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호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다”

서권기 문자향(書卷氣 文字香)의 이불재(耳佛齋) 주인 정찬주 소설가

  • 조용헌| 동양학자·칼럼니스트 goat1356@hanmail.net

    입력2012-09-21 09: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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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찬주 작가는 수연행(隨緣行)을 일상의 기준으로 삼는다.
    • 인연에 순응하며 사는 것이다.
    • 인연을 받아들이되, 때를 기다릴 줄 아는 것이다.
    • 물결치는 대로 바람 부는 대로 순응하며 원망하거나 초조해하지 않는 경지다. 일상에서 재수 없는 사람과 인연이 엮여 괴로운 경우가 한두 번이었던가. 수연행 관점에서는 이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거부할수록 고통이 더 심해지기 때문이다. 고승들은 “인과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찾아온다”라고 했다. 인과의 사슬을 끊어내는 것이 수행연이다.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다”
    그 사람이 사는 집에 가보면 그의 성격과 팔자가 보인다. 국내의 여러 집을 둘러보고 ‘백가기행(百家紀行)’이라는 책을 쓰면서 깨달은 이치다. 집이 정리되어 있지 않고 구질구질 하면 그는 생각이 많은 사람이다. 생각이 많으면 기발한 아이디어가 많을 수 있지만, 내면세계가 복잡하게 엉켜 있을 가능성도 있다.

    집이 폐쇄적으로 되어 있으면 아무래도 주인은 내성적이고, 사소한 일에도 잘 삐치기 쉽다. 집이 군더더기가 없고 심플하면 틀림없이 성격도 심플하다. 욕심도 별로 없고, 사색을 많이 해서 뭐가 중요하고, 뭐가 덜 중요한지를 쉽게 간파한다. 남의 집을 방문했을 때 구조나 전망, 가구배치, 인테리어 등도 보지만, 필자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기운(氣運)’이다.

    기운? 기운은 눈에 보이지 않는 요소다. 그 집에 들어갔을 때 따뜻한 기운이 도는지, 밝은 기운이 도는지, 차가운 기운이 도는지, 산만한 기운이 도는지가 중요하다. 사무실도 마찬가지다. 국회의원 사무실이 들어서 있는 국회의원회관에 들어가보니까, 기운이 스산했다. 썰렁하고 냉정한 기운이 가득했다. 여야 간에 대립하고, 자기 보존을 위해 적과 동지가 없는 투쟁을 하는 곳이다보니까 그런 에너지가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거주하는 사람의 심리 상태가 눈에 보이지 않는 기운이라는 요소로 결집된다. 기운을 대강살펴보면 집주인의 평소 심법(心法)을 추론해볼 수 있다.

    육바라밀송이 있는 마당

    정찬주 작가가 사는 전남 화순(和順)의 ‘이불재(耳佛齋)’ 현관에 들어서자 청량하다는 느낌이 밀려왔다. 판소리 ‘호남가(湖南歌)’의 가사는 ‘화순은 풍속이 순하다’고 되어 있다. 산세가 부드러워 화순이라 이름 지었을까? 바위가 날카롭게 솟아 있는 산이 별로 없다. 둥그런 육산이 많아서 그런 가사를 지었을 성싶다.



    큰 도로에서 벗어나 4~5km 계곡 길을 따라 들어가니 9세기 때의 선승인 철감선사(798~868)가 창건한 쌍봉사(雙峰寺)가 나온다. 절은 계곡을 따라 들어가 깊숙한 곳에 자리 잡아야 그윽한 분위기가 있다. 쌍봉사는 고즈넉하다. 시끄럽지 않아서 절 맛이 난다. 국보로 지정된 철감선사 부도탑을 구경하다 절 입구 쪽을 바라보니 앞산 언덕에 기와집이 한 채 있다. 쌍봉사의 부속 암자인가 싶은 곳에 위치한 이 기와집이 정찬주의 집이다. 글을 쓰는 무염산방(無染山房)인 것이다. ‘오염되지 않은 산방’.

    “요즘은 청량리(淸凉里)에 가도 기운이 청량하지 못하고 매연만 잔뜩 휘날린다. 여기는 청량리도 아니고 청량산도 아닌데 왜 이렇게 집에 들어오니 기분이 상쾌해지는가?”

