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9월호

은퇴선언 양준혁의 불꽃 야구 인생

“단 한번도 야구를 즐긴 적 없다, 오직 죽자 사자 뛰었을 뿐”

  • 송화선│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10-08-23 14: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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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성라이온즈는 내게 고향, 첫사랑, 오래된 연인”
    • “사장한테 큰소리쳤다가 해태로 쫓겨났다”
    • 가장 자랑스러운 기록은 최다 안타, 최다 4사구
    • 공은 눈이 아니라 오른발로 봐라
    • “선수협 안 되면 죽어버리려 했다”
    • “감독·코치 안 한다, 청소년 야구리그 만들겠다”
    은퇴선언 양준혁의 불꽃 야구 인생
    양준혁(41)은 달렸다. 6대 6으로 팽팽히 맞선 9회말 1사 1, 2루. 대타로 나선 그는 원 스트라이크 원 볼 뒤 3구를 노려 좌익수 왼쪽으로 빠지는 안타를 쳐낸 참이었다. 용수철처럼 튀어나간 공이 좌측 펜스를 때리자 좌익수는 따라가기를 포기했다. 승패는 이미 갈린 것이다. 그러나 양준혁은 계속 달렸다. 1루를 지나 2루까지, 뒤늦게 날아온 공을 2루수가 잡아내 더 이상 뛸 수 없을 때까지. 그가 2루 베이스에서 두 손을 번쩍 든 순간 비로소 경기는 끝이 났다. 7월1일 대구구장에서 열린 삼성-롯데전. 삼성은 양준혁의 끝내기 2루타로 짜릿한 승리를 거뒀다.

    대구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계속 이 경기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렸다. 타자들은 끝내기 안타를 치면 으레 1루에서 멈춘다. 승부가 결정됐으니 더 이상 뛸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양준혁은 달렸다. 마치 1회 초 첫 타격에 나선 것처럼.

    돌아보면 늘 그랬다. 평범한 투수 앞 내야 땅볼을 치고도 모자가 벗겨지도록 달리곤 했다. 188cm 100kg의 거구로 쿵쿵 땅을 구르며, 살아나가지 못할 것이 뻔한 1루를 향해 악착같이 뛰었다. 프로야구 통산 최다 출장, 최다 홈런, 최다 안타, 최다 2루타, 최다 득점, 최다 4사구…. 양준혁을 수식할 대기록은 많다. 하지만 그를 추억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언제나 조금은 우스꽝스럽던 그 뒷모습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가 그라운드를 떠났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두 번의 트레이드와 선수협 파동의 오랜 여진 속에서도 꺾이지 않았던 남자, 야구팬들에게 신이라 불리던 사나이. 그가 은퇴를 선언했다. 그리고 꼭 10일이 지난 8월 초, ‘양신(梁神)’ 양준혁을 만났다.

    “내가 못해서 잘린 것도 아니고…”



    그는 덥고 습한 대구구장 그라운드에서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배팅 연습을 하고 있었다. 여러 선수 중에서도 대번 눈에 띄는 큰 덩치, 그리고 선명한 배번 10번. 양준혁의 움직임을 쫓는 건 어렵지 않았다. 후배들의 타격 자세를 지켜보며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던 그는 훈련 시간이 끝날 즈음 비로소 타석에 섰다. 방망이는 매서웠다. 왼쪽, 오른쪽, 가운데. 장타와 홈런이 골고루 날아갔다. 경기장을 훌쩍 벗어나는 장외홈런도 쳐냈다.

    ▼ 컨디션이 좋아 보입니다. 아까 보니 오른쪽 장외홈런이 나오더군요.

    “연습구는 실전 공처럼 강한 게 아니니까 별 의미가 없어요.”

    ▼ 하지만 타구 비거리가 다른 선수들과 비교해도 눈에 띄게 길던데요.

    쏟아지는 땀을 수건으로 닦으며 인터뷰에 응하던 그가 잠시 멈칫했다. 눈을 들어 기자를 쳐다보더니 씨익 웃는다.

    “은퇴는 했지만 내가 실력이 없어서 잘린 것도 아니고….”

    뭐 그런 소리를 하느냐는 투다. 사실 양준혁에게 ‘다른 선수보다 잘 친다’는 말은 칭찬이 아닐지 모른다. 18년 프로선수 생활 중 14시즌 동안 3할대 타율을 기록한 그다. 15시즌 연속 두 자릿수 홈런, 16시즌 연속 세 자릿수 안타를 때려낸 대(大)타자이기도 하다. 다른 선수보다 잘 맞히고, 멀리 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래도 한 번 더 묻기로 했다.

    ▼ 몸 상태가 선수 시절과 다를 바 없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아이고, 어디 봅시다. 1999년 12월31일하고 2000년 1월1일, 뭐가 다릅디까. 카운트다운만 요란했지 날짜 바뀐 거말고는 똑같잖아요. 나도 같아요. 훈련도 똑같이 하고 있고요.”

    그는 은퇴 선언과 동시에 1군 엔트리에서 말소됐지만, 시즌이 끝날 때까지 후배들과 함께 팀 훈련을 할 거라고 했다. 그의 한마디에 인터뷰는 순식간에 본론으로 들어갔다. 양준혁의 은퇴 발표 후 야구팬들이 가장 궁금해 하던 이야기를 스스로 털어놓았기 때문이다. 여전히 잘 뛸 수 있는데 왜 시즌 중 돌연 은퇴를 결심했느냐는 의문이다.

