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9월호

강력수사의 귀재 장영권 경감

“흉악범일수록 다루기 쉬워 … 형사이기 전에 인간으로 다가서라”

  • 조성식│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airso2@donga.com│

    입력2010-08-23 14: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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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8올림픽 유도 국가대표선발전 탈락 후 교사 거쳐 경찰로
    • 순경에서 경감까지 특진으로만 올라간 전설적 형사
    • 서울경찰청 강력계, 광역수사대 등 강력부서만 15년 근무
    • 청송교도소 출신들과의 끈끈한 인연으로 숱한 강력사건 해결
    • 대한민국 대표 소매치기 모임에도 참석
    • 내게 형사는 천직, 다시 태어나도 형사 하겠다
    강력수사의 귀재 장영권 경감
    서울 금천경찰서 강력계장 장영권(45) 경감. 그는 형사다. 그에게는 퇴근이라는 개념이 없다. 강력계 사무실 캐비닛 뒤에 있는 이층침대가 그의 숙소다. 1층 침대는 그가 사용하고, 2층에서는 당직자가 잔다. 세수는 샤워장에서 하고 옷은 직접 빨아 입는다. 식사는 구내식당을 이용한다. 이런 생활이 3년을 넘었다. 2007년 그의 아내는 아이들을 데리고 부산 시댁으로 내려갔다. 뇌졸중을 앓는 시어머니 병수발을 들기 위해서였다.

    경찰생활 20년째인 장 경감은 강력수사의 귀재다. 서울경찰청 강력계, 서울경찰청 형사과 기동수사대,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대 등 강력부서에서만 15년 동안 근무했다. 남들은 한 번 하기도 힘든 특진을 네 번이나 했다. 순경으로 출발했으니 경감에 이르기까지 매번 특진을 한 셈이다(순경-경장-경사-경위-경감). 전국 강·절도 검거실적 1등을 차지하기도 했다.

    강력반에서 잔뼈가 굵은 형사답게 그의 몸은 근육 덩어리다. 키는 170㎝가 채 안 돼 보이지만 몸무게가 100㎏이나 나간다. 떡 벌어진 가슴이 힘깨나 쓸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팔뚝 굵기도 보통 사람의 두 배쯤 돼 보인다. 가슴둘레가 120㎝라고 한다.

    외유내강(外柔內剛)이랄까. 험한 근육과 달리 그의 표정은 매우 부드럽다. 쌍꺼풀이 있어서 더 그런지 몰라도 남자치고는 고운 눈매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강력범들을 제압할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 정도로 선해 보이는 인상이다.

    그는 원래 유도선수였다. 초등학생 때부터 운동을 시작해 중·고등학교 시절엔 전국체전에 출전했다. 1983년 유도 특기생으로 용인대에 입학한 그는 1학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했다. 단기사병이었다. 제대 후 복학이 안 돼 재입학해 85학번이 됐다. 용인대 4학년이던 1988년, 올림픽을 앞둔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1984년 LA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안병근 선수에게 패했다.



    “너 몸 좋은데…”

    국가대표 꿈이 좌절된 그는 대학 졸업 후 문일고(서울 금천구 시흥동)에서 1년8개월 동안 체육교사를 지내다 경찰로 전향했다. 1991년 충북 충주에 있는 중앙경찰학교에 입교했다. 결혼한 지 4개월 만이었다.

    애초 무도 특채를 희망했으나 필기시험에서 탈락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의 첫 근무지는 서울 남부경찰서(현 금천경찰서)였다. 신고식 하는 날 강력반장이 “너 몸 좋은데 강력계 해볼래” 하고 권한 것이 강력형사의 길을 걷게 된 계기가 됐다.

