

    정치인이 물먹는 이유

    영남지역 지방선거 공천의 또 다른 특징은 광역단체장 중에 정치인 출신이 없다는 점이다. 이번에 영남지역에서 공천 받은 한나라당 광역단체장 후보의 면면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5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치러진 경선에서 부산과 대구, 경북에서 현역 의원들이 도전했다. 그러나 모두 단체장, 공무원 출신 후보들에게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부산 권철현 의원은 허남식 부산시장에게, 경북 김광원 의원은 김관용 전 구미시장과의 경선에서 밀렸다. 두 의원 모두 3선 의원이다.

    서울의 경우 경선에서 떨어지긴 했지만 맹형규 전 의원과 홍준표 의원이 끝까지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경기에선 김문수 후보를 비롯해 김영선·전재희 의원이 경선에서 맞붙었다. 권철현 의원은 2002년 부산시장 후보 경선에서 고(故) 안상영 시장에게 근소한 차로 떨어진 바 있다. 그런데 이번 경선에서는 허남식 시장에게 많은 표차를 보였다. 경북 김광원 의원은 경선에 참여한 3명 중 꼴찌를 기록하고 말았다. 김 의원과 경쟁한 후보들은 모두 기조단체장 출신이다.

    이러한 결과를 두고 해당 지역에선 “지역 사정은 잘 알지도 못하고 중앙 무대에서의 지명도만 믿고 나섰다가 실패한 것”이란 얘기가 나왔다. 민선 단체장 4기로 접어들면서 지역의 단체장들이 속사정을 훤히 꿰고 있는데다 밑바닥까지 다져두어 경선에서도 유리했단 얘기다.

    정치인이 오히려 정치인을 밀지 않는다는 해석도 있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다른 지역을 보더라도 해당 국회의원과 정당의 부탁과 민원을 잘 들어주지 않는, 이른바 ‘깐깐한’ 단체장들은 재공천을 받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영남지역의 경우 한나라당이 지방정부의 여당이다 보니 의원들로서는 지역구 일로 단체장과 협의할 때가 많다. 그러려면 대하기 어려운 정치인보다는 상대적으로 ‘만만한’ 행정가 출신 단체장이 더 편하단 것이다. 권철현 의원도 부산지역 16명의 당 소속 의원 중 2~3명만이 도왔다는 소문이 나온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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