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호

‘우리에겐 왜 佛 퀼튀르 같은 라디오 방송이 없나’

스마트폰 시대의 라디오 사랑

  • 정수복│사회학자·작가

    입력2012-12-27 11: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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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눈이 휙휙 돌아가도록 빨리 변하는 이미지 세상이지만 라디오는 여전히 소중한 친구다. 그러나 광고도 없고 수준 높은 강연과 토론이 매시간 벌어지는 프랑스 퀼튀르 같은 방송은 우리에게 없다.
    • 세상 돌아가는 큰 이야기를 해줄 라디오 방송이 없어 아쉽다.
    ‘우리에겐 왜 佛 퀼튀르 같은 라디오 방송이 없나’

    실내 흡연 금지 규정에 따라 파리 봉마르셰백화점 직원들이 밖에서 흡연하고 있다.

    파리에서 한 달을 지내다가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파리 생활이 다소 불편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길을 걷거나 공원 벤치에 앉아 있거나 지하철을 탈 때 문득문득 시적 영감과 정신적 고양감을 얻을 수 있었다. 그에 비해 서울 생활은 편리하지만 특별한 감흥이나 정취가 없다. 파리 곳곳에는 오랜 역사에서 비롯된 수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서울의 거리에는 오래된 이야기는 거의 없고 오늘의 모습만 존재한다. 무언가를 환기시키는 기억의 장소가 부족하다.

    서울은 모든 것이 고정된 상태에 머무르지 않고 늘 유동하는 도시다. 빠르게 변하는 상황에 앞서 가지는 못할망정 뒤처지지 않으려고만 해도 항상 마음이 바쁘다. 어디 한 군데 마음 붙이고 안정된 상태에 머무르기가 힘들다. 늘 붕 떠다니는 느낌으로 살게 된다.

    파리라는 도시에는 오래된 역사의 넝쿨이 덮여 있고 이야기를 담은 삶의 이끼가 끼여 있다. 그래서 내가 지금 여기 혼자 사는 게 아니라 나보다 먼저 삶을 살았던 사람들에 이어서 살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그걸 전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파리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도시다. 오랜 세월에 걸쳐 도시 구석구석을 다듬어놓았다. 부분과 부분이 자연스럽게 이어져 하나의 전체를 이룬다.

    그럼 서울은 어떤가? 19세기 말 개화기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근대적인 도시로 변모했다고 하지만 서울은 1960년대 이후 50여 년 사이에 환골탈태한 신흥 도시다. 그간의 역사는 앞서가는 나라들을 따라잡는 추격형 근대화였고 막무가내로 나아가는 돌진형 근대화였다. 사회학자 장경섭은 짧은 시간 안에 많은 것을 구겨 넣은 우리의 근대를 ‘압축 근대(compressed modernity)’라고 한다.

    그러다보니 서로 시간대가 다른 비동시적 형상들이 동시적으로 존재하게 된다. 단적인 보기를 들자면 강남과 강북은 서로 다른 두 개의 도시다. 1980년대 이후 건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한 강남에는 모든 것이 새것인 반면 원래의 서울인 강북에는 새것과 옛것이 무질서하게 섞여 있다. 한강을 경계로 갈라진 그 두 도시 사이에는 연계가 부족하다. 내 몸은 현재 강남에 살고 있지만 마음은 아직도 내가 자란 강북에 있다. 북촌과 서촌, 세종로와 남대문, 동대문과 청계천, 종로와 을지로, 명동과 소공동 근처에 가야 내가 서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곳에 가야 나의 유년기와 청년기가 생각나고 서울의 역사와 대한민국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일상생활이 때로 지루하고 따분해진다면 그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무 문제없이 잘 굴러가고 있다는 뜻이다. 모든 일이 예상하고 기대했던 대로 진행되며 오늘은 어제와 다르지 않고 내일은 모레와 다르지 않은 삶은 평화스럽지만 권태롭기도 하다. 그런 생활을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 같은 삶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당연의 세계를 낯설게 보는 능력만 갖춘다면, “다 그런 거지 뭐!”라는 의식 상태가 아니라 “아니 저건 또 뭐지?” 라고 물을 수 있는 마음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면 일상의 모험이 가능하다. 호기심과 경탄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에게는 지루한 시간이 없다. 그런 열린 마음으로 서울생활을 하다보면 다시 낯선 풍경들이 나타난다. 익숙한 거리를 전에 와본 적이 없는 것처럼 새롭게 둘러보면 잠복해 있던 풍경들이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풍경 #74 12월의 백화점 풍경