    대형 강력사건 해결사로 이름을 날린 그를 더욱 유명하게 만든 것은 청송교도소 재소자들과의 특별한 인연이다. 청송 재소자들 사이에서 그는 ‘장 반장’으로 통한다.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대에서 10여 년간 강력반장으로 활약한 덕분이다. 경찰 동료들 사이에선 ‘청송맨’으로 불린다. 알고 지내는 청송 재소자와 청송 출신 전과자가 3000명에 달한다고 한다. 그들 모두가 그에겐 소중한 제보자다. 웬만한 강력사건은 그들에게 물어보면 답이 나온다. 어떻게 된 사연일까. 그는 “취미생활이 청송 방문”이라며 겸연쩍게 웃었다.

    “매달 몇 번씩 청송에 갑니다. 그냥 면회하기는 뭣하니 옷이라도 사서 가지요. 매번 새 옷을 살 수는 없으니 더러는 헌옷을 가져가기도 합니다. 헌옷가게에서 구입해 깔끔하게 세탁하지요. 많지는 않지만 영치금도 넣어줍니다. 한 사람당 2만~3만원씩 넣어주지요. 청송 재소자 대부분은 가족이 없거나 가족과 단절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만큼 정에 굶주려 있죠. 조사할 때 인간적으로 대해주면 무척 고마워하면서 인간적으로 다가옵니다. 조금만 정을 줘도 금방 친밀한 관계가 형성됩니다. 그들이 내게는 큰 자산이죠.”

    한번은 청송 재소자들이 그가 근무하던 경찰서 서장한테 그의 선행을 알리는 편지를 보냈다. 그 일로 그는 서장 표창을 받았다. 지금도 적잖은 재소자가 그에게 편지를 보내온다. 대부분 “인생의 선배로 모시겠다” “형사님의 말 한마디가 내 인생을 바꿨다” 따위의 감사편지다.

    그는 평소 긴밀한 관계를 맺어둔 청송 사람들 덕분에 많은 사건을 해결했다. 대표적인 게 2001년 12월 경북 경주에서 발생한 은행현금수송차량 탈취사건이다. 그가 이 사건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1997년 충북 옥천에서 일어난 동일한 종류의 사건이었다. 범인이 밝혀지지 않은 미제(未濟)사건으로, 용의자는 증거부족으로 풀려난 상태였다. 유일한 증인이던 제보자가 차에 치여 죽은 게 결정적 원인이었다. 무죄로 석방된 용의자는 경찰이 무고한 사람을 범인으로 몰았다며 관계기관에 진정했고 결국 담당형사 2명이 옷을 벗었다.

    조작된 알리바이를 깨라

    강력수사의 귀재 장영권 경감

    형사가 천직이라고 말하는 장영권 경감.

    1999년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대 강·폭력반장이던 장 경감(당시 계급은 경사)은 옥천 사건 용의자이던 A씨의 전과기록을 면밀히 살폈다. 울산이 고향인 A씨는 청송교도소 출신으로 절도 12범이었다. 청송 출신 재소자들 주변을 탐문한 장 경감은 청송교도소 시절 A씨와 알고 지낸 B씨를 찾아냈다. B씨는 장 경감에게 “최근 A씨가 통화하는 내용을 우연히 엿들었는데 옥천 사건의 범인이 맞는 것 같다”고 제보했다. 문제는 증거였다. A씨 일당은 모두 세 명. 다들 멀쩡한 직업인으로 카센터에서 일하고 있었다. 장 경감은 그들의 동태를 감시했으나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했다.

    2000년 2월 이번엔 부산에서 현금수송차량 탈취사건이 일어났다. 범행수법이 옥천 사건과 똑같았다. 장 경감은 A씨의 범행이라는 심증을 굳혔으나 이번에도 증거가 없었다. A씨 일당의 알리바이가 완벽했기 때문이다. 범행이 일어난 시각, CCTV와 휴대전화 통화기록에 따르면 그들은 울산에 있었다.

    장 경감은 B씨를 이용해 도난당한 수표의 행방을 추적했다. 장 경감과 짠 B씨는 A씨에게 수표를 바꿔준다며 접근해 자신이 알고 지내던 사채업자를 소개해줬다. A씨가 사채업자에게 수표를 건네는 장면은 장 경감이 몰래 설치해둔 비디오카메라에 고스란히 찍혔다.

