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2월호

경제정책과 사회통합에 대한 보수와 진보의 시각

한반도선진화재단ㆍ한국미래학회ㆍ좋은정책포럼 공동 주최 토론

  • 정리·송화선│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09-12-10 14: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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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화 기회인가 위기인가
    • 사회안전망 효율인가 확충인가
    • 지방정책 집중인가 분권인가
    • 한국 사회에서 보수와 진보는 치열한 논쟁과 차별화를 통해 성장해왔다. 그러나 최근 양자의 대화와 상생을 모색하는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다. 우리 사회의 보수와 진보진영을 대표하는 학자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도 이 때문이다.
    • 토론자들은 한국적 현실에서 보수와 진보가 갖는 의미, 양자의 가치와 정책 방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특히 세계화에 대응하는 대한민국의 경제·문화정책과
    • 사회복지 시스템, 지방분권과 세종시 건설 등을 둘러싼 논란에 대해 집중 논의했다. 한반도선진화재단 조영기 교수와 보수진영의 전상인 교수, 진보진영의 김형기 교수가 간사를 맡아 토론 주제를 사전 조율했다. 논의 현장을 지상중계한다.
    ■ 일 시 :2009년 10월31일 오전 10시

    ■ 장 소 :아카데미하우스

    ■ 사 회 :강대인 전 건국대 교수

    ■ 패 널 :

    [보 수]강석훈 성신여대 경제학과 교수



    이명희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

    이인재 인천대 경제학과 교수

    전상인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진 보]김영정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

    김형기 경북대 경제통상학부 교수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이태수 꽃동네현도사회복지대 사회복지대학원 교수

    보수와 진보,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경제정책과 사회통합에 대한 보수와 진보의 시각
    강대인 : 이 자리에는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과제를 어떻게 풀어낼 것인지 고민해온 분들이 함께 있습니다. 서로 방법론은 다를지언정, 한국 사회가 발전해야 한다는 데 대한 진정성은 공유하고 있는 분들입니다. 우리 사회가 그동안 보수와 진보에 관한 문제로 상당한 진통을 겪어왔고, 또 현재도 겪고 있기 때문에 양자의 대화를 통해 상생의 방법을 모색하기를 기대합니다. 우선 보수와 진보의 개념부터 이야기를 시작합시다.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보수가 추구하는 자유와 진보가 추구하는 평등은 양립할 수 없는 것인가 하는 문제부터 논의해보면 좋겠습니다.

    김형기 : 저는 경제학을 전공하기 때문에 경제학적 관점에서 보수와 진보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시다시피 두 진영은 자본주의를 바라보는 방식에 차이가 있습니다. 한때 계획경제가 진보의 방향으로 여겨진 때가 있지만, 70년 동안의 사회주의 실험이 실패한 뒤부터 시장경제냐 계획경제냐 혹은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 같은 대립은 더 이상 보수와 진보 혹은 좌파와 우파를 나누는 기준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어떤 시장경제, 어떤 자본주의를 추구하느냐가 문제가 되지요. 자유시장경제(liberal market economies)를 추구하느냐 아니면 국가에 의한 적절한 개입과 시민사회에 의한 통제를 통해 시장경제의 문제점을 인간화와 민주화의 관점으로 치유하는 조정시장경제(coordinated market economies)를 추구하느냐로 구분된다고 보면 좋겠습니다. 시장의 역동성과 경쟁 시스템의 효율성을 인정하지만, 동시에 시장경제가 초래하는 반인간적이고 반민주적이며 불평등한 질서를 어떻게 시정하느냐를 고민하는 지점에서 진보와 보수가 엇갈린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만 최근 박세일 교수가 이끄는 한반도선진화재단에서 공동체성을 강조함으로써 자유주의를 시정하는 공동체자유주의를 모색하고 있고, 한편으로는 범진보진영내에서도 자유주의의 바탕 위에서 사회성 즉, 연대와 공공성을 실현하려는 사회자유주의도 논의 중이라는 점에서 양자 간의 대화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전상인 : 김형기 교수 말씀에 동의합니다. 보수와 진보는 자유 대 평등, 성장 대 분배, 시장 대 계획 등의 기준으로 구분될 수 있지요. 우리나라의 경우 대북(對北)관계 면에서도 차이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오늘 토론 제목 ‘보수와 진보의 대화와 상생’에서 보듯, 두 진영이 함께 대화하고 소통하면 꽤 많은 공통점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염려하는 것은 소위 진보 대 보수의 차이가 민주화의 후유증 혹은 대선 같은 각종 정치 행위의 병폐로 인해 상당부분 왜곡돼 있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들여다보면 진보와 보수 사이의 콘텐츠상에 확연한 구분이 없고, 있더라도 제가 보기에 그렇게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최근 10여 년 동안 진보 대 보수의 이분법이 구조화되고 악화되고 첨예화되는 현상, 그러니까 실제보다 더 정치화되는 현상이 생긴 것은 다분히 민주화 이후 권력 혹은 정치화된 논리에 편승한 측면이라고 보는 거지요. 오늘 토론자 대부분이 학계에 소속돼 있지만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권력과 지식이 결합한 형태를 띠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런 점 때문에 진정한 보수 대 진보의 논쟁이 굉장히 어려워졌고요. 오늘 자리가 그런 문제를 분명히 정리할 수 있는 기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김호기 : 저는 이념 문제를 다룰 때 발생할 수 있는 여러 오해를 피하기 위해 토론에 앞서 우선 개념을 명확히 정리하고 싶습니다.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네 가지로 짤막하게 정리해보겠습니다. 먼저 따져볼 것이 진보와 보수인데요, 양자는 자유와 평등, 변화와 안정 중 어디에 무게중심을 둘 것인지에 따라 구별됩니다. 보수는 자유와 안정, 진보는 변화와 평등에 무게중심을 두는 쪽이지요. 좌파와 우파는 아까 김형기 교수가 적절히 지적하셨듯이 자본주의체제를 어떻게 볼 것인지에 따라 갈립니다. 성장과 분배, 국가와 시장에 대한 인식이 중요하지요. 우파는 시장과 성장에 무게중심을 두고, 좌파는 국가와 분배에 무게중심을 두는 것이 특징입니다. 우리가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라는 개념을 구별해야 하는 이유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진보와 보수의 개념에 변화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보수와 진보를 단순히 변화와 안정이라는 기준으로 나눈다면 시장의 경쟁력 강화를 강조하는 신자유주의는 오히려 진보적인 성격을 띠는 것으로 보이거든요. 끊임없이 변화를 요구하는 진보적 우파인 것이지요. 반면 마르크스주의를 여전히 강조하는 그룹들은 보수적인 좌파로 볼 수 있을 겁니다.

    두 번째로 살펴볼 것은 한국적인 특성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진보와 보수를 나누는 기준은, 전상인 교수가 지적하신 것처럼, 북한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와 상당히 관련돼 있습니다. 박정희 시대를 어떻게 보느냐도 중요한 기준 가운데 하나지요. 1997년 외환위기 이후부터는 여기에 신자유주의를 어떻게 볼 것인가하는 문제도 추가됐습니다. 햇볕정책을 지지하고 박정희 시대를 비판적으로 보며 신자유주의 역시 비판적으로 보면 진보라는 겁니다.

