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호

찰스 왕세자와 아일라 위스키

  • 김원곤 | 서울대 의대 교수∙흉부외과 wongon@plaza.snu.ac.kr

    입력2012-09-21 10: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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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가 ‘위스키의 성지’로 표현해 더욱 유명해진 스코틀랜드 서쪽의 작은 섬 아일라에서는 피트향이 강한 이탄(泥炭)으로 몰트보리를 볶아 스카치위스키를 만든다. 이곳을 찾았다가 가벼운 비행기 사고로 예정보다 오래 머물게 된 찰스 왕세자를 극진히 대접해준 증류소는 로열 워런트를 받기도 했다. 다도해를 미니어처로 축소해놓은 것 같은 해안선이 인상적인 아일라 섬에서 저녁놀을 바라보며 피트향이 강한 스카치위스키를 목구멍 깊숙이 삼켜보는 것은 어떨까.
    찰스 왕세자와 아일라 위스키
    올해 2월 고(故) 다이애나 영국 왕세자비의 일생을 그리는 전기(傳記) 영화 ‘코트 인 플라이트(caught in flight)’의 헤로인으로 영화 ‘킹콩’에서 여주인공을 한 나오미 왓츠가 캐스팅됐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 영화는 1997년 36세로 요절한 다이애나의 사망 이전 2년을 중심으로 그녀가 한 역할, 봉사 활동, 여자로서의 행복과 자유를 추구하는 모습 등을 다룰 예정이라고 한다. 올리버 히르비겔 감독이 메가폰을 잡는다.

    다이애나는 한 편의 동화 같았던 결혼식, 화려해 보였던 왕세자비 생활, 세상을 놀라게 한 왕세자와의 이혼, 그리고 사망에 이르기까지 드라마 같은 삶을 살았다. 다이애나의 이야기에 찰스 왕세자가 빠질 수가 없다. 최근 뉴욕타임스 기자를 지낸 샐리 베델 스미스가 펴낸 책‘영국 여왕 엘리자베스’에 따르면 찰스의 어머니인 엘리자베스 2세는 전 캔터베리 대성당의 주교인 커레이 경에게 아들 부부 사건에 대한 심정을 솔직히 밝히면서 ‘처음으로 엄청난 절망을 느꼈다’고 했다고 한다.

    여왕은 과거 에드워드 8세(1894~1972)가 왈리스 심프슨(1896~1986)과 결혼하기 위해 왕위를 버린 것처럼 찰스 왕세자도 정부(情婦) 카밀라와 결혼하기 위해 왕위를 포기할 수도 있다는 데 큰 충격을 받았다. 커레이 경은 ‘여왕은 한숨을 내쉬면서 역사는 반복되고 있다고 솔직히 이야기했으며 그 표정에서 엄청나게 실망하고 있음을 느꼈다’라고 밝혔다.

    代를 건너뛰어 나타난 스캔들

    에드워드 8세와 찰스 왕세자는 비슷한 길을 걸었지만 다른 점이 있다. 엘리자베스 2세의 삼촌인 에드워드 8세는 조지 5세의 장남으로 1936년 아버지인 조지 5세가 사망함으로써 왕위에 올랐다. 왕세자 시절 여성 편력으로 구설에 올랐던 그는 즉위 후 그때까지 사귀고 있던 미국인 애인 심프슨과의 정식 결혼을 시도한다. 한 번 이혼 경력이 있는 심프슨은 두 번째 결혼생활도 실패해 파경 직전이었다. 그녀는 공식적으로는 유부녀 상태에서 에드워드 8세와 사귀었다.



    스탠리 볼드윈(1867~1947) 총리가 이끄는 영국 내각은 ‘살아 있는 전 남편’을 둘이나 두게 될지도 모를 여자를 국모로 맞이하는 것은 절대 불가하다고 주장했다. 영국 왕을 수장으로 모시는 영국교회도 강력히 반대했다. 국민 여론도 나빠지자 에드워드 8세는 사랑을 위해 즉위 326일 만에 왕위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그녀와 결혼해 프랑스에 살다 1972년 병으로 사망했다. 이‘세기의 로맨스’로 에드워드 8세의 동생인 조지 6세가 왕위에 올랐고 이어, 조지 6세의 큰딸인 엘리자베스 2세가 여왕이 되었다.

