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9월호

행복의 추구, 한 청년의 일생

  • 함정임│소설가·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 etrelajiham@empal.com│

    입력2010-09-02 16: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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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의 추구, 한 청년의 일생

    ‘적과 흑’<br>스탕달 지음, 이규식 옮김/ 문학동네/ 1권 360쪽, 2권 472쪽/ 1권 1만1000원, 2권 1만2000원

    여기, 프랑스행 비행기 티켓이 한 장 있다. 프랑스 어디로든 갈 수 있는 티켓이다. 만약 당신에게 이 티켓을 선물로 준다면, 어디로 떠나고 싶은가.

    대부분의 독자는 파리를, 또는 니스를 선택할 것이다. 물론 탁월하고도 당연한 결정이다. 만약 파리도 니스도 돌아보았다면, 그리고 프랑스라는 나라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행기 티켓이 주어진다면, 당신은 어디를 선택할 것인가. 예를 들면 이런 곳.

    베리에르라고 하는 작은 도시는 프랑슈콩테 지방에서 가장 예쁜 곳의 하나로 통할 만하다. 붉은 기와가 덮인 뾰족한 지붕의 하얀 집들이 언덕 경사면 위로 펼쳐져 있고, 울창한 밤나무 숲은 언덕의 굴곡을 드러내고 있다. 예전에 스페인 사람들이 지었으나 지금은 폐허가 된 요새 아래로는 두(Douds) 강이 까마득히 흐르고 있다. -스탕달, ‘적과 흑’ 제 1장 소도시에서

    또는 이런 곳.

    쥘리앵은 산악지방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경치 한복판에서 즐겁게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베르지 북쪽의 큰 산맥을 가로질러야 했다. (중략) 나그네의 시선은 남쪽을 향하여 흐르는 두 강 줄기를 가로막는 그리 높지 않은 언덕 위를 거쳐 부르고뉴와 보졸레의 비옥한 평야에까지 다다랐다. 이 젊은 야심가의 영혼이 아무리 이런 종류의 아름다움에 무감각하다 하더라도, 그는 그토록 광활하고 그토록 장엄한 풍경을 바라보기 위하여 때때로 발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스탕달, ‘적과 흑’ 제12장 여행에서



    유럽에서 가장 신비로운 도시

    몇 년 전 ‘타임’지에서 여름 특집호를 기획하면서 유럽에서 가장 신비로운 도시, 그러니까 가장 가보고 싶은 도시에 대한 설문조사를 했다. 가장 많은 응답자가 뽑은 도시는 흥미롭게도, 파리도 니스도 아닌 프랑스 중부, 론-알프스 지방의 산악 도시 그르노블이었다. 그르노블이라니, 한국인에게는 처음 들어보는 생소한 도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불문학자들 중 그르노블 3대학 출신이 제법 많다. 한국의 프랑스문학 전공자들이 한때 파리를 제치고 이곳으로 몰려든 이유는 무엇일까. 문과대학인 그르노블 3대학은 스탕달 대학으로 불린다. 19세기 프랑스의 대표적인 소설가 스탕달이 바로 이곳 그르노블 출신.

    2010년 7월, 파리 몽파르나스 역의 유럽 카에서 신형 스투롸엥 피카소 한 대를 빌려 그르노블을 향해 떠났다. 가고 오는 길에 퐁텐블로, 브장송, 보졸레, 스트라스부르 등 스탕달의 소설 ‘적과 흑’의 주인공 쥘리앵 소렐의 행적을 좇아볼 생각이었다. 그르노블에는 20년 만에 두 번째 방문이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나를 그곳으로 이끈 것은 ‘타임’지에서 손꼽은 유럽에서 가장 신비한 도시로서가 아니라 스탕달의 ‘적과 흑’의 무대로서였다. 그르노블에 진입해서 곧장 알프스 산록의 눈이 녹아 흘러내리는 이제르 강변의 그르네트 광장을 찾았다. 광장가 ‘유럽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창문을 열어젖히니 한여름 관광객들로 가득한 광장이 발아래 펼쳐졌다.