    양준혁은 1993년 삼성라이온즈에 입단했다. 프로 18년차, 우리 나이로 마흔둘이다. 하지만 동료들이 하나 둘 그라운드를 떠날 때도 흔들리지 않았다. 늘 주전이었고, 3할 타자였다. 지난해 잦은 부상으로 규정타석을 채우지 못했을 때도, 82경기에 출전해 3할2푼9리의 타율을 기록했다. 7월24일, 은퇴 선언 불과 이틀 전 치러진 올스타전에서의 3점포는 또 어떤가. 양준혁은 41세 1개월 28일째에 친 이 홈런으로 역대 올스타전 최고령 홈런 기록(37세 1개월)을 갈아치우며 건재를 과시했다. 그는 여전히 잘 맞히고 멀리 치는 타자다. 그런데 왜 갑자기 은퇴를 선택한 걸까.

    “언제부턴가 출장 기회가 줄어드는 걸 느끼면서 조금씩 생각해왔어요. 팀에 보탬이 되지 않고, 팀에서 나를 원하지 않을 땐 언제든 옷을 벗자. 지금이 그때인 거죠.”

    그는 스스로에게 확신을 주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팀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말씀은 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번 시즌 드문드문 대타로 출장하면서도 2할7푼3리를 쳤죠. 삼성 팬들은 여전히 경기가 안 풀리거나 한 방이 필요할 때면 ‘양준혁’을 연호합니다.

    “네…. 저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어요. 선수생활을 계속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요. 하지만 감독님이 어린 선수들을 키워보고 싶어하니까…. 요즘엔 대타로 나설 기회도 줄어들었잖아요. 야구를 웬만큼 하는 선수가 벤치에만 앉아 있으면 구단에 얼마나 부담이 되겠습니까.”

    양준혁은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선동열 삼성 감독은 올 시즌 젊은 선수를 전면에 내세우는 ‘팀 리빌딩’ 작업을 하고 있다. 박석민 채태인 최형우 등이 주전을 차지하면서 양준혁은 시즌 초반부터 중심 타선에서 빠졌다. 드물게 대타로 나가다보니 경기 감각을 유지하기 어려웠고, 제 몫을 하지 못한다는 스트레스가 줄곧 그를 괴롭혔다.

    끝내기 2루타

    ▼ 이제는 마지막 안타가 된 7월1일 롯데전 끝내기 안타를 쳤을 때는 “대타라도 자주 기회가 왔으면 좋겠고, 그 기회를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열심히 하겠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날도 7게임 만에 출장했을 거예요. 오늘 못 치면 또 10게임은 못 뛰겠구나 생각하니 얼마나 긴장이 되던지, 타석에 들어서면서 계속 ‘못 치면 끝난다. 쳐야 한다. 쳐야 한다’ 되뇌었죠.”

    ▼ 치는 순간 무슨 생각이 드셨나요.

    “이걸로 생명이 좀 연장되겠구나….”

    투박한 대구 남자의 얼굴에 헛헛한 웃음이 번졌다. 그는 할 바를 다하고 기다렸다. 자신이 팀을 위해 쓰이기를. 그러나 기회는 오지 않았다. 안타를 친 후에도 계속 벤치에 머물게 되면서 양준혁은 ‘지금이 떠나야 할 때’라는 걸 확실히 깨달았다. 7월 중순, 구단에 은퇴 의사를 밝혔고, 2010 시즌 전반기가 끝난 뒤 공식 발표하기로 했다. 은퇴 발표 이틀 전 올스타전 홈런을 쳤을 때는 아름다운 피날레를 맺은 게 기뻐 가슴이 뛰었다.

    각본 없는 드라마

    양준혁은 “야구를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 하는데, 이번에 내가 그 안에서 제대로 주인공이 한번 된 것 같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사실 그는 2010 올스타전에 출전하지 못할 뻔했다. 이스턴리그 지명 타자 부문 팬 투표에서 롯데 홍성흔에 밀려 2위를 했다. 경기 전날 이스턴리그 출장 선수였던 SK 박정권이 다치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 7월1일 안타를 마지막으로 그라운드를 떠났을 게다. 김성근 감독이 박정권이 비운 자리에 그를 뽑아줬다. 그는 대구팬 앞에서 마지막 타격을 선보일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은퇴선언 양준혁의 불꽃 야구 인생
    ▼ 이번 올스타전 MVP는 홍성흔 선수였지만, 대구 구장의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양준혁 선수였습니다. 특히 7회 스리런 홈런을 쳤을 때는 한국 축구가 월드컵 16강에 진출했을 때보다 함성이 더 큰 것 같더군요.

    “그동안 야구를 하면서 내가 얼마나 행복했는지, 그날 다 느낄 수 있었습니다. 평소엔 타석에 서면 관중 소리가 잘 안 들렸는데, 그날따라 다 같이 내 이름을 외치는 게 선명히 들렸어요. 야구 선수를 안 했다면 수만명이 그렇게 동시에 내 이름을 불러줄 일이 있었겠습니까.”

    홈런을 치고 들어오는 그의 손을 김성근 감독이 잡아줬을 때도 행복했다.

    ▼ 김 감독님이 그렇게 환하게 웃으시는 건 처음 봤습니다.