    세 번째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보수와 진보의 하위범주들에 대한 것입니다. 저는 현재 기준에서 보수에 두 그룹이 있다고 봅니다. 안보적 보수와 시장적 보수입니다. 전자의 그룹은 박정희 시대의 발전국가론을 여전히 보수의 핵심 가치로 봅니다. 후자의 그룹은 신자유주의를 핵심적 기반으로 보지요. 저는 한나라당 안에도 이 두 그룹이 양분돼 있다고 생각합니다. 진보그룹의 경우도 대략 자유주의적 진보그룹과 마르크스주의적 진보그룹으로 나누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전자를 온건진보, 후자를 급진진보라고 부를 수 있을 겁니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이 그룹들의 관계입니다. 저는 시장적 보수와 자유주의적 진보는 사실상 비적대적인 공존이 가능하다고 보는 편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개방 문제라고 봐요. 자유주의적 진보그룹으로 볼 수 있는 노무현 정부가 자유무역협정(FTA)을 추진하지 않았습니까. 이 과정에서 급진 진보그룹은 노무현 정부를 향해 보수라고 비판했지요. 반면 안보적 보수와 급진적 진보는 언제나 첨예하게 맞서왔습니다. 가장 예각적으로 나타난 것이 대북 문제이고, 종부세 같은 주거 문제나 외국어고 폐지 같은 교육정책에 대한 생각도 첨예하게 갈리지요. 다시 말씀드리자면 우리나라에서 보수 대 진보에 대해 논의하려면 이런 기본 개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경제정책과 사회통합에 대한 보수와 진보의 시각

    이명희

    이명희 : 저는 우리 사회에서 보수와 진보를 구분하는 또 하나의 기준으로 국가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보수 우파는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고 언제나 실패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역사로부터 배워야 한다. 역사는 선조들의 성공과 시행착오의 축적인데 그것의 총체, 즉 역사의 총체가 국가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보수주의자들은 시장보수든 안보보수든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국가를 소중히 유지하고 발전시켜 후손에게 물려줘야 한다는 의식이 강하지요. 근래에 역사 문제를 두고 진보와 보수 진영이 팽팽하게 대립했는데, 그것은 국가에 대한 시각이 다르기 때문이었다고 봅니다. (기존 교과서가 좌파적 시각을 담고 있다고 비판하며 교과서 수정 노력을 펼치고 있는) ‘교과서포럼’의 지식인 가운데 상당수는 우리 역사를 소중히 여기고 발전시키려는 분들입니다. 오늘 한국 사회의 보수와 진보에 대해 얘기하려면, 이들이 국가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반드시 논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태수 : 이명희 교수의 말씀에서는 진보가 국가의 정체성이나 정당성을 부정한다는 뉘앙스가 읽히는데요, 사실 국가나 공공부문의 역할을 대단히 중시하는 것이 좌파 내지는 진보의 특성입니다. 우파 혹은 보수는 개인의 역할을 중시해 작은 정부를 강조하고요. 우리나라에서 좌파나 진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지난 국가나 정부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국가의 정체성과 역할을 부정하기 때문이 아니라 과거 정부의 역할이나 국가 역할의 적정성에 대한 견해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봐야 합니다. 정부와 국가는 엄연히 구분되지만, 거칠게 말해서 정부가 국가를 대변한다고 봤을 때, 과거의 국가는 좌파적·진보적 시각으로 볼 때 제 역할을 못 했습니다. 그 점을 비판적으로 평가할 뿐, 결코 국가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지요.

    이명희 : 아까 김호기 교수가 우파와 좌파의 하위범주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좌파에도 국가의 필요성이나 중요성을 인정하는 그룹과 국가를 계급의 하위범주에 놓고 부정하는 그룹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파에도 국가가 개인을 침해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있고, 국가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면 안 된다고 믿는 부류도 있어요. 그래서 저는 국가 문제를 어떻게 보느냐가 우리 사회에서 좌와 우, 혹은 우파나 좌파 안에서 서로를 구별하는 굉장히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김영정 : 이명희 교수 말씀은 국가론의 영역으로 여기서 논쟁할 이유가 없는 것 같아요. 이미 워낙 많이 논의됐던 주제이므로 오늘은 넘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강대인 : 차라리 한국 근현대사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역사 이해의 문제를 논의하는 것이 더 건전하고 유효할 것으로 보입니다. 예컨대 1948년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의 역사적 의미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쪽으로 이야기를 진행시키면 어떨까요.

    강석훈 : 대한민국을 어떻게 볼 것이냐, 대한민국의 지난 역사를 어떻게 평가할 것이냐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라서 그 얘기만 해도 오늘이 다 지나갈 것 같습니다. 보수와 진보가 상생을 이뤄내고자 한다면,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가 상대방의 가치에 비해 우월하다는 식의 접근 방식을 버리고, 오늘 한국 사회에 나타나고 있는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냐, 과학적이냐 이렇게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 이 자리에서 가장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각자가 바라는 이상적인 사회에 대한 것입니다. 저는 한국 사회가 물질적 부(富)라는 토양을 바탕으로 사회 구성원들이 자신의 가치를 추구할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쪽으로 가기 위해 어떤 시기에는 보수적인 방법론이 동원될 수도 있고, 다른 시기에는 진보적인 방법론이 동원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사안 사안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의논하면 좀 더 차이가 분명해지고 또 어떤 면에서 같이 갈 수 있는지를 아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봅니다.

    이인재 :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현재 우리 사회를 보면 소위 보수든 진보든 모두 교육 고용 분배 등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있거든요. 이 부분을 어떻게든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접근방식에서 차이가 난다는 겁니다. 따라서 구체적인 문제를 대할 때 시장주의적으로 접근해야 하느냐 아니면 좀 더 사회적 연대성을 강조해야 하느냐 하는 측면에서 논의를 풀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아까 김호기 교수께서 보수와 진보를 이념적 스펙트럼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누셨는데, 저는 스스로를 시장주의자라고 생각합니다. 친(親)시장이라는 것은 사실 한국 사회에서 상당히 급진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지요. 친시장은 친기업이 아니고 친국가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친시장은 결코 수구가 될 수 없고, 반대로 진보진영에서 하는 얘기와도 상당히 거리를 둡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이슈 중심으로 얘기를 나눠야 보수와 진보가 사회 문제에 어떻게 접근하는지에 대해 보다 뚜렷하게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김형기 : 그전에 정리하고 갈 것이 있습니다.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진보와 보수의 대립은 친(親)북한이냐 반(反)북한이냐, 혹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인정하느냐 안 하느냐와 같은 양상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런 이분법적인 대립구도를 이제 극복해야 합니다. 아시다시피 진보 내에도 반북한 진보가 있습니다. 북한의 인권 보장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새로운 진보그룹이지요. 대한민국의 정통성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건국은 우파만 한 것이 아니잖아요.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이나 기업가만 대한민국을 만든 것이 아닙니다. 다양한 국민이 참여하여 만들었지요. 이러한 점에서 대한민국의 정통성 문제를 기준으로 삼아 보수와 진보, 좌파와 우파를 나누는 것은 소모적인 일이라고 봅니다. 우리가 논의할 것은 산업화 세력이 얼마나 인권과 민주주의적 가치를 소홀히 여겼는지, 또 민주화 세력은 중산층을 형성한 한국의 경제성장과 박정희 대통령 시대의 역할을 제대로 인정했는지와 같은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대화를 통해 보수와 진보가 역사적인 화해를 하고 미래를 보는 것이 오늘 토론의 목적이지요. 그런 점에서 일단은 낡은 대립구도를 청산한 뒤,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시장이냐 국가냐,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어떻게 볼 것이냐 등의 문제에 대해 구체적인 이슈를 바탕으로 논의하면 좋겠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보수와 진보의 의미

    경제정책과 사회통합에 대한 보수와 진보의 시각

    강대인

    강대인 : 보수와 진보가 한국 사회에서 혼란스럽게 된 단서는 6·25전쟁이라고 하는 뼈아픈 민족적 비극과 남북한의 대결 구도에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보수 진보에 덧씌워진 이념이라는 것을 떼어내고 양쪽이 주장하는 가치 문제만을 갖고 얘기하면 분명히 접점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보수적 가치나 진보적 가치가 더 나은 삶이나 우리 국가의 미래를 위해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하면 문제를 풀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명희 : 보수 세력 입장에서 봤을 때 진보 혹은 좌파 세력 내에는 여전히 반(反)대한민국 세력이 있습니다. 좌파의 주류들도 분명히 그것을 구별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우리가 대한민국의 체제 속에서 살아가려고 한다면 대한민국을 긍정하고 그 정통성 위에서 우리의 미래를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요.