    장 경감은 A씨가 사채업자에게 건넨 수표를 조사했다. 부산 은행에서 도난당한 수표 한 장이 발견됐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A씨가 수표의 출처를 모른다고 잡아떼면 굴복시킬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2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2001년 12월. A씨 일당은 경주시내 대로에서 현금수송차량을 털었다. 옥천, 부산 사건과 똑같은 방식의 범행이었다. 사전에 현금수송차량의 번호판과 동선을 파악한 공범 2명이 은행 앞에서 대기하다 차량이 출발하자 오토바이를 타고 뒤를 쫓았다. 수송차량이 교통신호에 걸려 대기하는 순간 차 뒤에 바싹 붙어 트렁크를 따고 돈 보따리를 꺼내 오토바이에 싣고 달아났다.

    경찰은 A씨 일당을 용의선상에 올렸다. 하지만 또다시 알리바이가 발목을 잡았다. 앞선 사건과 마찬가지로 CCTV와 휴대전화 통화기록이 그들의 알리바이를 입증했다. 이번에도 그들은 범행시간에 울산에 있었다.

    장 경감은 다시 한번 A씨의 청송 동기인 B씨를 활용했다. A씨는 “수표를 안전하게 바꿔주겠다”는 B씨의 제안을 별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잡힐 때가 됐는지, 그는 사건 직후 땅속에 묻어뒀던 수표 뭉치를 들고 나타났다. A씨가 사채업자에게 건넨 수표는 고스란히 장 경감에게 넘어갔다. 이를 근거로 경찰은 A씨 일당을 잡아들였다. 처음에 그들은 알리바이를 내세우며 버텼다. 하지만 A씨가 사채업자에게 수표를 건네고 현찰을 받는 장면이 담긴 비디오테이프와 그 자리에서 나온 경주 은행 수표들을 들이밀자 더는 부인하지 못했다. A씨가 수표 바꾼 걸 미처 몰랐던 공범 두 명이 A씨에게 항의하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물건을 조세형에게 넘겼다”

    강력수사의 귀재 장영권 경감

    영화 ‘공공의 적’에서 강력반 형사 역을 맡은 설경구

    그렇다면 알리바이는 어떻게 된 걸까. 조사결과 주범인 A씨가 사건이 발생했을 때 울산에 있었던 건 사실이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수송차량을 턴 건 나머지 2명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휴대전화 통신기록에는 세 사람이 울산에서 휴대전화로 통화한 것으로 나타났을까.

    사건 당일 울산에 가 있던 A씨는 공범 2명의 휴대전화기를 갖고 있었다. 그는 경주의 한 은행에서 출발한 수송차량이 첫 번째 교통신호를 받고 멈추는 시각에 정확히 맞춰 울산 모 은행 현금인출기 CCTV 앞에 섰다. 이어 수송차량이 두 번째 신호를 받고 대기하는 순간, 말하자면 범행이 발생한 시각에 공범 두 사람의 휴대전화번호를 눌렀다. 세 사람이 울산에 있었다는 알리바이는 이렇게 조작됐던 것이다.

    “그 사건, 정말 고생 많이 했습니다. 부산 사건이 나기 직전부터 시작해 2년간 내사를 계속했습니다. 근무지가 서울이라 그 사건에만 계속 매달릴 수도 없었지요. 쉬는 주말을 이용해 짬짬이 부산과 울산, 경주에 내려가 단서를 추적했습니다. 동료들이 ‘머리가 좀 어떻게 된 것 아니냐’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범인들의 직업이 분명했고 알리바이가 확실했으니까요. 아무런 낌새도 없는데 계속 감시할 수는 없잖아요. 카센터에서 일하면서 1년에 한 건 정도씩 범행을 하는 자들이라 잠복도 무의미했지요. 수표 추적과정에 700만원가량의 사비(私費)도 썼습니다. 비디오카메라로 증거를 확보한 게 주효했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건 옥천 사건 당시 제보자의 목숨을 앗아간 뺑소니사고의 진상을 밝히지 못한 점입니다. 고의적인 사고라는 심증을 가졌지만 물증이 없으니 어쩔 수 없었지요.”