    찰스 왕세자는 다이애나와 결혼하기 전 카밀라를 사랑했다. 하지만 카밀라는 유부녀였기에 다이애나와 결혼했다. 진정한 사랑이 부족했던 결혼은 파경에 이르렀고 다이애나는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다. 그 후 찰스 왕세자는 남편과 이혼한 카밀라와 재혼해 행복하게 살고 있다. 낭만가적 기질일 수도 있지만, 난봉꾼의 일탈로 격하될 수 있는 일들이 엘리자베스 2세의 표현대로 한 세대를 걸러 이어진 것이다.

    찰스는 1948년 버킹엄 궁에서 당시 공주였던 엘리자베스 2세와 그리스 왕실 출신의 에든버러 공작 필립 공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필립 공의 어머니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증손녀였으니 그의 혈통 절반에는 영국 왕실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찰스가 만 4세도 되기 전인 1952년 2월 6일, 조지 6세가 타계해 엘리자베스 2세가 25세로 왕위에 올랐다. 그때 찰스는 차기 왕위 계승자가 돼 지금에 이름으로써, 영국 역사상 가장 오래 왕세자로 머물러 있는 이로 기록되었다.

    찰스는 미래의 영국 왕이 되기 위해 체계적인 교육을 받게 되었다. 1955년 왕실은 찰스가 개인 교습이 아니라 일반 학교에 다니면서 공부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는 영국 왕실 역사상 첫 시도였다. 1956년 찰스는 런던에 있는 ‘힐 하우스’에 입학했다. 이 학교의 창립자이며 교장인 타운엔드는 찰스를 다른 학생과 똑같이 대하려고 했다.

    1957~1962년 찰스는 아버지의 모교인 햄프셔 주 헤들리의 ‘침 스쿨’에 다녔고, 1962~1967년에는 스코틀랜드 북동부에 위치한 엄격한 교풍의 ‘고든스타운 스쿨’에서 대학 전 예비교육을 받았다. 1966년 1월에서 9월 사이엔 교환학생으로 오스트레일리아 빅토리아에 있는 ‘질롱 그래머 스쿨’의 ‘팀버톱’을 다녀오기도 했다. 오지에 있는 분교였다.

    찰스를 꿰뚫어본 마운드배튼

    영국 왕자들은 사관학교를 거치는데, 1967년 찰스는 그 관례를 깨고 바로 케임브리지 대학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했다. 그는 인류학과 고고학, 역사학 등을 공부함으로써 1971년 영국 왕위 계승자로서는 최초로 학사학위를 받았다. 1975년에는 석사학위도 취득했다. 그때 한 학기 동안 애버리스투위스에 있는 웨일스의 유니버시티 칼리지에 다니면서 웨일스어를 배워, 웨일스 밖에서 태어나 ‘웨일스 공(Prince of Wales)’의 타이틀을 가진 사람으로서는 처음 웨일스어를 배운 인물로 기록됐다.

    찰스는 왕실 전통에 따라 군 복무를 했다. 케임브리지 대학 2학년인 1969년에는 영국 공군에서 조종사 훈련을 받아 비행기를 조종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리고 다트머스에 있는 해군사관학교에서 6주 교육을 받고 장교가 돼 1971~1976년 6년간 함정을 타고 여러 곳을 순회하게 되었다. 그때 헬리콥터 조종사 자격증도 취득했다.

    왕세자라는 신분과 남성적인 매력으로 찰스는 상당한 여성 편력을 보였다. 그 무렵 찰스는 작은할아버지(종조부)인 마운트배튼(1900~1979)을 만나게 된다. 마운트배튼은 찰스의 아버지인 필립 공의 친삼촌으로, 인도의 마지막 총독을 지냈다. 찰스가 그를 몹시 따랐기에 찰스 성장기에 큰 영향을 미치며 멘토 역할까지 하게 되었다. 그는 찰스가 에드워드 8세처럼 자유분방하게 즐거움을 추구하는 성격을 가진 것을 알고 몇 차례 주의를 주었다.

    찰스 왕세자와 아일라 위스키
    그러면서도 총각 시절에는 즐길 수 있을 만큼 즐길 것을 권장했다. 하지만 결혼만은 안정된 생활을 위해 젊고 순진한 여자와 해야 한다는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마운트배튼은 찰스의 배우자로 자기의 손녀 아만다를 적극 추천했다. 몇 차례의 예비 작업을 거쳐 1978년 찰스와 아만다가 함께 인도로 여행 가도록 요청했다. 하지만 구설수를 염려한 양가 부모의 반대로 이 계획은 무산되고, 이듬해(1979) 그는 아일랜드공화국군(IRA)이 그의 요트에 몰래 장착해놓은 폭탄이 터져 사망했다.