    김호기 : 저는 사회학 연구자로서 우리 사회에 ‘뉴라이트’가 기여한 점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진보 세력에게 북한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강제한 것이지요. 그들의 활동을 통해 진보 세력 내에서 종북주의(從北主義)를 둘러싼 논란이 생겼고, 이후 북한 문제에 대한 명확한 차이가 나타나게 됐습니다. 저 역시 종북주의에 대해 누차에 걸쳐 비판했고요. 문제는 이렇게 정리된 후에도 여전히 뉴라이트 세력들이 이념논쟁으로부터 뭔가 정치적인 이익을 얻으려 한다는 점입니다. 여전히 그 패러다임 안에서 진보 세력을 과도하게 비판하는 것은 정치적인 이득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닌지, 개인적으로 의구심을 갖고 있어요. 이념 문제에 관해서는 시민적 상식의 수준을 따르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봅니다. 최근의 사회 분위기를 보면, 시민들은 보수 정치세력이나 보수 지식인들에게 ‘더 이상 북풍(北風)은 없다’는 분명한 경고를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시민적 상식을 안다면, 보수 세력은 북풍을 통해 더 이상 정치적 이익을 얻을 수 없다는 점을 깨달아야 할 겁니다. 진보 세력에게 주는 경고도 있습니다. ‘더 이상 도덕적 우월성은 없다’는 것이지요. 한동안 민주화세력은 도덕적 우월성이라는 정치적 자산을 갖고 있었지만, 2007년 대선과 2008년 총선을 통해 시민들은 민주화 세력에게 더 이상 도덕적 우위가 없다고 생각한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줬어요. 이런 시민들의 관점에서 이념 논란을 정리해야 합니다.

    김형기 : 아까 이명희 교수가 진보에게 반대한민국 세력, 친북한 세력과 연계돼 있는 부분을 확실히 정리하라고 요구하셨지요. 우리의 요구는 그쪽 역시 수구와 단절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 담론이 있어야 진정한 뉴라이트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기묘하게 수구와 결합한 뉴라이트는 라이트(우파) 자체를 망칠 수 있고 대한민국 장래에 굉장히 부정적인 효과를 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잘못된 이념으로부터 자유를 얻기 위해 대화 초반에 그런 점에 대해 합의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경제정책과 사회통합에 대한 보수와 진보의 시각

    토론에 참여한 진보 진영 학자들. 왼쪽부터 김형기, 이태수, 김호기, 김영정 교수.

    전상인 :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저희들은 소위 뉴라이트 대표자격으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뉴라이트의 공과를 따지는 일은 적절한 주제가 아닙니다.

    김영정 : 진보 쪽 얘기하면서 북한 문제와 연관시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수학자 가운데 양자를 자꾸 연관시켜서 진보학자들은 뭔가 이상한 생각을 할 것이라고 여기는 분들이 있는데, 그건 정말 잘못된 거예요.

    이태수 : 거듭 말씀드리지만, 학문적으로 얘기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북한 문제는 더 이상 중요한 이슈가 아닙니다. 북한이 베일에 가려 있었을 때는 그쪽이 사회주의체제라는 점에서 평등과 공동체의 가치가 구현되는 것으로 막연히 생각한적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북한의 실체가 드러나고, 사회주의적인 이념이 전혀 투영되지 않는, 철저하게 독재적이고 반인본주의적인 국가라는 사실이 알려진 뒤 대부분의 학자 내지는 좌파로 분류되는 사람들 내에서 이 문제는 끝이 났어요. 그래서 그 문제가 더 이상 좌파와 우파를 가르는 기준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아까 강석훈 교수가 제안하신 대로 제가 꿈꾸는 사회에 대해 얘기한다면, 저 역시 ‘물질적 부를 토대로 각 개인의 가치가 실현되는 사회’라는 지향에 동의합니다. 그리고 ‘모두가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실현시키면서 사는 복된 사회’도 꿈꿉니다. 그것을 이뤄내는 과정에서 시장과 개인과 자유를 중시하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공동체와 평등을 더 중시하는 것이 옳은지를 각론에서 따져야겠지요.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데, 아까 김호기 교수께서 말씀 도중 민주화세력이 곧 진보세력인 것처럼 언급하신 부분입니다. 사실 ‘민주화세력=좌파=진보’는 아니지요. 민주화운동은 반독재의 문제이므로 개념 구분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강대인 : 그동안 보수적 가치나 진보적 가치라고 하는 것이 현실 정치 세력들과 결합되면서 많은 오해를 낳은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진보진영에서는 소위 북한 문제에 분명하게 선을 긋고, 보수진영에서는 수구와 단절하는 노력이 필요할 겁니다. 그럼 이제 여러 선생님이 말씀하신 대로 구체적인 문제에 대한 토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첫째로 논의할 것은 세계화 문제입니다.

    세계화, 위기인가 기회인가

    경제정책과 사회통합에 대한 보수와 진보의 시각

    토론에 참여한 보수진영 학자들. 왼쪽부터 이인재, 이명희, 강석훈, 전상인 교수.

    강석훈: 세계화를 이야기하려면 일단 이 문제가 한국 사회나 한국 경제에서 선택변수인지 아니면 이미 주어진 변수인지에 대해 판단해야 한다고 봅니다. 저는 세계화가 한국이 거부할 수 없는, 일종의 주어진 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세계화 자체에 대해 논의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세계화의 순기능을 극대화하고 역기능을 최소화할 것인지에 대해 토론해야 한다고 봅니다. 경제학 이론을 놓고 봤을 때, 세계화는 한 국가의 복리(welfare)를 증가시킬 가능성을 제시할 뿐, 그 자체가 복리를 증가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세계화가 가져올 수 있는 국가 복리의 증가분을 어떻게 긍정적으로 이용할 것이냐, 세계화가 진전될 때 세계화의 수혜계층으로부터 피해계층으로 이익(benefit)이 전달되도록 하려면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논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로 토론하고 싶은 것은 세계화를 잘 이용하기 위해 한국 사회가 갖춰야 할 제도와 규범의 문제입니다. 여건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의 세계화는 1997년 외환위기에서 보듯 오히려 재앙(disaster)이 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세계화를 받아들일 때 조금이나마 통제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그에 대해서도 논의해보면 좋겠습니다. 저는 경제적인 면의 세계화는 급진적으로(radical) 진행하되, 사회나 문화와 연계된 부분은 좀 더 관리가능한(manageable) 수준으로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강대인 : 강석훈 교수는 세계화가 필연적인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진보 쪽 학자들도 그 부분에 대해 동의하십니까?