    1998년에 발생한 충북 도의회 의장 집 절도사건을 조사할 때도 청송 사람들의 제보가 큰 도움이 됐다. 범인들은 충주에 있는 도의회 의장 집에 100억대의 국보급 보물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세 차례 침입을 시도한 끝에 범행에 성공했다. 청송 사람들의 제보를 받고 용의자들의 신상을 파악한 장 경감은 휴대전화 발신기록을 추적해 대전에서 범인들을 검거했다. 범행이 일어난 지 4개월 만이었다. 범인들은 그 사이에 광주에 내려가 또 다른 문화재를 훔쳤다.

    장 경감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던 용의자들은 체포된 후 사건의 진상을 털어놓았다. “(훔친) 물건들을 세형이 형(조세형)에게 넘겼다”는 진술이 나왔다. 장 경감이 “아직도 조세형이 범죄를 하느냐”고 묻자 그들은 “지금도 세형이 형이 찍어준다”고 말했다. 장 경감은 그날 오후 범인들을 입감시키고 다음날부터 조씨를 내사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전설적인 도둑인 조씨를 잡으려면 치밀한 계획과 완벽한 증거가 필요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날 밤 조씨가 서울 마포경찰서 지구대 직원에게 붙잡혔다. 인근 아파트에서 가정집 절도를 하다 체포된 것이다. 조씨는 처음에 신분을 감췄다. 하지만 지문조회 결과 그가 조세형임이 드러났다.

    청송에서 수감생활을 했던 베테랑 소매치기들은 출소 후 계모임을 만들었다. 소매치기는 아니지만 대도(大盜)의 명성을 누리고 있는 조세형씨가 이 모임의 주축이다. 장 경감도 이 모임에 가끔 참석한다. 언젠가 그가 회원들에게 물었다. “도대체 조세형은 왜 그러느냐?”고. “그 사람, 습성입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남의 물건을 건드리는 습관이 있어 담배나 라이터도 무의식중에 슬쩍 들고 간다는 것이다.

    강남역 화장실에서 발견된 지갑 150개

    장 경감이 소매치기들과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된 것은 2005년 서울시내에서 소매치기 일당 16명을 검거한 사건과 관련이 깊다. 당시 장 경감은 경위로 특진한 뒤 동작경찰서 강력반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특진을 하면 얼마 동안 일선서에 나가 있는 것이 경찰 인사관행이다. 그때도 수사의 출발점은 청송 사람들의 제보였다.

    “전국의 유명한 소매치기들이 서울 강남에 모여 있다는 제보를 받았습니다. 일당 중 한 명을 잡아서 추궁했죠. 강남역 공중화장실 천장에서 소매치기들이 버린 지갑 150개가 발견됐습니다. 이들은 주로 횡단보도에서 범행을 했는데 수법은 이렇습니다. 두 조로 나뉘어 횡단보도 양끝에 서 있습니다. 한 명이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 뒤에 따라붙어 칼로 가방 속 지갑을 딴 다음 맞은편에 서 있는 공범한테 넘기는 겁니다. 돈만 빼낸 다음 지갑은 화장실에 갖다 버렸던 거죠.”

    그는 “조폭보다 소매치기 잡는 게 더 위험하다”고 했다. 소매치기들은 혁대 안쪽에 예리한 칼을 감추고 있기 때문에 언제 기습을 당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또 상의 옷깃에 청산가리를 숨겨놓고 여차하면 자살을 시도하기 때문에 체포할 때 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장 경감은 청송 사람들로부터 종종 구직 부탁을 받는다. 마음이야 힘닿는 데까지 도와주고 싶지만 일부 청송 출신의 경우 과거의 사고방식을 버리지 않고 있어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아파트 경비 자리를 소개해줬는데 아파트 열쇠를 복사해 절도를 하더군요. 오랫동안 교도소에 수감돼 있었기 때문에 세상물정 모르고 눈만 높아요. 한탕으로 수천만원을 챙겼던 경험들이 있기에 웬만한 수입은 성에 차지 않는 거죠.”

