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긴장 완화, 주변국 협력 촉진, 남북대화 병행
- 6·15 공동선언, 10·4 선언 존중…장점만 승계한 대북정책
- 北, 장거리 로켓 발사로 정상회담 서둘지 않을 듯
박근혜 당선인은 한국미래연합 창당준비위원장 시절인 2002년 5월 북한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당시 국방위원장과 단독 면담하고 만찬을 함께 했다. 이런 경험은 남북대화에 자신감으로 작용할 것으로 예상된다.
국제정치학에서 신뢰는 기본적으로 이상주의적 외교수단이다. 이해관계자의 선의(善意), 국제규범에 대한 신뢰를 기초로 국제관계를 조율하는 것을 말한다. 반면에 현실주의적 접근은 선의를 믿지 않고, 힘의 우열에 기초를 두고 관계를 정립하는 대외정책을 말한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당선인이 말하는 신뢰는 순수한 이상주의적 접근이 아니다. 그는 외교안보정책을 통해 우선적으로 지속가능한 평화 건설을 강조하고, 지속가능한 평화를 만드는 수단으로 튼튼한 국방 태세 확립을 명확히 하고 있다. 동시에 북방한계선(NLL) 등 영토와 주권을 확고히 수호하고, 현재의 안보 골격인 한미동맹의 기본 틀을 강화하겠다는 의지를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다. 국가이익 분류 중 가장 중요한 국가이익인 ‘생존권적’ 차원의 이익(survival interest)에는 절대 양보하지 않을 것임을 알 수 있는 대목. 선거 기간 중에 제기된 NLL, 독도 영토 논란에 대해 수호 의지를 확고히 했다.
그렇다고 박 당선인이 냉전시대에 전개된 ‘강대국 외교’를 답습하는 것도 아니다. 동북아 평화협력 외교를 추진하는 등 이상주의적 외교수단을 적극 활용하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동북아시아의 지속가능한 평화와 발전을 위해 ‘동북아 평화·협력구상’을 추진해, 이른바 동북아판 헬싱키 프로세스(안보와 인권문제를 연계하는 해법)를 만들려는 구상과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핵안전, 기후변화, 자연재해 등 공통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동아시아 국가들과 함께 공동 대응하는 협력 장치를 마련한다는 복안이다. 국제관계를 인식하고 다루는 외교철학 측면에서 박 당선인이 강조하는 신뢰 외교는 현실주의와 이상주의를 결합한 새로운 외교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다.
진화론과 균형정책
박 당선인은 남북관계를 다루는 철학으로 ‘진화론적 입장과 균형정책’을 자주 강조한다. 그가 강조하는 진화론적 입장은 역대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기본 인식과 태도를 가장 잘 나타낸다. 그는 대북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역대 정부의 장점과 긍정적 효과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한 단계 향상된 대북정책을 전개하겠다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박 당선인은 선거 과정에서 민주당 집권 10년의 대북정책 폐해를 지적하면서도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과 차별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그는 국내 보수파로부터 엄청난 비판을 받고 있는 6·15 공동선언(2000년 6월 15일 평양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합의한 공동선언문), 10·4 선언(2007년 남북 정상회담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합의한 것으로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을 포함한 역대 정부의 남북 합의를 기본적으로 존중하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기존 합의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세부 합의내용은 현실에 맞게 조정하겠다는 점을 강조했지만, 남북관계를 제대로 발전시키겠다는 의지를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선거 과정에서 보수논객의 엄청난 비판과 반대를 각오하고 향후 대북정책을 어떻게 추진해갈 것인지에 대한 의지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기도 했다.
박 당선인은 대선 기간 중 TV 토론회에서 “진짜 평화와 가짜 평화는 구분해야 한다. 퍼주기를 통해 평화를 유지하는 건 진정한 평화가 아니다”라며 “2006년 북한에 그렇게 퍼주기를 했음에도 첫 번째 핵실험을 했다”고 지적했다. 북한이 실제로 장거리 로켓을 발사하자 “대한민국에 대한 도발일 뿐 아니라 세계에 대한 도발”이라고 강력하게 규탄했다.
이쯤 되면 2010년 천안함 폭침사건 이후 남북 교류를 전면 중단한 5·24조치에 대한 그의 입장이 궁금해진다.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 기조는 어떻게 되는가, 금강산 관광 문제는 또 어떻게 되는가.
