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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지도자와 술 19

찰스 왕세자와 아일라 위스키

  • 김원곤 | 서울대 의대 교수∙흉부외과 wongon@plaza.snu.ac.kr

찰스 왕세자와 아일라 위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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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가 ‘위스키의 성지’로 표현해 더욱 유명해진 스코틀랜드 서쪽의 작은 섬 아일라에서는 피트향이 강한 이탄(泥炭)으로 몰트보리를 볶아 스카치위스키를 만든다. 이곳을 찾았다가 가벼운 비행기 사고로 예정보다 오래 머물게 된 찰스 왕세자를 극진히 대접해준 증류소는 로열 워런트를 받기도 했다. 다도해를 미니어처로 축소해놓은 것 같은 해안선이 인상적인 아일라 섬에서 저녁놀을 바라보며 피트향이 강한 스카치위스키를 목구멍 깊숙이 삼켜보는 것은 어떨까.
찰스 왕세자와 아일라 위스키
올해 2월 고(故) 다이애나 영국 왕세자비의 일생을 그리는 전기(傳記) 영화 ‘코트 인 플라이트(caught in flight)’의 헤로인으로 영화 ‘킹콩’에서 여주인공을 한 나오미 왓츠가 캐스팅됐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 영화는 1997년 36세로 요절한 다이애나의 사망 이전 2년을 중심으로 그녀가 한 역할, 봉사 활동, 여자로서의 행복과 자유를 추구하는 모습 등을 다룰 예정이라고 한다. 올리버 히르비겔 감독이 메가폰을 잡는다.

다이애나는 한 편의 동화 같았던 결혼식, 화려해 보였던 왕세자비 생활, 세상을 놀라게 한 왕세자와의 이혼, 그리고 사망에 이르기까지 드라마 같은 삶을 살았다. 다이애나의 이야기에 찰스 왕세자가 빠질 수가 없다. 최근 뉴욕타임스 기자를 지낸 샐리 베델 스미스가 펴낸 책‘영국 여왕 엘리자베스’에 따르면 찰스의 어머니인 엘리자베스 2세는 전 캔터베리 대성당의 주교인 커레이 경에게 아들 부부 사건에 대한 심정을 솔직히 밝히면서 ‘처음으로 엄청난 절망을 느꼈다’고 했다고 한다.

여왕은 과거 에드워드 8세(1894~1972)가 왈리스 심프슨(1896~1986)과 결혼하기 위해 왕위를 버린 것처럼 찰스 왕세자도 정부(情婦) 카밀라와 결혼하기 위해 왕위를 포기할 수도 있다는 데 큰 충격을 받았다. 커레이 경은 ‘여왕은 한숨을 내쉬면서 역사는 반복되고 있다고 솔직히 이야기했으며 그 표정에서 엄청나게 실망하고 있음을 느꼈다’라고 밝혔다.

代를 건너뛰어 나타난 스캔들

에드워드 8세와 찰스 왕세자는 비슷한 길을 걸었지만 다른 점이 있다. 엘리자베스 2세의 삼촌인 에드워드 8세는 조지 5세의 장남으로 1936년 아버지인 조지 5세가 사망함으로써 왕위에 올랐다. 왕세자 시절 여성 편력으로 구설에 올랐던 그는 즉위 후 그때까지 사귀고 있던 미국인 애인 심프슨과의 정식 결혼을 시도한다. 한 번 이혼 경력이 있는 심프슨은 두 번째 결혼생활도 실패해 파경 직전이었다. 그녀는 공식적으로는 유부녀 상태에서 에드워드 8세와 사귀었다.



스탠리 볼드윈(1867~1947) 총리가 이끄는 영국 내각은 ‘살아 있는 전 남편’을 둘이나 두게 될지도 모를 여자를 국모로 맞이하는 것은 절대 불가하다고 주장했다. 영국 왕을 수장으로 모시는 영국교회도 강력히 반대했다. 국민 여론도 나빠지자 에드워드 8세는 사랑을 위해 즉위 326일 만에 왕위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그녀와 결혼해 프랑스에 살다 1972년 병으로 사망했다. 이‘세기의 로맨스’로 에드워드 8세의 동생인 조지 6세가 왕위에 올랐고 이어, 조지 6세의 큰딸인 엘리자베스 2세가 여왕이 되었다.

