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문재인
그렇게 이름 정도만 알고 지내던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건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사건 때다. 문재인 후보가 헌법이론으로 탄핵의 부당성을 뒷받침해줄 전문가를 찾다가 안 교수를 만나러 온 것. 안 교수의 회고다.
“법률가의 상식으로 볼 때 당시 탄핵은 굉장히 잘못된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 우리나라 법대 교수들, 특히 내가 재직하고 있는 대학의 교수들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불편한 감정 같은 걸 갖고 있었다. 그러다 내게 상의하러 온 거다. 당시 나는 서울대 법대 학장이었다. 비록 작은 기관일지라도 현직 기관장이 특정 사건에 직접 관여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문 후보도 나를 만나러 왔을 때는 도움을 청하려 한 게 분명한데, 내놓고 도와달라는 말을 못하더라. 결과적으로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 못했다. 이후 많은 사람이 나섰고, 얼마 지난 후 나는 그 일을 잊게 됐다.”
안 교수가 그 일을 다시 떠올리게 된 건 2012년 문재인 후보가 펴낸 자서전 ‘운명’에 그 일과 관련된 부분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서다.
“당시 법학자들이 나서는 데 내가 어떤 역할을 한 것처럼 썼다는 말을 들었다. 아마 내가 직접 도움을 주지는 못하지만 그러고 싶어 한다는 걸 느꼈고, 그래서 제자들을 움직여 돕도록 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실상을 말하자면 전혀 사실이 아니다. 그때 나선 학자들은 모두 자발적으로 한 것이다. 하지만 그 책의 내용을 듣고 나는 이미 잊고 있던 일을 문 후보가 기억하고 있다는 데 고마움을 느꼈다. ‘이 사람은 자기가 어려웠던 시절 받은 도움을 잊지 않고 마음으로 기억하는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했다.”
“선거는 깨끗했다”
노무현 정부 인권위원장 시절 받은 인상도 있다. 인권위는 정부의 인권침해를 지적하는 부처라 행정부와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다. 그런 그의 눈에도 문 후보는 공적인 업무를 원칙적으로 수행하면서 동시에 상대를 배려하는 인물로 보였다. 신뢰가 생겼다. 그는 선거 과정에서도 문 후보에게 실망한 적이 없다고 했다.
“12월 10일 세계인권의 날을 맞아 문 캠프에서 ‘인권 10대 정책’을 발표한 날이 생각난다. 그날 유세 일정이 워낙 바빠 내가 발표를 대신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런데 문 후보가 인권 정책만큼은 직접 발표해야 한다며 틈을 냈다. 놀랍고 고마웠다.”
안 교수는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에서 국가인권위원장을 지냈다. ‘정권은 짧고 인권은 길다’는 소신을 갖고 있다. 이번에도 문 캠프의 인권 공약 마련 등에 참여했다. 그는 “새누리당은 딱히 인권 공약이랄 것 자체가 없었다. 따지고 보면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다. 민주당이 뭔가를 내놓으면 ‘우리도 하겠다’는 식으로 가져갔을 뿐, 원래부터 그쪽에서 주도적으로 만든 공약이 별로 없다. 정책보다는 그저 인물로 선거를 치른 것”이라고 했다.
“그 인물의 힘도, 물론 본인의 경쟁력도 있지만, 아버지의 카리스마에 기인한 바가 크다는 점에서 아쉽다”는 게 안 교수의 평가다.
하지만 과반의 국민이 박 당선인을 선택했고, 문 후보는 꿈을 이룰 기회를 얻지 못했다. 안 교수는 “그래도 문 후보가 내놓은 정책과 선거를 치르는 동안 새로운 정치문화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노력만큼은 평가받았으면 한다”고 했다.
15일 인터뷰에서 안 교수는 박 당선인 측이 ‘야당의 흑색 선전이 선거를 혼탁하게 만들고 있다’고 지적한 데 대해 강하게 반박했다. “그 부분은 절대 동의할 수 없다. 지지자 개인 차원에서 뭐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선거캠페인 차원에서는 결코 없었다. 선거 기간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었다고 자부한다”고 했다. “선거 때마다 네거티브는 뒤지는 쪽에서 나온다. 하지만 이번 선거에서는 달랐다. 문 후보의 기본 태도는 ‘네거티브 하지 말라’였다. 안철수 전 후보는 말할 것도 없다. 나중에 종합적인 평가를 해보면 알겠지만 이번 선거에서 야당이 주도한 네거티브는 없었다고 본다”고도 했다.
“나는 자유주의자, 낭만주의자”
선거 막바지 큰 이슈가 됐던 이른바 ‘국정원 여직원’ 사건에 대해서는 “그 문제에는 두 개의 이슈가 혼재돼 있다. 저쪽에서 불법으로 여론을 유도한 것은, 사실관계를 볼 때,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라고 알고 있다. 그 후에, 문제를 제기하는 과정에서 사생활 침해 같은 미숙한 부분도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이 둘은 전혀 다른 문제고 비중도 다르다. 지금까지의 관행에서 볼 때 선관위 직원과 경찰이 문을 두드리는 것은 사람들이 수용할 수 있는 것 아니었나. 물론 인권 (침해), 그런 거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여론조작 전체를 무너뜨릴 만한 건가. 그건 아니라고 본다”는 의견을 밝혔다.
어쨌든 선거는 끝이 났다. 이제 ‘박근혜 정부’가 대한민국의 향후 5년을 이끌어갈 것이다. 안 교수는 애초 새 정부의 과제를 일자리와 경제문제 해결이라고 했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우리 경제가 어려울 것이라는 건 이미 예상되고 있다. 그들에게 도움이 되고 희망을 줄 수 있는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더불어 ‘동아시아 평화질서 구축’도 새 정부의 중요한 과제로 봤다. “이명박 정부에서 남북관계가 경색되면서 상대적으로 우리 정부의 역할이 많이 축소됐다. 이명박 정부는 안보를 이유로 댔지만 안보 면에서도 천안함 폭침, 북한군 노크귀순, 북한 미사일 발사 사건 등에서 보듯 문제가 많았다. 오히려 동북아의 주도권만 중국에 넘김으로써 우리나라의 입지가 굉장히 약화됐다. 매우 큰 문제고, 이른 시일 안에 정상화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박근혜 정부’가 이 과제를 잘 수행해주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그 자신은 다시 교수로, 그리고 저술가로 돌아갈 생각이다.
“나 같은 자유주의자, 낭만주의자가 정치는 무슨. 마지막에 한 번, 내게 주어진 무대에 다 던져보고 내려가는 거죠.”
목소리는 여전히 가라앉아 있었지만, 홀가분하게 들렸다. 선거운동 중에도 강의는 꼭 했던 그는 20일 오후에도 대학원 수업이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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