    “나는 잘 모르겠는데, 조 선생이 그렇게 느꼈다면 다행이다. 하루 종일 책 보고, 산책하고, 글 쓰는 일에만 집중하니 그런지 모르겠다.”

    “뭘 먹고 사는가?”

    “풀만 먹고 산다. 가능하면 육식은 안 한다.”

    “법정 스님이 정 작가에게 무염(無染)이라는 법명을 지어준 것도 그냥 지어준 것이 아닌것 같다. 법정 스님은 생전에 여기에 자주 왔는가?”

    “가끔 차 마시러 놀러 오셨다. 내가 불일암에 놀러 가기도 했다. 지금 저 사랑채에 걸린 ‘무염산방’ 현판 글씨도 스님이 직접 써준 것이다. 현판에 낙관은 없다. 스님이 ‘낙관을 찍으면 왠지 자기를 과시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낙관 없이 써주고 가셨다.”

    나는 50대에 들어서면서 없던 버릇이 하나 생겼다. 상대방과 이야기를 30분 정도 나눠보다가 머리가 아파지고 몸이 피곤해지면 얼른 자리를 피해버리는 것이다. 40대까지만 해도 참고 견디었지만, 50대가 되며 피하는 게 상책이라는 전술을 선택했다. 복잡한 상황에서 복잡한 생각을 하며 많은 이야기를 하면 오래 못가서 피곤해진다. 그래서 상쾌한 기분이 드는 사람하고만 이야기하고 싶어졌다.

    에너지가 떨어져서 그런가, ‘청탁(淸濁)을 가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하다보면 가려지게 된다.

    그러다보니 담양의 소쇄원(瀟灑園)이란 이름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소쇄’는 물을 뿌린 것처럼 맑고 시원하다는 뜻이다. 소쇄원이라 이름 지은 것은 역으로 그 이름을 지은 사람에게 얼마나 머리 아픈 일이 많았을까를 생각하게 한다. 무염산방의 소쇄하고 청량한 기운을 가진 주인과 접하면서 순식간에 든 생각이다.

    이불재는 쌍봉사의 부속 암자로 생각될 만큼 암자 분위기가 나는 집이다. 대문도 철제가 아니고 나무로 엮은 사립문이다. 대문 옆으로는 나뭇가지 넝쿨이 둘러싸고 있다. 옆으로 둥그렇게 돌담이 연결되어 있다. 돌담 위에는 기와가 얹혀 있다. 원래 돌담이 없었는데, 법정 스님이 와서 ‘담벼락이 없으면 사람 허리띠가 없는 것과 같다. 허리띠가 없으면 허전하다. 낮게라도 담을 만들어라’는 충고를 해서 설치했다고 한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조그만 연못이 있다. 연못 속에는 연꽃의 두꺼운 녹색 잎이 가득 차 있다. 연못 옆에는 키가 크지 않은 소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소나무 가지가 6갈래라고 해서 주인은 ‘육바라밀송’이라고 이름 붙였다고 한다. 육바라밀은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를 가리킨다. 연못 뒤로는 방 2칸이 있는 사랑채가 있다. 손님이 오면 이 방에서 머물 수 있다. 무염산방이라는 현판이 걸린 방이다.

    육바라밀송을 왼쪽으로 보면서 오른쪽으로 틀어 돌계단을 2, 3개 오르면 주인이 거처하는 한옥의 현관문이 나온다. 현관문 위에는 나무를 둥그렇게 해놓았다. 해인사 장경각으로 들어가는 현관문 위가 이렇게 아치형으로 되어 있다. 장경각 들어가는 문을 본떠서 만들었다고 한다. 안으로 들어가면 마룻 바닥이 나오는데, 거실 겸 방문객과 차를 마시는 다실이다. 찻잔들과 차 주전자, 그리고 대추나무 차판이 놓여 있다.

    文史哲 서적 그득한 서실

    거실 옆은 서실(書室)이다. 어림잡아 6평 공간에 불교사전을 비롯해 소설 집필에 참고가 되는 문·사·철(文史哲) 단행본과 자료가 책꽂이에 빼꼭히 꽂혀 있다. 불교와 역사, 동양 고전에 관계되는 책이 가장 많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왔으므로 무쇠로 만든 장작난로를 설치해놓았다. 한쪽 벽면에는 화면이 큰 컴퓨터가 있다. 이 컴퓨터로 소설을 쓰는 모양이다. 연재할 원고를 보내기 위해 우체국에 갈 필요 없이 컴퓨터 e메일로 바로 보낼 수 있다.