    “그날 경기 시작 전에 찾아뵙고 ‘이번 시즌을 끝으로 은퇴하기로 했다’ 말씀드렸습니다. 깜짝 놀라시더니 ‘그럴 거면 우리 팀(SK)으로 오지 그랬냐’ 하시더군요. 그 마음이 정말 감사했지요. 그날 저 은퇴한다고 특별히 좌익수 수비도 시켜주시고…. 감독님 덕분에 더 바랄 것 없는 마무리를 하게 됐습니다.”

    웃는 얼굴 위로 만감이 교차하는 게 보였다. 올스타전이 끝났을 때도 그랬다고 했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발이 떨어지지 않아 선수들이 떠난 그라운드 위에 5분쯤 가만히 서 있었다.

    ▼ SK 외에도 양준혁 선수를 탐내는 팀은 많았을 겁니다. 원하기만 하면 선수 생활을 계속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그런 생각 안 해본 건 아닙니다. 개인 통산 2500안타를 못 치고 끝내는 게 마음 아팠죠. 이제 182개 남았는데, 지금 몸 상태에서 정상적으로 게임에 나가기만 하면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구단에서도 ‘다른 팀에 가겠다면 조건 없이 보내주겠다’고 하고….”

    ▼ 그런데 왜 그만두신 겁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삼성을 떠나는 건 아닙디다. 기록을 세우려면 여기서 했어야지, 이제 와 다른 팀 가서 내 기록 세우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여기서 좋은 시절 다 보냈는데…. 내 첫사랑인데. 돌아보면 야구선수로서 저한테 삼성은 오랜 연인이었습니다. 그 품에서 은퇴하는 게 가장 행복한 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니 결론이 나더군요.”

    파란 피가 흐르는 남자

    말해놓고는 본인도 쑥스러운지 씨익 웃는다. 마흔두 살 노총각 입에서 나오는 ‘연인’ 타령이라니. 그것도 평생 해온 야구를 포기하면서까지 말이다.

    양준혁의 삼성에 대한 사랑은 사실 드라마틱한 면이 있다. 프로 데뷔부터 은퇴까지 그가 겪은 숱한 부침의 중심에는 늘 삼성을 향한 일편단심이 있었다. 1991년 영남대 졸업반 시절, 그는 88학번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유망주였다.

    ▼ 대학선수권 대회에서 5할 타율에 도루왕까지…. 말 그대로 ‘호타준족’이었다고 들었습니다.

    “뭐 그렇게까지야…. 좀 잘 친 건 맞습니다.”

    은퇴선언 양준혁의 불꽃 야구 인생
    ▼ 삼성에 입단할 거라고 믿고 있었죠.

    “주위에서 다 그렇게 얘기했어요. 나도 삼성 아닌 팀에 가는 건 생각도 안 해봤고.”

    중학생 시절, 프로야구가 출범한 때부터 양준혁의 꿈은 고향팀 삼성의 푸른 유니폼을 입고 그라운드를 달리는 거였다. 대구상고 4번 타자로 뛰던 고2 때 박영길 당시 삼성 감독을 찾아가 “대학 안 가고 바로 삼성으로 가고 싶다. 받아주실 수 있느냐”고 묻기도 했다.

    “대학 다녀오면 뽑아주겠다고, 일단 가서 실력 더 쌓아오라고 하시더군요. 그때 삼성 타선이 워낙 좋았어요. 장효조 선배, 김성래 선배. 이만수 선배 다 있었으니.”

    그러나 울며 겨자 먹기로 들어간 대학에서 강타자로 성장해 돌아온 그를 삼성은 또 한 번 뽑지 않았다. 양준혁의 대구상고 동기인 좌완투수 김태한을 1차 지명하면서, 그에게 1년을 기다려달라고 부탁하기까지 했다.

    ▼ 그때 다른 팀의 영입 제안이 대단하지 않았습니까.

    “OB에서는 백지수표를 내밀었죠. 나중에 들으니 5억원 정도 줄 생각이었대요. 아파트 한 채하고, 따로 돈도 주려 했다고…. 그때는 어릴 때라 그런 게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습니다. 내가 하는 행동의 가치를 돈으로 매길 수 없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죠. 지금 같아 봐요. 어디 그러겠어요.”

    쌍방울에서도 그를 입단시키기 위해 움직였다. 양준혁은 모든 제안을 뿌리치고 “삼성 이외의 팀엔 가지 않는다. 군대 먼저 다녀오겠다”고 선언하고 입대해버렸다. 그의 이 행동은 이른바 ‘양준혁 파동’으로 당시 언론에 대서특필됐다.

    ▼ 결국 이듬해 삼성 유니폼을 입었어요.

    “방위 복무 기간이 6개월 남은 상태여서 풀타임 선수로는 못 뛰었죠. 부대 위수지역 내에서, 근무 마친 뒤 열리는 경기에만 출전할 수 있었어요. 대구 홈구장 야간 경기만 나갔습니다.”

    괴물 신인의 등장

    그러나 기록은 놀라웠다. 신인 양준혁은 그해 타격 1위, 장타율 1위, 출루율 1위에 홈런 2위, 득점 2위, 타점 2위를 기록하며 타격 전 부문에서 선두권을 차지했다. ‘괴물’의 등장이었다. 타율 3할4푼1리, 23홈런, 130안타의 기록으로, 이후 10년 이상 이어질 3할 타율, 세 자릿수 안타, 두 자릿수 홈런 기록의 첫걸음을 떼었다.

