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9년부터 191명 수료…“돌봄 문제 깨달았다”
- 가족 병수발 한계, 전문가들이 체계적으로 보살펴야
- 돌봄제공자는 ‘숨은 환자’… 일시 보호시설 등 지원 필요
이 사건이 며칠 주요 뉴스로 다뤄지면서 보통 사람들 사이에서 화제가 된 것은 남의 일 같지가 않기 때문이다. 누구나 치매 혹은 다른 중증으로 노년을 힘들게 보낼 수 있고, 그런 가족을 돌봐야 하는 처지에 몰릴 수 있다. 노환을 앓는 부모를 누가 수발할 것인지를 놓고 형제자매끼리 얼굴 붉히는 일, 이미 겪었거나 앞으로 닥칠 수 있는 우리의 문제다. ‘돌봄의 대상’인 노인 문제는 고령화 시대에 우리가 풀어야 할 시급한 사회 현안이다.
그런데 여기 한 가지 빠진 게 있다. 이런 노인을 돌보는 사람들, 즉 케어기버(caregiver)에 대한 논의다. 고려사이버대의 한국 로잘린카터 케어기빙연구소(RIC-Korea) 조경진 교수(문화콘텐츠학과)는 “사회복지학에서는 옷 입기, 대소변 조절하기 등 일상생활을 혼자 수행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케어기빙(care-giving)이라고 한다”며 “케어기버가 돌보는 대상에는 유아나 장애인도 있지만, 현재 가장 시급한 과제는 노인에 대한 케어기빙”이라고 강조했다. 노인은 늘고 청년은 감소하는 인구구조 면이나 부모 수발을 기피하는 탈가족화 면에서 케어기버 문제는 아무도 직시하진 않지만 이미 만연해 있고 시급히 해결할 사회문제라는 것이다.
2년 새 3000여 명 수강
“케어기버가 스트레스, 우울증, 경제적 어려움 등으로 고통 받는다는 것은 여러 연구 결과에 나타납니다. 케어기버가 정신적, 육체적으로 지치면 최근 이슈가 된 사건에서 보듯이 노인을 학대하거나 극단적으로는 살해하는 일까지 벌어집니다. 흔히 ‘패륜’이라고 하지만, 심리학적 관점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케어기버를 ‘숨은 환자(hidden patient)’라고 부릅니다.”
고려사이버대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케어기빙전문가 교육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부인 로잘린 카터가 설립한 미국 조지아사우스웨스턴주립대 RCI(Rosalynn Carter Institute for Caregiving)와 협약을 맺고 RCI-Korea를 설립, 2010년 3월부터 케어기빙 교육을 시작했다. 미 RCI와 RCI-Korea는 공동으로 교육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수료자에게 공동 명의의 국문 및 영문 수료증을 수여한다. 매년 미국에서 RCI 주최로 열리는 케어기빙 학술대회를 통해 연구 교류도 활발하다.
고려사이버대는 케어기빙에 대한 전문적 지식과 케어기버에 대한 이해와 관리 능력을 갖춘 전문인력을 양성하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 케어기빙의 중요성을 알리고, 케어기빙에 대한 사회적 지원체계 구축에 기여하고자 한다. 조 교수는 “사회복지학과와 상담심리학과 학생들이 주로 이 교육에 참여하지만, 교양과목으로도 인기가 높다”고 전했다. 벌써 3000여 명의 학생이 이 교육을 거쳐 갔고, 191명이 교육과정을 수료했다.
