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엔리코 페르미(원안)가 최초로 핵분열 실험을 한 CP-1 원자로.
시슬러의 설명이 일찌감치 원자력의 힘을 인식하고 있던 이승만 대통령을 움직였다. 이 대통령은 원자력의 가치를 알고 있었지만 한국이 과연 원자력발전을 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확신을 갖지 못했으나 시슬러의 설명을 듣고 원자력에 대한 도전 의지를 갖게 됐다고 한다.
IAEA 창립
잠시 시선을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로 돌려보기로 하자. 앞장에서 설명했듯 소련과 영국이 핵실험에 성공한 다음인 1953년 12월8일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유엔 총회 연설에서 ‘평화를 위한 원자력(Atoms for Peace)’이란 제목의 유명한 연설을 한다. 이때의 시대정신을 알기 위해 아이젠하워가 한 연설의 일부를 옮겨본다.
“원자력을 군사적으로만 이용하려는 이 무시무시한 추세가 뒤바뀔 수만 있다면, 원자력이 갖고 있는 엄청난 힘은 인류에게 큰 이익을 주는 것으로 탈바꿈하리라고 믿는다. 원자력을 평화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헛된 꿈이 아니다. 그 가능성은 이미 입증돼 있다. 따라서 본인은 국제원자력기구를 유엔의 후원하에 설립할 것을 제안한다.
이 기구는 세계의 전력 부족 지역에 충분한 전력을 제공하는 일을 한다. 또 원자력을 농업과 의학 등 평화적 활동을 하는 데 사용하는 일을 할 것이다. 미국은 원자력의 딜레마(군사용으로도 쓰일 수 있고 평화용으로도 쓰일 수 있는 모순)를 해결하는 데 앞장설 것이다. 인간이 갖고 있는 위대한 창의력을, 죽음을 생산하는 물질이 아닌 삶을 창조하는 물질을 만드는 데 바칠 것을, 전세계 앞에서 약속한다.”
세계 각국은 아이젠하워의 선언을 적극 환영하였다. 이에 따라 국제원자력기구(IAEA)를 만들기 위해 1954년 중에만 무려 28차례나 국제회의가 열렸다. 그리고 1956년 유엔 총회에서 국제원자력기구 헌장이 채택됨으로써 1957년 IAEA가 유엔 산하기관으로 창설되었다.
당시 한국은 유엔에 가입하지 못했지만 국제원자력기구 결성이 논의되던 1956년 9월 국제원자력기구 헌장에 서명함으로써 이 기구 창립 회원국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아이젠하워가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선언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자신감에서 비롯되었다.
핵폭탄을 만들기에 앞서 인류는 원자로를 제작했다. 시카고대의 엔리코 페르미가 Chicago Pile-1, 줄여서 CP-1이라고 하는 실험용 원자로(흑연감속로)를 만들어 33분 동안 핵분열 연쇄반응 실험에 성공한 것은 1942년 12월2일이었다. 핵폭탄 만능론이 미국을 지배하고 있을 때 미 해군은 핵폭탄이 아닌 페르미의 CP-1 원자로에 주목했다.
1946년 미 해군은 리코버(Rickover) 대령을 비롯 네 명의 장교를 원자폭탄을 만든 오크리지 국립원자력연구소에 파견했다. 이들의 임무는 원자력의 엄청난 힘을 대형 함정을 움직이는 동력원으로 사용할 수 있는지 검토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1948년 미 원자력위원회는 잠수함용 열(熱) 원자로인 ‘STR(Submarine Thermal Reactor)’ 개발 계획을 정규 연구과제로 확정했다.
1953년 STR 제1호기인 STR 마크(Mark)-Ⅰ이 완성되었다(미국은 무기나 장비를 개발할 때 처음 개발한 것은 마크 Ⅰ, 그 다음 것은 마크 Ⅱ, 그 다음 것은 마크 Ⅲ로 불러 구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