    얼마 전에도 장 경감과 잘 알고 지내던 청송 사람 한 명이 재구속됐다. 절도죄였다. 며칠 전만 해도 경찰서로 찾아와 막일을 한다며 손바닥을 보여주던 사람이었기에 실망감이 컸다. 이처럼 때로 뒤통수를 맞지만, 청송 사람들에 대한 그의 애정은 변함없다.

    “그들은 출소해도 따뜻하게 맞아줄 사람이 없습니다. 오갈 데 없는 그들의 친구나 형이 돼주고 싶습니다.”

    1997년에 일어난 4인조 특수강도 사건은 그가 청송 사람들과 맺은 인연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를 잘 보여준다. 40대 후반의 남자 4명이 전국을 돌며 강도짓을 했는데 수법이 한결같았다. 택배 직원을 가장해 가정집에 들어가 인질을 잡고 금품을 강탈한 것. 장 경감은 청송 출신 재소자들에게 용의자들의 몽타주를 보여줘 그중 한 명이 경남 진주에 살고 있는 걸 알아냈다. 수사팀은 거주지 주변에 차를 대놓고 잠복에 들어갔다. 식사는 차 안에서 빵과 우유로 때우고 우유팩에 소변을 봤다. 잠도 차에서 잤다.

    “당신을 형으로 모시겠다”

    그렇게 20일이 지났을 때 용의자가 귀가했다. 수사팀이 집 안으로 쳐들어갔을 때 용의자의 노부모가 있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부모가 보는 앞에서 용의자에게 수갑을 채웠다. 일주일 뒤 용의자의 어머니가 그 충격으로 사망했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얼마 후 장 경감 앞으로 편지가 날아왔다. 청송교도소에 수감된 범인이 보낸 것이었다. “어머니 산소에 술 한 잔 뿌려주고 싶으니 도와달라”는 부탁이었다. 장 경감은 마음이 아팠지만 법을 어기지 않는 한 도와줄 방법이 없었다. 그 편지는 두 사람의 인연을 새롭게 했다. 장 경감이 안타까운 마음에 교도소로 그를 찾아갔고 이후 수시로 면회하면서 마음을 터놓고 얘기하는 사이로 발전한 것이다.

    세월이 흘러 수감생활을 마친 그가 장 경감을 찾아와 인사하며 이렇게 말했다.

    “체포된 후 당신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악에 받쳐 있었습니다. 하지만 교도소 생활을 하면서 조금씩 마음이 바뀌어 당신이 나를 개과천선하도록 도와준 것을 고맙게 여기게 됐습니다. 나이로는 내가 15년쯤 선배지만 당신을 형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장 경감은 최근 청송 출신 추모씨의 유골을 인도하기 위해 관계기관과 협의하고 있다. 추씨와의 인연은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장 경감은 자신이 구속시킨 한 절도범을 통해 우연히 추씨를 알게 됐다. 가족이 없어 찾아오는 사람이 없다는 말을 듣고 자주 그를 면회했다. 갈 때마다 속옷과 양말, 음식을 넣어주었다. 7개월쯤 후 출소한 추씨는 장 경감의 사무실로 찾아와 일자리를 부탁했다. 장 경감은 처음엔 그를 자동차매매센터에 소개해줬다가 그가 잘 적응하지 못하는 듯싶어 택시회사로 옮겨줬다. 얼마 후 추씨가 장 경감이 수사하는 사건에 공범으로 연루된 사실이 드러났다. 그때만큼은 장 경감도 화가 났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랬을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배신감이 훨씬 더 컸지요.”