    ▼ 비율로 따지는 타율 부문이야 그렇다 쳐도, 경기를 절반밖에 못 나가면서 홈런과 타점 부문에서까지 2등을 차지한 건 믿기 어려운데요.

    “돌아보면 내가 야구를 제일 잘한 때가 1993년인 거 같아요. 그때는 건드리기만 하면 안타였습니다.”

    1993년 프로야구에는 이종범, 구대성, 이상훈 등 대형 신인이 대거 등장했다. 그러나 이들 중 누구도 그해의 양준혁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양준혁은 신인왕을 차지했고, 홈런 1위, 타점 1위를 기록한 같은 팀 선배 김성래와 MVP를 놓고 경쟁했다.

    ▼ 당시 삼성에서 김성래 선수에게 MVP를 주기 위해 시즌 막판 양준혁 선수를 출전시키지 않았다는 얘기가 있던데요.

    “감독님이 ‘너는 젊으니까 다음이 있을 거다’고 하셨어요. 당시 제가 타점 부문에서 김성래 선배한테 딱 1점 뒤진 2위였거든요. 만약 타점왕까지 차지했으면 MVP가 저한테 왔겠죠. 그때는 선배가 받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그 뒤부터 계속 물을 먹더라고요.”

    양준혁의 MVP 불운은 한국 야구계의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로 꼽힐 만하다. 프로 데뷔 후 18년간 흔들림 없이 활약하고도, 그는 정규시즌뿐 아니라 올스타전, 한국시리즈에서조차 단 한 번도 MVP 트로피를 가져가지 못했다.

    ▼ 상복이 참 없었습니다. 기록을 보면 1996년에도 MVP급 활약을 펼쳤던데요. 타격 1위에 홈런 2위, 게다가 ‘20홈런-20도루’ 클럽에도 가입했죠.

    “그해엔 팀 성적이 너무 나빴어요. 삼성이 페넌트레이스 6위를 한 게 영향을 미쳤겠죠. 그렇게 보면 98년에도 개인 성적은 괜찮았어요. 타율, 장타율, 안타 전부 1위였는데, 그때는 구단에서 저를 트레이드 하려고 할 때라 제대로 밀어주지 않았죠.”

    “이제는 말할 수 있다”

    1998 시즌이 끝나고 이뤄진 임창용 당시 해태 투수와의 트레이드에 대한 얘기다. 양준혁은 내심 MVP까지 생각했던 최고의 해를 보낸 뒤 구단으로부터 해태행을 통보받았다. 일방적인 결정이었다. 충격에 휩싸인 그는 열흘 이상 잠적했다. 해태에 가느니 미국에 가겠노라 선언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KBO 규정 어디에도 선수가 구단 사이의 트레이드를 거부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해태가 양준혁을 임의탈퇴 선수로 등록하면 그의 선수 생명은 그대로 끝날 판이었다.

    ▼ 원치 않는 대학 진학에 군 입대까지 감수하며 입단한 고향팀이었는데, 갑자기 트레이드됐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글쎄요. 아무 생각도 안 났습니다. 나한테 ‘팀 우승도 못 시키는 4번 타자’라고 하더군요. 아무리 잘 치고 열심히 쳐도 필요 없다는 거죠.”

    ▼ 양준혁 선수가 1998년 삼성 주장을 맡으면서 구단에 미운털이 박혔기 때문이라는 얘기가 있던데요.

    “아, 그건…. 네. 오래전 일이니까요. 그때 내가 구단 눈 밖에 나 있던 건 맞습니다. 당시 사장님이 좀 괴짜였어요. IMF 때라 형편 어려운 후배가 많았는데, 그런 친구들 얘기를 하면 영 안 좋아했죠. 하지만 주장인데 계속 얘기해야지 어떡합니까. 신고선수(연습생)들한테 좀 잘해주자 하는 걸 계속 묵살하길래 한번 대들었어요. 큰소리도 좀 치고.”

    ▼ 삼성에서 일방적으로 트레이드됐을 때 그 일이 바로 떠올랐겠군요.

    “한창 자신만만할 때라 ‘자르고 싶으면 잘라봐라’ 그랬어요. 진짜 나를 자를 줄은 몰랐죠. 삼성이 나를 버릴 수도 있는 거구나. 정말 미칠 것 같았습니다.”

    ‘첫사랑’에게 두 번째로 배신당한 기억이다. 마음의 상처는 컸다.

    “정말 한 번도 내가 다른 팀에서 야구할 거라는 생각을 안 해봤기 때문에 해태에는 못갈 줄 알았어요. 해태 김응용 감독님 전화를 받고 마음을 돌렸죠. ‘1년만 있다 가라. 1년 있으면 놓아주겠다’ 하시더군요. 꼭 1년 만에 그 약속을 지켜주셨고요. 제가 야구하면서 존경하는 감독님이 두 분 있는데, 한 분이 김응용 감독님이고, 다른 한 분이 김성근 감독님입니다.”

    양준혁은 그해 해태에서 부동의 중심 타자로 활약했다. 타율 3할2푼3리, 32홈런, 105타점, 160안타를 쳐냈다. 풍파 속에서도 제 몫을 하는 그에게 ‘방망이를 거꾸로 잡아도 3할을 치는 선수’라는 찬사가 따라붙기 시작했다.