    기온이 영하로 내려갔다.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 선물이 오고가는 크리스마스 철에 든 생각이다. 서울 시내 백화점들은 건물 안과 밖에 화려한 크리스마스 장식을 하고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다. 백화점의 에스컬레이터와 엘리베이터 안에는 각 층을 오가며 물건을 구경하고 구입하는 ‘고객님’들로 가득하다. 포근한 크리스마스 트리가 장식된 백화점은 소비의 궁전이고 소비주의의 신전이다. 많은 사람에게 소비는 휴식이고 취미이고 여가생활이 되었다. 주말이면 백화점은 평소보다 더 많은 사람으로 붐빈다. 그곳에는 언제나 구경거리가 넘친다. 세계 곳곳에서 만들어진 ‘명품’이 즐비하게 전시된 백화점 안을 돌아다니며 구경하다보면 돈만 있으면 인생이 행복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1852년에 문을 연 세계 최초의 백화점, 파리의 봉마르셰 백화점은 올해 160주년 기념행사를 마련했다. 영화배우 카트린 드뇌브가 파리 센 강 좌안의 정신이 깃들어 있는 열 군데 장소를 정하고 유명한 일러스트레이터가 그린 그림을 전시하는 행사다. 센 강 좌안은 이전엔 가난한 학생들이 머물던 지역이었고 지금은 카페와 바가 늘어서 활기가 넘치는 곳이다. 센 강 우안은 예부터 상업지구로 유명하며, 상대적으로 부유한 지역이다. 그래서 봉마르셰 백화점은 우안의 프랭탕, 라파예트 백화점 등과 차별화하기 위해 기념행사에 ‘물질적 소비’뿐 아니라 ‘정신적 사치’라는 이미지를 가미한 것이다.

    봉마르셰는 19세기 후반 이후 파리의 부유층에게 고급 식료품과 온갖 생활용품, 사치품을 공급하는 소비의 궁전이었다. 19세기 말 개화기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서구인의 소비생활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개화기 조선의 부유층 양반들은 이미 유럽 상류층의 소비생활을 모방하고 있었다. 1892년부터1894년 사이에 주한 프랑스 대리공사 겸 영사로 근무하던 이폴리트 프랑뎅이 쓴 ‘조선에서’(1905)를 보면 서울 상류층 사람들이 프랑스로부터 포도주와 샴페인을 사들여 마시면서 거의 모든 유럽식 놀이를 즐겼고 부인들은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화장품과 옷을 사들였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1894년에 나온 ‘독립신문’을 보면 하단에 양변기, 커피, 마카오 양복지 등 수입된 고급 상품을 알리는 광고가 나온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파리와 서울의 백화점에는 ‘행복한 삶’을 꿈꾸는 수많은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할 물건을 찾아다녔다.

    풍경 #75 유명 가수 디너쇼

    서울 거리에서는 가로 5~10m로 길게 펼쳐진 현수막을 자주 볼 수 있다. 파리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것들이다. 구체적 인물을 겨냥하는(XXX는 즉각 퇴진하라!) 공격성 문구도 있고, 선거에 출마한 후보를 선전하는 내용도 있다.

    평소 현수막들에 별로 눈길을 주지 않고 다니는 편이지만 때로 관심을 갖고 바라보게 되는 플래카드들이 있다. 이미자, 패티김, 조영남, 하춘화, 현미, 남진, 나훈아, 양희은 등 내가 아는 가수들의 이름이 보일 때다. 대개 어버이날에 즈음해 나타나는 이 플래카드들은 ‘추억의 가수’들이 부르는 노래를 들으며 식사하는 디너쇼 광고물들이다.

    그런데 서울에 돌아와 새삼 알게 된 건 이런 디너쇼가 연중 여러 번 열린다는 것이다. 가을맞이 디너쇼, 크리스마스 디너쇼, 연말 디너쇼 등 다양한 이름이 붙어 있다. 주로 서초구와 강남구 대로변에 많이 붙어 있는 이 광고 플래카드들은 나 같은 중년 남자에게는 젊은 날들을 회상하게 하는 추억거리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송창식, 윤형주, 펄시스터즈, 김추자 등의 디너쇼에 가보고 싶다. 1970년대 초 ‘후라이보이’ 곽규석이 진행하던 ‘쇼쇼쇼’에 자주 출연하던 가수들이다.