이를 알아보기 위해선 균형정책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박 당선인은 ‘균형(alignment)정책’을 대북정책 철학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가 강조한 균형정책 역시 역대 정부의 대북정책 시행착오와 깊은 관련이 있다. 안보 위주의 대북정책과 협력 위주의 대북정책이 만든 폐해를 바로잡자는 것이고, 민족과 국제공조만 강조해 만들어진 정책의 부작용인 남남갈등, 안보의식 취약 등을 시정하겠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5·24 조치와 금강산 관광 중단 조치에 대해선 그의 균형적인 입장이 잘 나타난다. 박 당선인은 5·24 조치, 금강산 관광 중단 조치가 남북관계를 위축시켰다는 거센 공격에도 일관되게 북한의 성의 있는 조치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유지했다. 북한의 반복적인 잘못을 외면하면서 남북관계의 국면전환 자체만을 위해 양보하지 않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북한 당국과 우리 국민에게 보여준 것이었다.
그렇다면 박 당선인은 대북정책에 대해 어떤 정책을 펼칠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박 당선인은 북한의 도발에 대해 책임을 묻는 조처에 엄격하면서도, 남북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한 다양한 구상도 제시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는 “전쟁 중에도 대화를 한다”는 원칙과, 남북관계 발전에 도움이 된다면 대화를 할 의지가 있다는 것을 여러 차례 강조한 만큼 정상회담을 포함한 남북대화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다.
비전 코리아 프로젝트
2002년 북한을 방문해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대화한 경험을 고려하면 남북대화에도 자신감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북한이라는 상대가 있는 만큼, 북한이 외면하는 개혁·개방이라는 말 대신 ‘비전 코리아 프로젝트’라는 대담한 프로그램을 적극 활용한다는 복안이다. 서울과 평양에 남북교류협력사무소 설치를 제안하고, 정치·군사적 신뢰를 구축해가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하고 있다. 남북관계가 좋아질 경우 한반도의 균형발전과 경제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한 구상도 제시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미·일 6자회담 수석대표들이 2012년 5월 21일 서울 도렴동 외교통상부에서 회담을 하고 있다.
남북관계를 안정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남북관계 현안을 논의할 협력사무소를 상설 설치하겠지만, 처음부터 양측 입장 조율이 어려운 정치·군사 의제를 다루기보다는 공동이익을 만들어낼 경제 의제를 다루려 하는 것이다. 데이비드 미트라니(David Mitrany)가 강조한 기능주의적 통합원칙을 남북관계 여건과 현실에 맞게 적용하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과의 외교는 어떨까.
미국의 오바마 정부는 글로벌 차원에서 균형을 강조하면서 아시아 중시 외교를 펼치고 있고,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이끄는 중국은 ‘새로운 강대국 관계론(신형대국관계론)’을 앞세우면서 동북아에서 정치·군사적 위상을 강화하려 하고 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이끄는 일본은 미일동맹을 축으로 중국의 정치군사적 영향력 증대를 억제하려 하고 있다. 이러한 외교 각축 속에서 박 당선인은 한미 관계를 포괄적 전략동맹 관계로 발전시키고, 한중 관계를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로 발전시키겠다고 강조했다. 미국과 중국이 상호 협력적 관계로 진행된다면 박 당선인의 외교 목적은 쉽게 달성될 수 있다.
그러나 미중 관계가 긴장된 경쟁 관계로 진행될 경우 외교적 딜레마에 처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 변화를 고려해 한국 외교의 위상을 확보하고 역할을 강화하기 위해 ‘동북아 평화·협력구상’을 밝히고 있다. 한미 동맹관계와 한중 협력관계의 차별적 의미를 냉정하게 인식한 가운데, 이들 국가 상호관계를 협력적 관계로 만들려는 적극외교, 능동외교를 준비하고 있다.