    “늘 절박하게”

    3할 타율은 산술적으로 그다지 어렵지 않게 느껴진다. 열 개의 공 중 단 세 개만 제대로 때리면 3할 아닌가. 하지만 그 과정을 들여다보면 결코 간단치 않다. 마운드에서 홈플레이트까지의 거리는 18.4m. 시속 150km의 공을 던지는 SK 김광현이 전력투구할 경우 투수 글러브를 떠난 공은 0.44초 만에 포스 미트에 꽂힌다는 계산이 나온다. 눈 한 번 깜빡할 그 사이에 타자는 공의 구질과 방향을 파악하고, 수비수가 없는 자리를 골라 쳐내야 한다. 변화구도 힘들긴 마찬가지다. 변화구는 보통 분당 1800번가량 회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투수의 손을 떠나 포수에게 닿기까지 12번가량 움직인다. 양준혁은 그 3할을 선수생활 동안 14번이나 기록했다.

    ▼ 최다 4사구 기록도 갖고 있죠. 자신이 원하는 공을 정확하게 때리고, 스트라이크 존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공은 정확하게 골라내는 비결이 뭔가요.

    “1구1구 전력을 기울이는 거죠. 어떤 공이 들어오든 인내심을 갖고 끝까지 지켜봐요. 공을 잘 보는 건 굉장히 중요합니다. 안타를 치든 4사구를 고르든, 어떻게든 살아서 진루해야 이기는 게 야구니까요.”

    2009시즌 양준혁의 출루율은 0.464. 타석에 두 번 설 경우, 그중 한 번은 반드시 살아나갔다는 것이다. 그의 말을 들으며, 땅볼을 치든 뜬공을 치든 무조건 1루를 향해 전력질주하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떻게든 살아서 진루하기 위해 그는 그렇게 달렸던 걸까.

    “그럼요. 야구는 심판의 결정이 있을 때까지는 그냥 플레이인 겁니다. 공을 치고 내 맘 대로 이건 아웃이야, 이건 땅볼이야 정하는 건 말이 안 돼요. 평범한 내야땅볼이 안타가 되고, 송구 실책 하나로 단타가 2루타, 3루타가 되는 게 야구거든요. 언젠가 플레이오프에서 제가 투수 앞까지도 안 가는, 정말 ‘또로록’ 굴러가는 땅볼을 친 적이 있어요. 그러고는 늘 그러듯 냅다 달렸죠. 내가 쿵쾅쿵쾅 뛰어가니까 포수가 깜짝 놀랐는지 폭투를 했습니다. 김동수 선배였는데 나중에 ‘네가 어이없는 공을 쳐놓고 전력질주하는 통에 놀라서 손이 말렸다’고 하더군요. 결국 그 게임을 우리가 이겼어요. 그게 야굽니다.”

    문득 1993년 삼성 대 LG의 플레이오프 2차전이 떠올랐다. 당시 양준혁은 왼쪽 다리 부상으로 절룩거리며 타석에 섰다. 2루수 앞 내야 땅볼을 쳤다. 누가 봐도 아웃될 수밖에 없는 상황. 그러나 그는 1루까지 살아나갔다.

    “아, 예. 생각납니다. 그해에 제가 진짜 잘 쳤는데, 시즌 막판 부상으로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어요.”

    2-2로 맞선 8회 초였다고 했다. 1사 후에 삼성 김성래가 3루타를 치고 나가자 LG는 두 명의 후속 타자를 4사구로 내보내며 만루 작전을 썼다. 다음 타자 양준혁에게 내야 땅볼을 유도해 병살타로 이닝을 마무리할 계획이었다.

    ▼ 그때 상황을 설명해줄 수 있나요.

    “왼쪽 다리가 아파서 제 스윙이 안 나왔어요. 내가 친 공이 굴러가는 걸 보니 딱 더블플레이 상황이더라고요. 이거 어쩌나 생각하면서 그냥 뛰었어요. 신기한 게 타석에 들어설 때까지만 해도 너무 아프던 다리가 뛰기 시작하니 하나도 안 아프더라고요. 아, 이제 다 생각이 납니다. 1루 주자가 2루에서 아웃되고, 공이 다시 1루로 돌아오기 직전에 내가 1루 베이스를 밟았어요. 김성래 선배는 그 사이 홈에 들어왔고…. 그게 그 경기의 결승 타점이었죠.”

    꼭 18년 전의 일이다. 그는 스물세 살 청년 양준혁의 플레이를 설명하며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간 듯 즐거워했다.

    ▼ 움직일 수조차 없던 다리로 1루까지 뛰었다.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할까요.

    “열정이겠죠. 집중력 의지…. 나는 안타 하나를 치기 위해 수천 번을 고민하고 수만 번씩 스윙 연습을 합니다. 그 힘을 그라운드에서 다 쏟아 붓는 거예요. 경기장에 나와 대충할 거면 왜 야구를 해요. 일찌감치 때려치워야죠.”

    ▼ 프로선수 중에도 ‘즐기면서 야구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예전에 송진우 선배가 은퇴하면서 그러더군요. ‘나는 즐기면서 야구했다’고. 그때 저 양반은 정말 나보다 두 수 세 수 위에 있구나 생각했어요. 나는 30년 동안 야구 하면서 단 한 번도 즐겨보지 못했어요. 그런 급이 안 되기 때문에 죽자 살자 한 거예요. 경기를 뛸 때마다 복싱 링에 오른다고 생각했고, 한 경기 한 경기에 모든 걸 걸었어요. 그게 야구를 사랑하는 내 방식이었습니다.”