조 교수는 2012년 2학기에 ‘케어기버의 여정’이란 과목을 진행했다. 한 학기 내내 이 수업은 일종의 ‘힐링캠프’ 같았다고 한다. 500여 명의 수강생은 케어기버로서 힘들었던 점을 토로했고, 케어기버 역할을 하는 어머니나 아내를 지켜보며 안타까웠던 점, 지나고 후회하는 점들을 고백했다. 한 학기 동안 게시판에 올라온 질문은 무려 600여 개. 조 교수는 “24시간 내에 교수가 답하는 것이 원칙이라 힘들었다”며 웃었다. 하지만 그는 “자격을 갖춘 전문인력을 양성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학생들에게 케어기빙의 문제를 인식하게 하고, 각자의 가정 내에서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를 마련해줬다는 데에서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RCI가 1987년에 설립된 점에서 보듯, 미국에서 케어기빙은 20년 넘게 논의되어왔다. RCI는 2010년 가족 내 케어기빙의 경제적 가치를 산출해 발표했는데, 연간 3750억 달러(약 4조 원)로 추정됐다. 이는 미 정부가 메디케어 프로그램(65세 이상 노인에게 제공되는 건강보험)에 지출하는 비용을 상회하는 규모다.
스트레스 우울증세 호소
통계청에 따르면 우리나라 노년부양비(15~64세의 생산가능인구 100명이 부양해야 할 65세 이상 노인 인구 숫자)는 현재 15.5명에서 2050년 72명으로 급증한다. 이처럼 ‘초고속’ 고령화를 겪고 있음에도 한국은 케어기버의 문제에 대한 논의가 전무한 실정이다. 고려사이버대 김윤정 사회복지학과 교수에 따르면 2012년 치매환자에 대한 정부 정책에서 돌봄제공자에 대한 지원 계획이 언급된 바 있는데, 이것이 케어기버에 대해 언급한 유일한 정부 문서라고 한다. 다만 보건복지부의 2011 노인실태조사를 보면 노인환자의 주된 케어기버는 가족이고 그중에서도 배우자(53%)가 수발하는 경우가 가장 많았다. 85세 이상 고령층 노인의 경우 큰며느리가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했고 그 다음이 배우자, 딸 순이었다.
가족이 주된 케어기버라지만, 그 속사정은 편안치가 않다. 조 교수는 “학생들이 하소연과 고민을 털어놓는 것을 보며 케어기빙을 둘러싼 갈등이 심각한 문제임을 새삼 깨달았다”고 말했다. ‘어머니가 치매에 걸린 할머니를 돌보다 우울증에 빠졌지만, 아버지는 절대 요양원에 모시려 하지 않는다’ 등 개인적인 고민을 털어놓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RCI-Korea 연구위원을 역임하고 있는 고려사이버대 조경진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병든 부모의 수발이 가족 내 가장 약자라 할 수 있는 이주여성 며느리에게 미뤄지는 것도 한국적인 현상이다. 조 교수가 RCI 주최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한 이주여성의 사연은 이렇다.
전남 순천에 살고 있는 태국 출신의 S씨(42). 그는 당뇨와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시어머니를 모시면서 딸을 키우고 있다. 일자리를 찾아 전국을 떠도는 남편이 가끔 돈을 부쳐줄 뿐이어서 S씨는 식당 일도 하고 집에서 구운 과자를 내다팔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때때로 쌀을 살 돈조차 없는 곤궁한 삶을 그는 그저 자신이 처한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S씨가 이해하지 못하는 건, 다섯이나 되는 남편 형제가 명절이나 시어머니 생신 때 찾아오기는커녕 전화 한 통 하지 않는 사실이다. 그는 “태국에선 크리스마스 때 멀리 떨어져 사는 자식들이 아무리 못살아도 비싼 전화요금을 들여 부모에게 전화한다”라며 “한국은 효의 나라라고 들었는데, 정말 이상하다”고 말했다.