6자회담 역시 마찬가지다. 박 당선인은 2012년 12월 4일 안보 분야 TV토론회에서 외교안보 현안으로 북핵 문제, 한일갈등, 한미 관계와 한중 관계의 병행 발전, 동북아의 새로운 협력관계 발전을 꼽았다. 따라서 북핵 문제와 관련해 6자회담은 지속하지만, 6자회담으로만 해결할 문제는 아니라는 의미였다.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과 중국, 미국의 전략대화와 남북대화도 적극 활용한다는 예측이 가능하다. 동북아의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 질서 변화에 편승하기보다는 협력을 촉진하는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박 당선인은 또 우리 외교를 여는 새로운 지평으로 아시아와 유라시아를 주목하고 있다. 아세안(ASEAN)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와 전략적 파트너십을 강화하고 실크로드 익스프레스(SRX) 건설 구상으로 상징되는 유라시아 협력외교 등 새로운 북방외교를 본격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오랜 정치생활 동안 관심을 둔 한반도 종단철도와 대륙 횡단철도 연결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
주변국 협력 얻는다는 믿음
끝으로 통일에 대한 공약을 살펴보자. 박 당선인은 자신의 공약집에서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한반도 구성원 모두가 행복하고, 국제사회가 환영하는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 통일을 먼 훗날 일로 미뤄서는 안 된다.”
이 짧은 단문 속에 박 당선인의 통일에 대한 기본인식이 아로새겨져 있다고 볼 수 있다. 통일의 당위론을 미래지향적으로 재구성하겠다는 의지다. 통일 후 지금보다 더 행복해져야 통일의 정치적 의미가 있다는 인식이 잘 나타나 있다. 행복을 고려하지 않은 통일지상주의, 과거의 아픔을 치유하는 통일당위론을 넘어서 미래 행복을 담보할 수 있는 통일당위론을 갖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박 당선인은 한국의 통일을 주변 국가들이 반대한다는 상투적 관념을 단호히 거부한다. 통일이 되면 우리만 더 잘살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 주변 국가들에도 도움이 된다는 인식을 공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통일 과정에서 주변국이 반대할 것이라는 관념을 넘어서야 통일 과정에 주변국의 협력을 얻을 수 있다는 담대한 믿음을 갖고 있다.
따라서 박 당선인은 통일을 결코 서둘지 않겠지만, 통일의 기반을 국내외적으로 다져나가는 통일정책을 추진해갈 것으로 본다. 특히 통일정책과 관련해 북한주민의 인권과 인간다운 삶을 강조한 것은 통일 준비, 통일 과정이 북한 주민의 삶의 질에 좋은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 보편적 휴머니즘이 반영되어 있다.
앞으로 5년간 박근혜 시대가 열린다. 우리가 새 대통령의 안보정책에 대해 기대하는 것은 용기다. 새 대통령은 우리 한반도가 직면한 안보 현실, 여건을 정확히 진단해 기존의 안보정책 기조 중 유지할 것은 유지하고, 바꿀 것은 신속히 바꾸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먼저 우리의 국방은 국민에게 믿음을 주지 못하고 있다. 북한 핵과 장거리미사일, 북한의 다양한 비대칭전력은 우리 안보를 여전히 위협하고 있다. 국민의 안보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필요한 군사능력을 갖추는 노력을 지속해야 하며 컨트롤타워를 정비해야 한다.
미래전(戰)에 대비한 국방개혁은 군 내부의 갈등을 조정해 단기간에 방향성을 확정하고 매듭지을 필요성이 있다. 외교정책과 관련해 중국과 미국 간의 갈등이 커지는 것을 막는 데 외교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동북아에서 강대국 간 갈등구조는 한반도 운명에 비극을 강요해왔다. 이러한 비극의 재발을 막기 위해 동북아국가 전체가 협력하는 분위기를 선도해나갈 필요가 있다. 아울러 주변 국가와 우리의 군사력 격차를 줄이는 노력도 지속해나가야 한다. 대북정책은 역대 정부의 시행착오를 정책자산으로 활용하는 용기를 갖고 구상해 나가야 한다. 이전 정부의 대북정책 전부를 부정하라는 정치적 지지세력의 압력으로부터 독립해 미래를 지향하는 선택을 해야 한다. 통일을 준비하면서도 도발에 단호하고, 도발에 단호하면서도 대화와 협력을 이어가는 용기가 필요하다. 대통령 임기는 5년이지만 한반도의 안보에 미치는 영향은 50년, 500년이 된다는 역사적 임기를 유념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