    “죽어도 좋다”

    ▼ 그렇게 좋아하는 야구를 그만둘 생각을 한 적도 있죠?

    “글쎄요…. 야구가 아무리 힘들어도 그만두고 싶었던 적은 없었는데요.”

    ▼ 1999년 선수협 결성 때 일을 묻는 겁니다.

    “아. 그때는 야구를 그만두는 게 문제가 아니었죠. 죽을 생각까지 했었으니까.”

    해태에서 1999년 시즌을 마쳤을 때다. 양준혁은 프로야구선수협의회 결성을 주도하며 스포츠뉴스에 나오는 스타 플레이어에서 돌연 9시뉴스에 등장하는 ‘투사’로 변모했다.

    ▼ 당시 선수협 결성을 이끈, 핵심 인물이었다고 들었습니다.

    “그해에 한일 슈퍼게임이 있었어요. 일본에 같이 간 선수들과 논의한 겁니다. 제가 먼저 얘기를 꺼내고, 다른 선수들이 OK 한 건 맞지요. 삼성 주장을 할 때부터 2군 선수나 신고 선수들이 계속 눈에 밟혔어요. 나는 그래도 스타라고 대우 잘 받고 하고 싶은 말 하며 사는데 저들은 뭔가. 똑같이 글러브 끼고 야구하지만 완전히 다른 삶 아닌가. 그런데 나도 어느 날 갑자기 삼성에서 내쫓겼잖아요. 나라고 다를 게 없었구나, 프로야구선수들이 실은 다 노예였구나 깨달은 거죠. 뭔가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선수협 창립을 위한 준비는 양준혁 선수가 다 했는데, 회장은 송진우 선수가 맡았다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너무 강성 이미지였기 때문에 선배가 대신 맡아준 면이 있지요.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해요. 내가 맨앞에 섰으면 일이 더 힘들어졌을 겁니다. 당장 띠 두르고, 뛰쳐나가고 했을 테니까요.”

    ▼ 죽을 생각까지 했다는 말도 그런 뜻인가요.

    “아니, 그건 정말 말 그대로입니다. 당시 상황이 절박했어요. 갖은 방해 다 이기고 간신히 선수협 창립총회 날짜를 정했어요. 63빌딩에서 8개 구단 선수가 모여 공식 출범하기로 했죠. 다 단단히 약속했는데 막상 시간이 되니 한 팀도 안 오는 겁니다. 구단의 방해가 엄청났어요. 송진우 선배랑 다른 주동 멤버들이 ‘여기서 끝내자’ 그러더군요. 졌다는 거 인정하고 돌아가자고요. ‘그래, 끝내자, 다 가라. 나 혼자 여기서 죽어버릴 테니까 갈 사람 다 가라’ 그랬습니다. 그때 나는 더 이상 야구를 할 수도 없었고, 정말 살아야 할 의미가 없었어요.”

    63빌딩에 모였던 각 팀 대표들은 다 같이 울었다. 눈물을 쏟으며 소속 팀 선수들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총회장에 오지 못하고 마음 졸이다 전화를 받은 선수들도 같이 울었다. 당초 오후 7시에 열릴 예정이던 선수협 창립총회는 이런 우여곡절 끝에 다음날 오전 1시가 넘어서야 시작됐다. 현대, 삼성을 제외한 6개 구단 70여 명의 선수가 참석했다.

    “이젠 뭐 다 옛날이야깁니다.” 양준혁이 말을 돌렸다. 하지만 그 사건의 여진은 오래갔다.

    ▼ 당시 선수협 결성을 주도했던 선수들은 대부분 팀을 옮기거나 아예 야구를 그만뒀죠.

    “네. 저도 LG로 트레이드됐고요. 그때는 해태로 가라고 했을 때만큼 충격적이지도 않았어요. 무슨 일을 하든 ‘선수협 주동자’라는 딱지가 따라붙는 게 좀 불편했죠.”

    프랜차이즈 스타

    그는 LG에서도 여전히 3할대 타율을 유지했다. 2001년엔 3할5푼5리를 치며 타격왕 자리에도 올랐다. 하지만 그해 말 FA 시장에 나왔을 때 양준혁을 데려가려는 팀은 없었다. 언론에서는 연일 FA 최대어라며 그의 소식을 보도했지만, 정작 8개 구단 중 단 한 곳도 그에게 전화를 거는 팀이 없었다.

    “알고 보니 담합이 있었더군요. 선수협 주동자니까 다른 선수들한테 본보기 삼게 나를 매장시키려고 한 거죠. 이렇게 주저앉으면 안 되겠다 싶어서 지금 최희섭 선수 에이전트인 이치훈씨한테 급히 연락을 했어요. 메이저리그 진출을 좀 알아봐달라고요.”

    ▼ 관심을 보이는 팀이 있던가요.

    “뉴욕 메츠에서 영입 제안을 받았습니다. 그쪽 스카우터가 제 비디오 자료와 기록을 보더니 당시 그 팀 좌익수였던 신조 쓰요시보다 낫다고 했대요. 그 사람들이 가장 높이 친 게 출루율이었죠. ‘3진보다 4사구가 훨씬 많다, 어떻게든 1루에 살아나가는 선수가 우리한테는 필요하다’ 그렇게 말하더군요.”

    ▼ 구체적으로 논의가 진행됐나요.

