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2년 10월 1일 영국 런던에서 95세를 일기로 세상을 뜬 에릭 홉스봄.
지난봄 학기, 내가 맡았던 역사학개론 강좌의 교재가 홉스봄의 ‘역사론’(강성호 역, 2002, 민음사)이었다. 2학년 학생들에게는 다소 어려웠을지도 모르는데 모두 열심히 읽어주었다. 2002년 이 책이 처음 번역되었을 때도 강의에서 교재로 썼지만, 지난봄만큼 감동이 크지 않았다. 다 때가 있는 법인 듯하다.
이를 계기로 고병권 선생의 지도로 열린 수유너머R의 ‘정치경제학비판요강 강독’에 참가했다. 1857~1858년에 카를 마르크스가 쓴 초고(草稿), ‘정치경제학비판요강’(김호균 옮김, 그린비, 2000)을 읽는 모임이었다. ‘요강’은 출간된 책이 아니라 연구노트인데 역사학자로서의 마르크스를 이해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읽어야 할 저술이다. 이 책이 특히 중요한 이유는 필자처럼 조선시대를 공부하는 학자들에게 통찰력을 주는 ‘자본주의적 생산에 선행하는 제(諸) 형태’라는 장(章)이 실려 있기 때문이다.
‘요강’의 이 장은 그동안 스탈린을 비롯한 속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주장했던 원시 공산제→고대 노예제→중세 봉건제→근대 자본제→사회주의의 역사발전 5단계설이 얼마나 비(非)마르크스적이었는지를 선명히 알 수 있게 하는 자료다. 이 장에 대해 홉스봄은 해제를 붙여 영문으로 간행했는데 1988년에 번역본이 나왔다.(성낙선 옮김, ‘자본주의적 생산에 선행하는 제형태’ 1988, 지평)
역사학의 출발

에릭 홉스봄의 저서 ‘역사론’.
9월 22일 인천사연구소 세미나에서 발표했던 ‘역사학자 마르크스’라는 제목의 짧은 글에서 나는 마르크스의 ‘요강’과 홉스봄의 해제, 그리고 나의 의견을 정리했다. 홉스봄은 마르크스의 역사학을 이렇게 정의한다. “역사학에는 다양한 인간·사회·집단 분화의 메커니즘과, 한 종류의 사회가 다른 종류의 사회로 변하거나 변하지 못하는 메커니즘을 발견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내포되어 있다.”(‘역사론’, 243쪽)
풀어보자면, 마르크스는 왜 두 사회가 다른지를 사회의 차원(Dimension)이 서로 결합하는 방식에 의해 설명한다. 여기서 상부구조-하부구조(토대)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상부구조-토대의 착상은 경제결정론 때문에 나온 게 아니라 다양하게 존재하는 인간 사회를 설명하기 위해서다.
두 번째로, A사회는 A사회로 가는데, 왜 B사회는 가지 않는지 하는 이행(移行)의 문제가 있다. 이는 해당 사회의 모순 관계(Contradictions)에 대한 질문이다. 이렇게 해서 체제를 유지, 안정시키는 요소와 해체하는 요소에 대한 탐구가 동시에 가능해졌다. 이렇게 볼 때 “역사적 유물론은 역사적 설명의 기초(basis)이지, 역사적 설명 자체가 아니고,”(262쪽) “마르크스는 실제 역사 서술에서는 경제환원주의자의 정반대편에 서 있었다.”(264쪽)는 것이 홉스봄의 생각이며, “마르크스는 (역사학에서) 마지막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첫 번째 말을 한 것이다.”(271쪽)
벌거숭이 임금님
이렇게 홉스봄을 사숙하던 중에 이 분이 돌아가셨다. 다행히 이번에 내가 쓴 책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 서문에서 내가 최근 홉스봄에게 배운 바를 몇 줄이나마 적어놓았던 것으로 위로를 삼아야 할까? 당신에게 배운 바를 나름대로 역사서술에 처음 적용해본 것이 이 책이었는데…. 인연의 끈이 닿은 것이 다행이라고 치자. 나중에 저세상에서 만나면 절이라도 올리고.
홉스봄은 자본주의 체제와도 싸웠지만, 그가 속류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불렀던 이들과도 평생 싸웠다. 그 결과 교조적 스탈린주의는 서서히 사라져갔지만, 홉스봄의 저술은 탄탄한 독자층을 형성해갔다. 이렇게 학문은 자료와 논리를 두 축으로 서서히 진실에 도달하는 과정이다. 그 과정이 지난할 수도, 비교적 수월하게 이루어질 수도 있겠지만, 왕도(王道)가 없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우리가 어릴 때 교과서에서 본 기억을 떠올려보자. ‘벌거숭이 임금님.’ 1837년에 나왔다는 덴마크 동화작가 안데르센의 단편이다. 어느 날 왕에게 두 명의 재봉사가 찾아와 훌륭한 옷을 지어주겠다고 했지만 이들이 지어준 옷은 이른바 ‘나쁜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고, 착한 사람들의 눈에만 보이는 옷’이었다. 임금은 이 옷을 입고 행차를 했다. 소문을 들은 어떤 사람들은 입이 마르게 그 ‘아름다운 옷’을 칭찬했다. 그런데 한 아이가 ‘임금님이 벌거벗었다’고 소리쳤다. 그러자 일부 사람들이 웃기 시작했다.
난 교과서에서 이 글을 본 뒤, 내내 두 가지가 궁금했다. 하나는 그 임금님이 속옷을 입었을까? 아무래도 재봉사가 훌륭한 옷을 지어준다고 했으니 아마 곤룡포 같이 겉에 걸치는 옷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까 속옷은 입었을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교과서에는 삽화가 들어 있었는데 거기에도 속옷(고쟁이)을 입고 있었던 듯하다. 속옷조차 입지 않았다면? 참으로 가관이었을 것이다.
두 번째 궁금했던 점은, 임금님을 보고 ‘벌거벗었다’고 외친 소년과, 그 소년의 말에 맞장구치며 웃었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무사했을까? 아니면 잡혀가서 죽도록 맞았을까? 심한 경우 음~, 목이 달아날 수도 있었겠다. 바람직한 경우는 그 소년의 말을 계기로 다들 정신 차리는 것인데, 그렇게 되었을까? 그래서 임금은 자신의 허위의식을 반성하고 속은 것을 인정했을까? 사람들은 덩달아 맞장구친 자신들을 부끄러워했을까? 재봉사들은 처벌을 받았을까?
요즘 영화 ‘광해’가 꽤 인기를 끄는 모양이다. 나도 최근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이라는 책을 냈기 때문에 영화 ‘광해’를 보았고, 언론이나 친지들이 내 책에도 관심을 가졌으며 또 영화 ‘광해’에 대해 사실인지를 묻기도 했다. 실제 여기저기서 광해군의 실제에 대한 논의도 ‘새삼’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