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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 에세이

역사와 교육에 관한 네 가지 단상

  • 김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역사와 교육에 관한 네 가지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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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겨울 언니의 수능이 코앞에 닥쳤을 때 둘째는 늦은 시간 방으로 들어와 무릎을 꿇고 울며 말했다. “아빠, 저도 미술하고 싶어요. 힘들겠지만, 도와주실래요?” 미술? 뭐, 너도 미술?! 알았다. 좋다. 네가 꿈을 꿀 수 있다면, 난 힘들어 죽겠어도 좋다. 넌, 내가 꾸는 또 다른 꿈이니까. 아이는 문과에서 다시 예체능반으로 옮겼다. 하지만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시작이다. 녀석의 방황과 고민은 여전히 계속될 거다. 하지만 꿈을 가진 방황이니 좀 낫겠지?

셋째는 꿈이 너무 많다. 뭐래도 다 할 기세의 당찬 ‘초딩’ 5학년. 2년 전부터는 열심히 재즈 댄스를 한다. 방과 후 활동으로 시작하더니, 요즘도 꾸준하다. 학교에서 방과 후 활동 발표회를 한다고 해 가봤다. 순서가 돼 녀석이 나오는데, 정말 깜짝 놀랐다. 복장도 화장도 놀라운데 게다가 몸동작이 장난 아니다. 소녀시대 못지않다! 어쩌면 저렇게 예쁘게 잘할 수가 있을까? 나는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그런데 저녁에 다시 집에 와서 보니, 녀석이 시무룩하다. 남자아이들이 복장과 몸동작이 야했다고 놀렸다는 것. 그랬나? 내 눈에는 예쁘기만 하던데.

그런데 혹시 내가 그런 식의 눈요기(?)에 익숙해져서 아무렇지도 않았던 건가? 아이들의 눈에, 걔네들의 정서에 안 맞았다면, 문제가 있는 건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아이다울 때 가장 예쁜 것 아닌가. 사실 그 몸동작을 음흉하게 보려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겠구나 싶었다. 어른 흉내를 내며, 어른이 되어가는 아이들. 우리의 모습대로, 우리가 품은 생각대로, 우리가 보여주는 대로 아이들은 그것을 모델이라 여겨 따라 하고 배우는 법이다. 그걸 생각하니, 아찔한 일이 너무 많다. 아이들에겐 세상이 모두 배우고 따라야 할 교과서다. 그렇다면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따라 하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 내 삶은 그 일에 얼마나 충실한가?

넷째는 완연한 봄을 만끽하고 있다. 초등학교 4학년에 올라가더니, 사건을 하나 만들었다. 첫날 교실에 들어서는 순간, 눈에 띄는 아이가 있었단다. 그래서 며칠 궁리 끝에 편지를 썼다고. ‘너를 처음 보고 첫눈에 반했어. 나랑 절친 할 수 있니?’ 믿기지 않지만, 그 일을 했단다. 편지를 건네주니, 아이가 읽고, 자기를 돌아보고 씩 웃었다나. 그래서? 사귀기로 했단 말씀! 그 다음날 아내는 내게 사진 한 장을 보냈다. “사진 찍어 오란다고 진짜 찍어 보냈네~ 애들 넘 귀엽긴 하다 ^^*” 넷째가 인증 사진을 찍어 보낸 것. 정말 적응 안 된다! 보내온 사진 속 활짝 웃는 두 녀석은 밝고 맑았다. 기분이 묘했다. 나중에 며느리 보면 이런 기분이려나? 뜻밖의 소식이 나를 하루 종일 들뜨고 따뜻하게 했다. 학교 다니는 거 재미있니? 당연하지. 녀석은 학교에 갈 이유가 분명해졌다.

어느 날 놀이터에 녀석이 보이고, 그 곁엔 사진 속에서 보았던 그 아이가 보였다. 더욱 놀랄 일은 그 아이 곁에 똑같이 생긴 아이가 하나 더 있는 것! 이게 무슨 일? 알고 보니, 절친으로 사귄 아이가 일란성 쌍둥이란다. 왜 갑자기 화투판 전문용어가 생각나는 걸까? ‘일타쌍피!’ 며칠 후, 집으로 친구를 데려왔다. 네 명이다. 왜? 녀석이 절친 언니에게 남친을 만들어줬단다. 얼씨구, ‘일타삼피!’ 곁에서 지켜보는 것이 정말 재미있다. 그런데 쟤들 공부는 언제 하나? 은근 걱정된다. 하지만 저것도 좋은 공부가 아닐까? 어울려 놀 줄 아는 것. 친구 만드는 법. 난 좀 어려운 질문을 일부러 던졌다.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게 뭐야?” 거침없는 대답이 돌아온다. “노는 것!” -_-;; “놀기만 하다 망하면 어쩌려고?” “아니! 그렇게 될 때까지 놀진 않을 거니까 걱정 마, 아빠.” 그래, 걱정도 팔자다. 놀 줄 모르고 만날 쩔쩔매는 아빠보다 낫다.



역사와 교육에 관한 네 가지 단상
金獻

1965년 서울 출생

서울대 불어교육학과 졸업, 동 대학 철학과 석사, 협동과정 서양고전학과 석사,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대 서양고전학 박사

現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저서 : ‘고대 그리스의 시인들’ ‘위대한 연설’


지친 몸으로 쓰러져 있으면, 네 아이가 달려들어 팔 다리 하나씩 맡아서 주무른다. 아, 이래서 아이가 네 명은 있어야겠구나! 걸리버가 된 듯 누워 눈을 감고 생각한다. 이 아이들 잘 키워 훌륭한 어른이 될 수 있게 한다면, 역사에 나름 공헌을 하는 것이겠지?

신동아 2011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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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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