    강력수사의 귀재 장영권 경감

    어릴 적에 TV 드라마 ‘수사반장’에 푹 빠졌던 장영권 경감은 지금도 ‘장 반장’으로 불리길 좋아한다

    추씨는 그 사건으로 3년6개월 복역했다. 출소 후엔 진짜로 맘 잡고 노동일을 했다. 최근 장 경감은 그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청송 출신 재소자와 사소한 말다툼 끝에 칼에 찔려 죽었다는 것이다. 관할 구청에 문의하니, 가족은 없고 삼촌 한 명이 있는데 시신을 인도할 의사가 없다고 해 화장을 했으며 유골이 파주에 있다고 했다. 추씨의 유골을 인도하려면 그의 삼촌의 동의가 필요하기 때문에 장 경감은 조만간 그를 만날 계획이다.

    “추씨가 비록 생전에 죄를 많이 지어 30년가량 교도소 생활을 했지만, 저승에서나마 편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영혼을 달래주고 싶었습니다. 구청과 협의를 마치는 대로 유골을 인수해 그의 고향에 뿌려줄 계획입니다.”

    장 경감은 희대의 탈주범 신창원씨와도 남다른 인연을 맺고 있다. 1997년 경찰은 전국의 베테랑 형사 9명을 선발해 신씨 전담 수사팀을 꾸렸다. 장 경감도 수사팀의 일원이었다. 그는 “신창원은 복싱에 능했다”며 “당시 경찰관들이 너무 안이한 생각으로 신창원을 잡으려 했다”고 조심스레 말했다. 장 경감은 요즘도 가끔씩 신씨를 면회하는데 그의 부친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인권위에 불려가다

    완벽한 사람이 없듯이 완벽한 형사도 없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 장 경감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2003년에 일어난 공주박물관 사건은 그의 경찰인생에서 최대의 실책으로 기록될 만한 사건이었다.

    공주박물관의 불상이 털렸다. 청송사람들에게 탐문한 결과 청송 출신인 부산의 아무개가 용의자로 떠올랐다. 그의 전공이 바로 문화재 절도였다. 휴대전화 통화기록을 조사해보니 사건 당시 그가 공주에 있었던 사실이 드러났다. 곧바로 그를 체포했다.

    범행 당시 인질로 잡혔던 박물관 직원도 그가 범인이 맞다고 진술했다. 집을 압수수색하니 침대 밑에서 칼과 노루발장도리(빠루)가 나왔다. 직원의 증언으로는 공범이 있었다. 용의자는 자신의 형과 함께 범행을 저질렀으며 물건은 형이 빼돌렸다고 진술했다. 그런데 형은 부인했다. 동생은 검사와 경찰서장이 입회한 자리에서도 일관되게 진술했다. 수사팀은 형이 거짓말한다고 보고 둘 다 구속했다.

    20일 뒤 진범이 잡혔다. 구속돼 있는 용의자(동생)와 얼굴이 매우 닮았다. 키도 비슷했다. 왜 거짓자백을 했느냐고 묻자 “검사가 다른 죄를 봐준다고 해서”라고 대답했다. 범행수법은 인터넷을 통해 익혔으며 실제로 공주박물관을 털 계획으로 접근했다가 실패한 적이 있다고 털어놓았다.

    범행을 부인했던 형은 불법감금을 당했다며 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넣었다. 장 경감은 인권위에 불려가 한 차례 조사를 받았다. 그걸로 끝이었다. 장 경감과 알고 지내던 청송 사람들이 “장 반장이 어떤 사람인데 괴롭히느냐”며 진정인에게 압력을 가해 진정을 취소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한편 인질로 잡혔던 박물관 직원은 진범이 잡힌 지 한 달쯤 후 목숨을 끊었다. 무고한 사람을 범인으로 몰았다는 자책감을 견디지 못했다는 것이다.

    “반면교사가 됐던 사건입니다. 후배들에게 교육용으로 종종 들려주지요. 처음부터 누가 범인이라고 단정하지 말라고요. 한번 그렇게 생각하면 모든 걸 거기에 맞추게 되고 끝까지 그 방향으로 몰고 가게 됩니다. 정말 큰 교훈을 얻은 사건입니다.”