    김호기 : 저도 세계화가 한국 경제의 상수(常數)라는 의견에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우리나라 경제규모상 개방은 불가피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세계화는 기회인 동시에 위기입니다. 기회의 측면을 먼저 말씀드리면, 세계화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새로운 성장동력을 창출하고 이에 맞춰 산업구조를 재편할 경우 한국 경제가 한 단계 도약할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문제는 이런 기회의 반대편에 사회 양극화라는 위기가 있다는 점이지요. 세계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한 나라 안에서의 사회 양극화뿐 아니라 전 지구적인 차원의 양극화도 빨라지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이런 세계화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 등 여러 나라는 탈규제, 민영화, 노동시장 유연화, 국가 역할 축소 등의 전략을 쓰고 있지요. 그러나 지구에는 프랑스, 덴마크, 네덜란드와 스칸디나비아처럼 세계화가 강제하는 경쟁력 강화와 더불어 개별 국가가 유지해야 할 공공성과 형평성을 강조하는 대응 모델도 있습니다. 미세하게 들여다보면 조정시장경제 국가들의 세계화 전략이 좀 다르다는 말이지요. 이런 국가들은 지난해 9월 미국발(發) 금융위기에서 비교적 충격을 적게 받았습니다. 반면 같은 유럽에서도 독일처럼 완전히 미국식 모델을 받아들인 국가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어요. 이런 점에서 우리는 후자 국가들의 신자유주의 대응 전략을 주의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문제는 우리나라 보수 세력이 여전히 민영화나 노동시장의 유연화 같은, 구식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는 점입니다. 게다가 ‘4대강 정비’로 대표되는 토건국가적 계획까지 고수하고 있지요. 저는 이명박 정부에 부여된 경제적 과제가 새로운 성장동력의 확충과 산업구조 재편을 통한 양극화 해소에 있다고 보는데, 현재의 경제 정책으로는 이 부분에서 제대로 된 성과를 거두지 못할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진보 진영도 비판받을 점이 있습니다. 급진진보의 경우 여전히 세계화를 거부하고 있는데, 이것은 실현 불가능한 낭만주의적 발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온건진보의 경우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사례에서 보듯, 세계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는데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요. 그들은 성장 및 분배의 이중의 선순환 구조를 추구했습니다. 선한 측면에서 보자면 적극적인 대외개방을 통해 사회복지를 강화하겠다는 것이 두 정부의 기본구상이었던 것으로 보여요. 문제는 현실로 나타난 것이 사회 양극화의 강화였다는 점입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정책 및 대안을 제대로 제시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진보 보수 모두 세계화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이인재 : 세계화가 기회인 동시에 위기인 것은 분명합니다. 특히 위기는 소득분배 악화로 나타나지요. 우리나라의 통계를 보면 모든 소득분배지수가 급속히 악화되고 있습니다. 지니계수(소득이 어느 정도 균등하게 분배되는지를 나타내는 수치)의 경우 외환위기 전에 0.27 이었던 것이 이듬해 0.32까지 치솟았습니다.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급상승입니다. 상대적 빈곤율, 그러니까 중위소득 50% 미만이 전체 국민에서 차지하는 비율도 5% 정도 증가했고요. 세계화가 진행되고 경쟁이 심화되면 소득격차가 더욱 벌어지게 됩니다. 어쩔 수 없는 현상이지요. 미국에서는 같은 대졸자 그룹 안에서도 소득격차가 벌어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그룹 내 격차가 벌어지는 동시에 그룹 간 격차도 벌어지고 있어 굉장히 심각합니다. 이 문제에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은 사회보험 시스템의 전면 개편이라고 봅니다. 세계화 이후 과거와 전혀 다른 형태의 위기상황이 발생하고 있는 만큼, 이를 관리할 새로운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말이지요.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시절, 성장과 복지를 동시에 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지표상으로는 오히려 양극화가 심화되고 소득분배지수가 악화됐어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회보험제도와 노동시장 구조개혁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합니다.

    경제정책과 사회통합에 대한 보수와 진보의 시각

    이태수

    이태수 : 저 역시 세계화가 이미 주어진 것이고, 우리에게 기회인 동시에 위기라는 부분에는 동의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세계화의 본질과 본성을 바라보는 데 있어 진보와 보수 사이에 입장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저는 1990년대 이후 본격화된 세계화는 사조적으로 신자유주의이고, 경제적으로는 초국적 자본의 이해가 관철되는 것이며, 정치적으로는 미국 패권주의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위기의 측면이 훨씬 강하고 기회는 상대적으로 적다고 보고 있습니다. 저는 노무현 정부가 세계화를 기회 쪽으로만 본 점이 안타깝습니다. 세계화만 하면 미국과 끝장 승부를 봐서 결국 이길 수 있고 거기서 엄청난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봤는데, 어떻게 보면 그런 판단은 지나치게 낭만적인 것이지요. 세계화는 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거기서 야기되는 위기의 양상에 주목하면서 기회로서의 가능성보다는 위기의 가능성에 더 철저하게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전상인 : 세계화의 위기적 측면에 대해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겁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전략적인 세계화를 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보수 진보 양쪽 모두 동의할 거라고 봅니다. 다만 이 교수 말씀 가운데 세계화가 미국 패권주의의 발현이라는 의견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미국 패권주의에 의한 것이라면 앞일을 예측할 수 있고 대비도 쉬울 텐데, 지금은 미국조차 고삐를 놓친 상태로 보이거든요. 저는 우리 모두가 아무도 통제할 수 없는 ‘세계화의 게임’안에 들어가게 된다는 점이 이 위기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김형기 : 진보 쪽에서도 세계화를 미 제국주의가 이끌고 있다고 보는 건 아닙니다. 다만 세계화의 주체가 다국적기업이고, 그 기업들의 본사가 주로 미국에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일단 그런 힘으로 출발했다고 보는 거지요. 지금 진보의 관심사는 세계화가 주어진 조건이라고 할 때, 그 안에서 어떻게 사회통합을 강화할 것인가 하는 부분입니다. 위험관리의 문제라고 할 수 있지요. 아까 강석훈 교수는 경제적 세계화를 그냥 두고 사회문화 쪽은 관리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위험관리 측면에서 볼 때 오히려 관리해야 하는 부분은 경제적 세계화입니다. 그 방법으로 진보진영이 생각하는 것은 글로벌 거버넌스의 구축과 국가단위 사회안전망의 확충입니다. 전 지구적인 수준으로 세계화를 관리할 수 있는 사전적인 의미의 경제안전망과 국가 내부에서 발생하는 위험에 대응하기 위한 사후적 의미의 사회안전망, 즉 이중의 안전망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일본 하토야마 총리가 최근 동아시아에서 미국 주도의 글로벌화에 대응할 공동체를 만들자는 의견을 냈는데, 이러한 지역주의가 경제안전망 구축을 위한 한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지구적(global) 수준, 지역적(Regional) 수준, 국가적(national) 수준, 나아가 지방(local) 수준까지, 4중적인 거버넌스를 구축하면 일정 정도 세계화를 관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경제정책과 사회통합에 대한 보수와 진보의 시각