    인터넷은 화엄철학을 말해준다. 화엄은 ‘일즉다 다득일(一卽多 多卽一)’ 아닌가. 나와 세계가 바로 연결되는 구조를 눈으로 보여주는 게 인터넷이다. 소설가의 방은 이런 것인가. 서까래와 나무기둥, 그리고 한지를 바른 벽에 가득히 꽂혀 있는 책들. 그리고 컴퓨터의 인터넷. 서권기 문자향(書卷氣 文字香)에서 나오는 깊이와 전 국민과 연결되는 인터넷이 주는 활달함의 조화라고나 할까.

    문득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니 주위는 온통 청산뿐이다. 시멘트는 보이지 않는 녹색이 집을 둘러싸고 있다. 시골 야산 밑에 쓰러져가는 삼 칸 초가가 아니라, 기와를 얹은 아담한 한옥을 갖추고 공부해온 학문을 닦으면서 직업으로는 누구에게 아부하지 않아도 되는 소설가의 업을 가지고 사는 것이 행복이다. 우리는 먼지와 매연이 휘날리는 풍진 세상에서 먹고살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금쪽같은 한 세상을 다 보내고 있지 않은가!

    “청산에 살면서 번뇌가 없으면 그곳이 극락 아닌가? 청산에 살 수 있는 팔자는 상팔자다. 전생에 무슨 업을 쌓아서 이렇게 청산에 살 수 있는 것인가?”

    “나도 먹고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소설을 써야 먹고사는 것 아닌가. 49세 되던 2000년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내려왔으니 올해로 12년째다. 쌍봉산 자락에 올 때는 각오가 있었다. 오로지 글만 써서 먹고살아야 한다는 긴장감 같은…. 그 긴장감을 유지하려고 방문 앞에다가 호미를 걸어놓았다. 글로 밭을 갈겠다는 각오였다. 하루종일 농부들이 호미로 밭을 일구는데, 나도 글밭을 갈아야 할 것 아닌가. 몇 년간은 방문 앞에 호미를 걸어놓았더니 방문객마다 그 호미 앞에서 사진을 찍는 것을 보고 내려놓았다.”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시골에 내려온다는 것은 쉬운 결단이 아닌데…?”

    “그렇다. 서울에서는 나를 100% 연소시키지 못했다. 이것저것 잡사(雜事)가 많았다. 여기저기 모임에 가야 하고, 술자리도 있고, 얼굴을 내밀어야 할 곳이 많은 삶이 서울 생활이다. 더는 미루면 안 되겠다는 급박감이 들었다. 시골로 내려오니까 100% 나를 연소시킬 수 있다. 집중할 수 있어서 좋았다. 잃어버렸던 외로움을 되찾았다. 여기에 오니까 외로움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선택한 고립이 너무 좋았다. 겨울에는 눈보라가 몰아칠 때가 너무 좋다. 찾아오는 방문객이 하나도 없으니까.

    힌두교에서 말하는 인생의 4단계 가운데 임서기(林棲期)가 있다. 태어나서 25세까지는 학교 다니며 경전 공부를 하는 학습기(學習期)고, 50세까지는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양육하며 사회 의무를 다하는 가주기(家住期), 50세 이후는 집을 떠나 동네 뒷산에 원두막 같은 거처에 머무르며 홀로 명상하는 임서기(林棲期), 75세가 넘어서는 완전히 거지가 되어 길을 떠돌다 죽는 유랑기(流浪期)다. 이불재로 내려온 것은 임서기에 해당한다. 임서기는 자연이 스승이고 경전이고 벗이다. 주변 자연환경이 또 다른 경전이라는 사실을 이곳에 내려와서 깨달았다. 경전의 오의(奧義)를 알아가는 과정이다.”

