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버지니아에 있는 토머스 제퍼슨의 2층집 ‘몬티첼로’.
유례를 찾기 힘든 사회적 다양성 그 자체가 어쩌면 미국의 역사적 현실을 추상적 이념태(態)에 의탁해 이해할 수밖에 없도록 강요하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미국의 국민적 정체성은 역사적 경험의 공유보다는 미국적 이념과 가치에 대한 동의에서 생겨 나온다. 미국에서는 출생이 문제되지 않는다.
신분과 계층, 종족과 인종에 상관없이 미국적 이념을 받아들이면 미국인이 될 수 있다. 일찍이 정치학자 립셋(Seymour Martin Lipset)은 미국사를 구성하는 핵심적인 이념 원소로 자유, 평등주의, 개인주의, 대중주의, 자유방임의 다섯 가지를 제시한 바 있다. 미국사는 말하자면 이 다섯 이념으로 구축된 좌표 속에서 전개돼왔다는 것이다.
건국의 정치 지도자 가운데 미국사를 이런 추상적 이념의 전개 과정으로 파악하는 데 결정적으로 공헌한 사람은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1743~1826)이다. 독립혁명기의 시대적 여망을 담아 그가 기초한 독립선언서는 ‘이런 이념들에 계도되지 않는 사회적 삶은 타기해 마땅하다’고 천명함으로써 미국의 분리 독립을 정당화했고, 건국과 더불어 거기에 표명된 이념, 특히 ‘생명, 자유, 행복의 추구’라는 구절에 집약된 이념은, 나라의 근본을 밝힌 국시(國是)로 자리잡아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사회적 상상태의 원천이 됐다.
제퍼슨은 자신이 ‘독립선언서의 기초자’요, ‘버지니아 종교자유법의 제안자’요, ‘버지니아 대학의 창설자’로 후세에 기억되길 희망했다. 버지니아의회 의원, 대륙회의 대표, 주지사, 프랑스 전권공사, 국무장관, 부통령,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화려한 정치 이력보다는 민주주의 정치체제의 이념적 바탕을 마련한 철학자요 교육자로서의 업적을 더 의미 있다고 본 것이다.
‘미국 이념’의 창안자
미국사회가 나아갈 이념적 토대를 마련하고 그것에 입각한 단순명료한 역사적 상상력을 고취한 주인공이지만, 정작 제퍼슨 자신은 대단히 다면적이고 복잡한 인물이었다. 그는 격동의 혁명기를 이끈 정치 주역이면서도 18년간 미국철학회 회장을 지냈고, 계몽주의의 이상에 불타면서도 실용주의자였고, 유럽의 고전문화에 심취했으면서도 서부와 아메리칸 인디언 및 그 토착문화를 선양했고, 자유와 천부인권의 사도를 자임하면서도 노예 소유자였다.
오늘날 종종 그에 대한 비판의 원천이 되는 이 양면성은 그러나 그가 구축한 정신세계가 얼마나 드넓은지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1782년 몬티첼로(Monticello)를 찾은 프랑스인 샤스텔뤼(Marquis de Chastellux)의 찬탄대로, 제퍼슨은 ‘음악가, 설계사, 측량사, 천문학자, 박물학자, 법률가이자 정치가’였다. 그나마 제퍼슨이 화려한 경력을 갖기 이전의 평가이니 여기에 적어도 서너 가지의 또 다른 커리어를 덧붙여야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