    이인재

    이인재 : 김형기 교수께서 사회안전망을 구축하는 것이 진보의 입장이라고 하셨는데, 사실 시장주의적인 입장에서도 사회안전망은 매우 중요합니다. 시장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기본 전제이기 때문이지요. 다만 기존의 사회보험 틀 안에서 수급액이나 수급기간을 늘리는 식의 정책은 문제가 많다고 봅니다. 국가의 재정 부담이 급격히 증가하고, 근로는 유인되지 않는 부정적인 효과가 나타나기 때문이지요. 이런 부작용을 줄이면서 개인이 직면한 위험을 효과적으로 해결하려면 시장에서 개발한 다양한 보험기법을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개인이 자신의 계좌에 소득의 일정 비율을 적립한 뒤 실업이나 은퇴 시 인출할 수 있도록 하는 개인저축계좌제(individual savings account)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적립금이 부족한 개인에게는 정부가 상환을 전제로 대부를 해줄 수 있습니다. 임금근로자 중심의 현행 사회보험 수혜자를 자영업자, 비정규직, 저소득층을 포함한 국민 일반에게까지 확대할 수 있는 방안입니다. 또 산업구조 개편이나 구조조정 등으로 인해 소득이 줄어든 개인을 위해 소득상실액의 일부를 보상해주는 임금보험(wage insurance) 제도도 도입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미 일부 선진국에서 실행 중인 제도로, 개인의 책임에 기반을 두면서도 위험을 효과적으로 감소시키는 시장친화적인 사회안전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태수 : 저는 공공성이 확보돼야 하는 분야, 예를 들면 교육 의료 심지어 사회보험 분야에까지 산업화와 시장논리가 끼어드는 상황이 걱정스럽습니다. 지난 50여 년간 시장지상주의가 엘리트 지배 계층을 사로잡으면서, 경쟁과 시장은 거부할 수 없는 것이라는 의식이 팽배한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교육도 개방하고 의료도 개방하고 복지 영역이라고 볼 수 있는 분야도 전부 다 개방한 뒤 문제되는 부분은 사회안전망으로 해결하면 된다는 생각을 갖고 계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안전망을 효율적으로 구성하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기대는 순진한(naive) 겁니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아직은 복지 부분에서 효율화를 얘기할 단계가 아니에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은 평균적으로 국내총생산(GDP)의 22%를 복지 분야에 쓰고 있는데, 우리는 겨우 7% 수준이거든요. 이런 상황에서 효율성을 논하면 상당히 문제가 커질 수 있어요. 복지정책의 체계도 완전히 바꿔야 합니다. 과거에는 국민들이 어딘가에 고용될 기회가 많았기 때문에 수혜자가 수입이 있는 것을 전제로 일단 보험료를 낸 뒤 그에 따라 혜택을 받는 식으로 사회복지제도가 구성됐지요. 하지만 이런 사회안전망은 요즘처럼 고용 가능성이 점점 줄어들고 고용돼도 비정규직이 될 가능성이 높은 사회에서 제 기능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진보진영 일부에서는 소득 정도나 노동 유무에 상관없이 국민 모두에게 일정액을 지급하는 기본소득(basic income) 정책이 필요하다는 주장까지 나오는 게 현실입니다.

    강석훈 : 지금 논의를 보면 마치 세계화가 소득분배 악화와 사회 양극화의 주범인 것처럼 여겨지는데, 꼭 그렇게 볼 일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최근 소득분배가 악화되는 이유를 설명하는 가설은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기술발전 가설이고, 다른 하나는 세계화 가설이지요. 각각을 주장하는 학자 수를 세어보면, 전자 쪽이 훨씬 많을 겁니다. 세계화가 현재의 위기상황을 모두 책임질 것은 아니라는 말이지요. 저는 세계화에서 위기를 크게 보느냐 기회를 크게 보느냐의 문제에 대해서도 다른 선생님들과 의견이 다릅니다. 한국 경제가 앞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길은 세계 시장을 상대로 무역하고 문화와 서비스를 수출하는 것뿐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바로 세계화라는 측면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세계화가 시작될 때만 해도 외국 기업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면 국내 기업들이 다 망하는 것 아니냐, 우리 기업이 해외에 나가서 버티기나 하겠느냐 하는 걱정이 많았는데 지금 보면 한국 기업들의 맷집이 세지고 한국 경제의 경쟁력이 전반적으로 올라간 부분이 있거든요. 따라서 세계화를 너무 겁낼 필요는 없다는 생각입니다. 이인재 교수가 말씀하시듯, 세계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위기와 부작용을 촘촘한 사회안전망으로 상쇄시킬 수 있다면 전체적으로 남는 장사가 될 수 있지 않느냐는 게 제 생각입니다.

    글로벌 컬처를 어떻게 볼 것인가

    강대인 : 양쪽의 토론이 경제적 세계화가 가져올 수 있는 위기와 기회 부분에 집중돼 있는데요, 사회 문화 분야의 세계화는 또 다른 성격을 갖고 있다고 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도 논의를 부탁드립니다.

    김호기 : 저는 세계화의 영향으로 우리 사회가 이른바‘네트워크 소사이어티(network society)’의 도래, 글로벌 컬처의 확산, 유목(nomad) 문화의 도입 등의 변화를 겪고 있다고 봅니다. 네트워크 소사이어티는 스페인 출신의 정보사회학자 마뉴엘 카스텔이 주창한 개념으로, 사회적인 네트워크가 일국 내에 머무르지 않고 전 지구적으로 팽창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지요. 제가 이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최근 젊은 세대들이 철저히 국민국가의 경계를 넘어서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정서는 이미 전통적인 민족 문화의 영역을 벗어나 있는데, 한국 사회의 보수나 진보는 이에 대응하는 효과적인 문화정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국가가 문화 영역에 과도하게 개입하지 않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아직 전 지구적인 세계화가 주는 문화적 충격에 대응할 수 있을 만큼 개인주의와 자유주의가 충분히 성숙해 있지 못합니다. 이것을 뿌리내리게 하기 위한 문화적인 개입, 문화정책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전상인 : 세계화는 필연적으로 문화적 다양성을 침해합니다. 문화의 산업화 내지는 시장화가 진행되면 각기 고유한 문화의 진정성이 훼손될 수밖에 없습니다. 인류문명 차원에서 이 점이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제가 세계화를 무작정 지지하지 못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이것이 에너지를 많이 쓰는 문명이기 때문입니다. 물류와 인구 이동이 늘면 CO2 배출량 역시 늘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환경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이러한 세계화가 우리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검토해봐야 합니다.

    강석훈 : 문화는 전혀 모릅니다만, 저는 경제학자로서 세계화가 한국 문화산업의 경쟁력을 강화시키는 하나의 계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문화를 하나의 산업으로 볼 때, 내수산업(domestic industry)으로서의 문화와 세계진출을 생각하는 문화는 완전히 다를 것이기 때문이지요. 한류(韓流)의 예를 봐도, 세계 각국이 다른 나라 드라마 수입 금지 정책을 썼다면 해외에서 이렇게 큰 가치를 창출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 같은 문화산업을 통해 직접적인 수익이 창출되고, 나아가 우리나라의 국가브랜드 이미지까지 높아진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여러 선생님이 세계화를 통해 우리 고유의 문화콘텐츠가 사라질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시는데, 저는 지금과 같은 인터넷 시대에 나라 문을 걸어 잠근다고 해서 다른 문화가 우리나라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강대인 : 현재 세계 문화산업의 지배권을 미국이 갖고 있는 현상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시는지 궁금합니다. 프랑스나 독일 등 유럽 국가에서조차 미국 콘텐츠가 아닌 콘텐츠를 찾아보기 어렵지요. 세계화가 이런 구조를 더욱 확대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에 문제의식이 필요한 것 아닐까요.