찰스 왕세자는 다이애나와 결혼하기 전 카밀라를 사랑했다. 하지만 카밀라는 유부녀였기에 다이애나와 결혼했다. 진정한 사랑이 부족했던 결혼은 파경에 이르렀고 다이애나는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다. 그 후 찰스 왕세자는 남편과 이혼한 카밀라와 재혼해 행복하게 살고 있다. 낭만가적 기질일 수도 있지만, 난봉꾼의 일탈로 격하될 수 있는 일들이 엘리자베스 2세의 표현대로 한 세대를 걸러 이어진 것이다.

찰스는 1948년 버킹엄 궁에서 당시 공주였던 엘리자베스 2세와 그리스 왕실 출신의 에든버러 공작 필립 공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필립 공의 어머니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증손녀였으니 그의 혈통 절반에는 영국 왕실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찰스가 만 4세도 되기 전인 1952년 2월 6일, 조지 6세가 타계해 엘리자베스 2세가 25세로 왕위에 올랐다. 그때 찰스는 차기 왕위 계승자가 돼 지금에 이름으로써, 영국 역사상 가장 오래 왕세자로 머물러 있는 이로 기록되었다.

찰스는 미래의 영국 왕이 되기 위해 체계적인 교육을 받게 되었다. 1955년 왕실은 찰스가 개인 교습이 아니라 일반 학교에 다니면서 공부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는 영국 왕실 역사상 첫 시도였다. 1956년 찰스는 런던에 있는 ‘힐 하우스’에 입학했다. 이 학교의 창립자이며 교장인 타운엔드는 찰스를 다른 학생과 똑같이 대하려고 했다.

1957~1962년 찰스는 아버지의 모교인 햄프셔 주 헤들리의 ‘침 스쿨’에 다녔고, 1962~1967년에는 스코틀랜드 북동부에 위치한 엄격한 교풍의 ‘고든스타운 스쿨’에서 대학 전 예비교육을 받았다. 1966년 1월에서 9월 사이엔 교환학생으로 오스트레일리아 빅토리아에 있는 ‘질롱 그래머 스쿨’의 ‘팀버톱’을 다녀오기도 했다. 오지에 있는 분교였다.

찰스를 꿰뚫어본 마운드배튼

영국 왕자들은 사관학교를 거치는데, 1967년 찰스는 그 관례를 깨고 바로 케임브리지 대학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했다. 그는 인류학과 고고학, 역사학 등을 공부함으로써 1971년 영국 왕위 계승자로서는 최초로 학사학위를 받았다. 1975년에는 석사학위도 취득했다. 그때 한 학기 동안 애버리스투위스에 있는 웨일스의 유니버시티 칼리지에 다니면서 웨일스어를 배워, 웨일스 밖에서 태어나 ‘웨일스 공(Prince of Wales)’의 타이틀을 가진 사람으로서는 처음 웨일스어를 배운 인물로 기록됐다.

찰스는 왕실 전통에 따라 군 복무를 했다. 케임브리지 대학 2학년인 1969년에는 영국 공군에서 조종사 훈련을 받아 비행기를 조종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리고 다트머스에 있는 해군사관학교에서 6주 교육을 받고 장교가 돼 1971~1976년 6년간 함정을 타고 여러 곳을 순회하게 되었다. 그때 헬리콥터 조종사 자격증도 취득했다.

왕세자라는 신분과 남성적인 매력으로 찰스는 상당한 여성 편력을 보였다. 그 무렵 찰스는 작은할아버지(종조부)인 마운트배튼(1900~1979)을 만나게 된다. 마운트배튼은 찰스의 아버지인 필립 공의 친삼촌으로, 인도의 마지막 총독을 지냈다. 찰스가 그를 몹시 따랐기에 찰스 성장기에 큰 영향을 미치며 멘토 역할까지 하게 되었다. 그는 찰스가 에드워드 8세처럼 자유분방하게 즐거움을 추구하는 성격을 가진 것을 알고 몇 차례 주의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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