    풍경 #76 남성 화장실의 문구들

    우리나라 사람들의 주거문화가 단독주택에서 아파트로 바뀌면서 화장실이 재래식에서 수세식으로 바뀌었다. 1960년대 서구 사람들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가장 불편하게 여기던 것이 화장실이었는데 지금 한국의 화장실은 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청결도를 유지하고 있다. 많은 사람의 머릿속에 선진국은 깨끗한 나라라는 등식이 들어 있어서 프랑스의 파리라는 도시의 화장실은 매우 깨끗할 것이라고 짐작한다. 그러나 파리의 현실은 그런 기대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서울에서 파견 근무를 하고 있는 어떤 프랑스 사람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그는 서울의 지하철 화장실이 파리의 병원 병실보다 깨끗하다는 자조적인 농담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서울의 카페, 주점, 식당 등의 남성용 화장실 눈높이에는 때로 다음과 같은 문구들이 붙어 있다. “한 걸음 더 전진!”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눈물만이 아니다”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습니다”….

    파리의 화장실에는 청결을 요구하는 글귀들보다는 “동성애 혐오자=파시스트” “세계화=빈곤” “공공서비스를 수호하자” 같은 정치적인 구호가 더 많다. 서울이나 파리나 예전과 달리 음란성 낙서가 사라진 것은 화장실 말고도 그런 욕구를 분출하고 해소할 장소가 많아졌음을 뜻한다.

    풍경 #77 주사 맞는 나무들

    ‘우리에겐 왜 佛 퀼튀르 같은 라디오 방송이 없나’

    서울 인왕산의 수성동 계곡.

    서울은 공사 중이다. 강남과 강북을 가리지 않고 곳곳에 고층건물들이 들어서고 있다. 요즈음 신축하는 고층건물 앞에는 작은 정원과 조형물들이 들어선다. 그리고 몇 그루의 나무들이 군데군데 들어선다. 선비정신을 상징하는 늘 푸른 소나무들이 즐겨 선택된다. 내가 다니는 서초대로의 효성그룹 사옥 앞 정원에는 키가 큰 소나무들이 아래쪽 가지들은 모두 잘리고 위쪽의 몇몇 가지만 겨우 간직한 채 애처롭게 서 있다. 조경업자들이 심심산골에서 잔뿌리를 다 잘라내고 큰 뿌리만 수습해서 대도시 대로변에 이식해놓은 것이다. 한 그루당 1000만 원을 호가한다고 한다. 지난해 추운 겨울에 거의 죽어갈 듯하던 소나무들은 새봄이 와도 기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그 비싼 나무들이 말라 죽을 것을 걱정하는 나무 의사들이 영양제가 든 비닐 봉투를 나뭇가지에 걸어놓고 봉투에 주삿바늘을 연결해 거북 등같이 두꺼운 소나무 피부에 꽂아 놓았다.

    서울 시내의 새로 지은 건물들 앞을 지나다니다보면 여기저기 생기 잃은 소나무의 모습이 눈에 생생하게 들어온다. 산속에서 맑은 바람을 맞이하며 제자리를 지키던 소나무들이 서울에 옮겨져 영양제 주사를 맞으면서 호강 아닌 호강을 하고 있다. 1970년대에 조성된 반포를 비롯해 30년 이상 된 아파트 단지에는 그나마 오래된 나무들이 풍성한 모습으로 서 있어서 보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파리에는 가로수들이 늘어서 있는 도로가 많다. 2차선이나 4차선 규모의 도로변에 위치한 카페의 테라스에 앉으면 오래된 나무의 모습을 여유롭게 바라볼 수 있다. 나무와 함께할때 사람들의 마음은 착해진다. 어린 시절 식목일이 오면 “산에, 산에, 산에다 나무를 심자!”라는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이제는 산이 아니라 도로변에 나무를 심을 때다.