    경제정책과 사회통합에 대한 보수와 진보의 시각

    김형기

    김형기 : 문화영역에서 아메리칸 스탠더드가 곧 글로벌 스탠더드가 되는 현상은 매우 위험하다고 봅니다. 문화적 다양성이 사라지면 인류문명의 종말이 올 것이라고 말하는 학자들이 있을 정도지요. 문제는 쇄국 같은 단순한 방법으로는 문화의 글로벌화를 막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국가의 문화정책이 글로벌화를 무조건 거부하는 폐쇄된 민족주의로 흘러서도 안 됩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세계 각국이 자신의 전통문화를 지키면서 이를 글로벌 문화와 공존시키는 방법을 찾는 것이지요. 이를 위해 우리 문화가 갖고 있는 고유한 측면, 반드시 지켜야 할 부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강석훈 : 저는 지금 세계 문화산업구도상 한국은 전혀 끼어들 여지가 없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 논리로 본다면 한국은 자동차나 TV도 만들 수 없었습니다. 우리 문화산업의 가능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또 저는 우리 젊은이들이 미국 문화에 종속적이라는 의견에도 생각을 달리합니다. 젊은 사람들은 특정 문화에 대한 선망, 종속 등의 관념조차 갖지 않은 것 같고, 우리 문화에 대한 자부심도 굉장히 강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는 우리 스스로 ‘우리 문화는 너무 약하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명희 : 그런데 세계화가 진행돼도 문화 영역에는 반드시 다양성이 존재해야 한다는 전제에 모두 동의하십니까. 현실적으로 보면 한 나라 안에서도 산업화나 근대화가 진행되면 지역 고유의 문화가 사라지면서, 표준화된 문화가 전국적으로 보급되지 않습니까. 지역별 토착 문화는 부분적인 형태로 기생해 있고요. 그게 현실인데, 세계화의 부분에만 다른 잣대를 대는 것으로 보입니다.

    전상인 : 글쎄요. 저는 다양한 문화적 취향에 대한 배려와 존중은 꼭 필요하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제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음식이 기내식인데, 만국 공통의 음식이지만 동시에 아무 나라 음식도 아니기 때문이지요. 기내식으로 나오는 비빔밥은 그 이름을 달고 있을 뿐, 우리가 먹는 비빔밥이 아니잖아요. 세계화의 영향으로 비빔밥이 고유의 맛을 잃어가는 것, 그런 식으로 전통과 문화가 하나씩 사라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 과정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게 되면 사회문화적으로 미치는 최후의(ultimate) 파장은 엄청날 겁니다.

    강대인 :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지역 문제로 넘어간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는 국가발전을 위한 바람직한 지역발전 철학과 모형은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를 이어가면 좋겠습니다.

    국가발전을 위한 지역발전 철학과 모형

    김영정 : 현재 우리나라의 지역 사회는 국가가 생산한 정책을 소비하는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이런 모델은 굉장히 위험합니다. 지역 발전을 위한 제 1 철학은 분권(分權)이 돼야 하지요. 특히 재정적 분권이 중요합니다. 지난 반세기 동안 중앙정부가 모든 권한을 독점하면서 나타난 폐해가 얼마나 큽니까. 이 문제에 대해 논의하면 좋겠습니다.

    경제정책과 사회통합에 대한 보수와 진보의 시각

    전상인

    전상인 : 저도 분권은 당위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처럼 ‘무늬만 지방자치’를 할 것이 아니라, 각 지방자치단체가 정책수립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보는 겁니다. 그런 면에서 자유선진당이 낸 ‘강소국연방제’를 지지합니다. 중앙정부 권력을 실질적으로 축소하고, 지자체마다 조세권을 부여하고, 중요한 정책을 지역에서 차별성 있게 결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예를 들어 필요에 따라 어떤 도(道)는 미국산 쇠고기를 사먹을 수 있고, 싫으면 안 먹으면 되는 겁니다. 어떤 도는 교육 문제에 있어 삼불(三不)정책을 도입하고, 그게 싫은 도는 풀면 되는 겁니다. 그 다음에 주민들이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하자는 거죠. 저는 이런 방식의 지방자치제를 위해 헌법개정이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영정 : 전상인 교수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연방제가 된다 해도 중앙정부의 역할은 여전히 엄청나게 클 수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소위 협상적 권력이라고 하는 부분을 완전히 장악하기 때문이지요. 그것을 견제할 수 있는 것은 지방시민사회뿐입니다. 따라서 분권의 제도화를 논의할 때는 반드시 시민사회의 성장 문제를 함께 고민해야 합니다.

    김형기 : 현재 우리나라 담론에서 볼 때 분권을 강조하는 것은 보수 쪽입니다. 진보진영은 분산을 통한 균형발전에 보다 역점을 두고 있지요. 한국 사회가 수도권 과대집중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상황에서 즉각적인 분권은 상당히 위험할 수 있다고 봅니다. 현재 세금의 60%가 수도권에서 걷히는 상황인데, 이런 구도에서 재정분권이 이뤄지면 서울과 경기도, 인천은 더욱 부자가 되고 다른 지방은 소외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점에 대해 과거 김영정 교수와 수차 토론한 적이 있는데, 당분간은 중앙정부가 재정자원을 재분배할 수 있는 권한을 갖도록 하고 지역경제의 회복과 활성화에 비례해 서서히 이 권한이 지방으로 옮겨가도록 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사실 진보진영 내에서도 의견이 엇갈리는데, 저는 수도권 집중의 대폭 완화를 전제로 한 상태에서 점진적으로 재정분권을 진행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김문수 경기도지사는 ‘대수도론’을 주장하면서 수도권에 우선 투자하면 그 효과가 지방에까지 미친다는 적하이론(trickle down)을 내세우지요. 하지만 산업연관분석 등을 통해 보면 수도권에 대한 투자는 수도권을 배부르게 할 뿐, 지방경제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 합니다. 그래서 저는 지방 투자를 주장합니다. 또 지방에 민간 투자를 유도하기 위한 국가의 선제적인 투자도 필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수도권 분산, 공공기관 이전, 행정수도 건설, 세종시 정책 등이 다 여기에 맞물려 있는 문제입니다. 이것이 한국사회의 특수성이기 때문에 이 문제를 제외하고 시장 메커니즘으로만 분권에 접근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전상인 : 김형기 교수 말씀처럼 분권에도 과도기가 필요하겠지요. 저는 일단 각 시·도에서 시·도 헌법을 만드는 방식으로 제도적인 분권화의 틀을 먼저 갖춘 뒤 과도기를 부여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경기도의 독주에 대해 우려하는 분이 많은데, 그 문제는 경기도를 뺀 나머지 시·도들이 동맹(alliance)을 만드는 방식으로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시·도 간의 자유로운 이합집산을 통해 어떤 정책지형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김호기 : 하지만 오랫동안 이른바 불균형발전에 따른 수도권 집중현상이 굳어진 상태이기 때문에 수도권 지자체들이 선발자의 이점을 갖고 있다는 점을 간과하면 안 될 것 같습니다. 후발자를 키우기 위해서는 현재로서 적절한 중앙정부의 개입이 불가피하다는 말씀이지요. 또 각각의 도가 개별 헌법을 갖자는 말씀이 우리나라 여건에서 과연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오히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권한과 책임을 어떻게 적절히 나눠 가질 것인가 하는 데 있지 않을까요. 더불어 한 가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지방분권에 관한 한 효율성보다 규범적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한국 경제는 오랜 시간 불균형발전을 해왔는데, 사실 국토발전의 경우 균형발전이 불균형발전보다 더 우월한 효과를 가져올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고 봅니다. 하지만 이 상태로 발전전략이 계속 진행되면 우리나라는 중앙에 1등 국민이 있고, 지방에 2등 국민이 있는 두 개의 국가가 되겠지요. 우리가 정책을 선택하는 1차적 기준이 늘 효율성인 것은 아닌 만큼, 국토발전의 문제를 대할 때는 효율성의 문제를 뒤로 미루고 국민 통합의 차원에서 균형발전을 추진해야 한다고 봅니다.