    그 후 인도 여행을 마치고 온 찰스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아만다에게 정식으로 프로포즈를 했다. 그러나 폭파 사건으로 할아버지뿐만 아니라 막냇동생 등 가족을 잃은 충격에 휩싸인 아만다는 왕실로 들어가는 것을 완강히 거절했다. 결국 1981년 7월 29일, 찰스는 세인트폴 성당에서 스펜서 백작 가문의 딸 다이애나 스펜서(1961~1997)와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다이애나는 20세의 처녀로 찰스와는 12살 차이가 났다.

    두 사람은 1977년에 다이애나의 집에서 처음 만났고, 찰스가 연정을 느끼게 된 것은 1980년 여름경이라고 한다. 하지만 주위 증언에 의하면 찰스는 그렇게 다이애나를 사랑했던 것 같지는 않았고, 다이애나도 찰스의 갑작스러운 접근에 당황했다고 한다. 그들의 교제가 매스컴의 집중 조명을 받자, 아버지인 필립 공이 찰스에게 ‘네가 어떻든 빨리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그녀의 명예에 큰 상처를 입힐 수 있다’고 충고했다.

    결혼 이듬해 장남 윌리엄이 태어나고 2년이 지난 1984년 차남 헨리가 출생할 때까지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행복하고 순탄해 보였다. 그러나 1985년에 접어들면서 깊은 갈등과 불화의 단서가 표출되기 시작했다. 결혼 전 찰스의 오랜 연인이었던 카밀라 파커볼스(1947년생)가 갈등의 원인이었다. 찰스에게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아름다운 생활이 아니라 왕위에 오르기 전에 치르는 일종의 통과의식이었던 모양이다.

    찰스는 왕세자비의 자리를 메워줄 고분고분한 여자를 찾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다이애나는 의외로 자의식이 강했다. 그녀는 찰스가 과거의 왕처럼 다른 애인을 두고 버젓이 공적 활동을 하는 것을 두고 볼 수가 없었다.

    1990년대 초 찰스와 다이애나의 불화가 매스컴을 통해 대중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1992년 다이애나는 한 작가에게 자신의 암담한 결혼생활을 낱낱이 고발하는 책을 쓰도록 했다. 결국 존 메이저 영국 총리가 국회에서 왕세자 부부의 공식 별거를 발표하게 되었다. 같은 해 찰스 왕세자와 카밀라가 1989년에 나눈 사적인 전화 통화내용이 도청 자료로 언론에 공개되기도 했다.

    다이애나의 죽음, 찰스의 재혼

    1995년 두 사람을 둘러싼 상황이 결정적으로 악화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BBC의 시사프로 ‘파노라마’와 인터뷰한 다이애나가 과거 그녀의 승마교관이었던 전 육군 소령 제임스 휴이트(1958년생)와 혼외정사를 했다고 고백한 것이다. 그러자 다이애나의 둘째아들인 해리 왕자가 휴이트를 닮았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이에 대해 휴이트는 훗날 다이애나와의 만남은 해리를 출산하고 난 다음부터라고 밝힘으로써 소문은 공식 부정되었다.

    찰스의 한심한 행태와 다이애나의 충격적인 고백에 분노한 엘리자베스 2세는 그해 12월 정식으로 이혼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서한을 보냈다. 찰스와 다이애나는 그 이듬해인 1996년 8월 28일, 정식으로 이혼을 발표했다. 그 후 다이애나는 세계를 무대로 적극적인 봉사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한창 활동하던 1997년 8월 31일 프랑스 파리의 한 지하차도에서 일어난 교통사고로 이집트 출신 백만장자의 아들인 도디 파예드(1955~1997)와 함께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찰스 왕세자는 2005년 4월 9일 윈저성의 성공회 세인트 조지 성당에서 오랜 연인 카밀라와 결혼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후 만일 찰스가 영국 왕에 즉위하면 카밀라를 정식 왕비(Queen Consort)로 부를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하원이 공식적으로 반대했고 국민의 반대 여론도 강해 현재는 찰스가 왕위에 올라도 카밀라는 왕비보다 한 단계 격이 낮은 왕의 배우자라는 의미를 지닌 ‘빈(Princess consort)’으로 부르기로 결정된 상태다.

