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에 오면 저절로 부소산부터 오르게 된다. 풍경이 먼저고 역사가 뒷전이라서가 아니다. 부소산은 역사가 아닌가. ‘따로 국밥’처럼 풍경을 따로 두는 역사는 없다.
아무튼 산을 오른다. 해발 106m. 큰 언덕에 지나지 않은 높이지만 부소산을 언덕에 비유하면 실례다. 키는 작지만 산다운 면모는 다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산길도 철따라 풍경뿐만 아니라 냄새까지 달라진다. 봄과 가을, 사람 북적이는 때면 산이 제 작은 몸집 때문에 몸살을 앓는 탓에 산을 찾은 이가 되레 안쓰럽다. 차라리 빗방울 떨어지고 눈송이 쏟아지는 때를 골라 이 산을 올라보자. 그 어여쁨에 자못 가슴이 저민다.
낙화암 꼭대기에서 바라보는 백마강 이편저편의 풍경처럼 삽상하고 근사한 데가 얼마나 있을까. 강줄기와 건너편의 백사장, 남녘 들판, 낙화암 바위 벼랑까지도 계절과 날씨에 따라 모양새를 달리하는데, 내가 보기엔 늦가을 해질 무렵이 가장 나은 듯싶다. 아연 강폭이 넓어지면서 물빛이 달라지고 들판은 더욱 아득하니 넓어진다. 디디고 선 벼랑마저 더욱 가팔라져 주위가 온통 처연한 아름다움에 휩싸이는 광경을 나는 이맘때 보았다.
부소산에 올라
이 경치를 보며 더러 나는 어린애처럼 부여와 경주를 비교하기도 했다. 경주에는 산은 있지만 강이 없다. 경주를 가리켜 빼어난 풍치를 가진 도읍지라고 하기 어렵다. 한데 부여는 그림처럼 산수(山水)를 다 갖췄다. 백제가 신라에 패망한 것도 혹여 이런 경치 때문은 아닐까? 방어의 요지라 여겨 산수를 가졌는데 뒷날에는 오히려 그 산수에 빠져 방어를 잊어버렸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곁들여보는 것이다.
날마다 부소산에 올라 경치를 바라보던 백제의 임금과 벼슬아치들에게 신라와 고구려는 얼마나 멀고 아득했을까. 어쩌면 그들과 국경을 같이한다는 현실조차 잊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림 같은 강으로 나당(羅唐)의 군선이 밀려들었다는 얘기조차 꿈같은 소리로 들린다. 부소산과 백마강은 그렇듯 짝을 이뤄 어여쁘다.
나도 산마루 군창지 근처에서 탄화된 곡식알을 손바닥에 얹어본 일이 있다. 과거 역사의 증거물인데, 이상하게 참혹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신기함, 경이. 그런 느낌이었던 듯싶다. 시간의 간극에서 오는 비현실감 때문이라기보다 주변 자연에서 비롯된 현실 왜곡이 아니었을까. 학자들도 부소산성의 구실에 대해 유사시엔 군사방어시설이지만 평상시엔 왕과 귀족들이 유흥과 소풍을 즐기는 비원(秘苑)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낙화암에 대해서 ‘삼국유사’는 궁녀들이 빠져 죽었다는 뜻으로 타사암(墮死巖)이라고 적고 있다. 나라를 망친 임금은 중국에 끌려가서도 체신 때문에 손에 물을 묻히지 않고 여생을 보냈는데, 불타는 궁궐에서 내쫓긴 궁녀들만 애꿎게 천 길 벼랑에 몸을 던졌다. 망국의 역사에는 이런 비장, 참혹미를 갖춘 전설이 곁들여지는 법이다. 그리고 자연은 자연대로 그 전설을 먹고 자라면서 자신을 찾아오는 이들과 더 긴밀하게 감정을 교류한다.
벼랑길로 해서 고란사로 내려간다. 강가 바위벽 아래 차려진 절집은 찾아오는 이만 드물다면 그 자체로 유현한 도량인데 이제는 하도 사람들의 내왕이 잦아 그런 맛이 사라지고 없다. 절의 내력에 대해서는 왕들이 노닐던 휴식공간이라는 설과 궁중의 내불전(內佛殿)이었다는 설이 있다. 백제의 멸망과 함께 소실된 것을 낙화 궁녀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서 고려 때 중창했다고 전해진다.
백마강이 낳은 시인, 신동엽
시내에 나온 김에 잠깐 시인 신동엽을 만나보기로 한다. 계백장군 동상이 서 있는 부근, 부여읍 동남리에 그의 생가가 있다. ‘껍데기는 가라’‘금강’ 등의 시로 이름 높은 그는 1930년 이 집에서 태어났다. 교직에 몸담고 있던 신동엽은 1959년 신춘문예 당선과 함께 시작(詩作) 활동을 했다. 체제 순응적이라 해서 순수시의 경향에 대해 극히 비판적이었던 그는 토착정서에 역사의식을 담은 민족적 리얼리즘을 추구한 시인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동학농민전쟁을 소재로 한 장편 서사시 ‘금강’은 그의 시 세계를 대변하는 작품으로 꼽힌다. 마흔에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우리들의 어렸을 적
황토 벗은 고갯마을
할머니 등에 업혀
누님과 난, 곧잘
파랑새 노랠 배웠다.
울타리마다 담쟁이넌출 익어가고
밭머리에 수수모감 보일 때면
어디서라 없이 새 보는 소리가 들린다.
우이여! 훠어이!
-신동엽 시 ‘금강’ 첫 부분
그의 시는 특히 정치적으로 각박하던 시절 젊은 세대에게 인기가 있었다. 역사, 통일, 민중 같은 집단 가치가 독재, 외세, 매판자본에 대항하는 새 이데올로기로 부각되던 때 그는 ‘고뇌하고’ ‘저항하는’ 시대의 양심으로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되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이 중요하게 거명되는 데 대해서는 “문학의 내재적 가치 때문이라기보다 그가 감당했던 세계관의 시대적 적실성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다. 신동엽은 “정치적으로 옳지만 예술적으로 글렀고, 더러는 정치적으로도 예술적으로도 글렀다”(고종석)는 심한 말까지 듣기도 한다.
신동엽의 시비는 부여에서 백마강을 건너 보령으로 넘어가는 길목, 즉 백제대교 옆 소나무 숲에 서 있다. 시인의 작고 1주기 때 그의 유족과 친구들이 세운 것이다. 저 홀로 고요히 흐르는 강물을 두고도 지배계급에게 억눌리는 민초들의 피땀이라고 하는 시가 있는가 하면, 사랑하는 애인의 숨결이라고 읊는 시도 있을 수 있다. 이런 다양한 안목이 없다면 무슨 재미로 시를 읊고 소설을 읽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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