    경제정책과 사회통합에 대한 보수와 진보의 시각

    김영정

    김영정 : 산술적 의미에서 균형발전을 이룬 나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지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고요. 미국을 예로 보면, 가장 잘사는 지역이 코네티컷이고 제일 못사는 곳이 미시시피인데, 두 지역의 주민소득 차이가 2.5배나 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주민소득 개념으로 볼 때 어느 지역도 다른 지역보다 2.5배 이상 벌지 못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렇게 불균등을 문제 삼느냐 하면, 이것이 정치적인 문제이기 때문이지요. 우리나라의 경우 불균등의 문제가 정치 갈등, 사회 혼란을 야기하고 있습니다. 정부가 지역 발전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정부가 산업구조고도화 정책을 펴면서 1990년대 이후 IT 산업을 집중 육성했지요. 경상도 지역에는 이미 전체 산업에서 IT가 차지하는 비중이 60%가량 됩니다. 중앙정부의 지역발전정책이나 국가발전정책이 한 지역의 산업구조를 완전히 바꾸고 새로운 산업 경로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강석훈 : 지방분권이 안 되는 이유는 아마 두 가지일 텐데, 첫째는 중앙에서 이미 모든 권한을 갖고 있는 이들이 그것을 놓고 싶지 않아서일 테고, 두 번째는 제가 다소 결례하는 것일지 모르겠지만 지방의 역량에 대해서도 아직은 사회적인 합의가 덜 됐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따라서 공무원 사회의 저항을 막을 수 있는 제도를 만들고, 동시에 지방의 역량을 키우는 두 가지 방법으로 분권을 위한 방법론을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영정 : 맞는 말씀입니다. 분권형 국가로 가기 위한 열쇠는 정치권이 갖고 있지요. 공무원의 저항을 누를 수 있는 방법은 분권형 헌법 제정 같은 제도개편뿐입니다. 동시에 지방의 역량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요. 지역혁신체계(Regional Innovation System)를 구축해 민주성을 담보한 시민사회의 성장을 이끌어야 합니다.

    세종시는 건설해야 하는가

    강대인 : 지역발전 문제를 논의하며 꼭 짚고 넘어갈 부분이 세종시 문제가 아닌가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한 의견을 부탁드립니다.

    전상인 : 저는 오늘날 세종시 문제를 잉태한 노무현 정부의 수도 이전 정책은 지역 균형에 관한 한 최악의 공약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것과 지역균형은 전혀 상관이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가령 정부의 경제 관련 부서가 과천에 있다고 해서 우리나라 경제정책이 그곳 주민들에 의해 이뤄집니까. 대전에 정부청사 가운데 하나가 있다고 해서 그곳 주민들이 해당 국가 정책을 수립합니까. 중앙집권적인 제도와 구조가 남아있는 한 몇 개 부서를 어디에 옮긴들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언필칭 지방화시대 혹은 언필칭 세계화시대에 중요한 것은 수도를 없애거나 줄이는 것이지, 늘리거나 옮기는 것이 아니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만에 하나 사회통합, 국민통합이 중요해서 백번 양보해 행정수도 건설이 필요했다 하더라도, 그 장소가 왜 충청도인지에 대해 저는 전혀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박정희 정부 때 충청도를 후보지로 정했다고 하는데, 그때는 서울에서 대전까지 2시간이 걸렸습니다. 지금은 전국 어느 곳도 서울에서 2시간 이상 걸리는 곳이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충청도 세종시 건설은 사실 정치적인 게임에 불과한 것이지요. 지금 충청도는 꽃놀이패를 잡은 것 같습니다. 세종시를 확보해놓은 상태에서 운 좋으면 다 받는 것이고, 양보하면 다른 것을 얻게 되겠지요. 그렇게 충청도는 이미 특권지역이 됐습니다. 그런데 강원도나 경상도, 전라도는 왜 안 되는지에 대해 언제 누가 합의한 적 있습니까? 제 결론은 세종시를 원안대로 하든, 혹은 플러스 알파로 수정해서 하든 알아서 하라는 겁니다. 대신 똑같은 세종시 혹은 플러스 알파를 강원도, 전라도, 제주도, 경상도에도 만들어줘야 할 것입니다.

    경제정책과 사회통합에 대한 보수와 진보의 시각

    김호기

    김호기 : 세종시 문제는 일단 그 과정을 돌아보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2002년 대선 과정에서 사실 이것은 정치적인 의제였지요. 그러다가 숱한 논란 끝에 결국 국가적인 의제가 되어 최종 법안 통과까지 이루어졌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에 의해 이것이 다시 정치적인 의제로 바뀌고 있어요.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균형발전과 불균형발전의 실질적인 효과는 계산하기 대단히 어렵다고 봅니다. 세종시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행정수도를 세종시로 이전했을 때 우리가 갖게 되는 실제적 효과는 계산하기 어렵고, 이 자리에서 토론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숱한 토론과 공청회를 통해 우리나라의 시민사회, 학계 등 여러 그룹이 참여해 가까스로 국가적 의제로 만들어놓은 사안, 게다가 법제적 약속까지 한 사안이라면 원안대로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요. 저는 그 점에서는 박근혜 의원 얘기가 맞다고 봅니다. 이명박 정부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은, 정말 세종시 건설 정책을 수정하고 싶었다면 먼저 안(案)을 갖고 시작했어야 한다는 거지요. 제가 보기에는 정부가 너무 아마추어적으로 접근했기 때문에 이 논란이 발생했습니다. 대통령이든 총리든 화끈하게 ‘각종 연구 결과 세종시 건설에 문제가 있고, 국민 절반 역시 이 정책을 반대하고 있다. 따라서 정부가 새롭게 만든 안에 대한 국민 의견을 묻고 싶다’고 밝혔어야지, 슬쩍 한번 건드려 국민의 반응만 보려 하지 않았습니까. 아직까지 우리는 정부의 생각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김영정 : 행정수도 이전 문제가 노무현 정부가 정치적으로 만든 선거 이슈였던 것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그것을 제안한 지식인 그룹이 꼭 분산의 효과만 생각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불균등의 문제, 균형의 문제와 연관돼 있지요. 저는 세종시 건설이 한국적 상황에서 정말 의미 없는 일일까 계속 되뇌어봅니다. 굳이 정리하자면 우리의 상황을 타개하는 한 가지 방법일 수 있다는 것이 제 의견입니다.

    김형기 : 세종시를 건설하면 행정 비효율 문제는 확실히 생길 겁니다. 그것을 없다고 하면 안 되겠지요. 그렇다면 해법은 청와대와 국회를 포함해 모든 부처를 옮기는 것입니다. 행정수도를 이전한 뒤 서울은 경제도시나 문화도시로 키우는 것인데, 이 부분은 위헌판결을 받았지요. 일단 헌법재판소 결정이니 받아들여야 한다면, 세종시를 대한민국의 수도로 한다고 명문화하고 차제에 지방분권 개헌을 하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강대인 : 세종시 문제를 포함해 지방분권의 문제가 우리 사회에서 이렇게 어려운 것은 역시 한국 사회가 갖고 있는 특수성, 역사성 때문일 거라고 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이 토론을 통해 선생님들이 느끼신 부분에 대해 자유롭게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전상인 : 아까 강석훈 교수께서 각자 그리는 세상을 한번 얘기해보자고 하셨지요. 제가 꿈꾸는 건 흔히 말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입니다. 가진 사람, 기득권자가 많이 베푸는 것이지요. 한국 사회의 문제는 가진 사람이 미리 베풀지 않아서 빼앗겼고, 빼앗기는 것이 기분 나빴다는 점입니다. 반대로 못 가진 사람은 가진 사람이 베푸는 것에 대해 고마워하지 않았고, 감사하지 않으니 빼앗아도 찜찜했습니다. 저는 좋은 사회란 가진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을 최대한 배려하고 도움을 받은 사람은 그에 대해 진정으로 감사함으로써 더 많이 베풀도록 자극하는 선순환의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는 법이나 제도 이전의 문제지요.