    한량 기질을 가지고 있는 찰스에게서 술에 대한 이야기가 빠질 수는 없다. 찰스는 우연히 술을 접했다고 한다. 16세로 1964년 스코틀랜드의 ‘고든스타운 스쿨’에 다닐 때였다. 그는 영국방위군의 일원으로 해군 사관 훈련을 받기 위해 스토나웨이 섬에 가 있었다. 그런데 신문기자 몇 명이 뒤를 따르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고 이들을 따돌리기 위해 뛰기 시작했다. 도망 중에 한 퍼브(pub)를 발견하고 황급히 들어가게 되었다. 퍼브 주인은 무엇을 마시겠느냐고 물었다.

    찰스의 머리에 떠오르는 술은 ‘체리브랜디(cherry brandy)’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친구들과 사냥 여행 등에 나섰을 때 양친에게 ‘마시는 술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양친은 체리브랜디라고 대답해준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의 부모는 아이의 질문에 자세히 대답하는 것이 귀찮아서 체리브랜디라고 한 것이지 항상 그 술을 마셨던 것은 아니다.

    체리브랜디를 맛본 찰스는 독하고 이상한 맛에 좋은 느낌을 가질 수가 없었다. 이 사실은 뒤따라온 신문기자들에 의해 기사화되면서 뜨거운 관심을 받게 된다. 그로 인해 엄격한 왕세자 교육 과정에 있던 찰스는 술에 대한 경험을 쌓지 못했다. 술에 대한 경험은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시작된 술과의 인연에 스카치위스키가 등장하게 된다.

    강한 피트향의 몰트 위스키

    찰스 왕세자와 아일라 위스키

    1981년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의 결혼식. 파국으로 끝난 이 결혼의 주인공 찰스는 아일라 위스키 애호가다.

    영국왕실과 스카치위스키의 인연의 역사는 만만치 않다. 조지 4세(1762~1830)는 불법으로 만들어지던 시절의 글렌리벳(Glenlivet) 몰트위스키를 즐겨 마셨다고 한다. 전 편에 소개한 빅토리아 여왕도 포도주에 스카치위스키를 첨가해 마셨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찰스의 부친인 필립 공도 스카치 몰트위스키의 대표 주자인 글렌피딕(Glenfiddich) 제품을 좋아해, 스코틀랜드 몰트증류소협회 창립 100주년인 1974년 글렌피딕 증류소를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

    1848년 빅토리아 여왕은 로열 로크나가(Royal Lochnagar)증류소를 처음 방문했다. 그로부터 150년이 지난 1998년 찰스가 이곳을 방문했다. 스카치위스키에 대한 찰스의 사랑은 로열 로크나가에서 멀리 떨어진 아일라 섬의 라프로익(Laphroaig)증류소에서 본격 표출된다.

    아일라는 작은 섬이지만 ‘위스키의 성지’로 알려져 있다. 이 표현은 일본의 유명한 소설가인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무라카미 하루키의 위스키 성지여행’에서 나온 것이다. 이 책의 내용은 깊이가 없다. 무라카미가 부인과 함께 아일라 섬에 잠깐 들러 몇몇 위스키 증류소들을 들러보고 쓴 기행문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 책이 어느 정도의 인기를 누린 것은 유명 작가의 유려한 필체 덕도 있지만, ‘위스키의 성지’라는 낭만적인 표현이 주는 인상 때문이었다. 아일라는 어떤 곳이기에 대단한 찬사를 받게 됐을까. 필자는 여러 해 전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그곳을 방문했다.

    아일라(Islay)는 스코틀랜드 서쪽에 있는 헤브리데안 제도 가장 남쪽에 위치한 섬으로, 발음이 영어 스펠링과 다른 것이 큰 특징이다. 아일라의 크기는 남북으로 약 40km, 동서로 약 32km이고 인구는 3400명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인구의 3분의 1은 바닷가 마을인 행정중심지 보모어(Bowmore)에, 나머지 3분의 1은 남쪽의 항구 도시인 포트엘렌(Port Ellen)에, 나머지 3분의 1이 섬 이곳저곳에 흩어져 살고 있으니 체감 인구밀도는 아주 낮은 편이다.

    로열 워런트의 힘

    이 섬은 8개나 되는 위스키 증류소 덕분에 유명해졌다. 긴 역사와 전통을 갖고 있는 증류소에서는 품질 좋은 스카치위스키를 생산한다. 강력한 향을 품은 이탄(피트)으로 볶은 몰트보리로 만들었기에 수많은 아일라 위스키 마니아를 탄생시켰다. 2005년에 설립된 킬코만(Kilchoman)증류소를 제외한 7개 증류소는 대단한 유명세를 누린다.