    “연봉 얘기까지 나왔죠. 70만달러, 당시로서는 엄청난 액수였어요. 99년 해태에서 뛸 때도 메이저리그 시애틀 매리너스에서 영입 제안이 왔었는데, 그때는 이적료 40만달러에 연봉 30만달러 수준이었거든요. 해태 쪽에서 액수가 너무 적어 안 된다고 틀었어요. 그런데 이번엔 두 배 이상을 부르니까, 이거 갈까 생각하고 있을 때 삼성에서 연락이 왔죠.”

    당시 삼성 감독은 해태 시절 양준혁과 함께 생활한 김응용 감독이었다. 그가 “양준혁 같은 프랜차이즈 스타가 와야 팀이 발전한다”며 구단을 설득한 덕분이었다. 양준혁은 삼성의 부름을 받는 순간 뉴욕 메츠와의 교섭을 접었다. 4년간 최대 23억2000만원의 조건으로 입단 계약을 맺으며 3년 만에 다시 고향의 푸른 유니폼을 입었다.

    ▼ 뉴욕 메츠의 조건이 더 좋았고, 메이저리그 진출이라는 의미도 있었는데 왜 삼성을 택했나요.

    “그때 모든 구단이 저를 받지 않기로 담합했다고 했잖아요. 그런 상황에서 미국에 나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았어요. 이종범 정민철 정민태, 다 해외 나갔다가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소속팀에서 다시 받아줬거든요. 내가 미국 가서 성공하지 못하면, 그때 난 어떻게 되나. 미래가 보이지 않았어요. 미국에서 선수로 성공한다 해도, 거기서 야구 인생을 끝내고 싶지는 않았고요. 나는 한국 프로야구 선수를 꿈꾸면서 자랐고, 여기엔 또 나를 보면서 프로야구를 꿈꾼 후배들이 있어요. 그걸 다 놓치면서까지 미국에 가는 건 싫었어요. 만약 내가 선수협 주동자가 아니었다면 한 번쯤 메이저리그 도전해봤겠죠. 하지만 그때는 위험부담이 너무 컸어요.”

    ▼ 그 선택을 후회한 적은 없나요.

    “그동안은 안 했는데 요새 좀. 막판 되니까 그런 생각이 들데요. 다른 건 몰라도 선구안 좋고 공은 잘 갖다 맞히는 편인데….”

    ▼ 미국에 진출했다면 좀 더 오래 선수생활을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말씀인 거죠.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죠. 하지만 2002년 삼성 복귀 첫해에 팀이 우승했을 때는 ‘미국 안 가길 정말 잘했다’ 싶었어요. ‘팀 우승에 필요하다’며 김태한을 1차 지명한 일, ‘팀 우승도 못 시키는 4번 타자’라고 해태로 트레이드한 일, 그간의 사건이 하나하나 떠오르더군요. 선수들과 뒤엉켜 엉엉 울면서 그동안 쌓인 한을 다 풀었어요.”

    양신(梁神)의 신화

    은퇴선언 양준혁의 불꽃 야구 인생
    자, 이제. 그의 야구 인생 마지막 라운드로 왔다. 슬럼프와 부활, 슬럼프와 부활, 슬럼프와 부활, 그리고 은퇴로 이어진 8년간의 기록이다. 팀의 리더로 삼성의 우승을 이끈 2002년 그는 개인으로서는 사상 최악의 한 해를 보냈다. 데뷔 이후 처음으로 타율이 3할 아래로 떨어졌고, 홈런 타점도 전만 못했다. 어느새 30대 중반을 향해가는 그의 나이를 거론하며 ‘양준혁도 늙었다’고 하는 사람이 많았다.

    ▼ 놀라운 건 이듬해 바로 161안타 33홈런 92타점 타율 3할2푼9리를 기록하며, 누구도 뭐라 할 수 없게 완벽하게 부활했다는 거죠.

    “2002년 시즌을 보내면서 변해야 한다는 걸 절감했어요. 업그레이드. 또 업그레이드. 또 업그레이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옷 벗는 일만 남는다…. 그래서 그동안 잘나가던 양준혁을 다 버렸죠.”

    두 달간 혼자서 타격 폼을 연구했다. 그때 그의 눈에, 전성기 시절 배트를 휘두른 뒤 한 팔을 놓으면서 마치 만세하는 듯한 자세를 취한 사진이 들어왔다.

    ▼ 거기서 만세타법이 나왔군요.

    “네. 그렇게 쳐보니까 잘 맞았어요. 방망이를 던지면서 임팩트를 가하는 게 치면 칠수록 굉장히 효과적이에요. 특히 나이 들어 배트 스피드가 좀 떨어졌을 때. 짧게 끊어 때린 뒤 임팩트시 공을 눌러준다는 느낌으로 치면 공을 멀리 보낼 수 있죠.”

    겨울 내내 근력 훈련에도 매달렸다. 그는 타석에 섰을 때 공을 보는 건 눈이 아니라 오른발이라고 했다. 공을 눈으로 확인하되 앞발을 이용해 타이밍을 잡아야 한다는 뜻이다. 배트가 나가는 순간에는 중심을 뒷다리에 둬야 한다. 결국 안타를 만드는 좋은 선구안은 하체에서 나온다.