연구가들은 케어기빙을 ‘혼자 하는 여행’에 비유한다. 아픈 사람을 돌보는 일이 길고, 고되고, 고독한 일이기 때문이다. 고려사이버대와의 협약을 위해 2010년 3월 한국을 찾은 로잘린 카터 여사의 연설문 중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만성 질환을 앓고 있는 아내를 둔 한 남자분은 “저는 자주 울지만 아내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습니다”라고 했고, 다른 젊은 여성분은 “친구들이 제게 전화를 하면 항상 아픈 제 남편이 어떤지 물어봐요. 제가 어떤지는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어요”라고 했습니다. 쇠약한 아버지를 간병하시는 한 여자 분은 하루는 실제로 집을 뛰쳐나가 호텔에 들어갔다가 아버지를 버리고 떠날 생각을 한 자신을 원망하며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2010년 3월 22일)
“케어기버들은 평균보다 높은 스트레스와 우울을 경험합니다. 환자를 돌보느라 자신을 방치해 환자보다 먼저 죽는 경우도 있습니다. 제가 아는 한 분은 당뇨와 고혈압을 앓는 남편을 돌보다 뇌졸중으로 먼저 세상을 떠났어요. 대부분의 케어기버들은 케어기빙을 가족으로서의 당연한 역할이자 의무라고만 생각하고 자신 역시 돌봄의 대상이란 사실을 인식조차 못하고 있는 실정이에요.”
고려사이버대가 케어기빙 교육을 통해 강조하고자 하는 첫 번째 메시지는 ‘케어기버에게도 돌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케어기버의 ‘짐’을 나누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조 교수는 “각 가정 내에서 할 수 있는 일, 국가가 할 수 있는 일이 따로 있다”며 “우선 케어기버들이 한 숨 돌리며 재충전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하루에 몇 시간씩 환자를 맡겨놓을 수 있는 일시보호기관을 설립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 서울시 각 구에 설치된 치매센터는 ‘치매환자가족을 위한 희망 다이어리’란 프로그램을 통해 치매환자 가족에게 스트레스 해소법, 자기 시간을 확보하는 방법 등에 대해 교육하기 시작했다. 조 교수는 “이런 프로그램이 다른 중증환자 가족에게까지 확장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인간은 共感의 동물
2010년 3월 고려사이버대를 방문한 로잘린 카터 여사.
“전문 케어기버들은 감정노동자입니다. 고된 노동에 스트레스가 큽니다. 하지만 처우는 좋지 않아 기피 직종이 되면서 조선족 간병인이 증가하는 추세지요. 시설에 부모를 맡긴 이들은 책임을 회피했다는 자책감에 간병인들을 다그치기 일쑤입니다. 심리적으로 자신을 간병인에게 투영하는 셈이지요. 간병인 입장에선 자신보다 케어 기술도 모르고, 자주 찾아오지도 않으면서 요구만 많다고 불만이고요. 가족과 간병인이 협조적인 관계를 맺는 것은 안정적인 환자 돌봄을 위해서 중요한 일입니다.”
케어기빙 교육과정의 첫 과목은 ‘케어기빙의 기초’다. 이 과목은 ‘인간은 공감의 동물’이란 메시지에 첫 2주간을 할애한다. 조 교수는 “아픈 부모를 모시고 있는 올케에게 ‘고생 많다’ ‘고맙다’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것이 케어기빙을 모두가 나누는 시작점”이라고 강조했다.
“케어기빙 문제의 심각성을 느낀 학생들은 ‘이렇게 어려움에 처한 케어기버를 어떻게 도울 수 있느냐’ ‘왜 우리 정부는 케어기버에 대해 아무것도 하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우선 시작은, 케어기버의 고충을 인정하고 ‘고맙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주변의 지지를 받으면 혼자 하는 고독한 여행은 덜 외로워지기 마련이니까요.”
고려사이버대는 앞으로 케어기빙 관련 과목과 프로그램을 추가로 개설하는 등 케어기빙 교육 프로그램을 좀 더 심화, 발전시켜나갈 계획이다. 또 2012년 기술, 정보, 문화 3개 트랙으로 신설한 학제정보대학원에 휴먼서비스 트랙을 추가해 ‘인간의 생애주기에 따른 케어’라는 화두의 연구에도 나설 계획이다. 조 교수는 “복지기관이나 요양기관 등 휴먼서비스 부문에서 종사하는 사람들을 이 같은 과정에 참여시켜 노인 돌봄 등 우리나라 휴먼서비스 수준을 향상시키는 데 기여하고 싶다”고 바람을 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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