    “어떻게 보면 비장한 각오로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화순으로 내려온 셈이다. 그렇지만 너무 비장한 감이 든다. 글을 쓰려면 심리적인 여백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 말도 맞다. 내가 ‘다산의 사랑’이란 소설에서도 썼지만 때로는 자기를 가둘 줄도 알고, 풀어줄 줄도 알아야 한다. 자신을 유배시킬 줄도 알고 해배(解配)도 시킬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처음에는 이불재에다 뼈를 묻겠다는 심정으로 왔다. 평생결제에 들어간다는 심정이었다. 지나고 보니까 들고 나감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골 저수지도 평소에는 물을 가둬놓지만 농사철이 되면 방류한다. 때로는 방류도 필요하다.”

    삶에서 배우는 오의(奧義)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다”

    쌍봉사의 암자 같은 정찬주의 산방 이불재.

    정찬주는 자연에서 삶의 오의를 많이 배운다고 한다. 지난 태풍 때도 배운 것이 있었다. 바람이 세게 부니까 집 마당으로 앞산의 나뭇가지들이 날려 왔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썩은 나뭇가지들이 대부분이었다. 태풍은 숲을 설거지하는구나…. 숲을 정화하고 설거지 하는 것이 태풍이다.

    땅콩 농사도 그렇다. 땅속에서 콩이 나온다는 사실이 그렇게 신기하고 기쁨을 주었다. 그래서 이름이 땅콩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고구마도 키워보니까 이치가 깨달아졌다. 고구마는 낫으로 줄기를 잘라주어야 한다. 줄기를 쳐주지 않으면 영양분이 뿌리가 아닌 줄기로 가버리기 때문이다. 농부들에게 배운 지혜도 있다. 무는 낮에 크고 배추는 밤에 자란다는 사실이다. 무는 양(陽)이고 배추는 음(陰)이다. 농부들은 경험에서 이러한 이치를 터득했을 것이다.

    “하루 일과가 어떻게 되는가?”

    “새벽 4시에 기상한다. 쌍봉사 새벽 종소리를 듣고 일어난다. 마당의 연못 주위를 네댓 바퀴 돌면서 정신을 가다듬는다. 그러고는 방에 들어와 집중적으로 글을 쓴다. 나는 새벽에 글을 써야 효율이 가장 높다. 아침을 먹고 다음에 좀 쉬다가 컴퓨터 앞에 앉아 새벽에 쓴 글을 퇴고한다. 점심 먹은 뒤에는 글을 쓰지 않고 찾아오는 손님들과 차를 마시고 대화를 한다.”

    “방문객이 많은가?”

    “있는 편이다. 처음에는 고향에 오니까 중·고등학교 동창이 많이 찾아왔다. 일부러 쌀쌀맞게 대했다. 인정 있게 대했다가는 일을 못하게 되니까. 냉정하게 대했더니 친구들의 방문은 줄어들었다. 독자들은 한 번씩 찾아온다. 한번은 어떤 노신사가 이불재의 툇마루에 앉아 바깥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어떻게 오셨느냐고 했더니, ‘쌍봉사에 왔다가 처마 밑 풍경 소리에 이끌려 여기에 왔다’는 대답이었다. 노신사는 절과 암자를 돌아다니고 있는 이유도 설명했다.

    설암(舌癌)에 걸렸었는데, 죽으려고 보니까 너무 억울했다. 그래서 남은 인생 산천유람이나 하던 참에 눈에 들어오는 책이 ‘암자로 가는길’이었단다. 이 책에 나오는 전국의 암자를 찾아 여행하다보니까 선고 받은 6개월의 시한부 인생이 6년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 책을 쓴 정찬주가 바로 저입니다’ 하니까 노신사는 깜짝 놀랐다. 한참 동안 말을 잊고 있다가 ‘너무 미안합니다. 그 책의 저자 정찬주 선생이란 말입니까? 생명의 은인 집에 왔는데, 빈손으로 와서 너무 미안합니다’ 하고 당황해했다. ‘선물이 없어도 됩니다. 생명을 연장했다는 그 말 자체가 ‘암자로 가는 길’을 쓴 저에게는 큰 선물입니다’라고 대답한 기억이 있다. 인상적인 방문객이었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이불재는 자연의 평화로움, 시골 생활의 느긋함, 문필가의 서권기 문자향이 어우러진 집이라 전국에서 방문객이 찾아온다. 독자도 있고, 유명인사도 있고, 우연히 들른 과객도 있다. 필자도 휴휴산방에서 살아보니까, 방문객이 너무 많아도 문제이고 너무 없어도 적막하다. 중심 잡기가 어렵다. 정 작가에게 이 부분을 물어보니 대답은 간단했다.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다’다.