    툭 트인 광장 너머 하늘을 바라보았다. 특유의 직각의 산 능선과 뾰족한 봉우리가 보였다. 광장을 가로질러 가면 장 자크 루소 골목(당시에는 비외 제주이트 골목)이 나오고, 거기 14번지에는 앙리 베일이 1783년 태어났다는 기념판이 돌로 새겨져 있었다. 앙리 베일은 평생 다양한 가명을 사용했던 스탕달의 본명이다. 광장 왼편 그랑드 거리를 통과하면, ‘적과 흑’이 씌어지는 데 결정적인 모티브가 된 ‘베르테 사건’의 재판이 열렸던 최고재판소가 나온다.

    중죄재판소의 한 평범한 사건을 가지고 스탕달은 역사적 심리와 역사철학에 관한 깊은 연구를 이루어놓았다. 대혁명이 형성해놓은 사회에서 행위의 은밀한 동기와 영혼의 내면적 성질에 대해 그는 ‘인간극’(100편 가까운 소설로 구성된 발자크의 총체소설-필자 주)전체와 맞먹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귀스타브 랑송

    문학사가 랑송이 지적한 ‘한 평범한 사건’이란 그르노블 인근 부랑그라는 인구 2만명 정도의 소도시에서 실제 있었던 일. 1828년 2월23일 그르네트 광장에서 신학생 앙투안 베르테가 처형되었다. 기사의 간략한 내용은 이렇다. 앙투안 베르테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출중한 재능을 사제에게 인정받아 신학교에 들어갔다가 몸이 약해 학업을 중단하고 사제의 알선으로 마을의 지주 미슈씨 댁의 가정교사로 들어간다. 부인과의 연정으로 남편에게 해고되고, 우여곡절 끝에 그르노블의 코르동씨 댁의 가정교사로 들어가지만 거기에서도 그 집 딸과 관계를 맺어 쫓겨나고 만다. 절망한 청년은 자신의 불행이 미슈 부인의 투서에 있다고 믿고, 부인이 다니는 교회로 달려가 미사를 보는 부인을 향해 권총을 발포하고, 살인미수로 체포된다.

    신문 사회면에 실린 이 치정 사건을 그르노블의 유명한 변호사의 아들이던 스탕달이 읽고 청년의 ‘격정’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 이 이야기는 소설의 중요한 골격으로 수용되는데, 소설의 주인공 쥘리앵 소렐이 출세(신부가 되느냐 군인이 되느냐)를 위해 불태워야 했던 사랑, 또는 욕망의 대상인 두 여인, 곧 레날 부인과 마틸드 중 레날 부인과의 관계로 표출된다. 작가는 소설 속에 이 사건을 변형시켜 스쳐 지나가듯 삽입시키고 있는데 그 대목을 보면 이렇다.

    기도대 위에서 쥘리앵은 읽으라고 거기 펼쳐놓은 듯한 인쇄된 종이 한 장을 눈여겨 보았다. 그는 눈길을 돌려 다음의 문장을 보았다.

    ‘브장송에서 집행된 루이 장렐의 최후의 순간과 처형 상보(詳報)…’

    종이는 찢겨 있었다. 뒷면에서는 문장의 첫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첫걸음.’

    ‘누가 이 종이를 여기 갖다놓았을까?’하고 쥘리앵은 생각했다. ‘가엾고 불쌍한 사람, 이 사람은 내 성(姓)과 끝 글자가 같네…’

    그는 한숨을 쉬며 이렇게 덧붙이며 종이를 구겨버렸다.

    -스탕달, ‘적과 흑’ 제5장 협상에서

    베리에르 시장의 아내인 레날 부인의 사랑이 순수하고 정적인 심리전이라면, 파리 라몰 후작의 외동딸 마틸드와의 사랑은 변덕스럽고 역동적인 심리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이야기 역시 실제 있었던 치정 사건을 모티브로 창작된 것이다. 일명 1829년에 일어난 ‘라 파르그 사건’. 라 파르그라는 가난한 가구세공사 청년이 질투로 변심한 애인의 목을 잘라 죽인 사건을 가리킨다. 라 파르그는 베르테처럼 처형되지 않고 5년형을 언도받는데, 마르세유에서 이 기사를 접한 스탕달은 가난하지만 훌륭한 교육을 받고도 ‘무서운 정열’의 희생자가 된 라 파르그라는 청년에게 고무되어 일사천리로 소설의 초고를 써내려간다.