    장 경감은 전공이 강·절도지만 조폭 수사에서도 주목할 만한 성과를 냈다. 대표적인 사건이 광역수사대 강·폭력3팀장이던 지난해 12월, 경기도 광명의 폭력조직인 철산리파를 일망타진한 것이다. 철산리파는 2001년부터 광명시내 유흥업소를 상대로 금품을 뜯거나 부동산 이권사업에 개입해온 토착 조폭. 두목 김모씨 등 15명이 구속되고 조직원 26명이 불구속 입건됐다. 이 사건은 언론에도 크게 보도됐다.

    2005년 동작서 강력반장을 할 때는 강서 영등포 일산 등지에서 활동하던 건달 73명을 잡아들여 그중 7명을 구속시켰다. 이들은 아파트에서 배출되는 쓰레기를 무단으로 가져가 팔고 아파트 입주권(딱지) 매매과정에 개입해 이권을 챙겼다.

    2007년엔 중국 흑사파의 실체를 처음으로 밝혀냈다. 흑사파는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 일대 ‘차이나타운’을 거점으로 활동한 조선족 폭력조직. 경찰은 유흥업소 주인 등을 상습적으로 폭행한 혐의로 흑사파 두목 양모씨 등 7명을 구속하고 25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이 조직을 검거하는 데는 장 경감 부인의 공이 컸다. 당시 장 경감은 신림동에서 가리봉동으로 이사한 상태였다. 그의 부인이 반상회에 참석했는데, 그 자리에서 “조선족 애들이 길거리에서 칼과 도끼를 휘두른다” “어느 노래방이 당했다” 따위의 얘기가 나왔던 것이다.

    “피해자들이 진술을 거부해 애를 먹었습니다. 보복을 두려워해서였죠. 저는 지금도 그 일대에 2~3개의 조선족 조직이 있다고 봅니다. 자기네끼리 세력다툼을 하고 있는데 점차 국내 조직들과 연계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수갑 채우는 순간 이마에 날아온 병

    그의 부인은 경찰이라면 고개를 흔든다. 딸만 둘인데, 사윗감이 경찰이라면 도시락 싸들고 말리겠다는 것이다. 경찰 중에서도 형사라면 더더욱 결사반대다. 하긴 박봉에 툭하면 밤샘근무하고 때로 생명의 위협까지 받는 직업을 세상의 어느 아내가 반기겠는가.

    신체적 위협은 강력반 형사의 숙명이기도 하다. 장 경감에게도 몇 차례 위험한 순간이 있었다. 경장 때 강도를 잡다가 이마에 병을 맞아 20여 바늘을 꿰맸다. 여름이었는데, 수배 중인 강도 패거리 4~5명이 파라솔 아래서 음료수를 마시고 있었다. 수갑을 채우는 순간 병이 날아왔다. 2년 후 그들은 골방에서 자고 있다가 그의 손에 체포됐다.

    신림동 살 때는 쫓고 있던 강도로부터 “가족을 다 죽이겠다”는 협박전화를 받고 긴장했던 적도 있다. 몇 년 전 강도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옆에 있던 동료가 당하는 걸 지켜봐야 했다. 강도가 가정집에 침입해 안에서 문을 잠갔다. 장 경감은 119구조대를 불러 문을 따고 들어갔다. 그 순간 강도가 식칼을 휘둘렀고 동료 형사가 찔렸다. 언젠가는 봉고차에 범인 7~8명을 태우고 가다 그들이 차 안에서 저항하는 바람에 격투를 벌인 적도 있다. 조폭들은 잡힐 때 흉기나 우산대, 야구방망이 등으로 저항하기 때문에 늘 조심해야 한다.

    장 경감에 따르면 요즘은 형사 풍속도가 바뀌었다.

    “순찰이 주 임무인 지구대 직원들은 4교대로 근무합니다. 하루 일하고 36시간을 쉬지요. 그런데 형사는 매일 근무합니다. 요즘 젊은 형사들은 시간 되면 곧바로 퇴근합니다. 주말엔 확실히 쉬고요. 차가 배당되지 않으면 현장도 잘 안 갑니다. 기름값이 없으니까요. 자기 차로는 안 가겠다는 거지요. 예전엔 영웅심에서라도 달려갔는데. 시대가 바뀐 거죠. 저는 젊은 형사들에게 ‘시간 되는 대로 가족과 함께 보내라’고 말합니다. 직장에서만 1등 하고 가정에서 꼴등하면 안 된다고. 형사 하다보면 사고를 많이 당해요. 사복 입고 다니니 유혹도 많고. 사고 터지면 검찰에 불려 다니고. 그래도 저는 형사가 좋습니다.”