    중국의 선승 마조(馬祖)의 제자가 대매(大梅) 법상(法常)이다. 대매 법상의 가풍이 바로 이것이었다. 정 작가는 수연행(隨緣行)을 일상의 기준으로 삼는다. ‘인연에 순응한다’는 뜻이다. 수연행은 달마대사의 가르침인 이입사행(二入四行) 가운데 사행(四行)의 하나에 들어간다. 이입(二入)은 이입(理入)과 행입(行入)이다. 이입은 경전 공부로 이치를 깨달아 도에 들어가는 노선이다. 사행(四行)은 행동으로 들어가는 4가지의 공부방법으로, 수연행(隨緣行), 보원행(報寃行), 무소구행(無所求行), 칭법행(稱法行)이다.

    수연행은 인연을 받아들이되 때를 기다릴 줄 아는 것이다. 너무 억지를 부리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다. 물결치는 대로 바람 부는 대로 순응하며 원망하거나 초조해하지 않는 경지다. 가는 사람 잡지 않고, 오는 사람 막지 않는다는 것이 수연행을 풀어서 설명한 셈이다. 말은 쉽지만 실천하기는 어렵다. 나이가 50세는 넘어서야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일상에서 재수 없는 사람과 인연이 엮여 괴롭힘과 피해를 보는 경우가 한두 번이었던가. 그를 탓할 필요가 없다. 수연행의 관점에서 보면 받아들여야 한다. 거부할수록 고통이 더 심해지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소극적인 인생관이다. 수연행을 하지 못하면 겪는 고통을 외부와 타인에게 전가하는 버릇을 갖게 된다. 원인을 자기에게서 찾지 않고 남에게서 찾으니 원망과 불만이 팽배해질 수밖에 없다.

    “수연행의 원리적 근거는 무엇인가? 왜 인연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가? 너무 무기력한 태도가 아닌가?”

    “인과(因果) 때문이다. 이런 원수가 나하고 엮인 것도 전생의 업보이고 인연 때문이다. 내가 그 원인을 만들어놓은 탓이다. 이 이치를 깨닫든지 아니면 믿어야 한다. 나는 고승을 만날 때마다 ‘인과가 있는 것입니까?’ 하고 묻는 버릇이 있다. 고승들은 즉시로 ‘인과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것입니다’하고 대답하주곤 했다. 고승들이 나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다.

    오늘 내가 하는 말 한마디 행동 하나도 나중에 인과로 연결된다. 그래서 말 한마디 행동 하나도 조심스럽게 해야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 주지 않도록. ‘낮 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는 속담은 이러한 인과의 이치를 설파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 하나가 다 연결되게 돼 있다. 결국에는 자기가 하기 나름이다.”

    “인과에 집착하면 일상생활이 너무 무겁게 되는 것 아닌가. 이 말 한마디가 내생에 어떤 과보로 연결될까를 의식하다보면 한마디를 하기도 부담스러워진다. 자칫 잘못하면 인과가 현상의 삶을 얽어매는 족쇄로 작용할 가능성도 있다.”

    “인과가 이데올로기가 되면 삶을 무겁게 하는 굴레로 작용할 수 있다. 문제는 체화(體化)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몸에 녹아들어야 한다. 불교는 도그마를 경계한다. 인과도 마찬가지다. 불교 초기 경전인 숫타니파타를 보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이라는 문구가 있다. 인과가 몸에 익으면 인과를 지키기는 하되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되는 경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인과가 그물이 될 수 있다. 나도 아직 ‘바람처럼’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물에 걸리지는 않으려고 노력한다.

    생전에 이불재에 자주 오셨던 법정 스님은 ‘흙탕물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리고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의 3가지 문구를 강조했다. 이 3가지 문구가 팔만대장경의 요체라고 당신은 보았다. 지금 생각해보니까 법정 스님이 나에게 준 화두가 3가지 문구다.”