    북쪽에는 부나하번(Bunnahabhain)과 쿠릴라(Caol Ila) 증류소가 있고, 남쪽 포트엘렌 마을 근처에는 아드벡(Ardbeg), 라가불린(Lagavulin), 라프로익(Laphroaig) 증류소가, 섬 중간에 보모어 증류소와 브루크라디(Bruchladdich) 증류소가 있다. 지역별로 술맛 차이가 확연해 남쪽 3개 증류소제 위스키는 피트향이 강하고, 북쪽의 2개 증류소제 위스키는 상대적으로 향이 약하다. 중간쯤에 있는 보모어는 중간쯤이다. 브루크라디 증류소는 피트향이 강하지 않은 제품이 주종이었으나 최근에는 상당히 강한 제품도 출시하고 있다.

    과거 아일라에는 여러 증류소가 있었으나 지금은 대부분 문을 닫았다. 그중 유명한 것이 1820년대 후반 설립됐다가 폐쇄된 포트엘렌(Port Ellen) 증류소다. 증류소가 폐쇄됐음에도 이곳에서 생산한 제품은 인기가 높아 지금도 위스키 마니아들 사이에서 고가로 거래된다. 사람들은 조류 관찰과 낚시, 캠핑 등의 여가를 즐기기 위해서도 이 섬을 찾는다. 아일라의 해안선은 정말 아름답다. 미니어처 다도해와도 같은 풍경이다. 섬 내륙에는 ‘헤더(heather)’라는 관목이 깔린 초원과 구릉이 펼쳐져 있다.

    1994년 6월 29일 찰스는 좋아하던 아일라의 라프로익 증류소를 방문하기로 했다. 일정이 빠듯해 개인 비행기로 도착해 증류소에 20분 정도 머물 계획이었다. 그런데 찰스의 비행기가 활주로를 지나 멈춰 서는 사고가 났다.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비행기가 망가졌다. 이 바람에 대체 비행기가 올 때까지 라프로익 증류소에 2시간 반 정도 머물게 됐다.

    이것이 증류소 지배인인 이안 헨더슨에게 큰 행운이 되었다. 그는 개인비서와 경찰 관계자 한 명을 대동하고 온 찰스 왕세자에게 온갖 정성을 다해 위스키 제조과정에 대해 설명했다. 찰스도 큰 관심을 가지고 여러 질문을 했다. 찰스는 전통적인 방법으로 위스키를 만드는 철학을 끝까지 고수해줄 것을 당부했다. 그리고 지배인의 부인이 준비한 맛있는 음식과 함께 라프로익 위스키를 음미했다. 증류소 직원들과도 즐거운 대화를 나눴다.

    대체 비행기가 도착해 떠날 시간이 되자 라프로익 증류소는 찰스에게 기념으로 자사 위스키가 들어 있는 오크통 두 통을 선물로 증정했다. 이 위스키 통이 훗날 자선단체에 기부돼 높은 가격으로 경매되었다. 찰스는 보답으로 왕세자의 로열 워런트(Royal Warrant)를 수여했다. 로열 워런트는 왕실에서 구매하는 제품과 서비스에 왕실 문장을 사용할 수 있는 허가증이다. 해당 상인으로서는 큰 영광이고 상응하는 경제적 이익도 보장받을 수 있게 된다.

    영국 왕실의 로열 워런트는 오랜 전통으로 이어져왔다. 현재 로열 워런트 허가권을 가진 이는 세 명이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남편 에든버러 공, 그리고 찰스 왕세자다. 로열 워런트의 문장은 수여자에 따라 달라진다. 라프로익 증류소는 싱글 몰트위스키로는 최초로 로열 워런트를 받는 영예를 누렸다. 이런 인연은 그 후로도 이어져 2008년 6월 4일 찰스는 새 부인 카밀라와 함께 재방문했다.

    1998년 12월 슬로베니아는 찰스의 공식방문에 맞춰 수도 류블랴나에서 영국 주간 행사를 열었다. 행사장을 찾은 찰스는 슬로베니아 대통령에게 기념으로 라프로익 한 병을 선물했다.

    올해 만 64세인 찰스가 2012년 9월 18일까지 왕세자로 있다가 즉위한다면, 그는 영국 역사에서 가장 많은 나이에 왕위에 오른 사람이 된다. 많은 이야기를 만든 찰스가 술에 대해서는 또 어떤 일화를 남길지 관심이 더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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