    김형기 : 오늘 우리 대화와 토론의 출발점은 보수·진보 양쪽이 서로의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컨대 보수가 경쟁력과 효율성을 중요시한다면, 진보도 이제는 시스템의 경쟁력, 효율성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가자는 겁니다. 동시에 보수는 진보가 내세우는 연대와 공평성의 가치를 인정하자는 것이지요. 그것이 우리 사회 발전에서 중요한 2개의 축이라는 것, 어느 하나도 놓칠 수 없는 중요한 축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인정하자는 공감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사실 오늘 토론은 총론에 그쳐버렸는데, 앞으로 지속적으로 대화를 나눠서 교육문제, 복지문제, 고용문제 같은 좀 더 구체적인 이슈에 대해 논의하고, 우리가 어디까지 합의할 수 있는지 알아보면 좋겠습니다. 나아가 공동으로 정책제안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요즘 이념 스펙트럼을 보면 자유주의와 사회민주주의 사이에서 공동체자유주의와 사회자유주의라는 중도보수와 중도진보가 떠오르고 있는데, 두 쪽이 양축을 이뤄서 대화하고 토론하면서 합의된 국정방향을 제시하는 흐름이 생겨나기를 기대합니다.

    경제정책과 사회통합에 대한 보수와 진보의 시각

    강석훈

    강석훈 : 오늘 여러 선생님과 한국 사회의 미래에 대한 인식을 나누고 싶었는데, 그런 논의가 없었던 것 같아 아쉽습니다. 저는 한국 경제가 큰 폭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회가 한 10년 남았다고 생각합니다. 아시다시피 2018년부터는 절대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하고, 노인인구도 급속도로 늘어납니다. 한국 경제가 활력 있게 커나가고 발전할 수 있는 시기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그 10년을 우리가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저와 우리 후손들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보고 있지요. 그래서 이 기간을 어떤 가치나 규범을 실험하는 시기로 보내는 건 역사에 대한 책무를 다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는 10년이 한국 경제에 남아 있는 시간이라는 데 공감대를 가진다면 좀 더 많은 주제에 대해 합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태수 : 개인적으로 복지 문제나 양극화 문제를 조금 더 논의했으면 서로의 시각차를 알게 되고 공감대를 얻는 데 성과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토론이 거의 없었던 점이 아쉽습니다. 어쨌든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말처럼, 오늘 이 자리에서 만나본 분들이 진보나 보수의 가치를 중요하다고 여기고 있음에도 첨예한 의견차를 보이지 않았던 것을 확인하게 된 게 성과입니다. 다만 지금까지 한국 사회를 보수 혹은 우파의 가치가 굉장히 오랫동안 지배했던 걸 생각하면, 앞으로는 의도적 내지는 현실적으로 좌파 혹은 진보의 가치가 좀 더 강조돼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특히 복지영역에서 그렇습니다. 세계화시대에 우리 국민이 겪고 있는 고통 문제를 봤을 때 복지의 중요성을 강조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명희 : 오늘 훌륭한 선생님들을 만나서 상당히 좋은 공부가 됐습니다. 그 점에서 먼저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고요. 오늘 논의도 사실 큰 의미가 있지만 구체적인 문제, 현실에 대해 각자의 입장을 명확히 하는 논의가 더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나라에도 여러 이념 스펙트럼이 있는데, 서로가 존재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구체적인 현실에 근거해 명확한 주장을 펴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서로 조금씩 더 다가서고 양보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오히려 각자가 자기를 명확히 하고 성숙시킴으로써 좌는 좌대로 우는 우대로 공존하고 협력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오늘 사실 교육문제가 끼어있어서 나왔는데 이 문제는 한번도 논의되지 않았습니다. 다음 기회에는 이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김호기 : 저는 민주주의라는 것은 사회 여러 부분의 자율성이 증대되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최근 우리 지식사회는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두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 번째는 지식사회를 중심으로 담론과 정책을 생산하는 그룹들이 정권적 의제와 국가적 의제를 구분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컨대 산업구조 고도화나 사회 양극화, 저출산·고령화 문제는 국가적 의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는 이러한 문제까지 보수와 진보가 정권적 차원에서 논쟁을 벌이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두 번째로 사회통합 문제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오늘 주제는 대화와 공존이었는데, 저는 경우에 따라서는 경쟁을 제대로 할 때 통합이 이루어지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나라의 보수와 진보는 그동안 우리 사회의 주요 이슈에 대해서, 그 이슈에 담긴 가치와 정책에 대해서 제대로 토론을 안 했을지 모릅니다. 주로 주변적인 문제, 지엽적인 문제에 대해서만 논쟁을 벌였지 핵심적 의제에 대해서, 가치와 정책에 대해서 제대로 된 논쟁을 하지 못했습니다. 각각의 핵심 가치와 그에 연관된 개별 정책에 대해 제대로 한번 경쟁하게 될 때 저는 상대방의 장점과 단점을 이해하는, 정말 질 높은 통합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인재 : 그동안 사적인 자리나 공적인 자리에서 보수·진보 얘기를 많이 해봤는데, 끝날 때는 늘 ‘서로 다르구나’라는 걸 확실하게 느꼈습니다. 접근 방식이나 기본 전제에 있어 정말 다르다는 말이지요. 그러면서 또 공통적으로 드는 생각은 보수나 진보 모두 반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정책학습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굉장히 취약한 것 같아요. 구체적인 정책을 개발하고 그에 대한 장단점을 토론하려 할 때 보면, 보수나 진보 할 것 없이 정책적 상상력이나 기본적인 학습이 다 부족합니다. 그런 측면에서는 좀 더 분발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김영정 : 오늘 참 많이 배웠습니다. 저 역시 마지막으로 좋은 사회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사회발전을 하나의 생태체계라고 봅니다. 이것을 구성하는 요소는 성장, 분배, 민주, 평등이라고 생각하지요. 이 네 가지가 생태적 과정처럼 서로 잘 물리고 조화를 이뤄야 좋은 사회가 될 겁니다. 그런데 사실 이 네 가지의 가치는 진보와 보수 쪽에서는 달리 볼 수 있는 것들이에요. 이 서로 다른 생각들을 뭉쳐서 좋은 사회를 만드는 시스템을 생산하는 데 꼭 필요한 기초 가치가 민주주의 가치라고 봅니다. 진보나 보수나 민주주의 가치에 대해서는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좋은 민주시스템을 만드는 데 협력할 수 있을 겁니다. 특히 오늘 제가 공부하고 있는 지역발전 문제를 논의하는 과정을 통해 ‘좋은 시스템을 만드는 데 같이 갈 수 있겠다’는 가능성을 발견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강대인 : 저는 보수 진보 양쪽의 지식인들이 대화를 통해 차이를 발견하는 것 자체가 희망이라고 생각합니다. 서로 차이를 깨닫고 그것을 극복해가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앞으로 작은 주제를 가지고 집중적으로 논의해 실질적인 결과물을 이끌어내는 토론을 계속 진행해가는 노력이 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리면서, 4시간에 걸친 논의를 마무리짓겠습니다. 진지하게 토론에 참여해주신 선생님들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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