    성철 법정 혜암…

    정찬주는 불교 고승들에 관한 소설을 많이 써왔다. 통도사 극락암의 경봉 스님에 대한 이야기는 ‘야반삼경에 촛불춤을 추어라’, 성철 스님은 ‘산은 산 물은 물’, 일타 스님은 ‘인연’, 법정 스님은 ‘소설 무소유’, 한용운 스님은 ‘만행’, 중국 구화산에 가서 지장보살이 된 신라 김교각 스님에 대한 것은 ‘소설 김지장’이다.

    무염거사에 의하면 성철 스님은 지혜가 뛰어난 분이었다. 출가하기 전에 칸트의 순수이성비판과 하이네의 시집을 읽었다. 성철과 법정에 관한 이야기도 있다. 성철은 평소에 해인사 강원 출신인 젊은 수좌 법정을 인재로 보았다. 내심 기대를 걸었던 법정이 1968년 어느 날 불교신문에 칼럼을 썼다. 성철 선사를 만나기 전에 무조건 3000배를 한다는 관례를 비판한 것이다. 간절한 마음이 중요한데, 간절한 마음 없이 3000배를 하는 것은 엎드렸다 폈다 하는 ‘굴신운동(屈伸運動)’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요지였다. 성철의 문도들은 분노했다. 제자들은 해인사에 있던 법정의 거처에 몰려가 방안 살림살이를 부숴버렸다. 한 번만 더 하면 방의 구들장을 파버리겠다는 으름장을 놓았다.

    보고를 받은 성철이 한마디했다. “그래도 펜대를 바로 세우고 글을 쓰는 사람은 법정밖에 없다.” 이 한마디로 사태는 정리되었다.

    “성철의 뒤를 이어 해인사 방장으로 있었던 혜암 스님은 어떤가?”

    “바늘과 실의 관계였다. 성철이 가는데 혜암이 따라갔다. 그만큼 밀접한 관계였다. 혜암은 전남 장성의 백양사 근처에서 태어났다. 어느 날 혜암이 해인사 방장으로 있는데, 장성에 살던 집안의 장조카가 혜암을 찾아왔다. 사업을 하던 조카는 혜암에게 어떤 도움을 받을까 해서 왔던 것이다. 마당에서 풀을 뽑고 있던 혜암은 장조카를 힐끗 보더니만 ‘너는 해인사의 풀 한 포기도 뽑아 갈 수 없다’고 일갈했다. 이 말에 정신이 번쩍 든 조카는 그 뒤로는 해인사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혜암은 공과 사가 분명한 선승이었다. 혜암은 평소에 ‘밥 먹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성품과 공부 정도를 알 수 있다’는 말을 자주 했다. 밥을 많이 먹으면 밖에 많이 돌아다녀야 한다. 많이 먹으면 에너지가 넘쳐 색심(色心)도 생겨난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밥을 많이 먹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허기만 달랠 정도로 조절해야 한다는 것이 혜암의 ‘밥론’이었다.”

    정 작가가 고승들에 대한 소설을 많이 쓰게 된 계기는 일찍부터 내로라하는 선승(禪僧)을 많이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선승은 보통 사람의 상식으로는 감 잡을 수 없는 인물들이다. 지극히 상식적인가 하면 깜짝 놀랄 만큼 파격적이기도 하다. 보통 사람이 측량할 수 없는 면모가 있다. 공부가 제대로 되면 귀신도 눈치를 못 챈다고 한다. 귀신이 알아보면 공부가 덜 된 것이다.

    놀아도 도인하고 놀아야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다”

    이불재 사립문 앞의 조용헌과 정찬주(오른쪽).

    아상(我相·ego)이 완전히 녹아버리는 멸진정(滅盡定)의 경지에 들어가면 천신(天神)들도 도인을 짐작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일반인은 선승의 경지를 측량하기 힘들다. 이런저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판단하고, 처신을 어떻게 하는지 옆에서 지켜보아야만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놀아도 도인하고 놀아야 한다. 공부가 따로 없다. 도인과 같이 먹고, 이야기하고, 그가 일처리를 하는 것을 보는 게 공부다. 공부가 많이 된 고승들은 대화의 파장이 다르다. 아상이 녹은 도인의 몸에서는 풍겨 나오는 에너지가 다르기 때문이다.