    1830년, 있는 그대로의 프랑스

    레날 부인은 미슈 부인의 분신으로, 마틸드는 ‘베르테 사건’의 코르동 양과 ‘라 파르크 사건’의 여주인공, 그리고 당시 스탕달 주변에 출몰했던 파리 사교계의 정열적인 여인들이 투영되어 형상화된다. 쥘리앵 소렐과 레날 부인, 그리고 마틸드 양이 실제 모델을 가진, 남의 불행을 훔쳐보는 재미가 충만한 통속 연애 소설로 읽기에 모자람이 없다. 그러나 작가가 이들을 주인공으로 선택한 이유는 정작 다른 데 있다. ‘1830년대의 연대기’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그리고 서머싯 몸이 지적하듯, 가난하지만 우수한 두뇌, 강한 의지력, 대담한 용기를 품은 쥘리앵 소렐이라는 희대의 풍운아를 통해 작가는 ‘1830년의 있는 그대로의 프랑스’를 그리는 데 목표가 있었다.

    ‘우리는 소설에서만 진실(진리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에 도달할 수 있을 뿐이다’ 요즘 나날이 확신을 더해 가는데, 어디서든 소설 이외에서 그것을 찾는 것은 건방진 생각이다. 그러므로…(원문은 여기에서 중단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인용자 주) -스탕달 소장본의 ‘적과 흑’ 1쪽 기록에서

    그러므로 스탕달은 ‘진실’을 향한 혁명가의 소명으로 소설을 써야만 했던 것. 절망과 한탄이 묻어 있는 작가의 이 고백은 대혁명이 남긴 열기와 그 후 이어지는 격변의 시간을 거치면서 진실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을 드러낸 것이다. 작가의 화두는 극심한 혼란기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진실은 어디에 있고, 그것에 다가가는 방법에 있었던 것. 변방 코르시카 섬 출신의 나폴레옹이 장교가 되고 황제가 되기까지의 파란만장한 역정을 가슴 깊이 품고 출세의 야욕에 불타는 쥘리앵 소렐의 위선은 작가가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 도달하고 싶었던 진실의 역설인 셈. 정열과 진실의 추구, 그것은 궁극적으로 스탕달의 신념이었던 지고한 행복의 추구를 의미하는 것.

    그르노블에서의 이틀, 그르네트 광장을 떠나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위해 프랑슈콩테의 요새 도시 브장송으로 향했다. 레날 부인과 헤어진 뒤 신부의 부푼 꿈을 안고 브장송의 신학교를 향해 떠나던, 야망에 사로잡힌 불온한 청년 쥘리앵 소렐의 복잡미묘한 마음을 헤아리며. 브장송에서 성벽을 서성이는 아름다운 청년을, 혹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즐거운 몽상을 하며.

    멀리 보이는 산마루 위로 검은 성벽이 눈에 띄었다. 브장송 성채였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만일 내가 이 고상한 전쟁도시를 지키는 연대의 소위로 이곳에 왔다면 내겐 이곳이 얼마나 다른 모습으로 보였을까! (중략) 브장송은 프랑스에서도 가장 예쁜 도시 중 하나일뿐더러 용기와 재주 있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기도 하다. (중략) 도개교를 지났다. 1674년 포위공격 때의 역사로 머리가 가득 찬 그는 신학교에 틀어박히기 전에 성벽과 성채를 보고 싶었다. (중략) 큰 길에 있는 커다란 카페 앞을 지날 때, 그는 몇 시간 동안이나 성벽의 높이며 참호의 깊이, 대포의 무시무시한 모습에 정신을 쏟았다. 그는 놀라서 꼼짝 않고 있었다. -스탕달, ‘적과 흑’ 제24장 현청 소재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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