    그는 어릴 적에 TV 드라마 ‘수사반장’을 보고 푹 빠졌다. 비록 운동선수의 길을 걸었지만 가슴 한구석엔 늘 형사반장을 해보고 싶다는 꿈이 있었다. 그래서 지금도 ‘반장’으로 불리는 걸 좋아한다. 경찰 경력 20년인 그의 월급은 310만원쯤 된다. 세금 떼면 270만원 안팎. 수당 포함해서다. 형사들은 사건이 나면 야근을 밥 먹듯이 한다. 하지만 야근수당은 밤 10시까지의 근무에 대해서만 나온다.

    “민간인들한테 ‘수고 많다’는 얘기를 듣거나 내가 잡아넣었던 청송 재소자들이 감사편지를 보내오면 보람을 느낍니다. 직업인으로서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생각뿐입니다. 사실 급여는 예전보다 좋아졌습니다. 월 100만원짜리 직장도 구하기 어려운 세상 아닙니까. 많게 생각하면 많고 적게 생각하면 적은 거죠. 적은 돈이나마 어렵게 사는 사람들에게 베풀자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르바이트 하며 아빠를 이해하게 된 딸

    ‘강력반 형사’ 하면 일단 거칠다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영화 ‘공공의 적’에서 강력반 형사로 나온 설경구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이 점에서 장 경감의 얘기는 뜻밖이다.

    “형사이기 전에 인간으로서 피의자에게 예의를 갖춰야 합니다. 형사라고 으스대지 말고. 윽박질러 자백을 받을 게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 시인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조사할 때 말도 따뜻하게 하고 음료수도 대접하면서 피의자의 마음을 사야 합니다. 고향이나 학교를 언급하면서 편하게 대화하다보면 마음의 문을 엽니다. 그들도 범죄자이기 전에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흉악범일수록 다루기가 쉽습니다. 정에 굶주려 있기 때문이죠. 저는 출소한 사람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합니다. 주변에서는 왜 쓸데없는 사람들을 만나냐고 하지만, 형사인 제게는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고객입니다. 그들이 언제 제게 정보를 줄지 모르잖습니까.”

    그는 최근 경찰에서 논란이 된 실적주의(성과주의) 폐해에 대해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중립적 견해를 비쳤다.

    “나는 직원들에게 실적을 다그치지는 않습니다. 다만 국가에서 월급 받는 공무원으로서 기본은 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강력반 한 팀이 5명인데 한 달에 강·절도범 한 명도 못 잡았다면 한 달 동안 놀았다는 얘기 아닙니까. 국민에게 미안하죠.”

    그는 조만간 고향인 부산으로 내려가 가족과 합칠 계획을 갖고 있다. 뇌졸중을 앓는 팔순노모의 대소변을 받아내는 아내의 고생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기 위해서다. 표현은 안 하지만, 아내에게는 늘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두 딸은 또 어떤가. 현재 대학교 1학년인 큰딸은 사춘기에는 아빠에 대한 거부감이 컸다. 하지만 대학생이 돼 햄버거 가게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아빠의 고생을 이해하게 됐다고 한다.

    “운동해선 금메달을 못 땄지만 경찰조직에서만큼은 1등 하자는 각오로 열심히 뛰었습니다. 운동할 때도 그랬지만, 남이 한 시간 잠복하면 나는 두 시간을 했습니다. 다시 태어나도 형사를 하겠습니다. 제게는 천직입니다.”

    대한민국에서 거칠기로 둘째가라면 섭섭해 할 청송 사람들이 그에게 편지를 보내는 이유를 알겠다. 그는 진짜 형사다. 사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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