    고승에게서는 에너지가 방출돼, 상대방의 세포 깊숙이 그 파장이 들어간다. 세포에 깊이 들어가는데, 뇌리에도 박히지 않겠는가. 공부가 제대로 된 도인의 몸에서 나오는 파장은 상대방의 업식(業識)을 녹여준다. 근심 걱정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도 도인과 몇 시간 이야기하고 나면 머리가 가뿐해진다. 꿈이 달라질 수도 있다. 정화된 에너지가 밑바닥에 있는 무의식까지 들어가 빛을 주기 때문이다. 사람 때문에 넘어지기도 하지만, 사람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인생이다. 악연을 만나서 자빠지기도 하지만, 선지식을 만나서 일어설 수 있는 희망과 힘을 얻기도 하는 것이 인생살이다.

    정찬주는 일찍부터 고승을 만났다. 동국대 국문과 시절 송광사에 계시던 구산(九山) 스님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당대의 선지식이었다. 구산은 출가하기 전 이발사를 하다 폐병이 걸렸다. 먹을 것이 부족하던 일제강점기에 폐병은 죽을병이었다. 그런데 지나가던 사람이 천수경(千手經)을 10만 독 하면 낫는다는 말을 해주었다. 그날로 천수경을 구해서 외우고 또 외웠다. 병이 완쾌되자, 그길로 출가했다. 제자들에게는 매우 엄격해서 몽둥이를 휘두르던 선승이었지만, 일반인에게는 담뱃가게 할아버지처럼 자비스러운 스타일이었다고 한다.

    정찬주는 방학 때 여러 학우와 구산을 만났다. 구산이 정찬주 학생에게 질문을 던졌다.

    “중생이 뭐냐?”

    “깨닫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건 책에 나온 말이고 네 생각을 말해봐라?”

    정찬주는 대답을 못하고 당황했다. 한 번도 생각해본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쩔쩔매는 정찬주를 보면서, 동석했던 다른 학생들이 긴장했다. 어색한 상황이 이어지는데, 구산을 모시는 시자(侍者)가 대접에다 포도를 담아 왔다. 구산은 포도 알을 하나 따더니 공중에 던지는 게 아닌가. 그러고는 입으로 받아먹는 묘기를 보여주었다.

    나이 든 선지식이 순간적으로 보여주는 묘기를 보고 좌중은 폭소를 터뜨렸다. 무거운 긴장을 주었다가, 순식간에 풀어주는 수단을 제시한 에피소드였다. 선가(禪家)에서는 이를 살활자재(殺活自在)라고 한다.

    일정이 끝나고 송광사 문을 나서는 정찬주에게 구산 노장은 일주문까지 따라와 “너 머리 깎고 출가했으면 좋겠다. 출가하면 좋을텐데”를 연발했다. 아쉬웠던 것이다.

    “누진통이 어렵네”

    정찬주가 청화(淸華) 스님을 만날 때였다. 청화스님은 1990년대 초반 곡성 태안사에 주석할 때 필자도 여러 번 뵈었다. 그렇게 자비로울 수 없는 분이다. 세포 하나하나에 자비와 겸손이 몸에 밴 선지식이었다. 이 어른과 30분 정도 이야기를 나누면 머리가 시원하게 정화되는 느낌을 받는다. 어느 날 청화 스님을 찾아간 정찬주가 질문했다.

    “스님은 깨쳤습니까?”

    외람되지만 솔직한 질문을 한 것이다.

    “숙명통(宿命通)과 천안통(天眼通)은 한 것 같은데, 누진통(漏盡通)은 아직 확신이 안 서네. 그러니까 아직 수행자지.”

    깨달음에 대한 기준은 각기 다르다. 무엇이 깨달음인지는 따지고 들어가면 쉽게 정의 내리기 어렵다. 수행의 경지에 깊이 들어가보지 못한 일반인이 깨달음에 대하여 왈가왈부하는 것은 주제 넘은 짓일 수 있다. 깨달아보지 못한 사람이 깨달았는지 안 깨달았는지를 어떻게 알 것인가? 청화 스님은 매우 고전적인 기준으로 깨달음을 이야기한 것으로 보인다.

    원시불교에서 깨달으면 6통을 한다고 되어 있다. 천안통, 타심통, 숙명통, 신족통, 천이통, 누진통이다. 깨달았다면 6가지 신통력을 갖추어야 된다고 청화선사는 생각했던 것 같다. 6통 가운데 누진통이 제일 어려운 것으로 되어 있다. 누진은 글자 그대로 몸에서 새는 것이 끝났다는 경지다. 번뇌가 없다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글자 그대로 몸에서 땀도 안 나는 경지로 해석하기도 한다.

