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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사기열전(史記列傳)’

② 태사공자서

겨울을 난 벚나무에 향기로운 꽃이 피고

  • 원재훈│시인 whonjh@empal.com

② 태사공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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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태사공자서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여유당 전서’를 지었다.

“그런데 그 뜻을 완성하지 못하고 있는 동안에 이릉의 화(禍)를 입었다. 이대로 미완성인 채로 그만두는 것은 유감천만이다. 그래서 나는 극형을 받으면서도 성난 빛조차 보이지 않았다. 내가 만일 이 저작을 완성한 진의를 전하고, 수도 장안을 비롯한 대도시에 유통시킬 수만 있다면, 이때까지의 굴욕이 보상되는 것이며 만 번 형륙(刑戮)을 받아도 한이 없겠다.”

불가에서는 수도승들이 묵언수행을 한다. 그 기간 자신의 산만한 내면을 살피고, 도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나는 작가에게도 묵언수행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작가의 묵언수행은 바로 집필하는 시기다. 이 시기가 무너지면 작가는 정체성을 잃는다. 그러나 이 수행은 고독하고 고통스럽다. 달콤한 말 한마디가 그립다. 금지된 육욕과 같은 유혹이다.

하지만 말이 많으면 실수하기 쉽고, 어떤 말은 바로 독이 되며, 또 어떤 말은 패가망신의 지름길이 되기도 한다. 물론 부처 예수 소크라테스와 성인군자들은 말을 많이 했다. 책을 쓰지는 않았다. 공자역시 역사서인 ‘춘추’를 지었을 뿐이다. 나 역시 강의를 많이 한 날은 온몸의 기운이 다 빠져나가 글을 쓰기가 힘들다. 말과 글은 어쩌면 한 치도 양보 않는 대척점에 있는지 모른다.

사마천은 과거의 인물들을 통해 자신이 갈 길을 찾았다. 선배들의 길을 따라야 한다고 자각한다. 우리의 삶도 ‘사기’의 열전 중 누군가의 길을 되밟는 일이다. 사마천의 위 문장을 이렇게 고쳐 써본다.

② 태사공자서

한센병을 앓은 시인 한하운.

정약용의 유배, 한하운의 천형



“옛날 다산 정약용은 참혹한 유배지 생활 동안 ‘여유당 전서’를 지었고, 추사 김정희는 제주도 유배지에서 ‘세한도’를 그렸다. 시인 한하운은 천형(天刑)이라는 한센병을 앓으면서 시를 지었다. 김지하는 독재정권에 저항하여 ‘오적’을 비롯한 걸작을 남겼으며, 신영복은 젊은 시절을 감옥에서 보낸 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펴냈다.

황석영도 출감하고 나서 더욱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천형을 앓은 한하운 시인의 정치권력에 희생당한 마음에는 울분이 차고도 넘쳤다. 그것을 발산할 수 없기에 지나간 일들을 문장으로 쓰고 또 쓴 것이다. 이런 선배들 앞에서 내가 갈 길을 보지 못한다면, 나는 장님이 아닌가.”

정치권력에 희생되어 모진 수난을 겪은 문인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쉽게 찾을 수 있다. 고대 중국에선 신체의 일부를 거세하는 원시적인 형벌을 내렸고, 현대에 와선 인간의 신체와 정신을 감금함으로써 정신적 불구를 만들고자 했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세계적인 화학자 프레모 레비도 극단적인 권력의 희생양이었다. 그는 지옥에서 살아남았지만, 자살을 택하고 만다. 한 인생이 넘을 수 없는 산이 있는 법이다.

나는 사마천과 같은 육체적 고통의 극한을 겪은 시인 한하운을 생각한다. ‘운명은 장담할 수 없는 일…’이라는 탄식으로 시작되는 한하운의 자서전을 살짝 들여다본다.

“나는 문둥병 선고를 받던 날, 그 순간부터 하늘이 무너지는 주검보다 무서운 절망에 허탈해버렸다. 절망의 수십 년 세월 속에 세상 사람들이 제멋대로 규정한 인간 추방의 잔학성에 인간폐업의 서식조건을 박탈당한 산송장으로 싸워 나온 서글픈 생존자라 할 거다.

세상은 사람이 사람을 짓밟고 사람 위에 서서 보잘것없는 사람에게는 세상은 함부로 무자비한 학대를 하고 개돼지보다도 더 비참한 나락으로 떨어진다. …전락의 삶과 병과 시혼(詩魂)의 방황 속에 애달프고 서글픈 생존과 자유를 찾는 고고한 생명의 시집이라 하겠다. 그러니 이 ‘고고한 생명’은 나의 인생기록에 해당하겠다. 이 책을 출판하게 됨은 나를 격려해주는 수많은 독자의 간곡한 청에 못 이겨 내놓은 것이다. 다만, 세상에 절망한 사람, 죽고 싶은 사람들이 이 책에서 어떤 용기를 얻게 되면 이 책의 보람을 다한 것이라 하겠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세상사, 절대 맘대로 되지 않는다. 이러한 생각은 세월이 갈수록 나이테처럼 가슴에 새겨진다. 그렇다고 운명론자가 되는 건 아니다. 시인 한하운은 시를 통해 고고한 생명의 기록을 남겼다. 세상에는 그가 아니면 안 되는 일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간절하게 그를 기다리는지도 모른다. 작가의 불행이 독자의 행복이라는 잔인한 말이 틀리지 않다. 불행조차 사마천이나 한하운과 같은 사람을 만나 찬란하게 변화한다. 고통을 통해 인간성을 죽이려던 잔인한 의도는 무산되고, 오히려 찬란한 저서와 시집이 탄생한다. 이 연금술은 고통을 행복으로, 죽음을 생명으로, 증오를 사랑이라는 거대존재로 변화시킨다. 고통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행복한 순간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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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재훈│시인 whonjh@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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