    2003 시즌이 시작됐을 때 그는 다시 놀라운 타자가 돼 있었다. 그럭저럭한 노장 선수로 그라운드를 떠나는 대신 올스타전 투표에서 최다 득표를 기록하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2004년에도 역시 3할 타율, 두 자릿수 홈런, 세 자릿수 안타를 쳤다. 2005년 다시 슬럼프가 왔을 때 그는 또 한 번 타격폼을 바꿨다. 이번엔 발의 위치였다. 2006년 그의 타율은 거짓말처럼 다시 3할을 넘겼다. 또 한 번 올스타전 최다 득표도 얻었다. 돌아보면 오뚝이 같은 기록이었다. 쓰러질 듯 하면 벌떡 일어나고, 쓰러질 듯 하면 또다시 일어났다. 주춤했다 부활할 때마다 그의 기록은 늘 ‘양준혁이 나쁜 적이 있었나’ 갸우뚱거리게 만들 만큼 더욱 빛났다. 그렇게 18년간 양준혁은 한국 프로야구에서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금자탑을 쌓았다.

    지난해까지 그의 통산타율은 3할1푼7리. 18년 선수생활 중 3할을 넘기지 못한 해는 단 4번(2002, 2005, 2008, 2010년)뿐이다. 개인 통산 최다 안타 부문도 2318개를 기록한 양준혁의 독무대. 현역 선수 가운데 장성호(한화), 이종범(KIA), 송지만(넥센), 박재홍(SK) 등이 뒤를 따라오고 있지만 모두 1600~1700개 수준에 불과하다. 458개를 친 2루타 부문에서도 양준혁의 기록은 압도적이다. 2위 장성호의 2루타 수는 300개 초반에 머물러 있다. 최고 타점 기록 역시 경쟁자를 찾기 어렵다. 양준혁의 1389타점에 가장 근접한 현역 선수는 이제 막 1000타점을 넘긴 박재홍이다. 통산 홈런(351), 득점(1299), 4사구(1380) 역시 도전자의 기록은 저 멀리 있다.

    ▼ 대기록을 세우는 동안, 이승엽 이종범 심정수 박재홍 수많은 선수와 경쟁했죠. 그중에 최고의 라이벌은 누구였습니까.

    “내 라이벌은 나이에 대한 선입관이었습니다. 잘할 때도, 못할 때도 날 가만히 놓아두질 않았죠. 나는 지금까지 누구를 이기려고 해본 적이 없어요. 내가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나이는, 처음으로, 이겨보고 싶었어요.”

    “내 길을 간다”

    그는 지금 나이와의 싸움에서 패배한 걸까. 41세 1개월 28일째에 날린 큼직한 3점포와, 페넌트레이스 마지막 안타를 기록하며 쉼 없이 뛰던 모습으로 대답을 대신하자. 나는 그가 ‘첫사랑’을 지키기 위해 필생의 싸움을 스스로 포기했다고 믿는다.

    ▼ 이번 시즌이 끝나면 바로 지도자 연수를 받나요.

    “끝나고 생각해보려고요. 아직은 정해진 게 아무것도 없어요.”

    ▼ 다른 경우의 수가 있나요.

    “글쎄요…. 코치, 감독. 나 아니어도 할 사람이 많은 그 길을 그냥 밟고 싶지는 않아요.”

    양준혁은 조심스레 “야구장 자리를 알아보고 있다”는 말을 꺼냈다. 청소년 아마추어 선수를 위한 ‘양준혁 야구장’을 짓기 위해서다.

    ▼ 중고등부 선수가 아닌 보통 청소년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아마추어요. 우리나라에서는 중고등학생이 공부말고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할 게 없으니까 자꾸 음지로 들어가게 되잖아요. 아이들이 마음 놓고 뛰어다니며 야구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고 싶어요. 그러면 성격도 밝아지고 리더십도 생기고 자연스레 팀워크도 배울 거예요. 그중에 야구에 정말 재능 있는 친구가 있으면 선수의 길을 열어줄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야구 자체를 즐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게 내가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걸음 나아가 양준혁은 야구 애호 청소년을 위한 클럽 리그를 만들 생각도 갖고 있다고 했다. 그가 지으려는 야구장은 이들이 게임을 즐길 수 있게 4개의 그라운드가 함께 놓인 파크 형식의 야구장이다.

    “지금 후배들이 전국에서 하나 둘 클럽팀을 만들고 있어요. 한 50개쯤 구성된 것 같아요. 구장만 마련되면 올가을쯤 대회를 열려고 합니다. 이게 잘되면, 그 뒤부터는 청소년들이 자발적으로 클럽팀 만들어서 야구 하는 분위기가 생기지 않을까요.”

    그는 야구가 정말 좋은 듯했다.

    “야구 하면서 한 번도 후회해본 적 없고, 아무리 힘들어도 미칠 듯이 좋았다.”고 했다.

    “야구는 다른 운동하고 달라요. 1구1구에 사연이 들어가지 않으면 내가 지죠. 공 하나마다 내가 가진 모든 걸 걸 때의 그 희열은 다른 어떤 것도 따라올 수 없어요. 야구를 뭐라 그래야 되나…. 좀 사랑했다고 해야겠죠? 그 말 외엔…. 뭐가 없네요.”

    그는 “나는 야구선수로서 지금까지의 내 삶이 예고편이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해야 할 더 큰 일은, 야구 문화를 만드는 거다. 이제부터 양준혁답게, 잘할 것”이라고 말했다.

    ▼ 마지막으로 팬들에게 어떤 선수로 기억되고 싶은지 궁금합니다.

    “항상 열심히 하던 선수, 1루까지 전력을 다해 뛰었던 선수. 그렇게 기억해주면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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