    숙명통 한 가지만 되어도 다른 사람의 운명을 훤히 본다고 한다. 그래도 도인 소리를 듣는다. 타심통이 되면 상대방이 지금 이 자리에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대강 짐작한다. 그래서 타심통이 된 도인하고 이야기할 때는 질질 끌지 말고 바로 속마음을 이야기해야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정찬주는 청화 스님의 솔직한 답변에 인간적인 매력을 느꼈다고 한다. 무려 40년 넘게 하루에 한 끼만 먹는 일종식(一種食)을 하고, 밤에는 잠을 자지 않는 장좌불와(長坐不臥)를 하며 수행해온 청화선사. 그런 고승이 속가의 머리 긴 소설가에게 자신의 부족함을 이야기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고승이니까 솔직 담백할 수 있는 것이다.

    정 작가에게 물어보았다. “소설도 여러 분야가 있는데, 그동안 불교와 고승들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써왔다. 이 분야에 집중하게 된 까닭이 무엇인가. 전생사와 관련 있는 것인가?” 그랬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전생사와 관련 있다.” 몇 년 전에 숙명통을 한 어떤 도사가 찾아와서 알려줬다는 전생담이다.

    “구업(口業)을 갚으려 글을 쓴다”

    정찬주의 전생은 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말을 잘 타는 화랑이었다. 화랑도 전성기인 김유신이 통일할 무렵의 화랑이 아니라 신라가 망해가는 무렵의 화랑이었다고 한다. 그는 고구려 지역에 들어가서 살게 되었다. 고구려에서는 생업이 사냥이었다. 화랑은 없어졌으니까 말 타고 활 쏘는 일을 사냥하는 대로 돌렸다. 살생을 하게 된 것이다.

    어느 날 원효의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를 읽게 되었다. 그 내용이 너무 와 닿아 공감이 되었다. 그래 나도 공부를 해야 하겠다. 이렇게 해서 사냥을 그만두고 ‘대승기신론소’를 강의하는 법사가 되었다. 강의 잘하는 법사로 활동하였다.

    법사 활동을 하면서 땡중을 비난하는 일이 잦아졌다. 중이 중답지 못하고 무식하다고 욕을 한 것이다. 욕을 많이 하면 구업(口業)을 짓는다. 그는 불교소설을 많이 쓰는 이유는 전생에 저지른 구업을 갚으려고 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듣고 보니 일리가 있다.

    통일 신라 말기의 선승인 철감선사와 인연이 있었어 쌍봉사 앞에 살게 되었다고 믿는다. 정찬주는 대작을 구상하고 있다. 대작이라 10권 넘는 장편이어야만 한다. 10권 이상의 장편소설은 동네의 중심에 서 있는 당산(堂山)나무와 같다는 지론이 있다. 당산나무가 없으면 소설가로서의 뼈대가 약해 보인다. 인도의 아쇼카 대왕에 대한 소설이다.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다”
    조용헌

    1961년 출생

    원광대 대학원 불교학박사

    한중일 3국의 불교 사찰, 도교 도관, 유교 고택 1000여 곳 현장 답사

    저서 : ‘500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 ‘사주명리학 이야기’ ‘백가기행’ ‘동양학강의 1, 2’등


    아쇼카는 인도를 통일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시절 동아시아 전역에 불교가 전파되었다. 4년 전에 인도의 불교성지를 순례하다가 아쇼카 대왕이 세운 석주를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아 소설로 써봐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고 한다. 준비를 위해서 5차례나 인도의 여러 지역을 답사하고 자료를 수집했다. 10권이 넘는 장편을 쓰려면 정력을 한곳에 집중해야 하는데, 그 시간이 5년 이상 걸린다. 이 기간 생계가 문제다.

    작가가 시골에 내려와 사는 모습이 참 보기 좋다. 그는 알게 모르게 지역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장년의 소설가는 당산나무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지역사회에 안정감을 주고 사람들을 교화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서권기 문자향을 내뿜는 한옥에서 주변 사람들과 교유한다는 것 자체가 당산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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