    풍경 #78 택시 안의 모금상자

    자가용 승용차의 소유가 지위의 상징이었던 시절에 택시는 돈 있는 사람들이 이용하는 고급 교통수단이었다. 그러나 자가용이 일반화하면서 이제 택시는 사실상 대중교통 수단이 되었다. 자가용 승용차 갖기를 거부하는 나는 주로 버스와 지하철을 이용하지만 간혹 택시를 탈 때도 있다. 어느 날 오후 택시를 탔더니 운전석 옆에 연두색 플라스틱 상자가 부착되어 있었다. 상자 안에는 껌이 들어 있고 상자 옆면에는 ‘심장병 어린이들의 수술비 마련을 위한 모금함’이라는 제목과 함께 ‘내 작은 손길이 이웃의 생명을 구합니다. 사랑의 손길을 기다립니다. 소년소녀 가장, 무의탁 노인 생활비 보조와 선교 활동에 사용합니다. -서울 운전기사 선교연합회’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그 글귀를 읽는 순간 마음이 다소 불편해졌다. 얼마라도 모금함에 넣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러나 파리에서는 택시에서 그런 모금상자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파리에서는 일상에서 적선을 요구하는 방식이 다른 것 같다. 그들은 ‘인정’에 호소하기보다는 ‘연대’라는 가치에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파리 시내 한복판 오데옹 거리 한구석에는 한동안 노숙자인 것처럼 보이는 중년 여성이 매일 똑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여성은 10년 이상 일한 어느 공장에서 부당 해고를 당했다면서 지금 회사 측과 재판 중인데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자기와 노동자 계급을 위해 연대해줄 것을 호소하고 있었다.

    물론 파리 시내에 구걸하는 사람 가운데는 골판지 위에 ‘배가 고파요(J′ai faim)’라는 문장을 써놓고 허름한 모자나 빈 상자 뒤에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아 있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지하철에 나타나서 구걸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자기도 최소한의 음식을 먹고, 몸의 청결을 유지하고, 인간답게 잠을 자야 하지 않겠느냐면서 최소한의 인권 개념에 호소하는 사람도 있다. 서울의 지하철에서 육체적 불구를 비롯해 불행한 처지를 내보이며 인정에 호소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을 구사하는 것이다. 파리의 지하철 승객들은 누가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를 불러도 자기의 마음을 움직인 경우에야 동전 지갑을 꺼내지 그렇지 않으면 소음으로 간주해 외면해버린다.

    풍경 #79 라디오는 내 친구

    지금은 많은 사람이 스마트폰에 매달려 있지만 1960년대는 말할 것도 없고 1970년대에도 밤 시간에는 라디오를 많이 들었다. 1960년대에는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 같은 라디오 연속극이 인기였고, 1970년대에는 이종환이 진행하는 ‘별이 빛나는 밤에’, 김세원이 진행하는 ‘밤의 플랫폼’, 임국희가 진행하는 ‘한밤의 음악편지’같은 인기 음악 프로그램들이 있었다. 작은 트랜지스터 하나만 있으면 혼자 자기가 원하는 장소와 시간에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지난 10년 동안 파리에 살면서도 라디오 방송을 참 많이 들었다. ‘프랑스 퀼튀르’라는, 광고가 전혀 없는 공영방송을 가장 많이 들었는데 라디오를 켜기만 하면 프랑스를 대표하는 학자, 작가, 지식인, 종교인, 언론인들이 나와 수준 높은 강연, 대담, 토론을 하고 있었다. 그 라디오 방송은 나에게는 재미있고 진지한 강의를 들려주는 교육기관이기도 했으며, 세상 돌아가는 꼴을 심층적으로 분석해주는 언론기관이기도 했다. 내가 유학생 시절보다 나이 50이 넘어서 프랑스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좀 더 알아듣게 된 것은 ‘프랑스 퀼튀르’라는 라디오 방송 덕분이다. 서울에 돌아와 나는 일부러 텔레비전 없이 살고 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난 여유로운 시간에는 주로 책을 읽지만 때로 라디오 방송을 듣기도 한다. 처음 서울에 돌아와서 ‘프랑스 퀼튀르’같은 라디오 방송을 찾아보려고 앞뒤로 채널을 옮겨보았지만 그런 방송은 찾을 수가 없다. 그래서 가수 최백호가 흘러간 가요를 들려주면서 구수하게 진행하는 ‘낭만시대’나 그나마 다소 문화적 분위기를 풍기는 ‘신성원의 문화 읽기’라는 프로그램을 듣기도 했다. 요즘은 ‘프랑스 퀼튀르’ 방송을 인터넷으로 듣기도 한다. 서울에서나 파리에서나 옛날이나 지금이나 라디오는 영원한 내 친구다.

    풍경 #80 등나무 벤치의 흡연구역

    서울에서도 파리에서도 한창 금연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실내에서 흡연이 금지되면서 파리의 식당이나 카페는 길거리 쪽에 테라스를 마련해 흡연자들이 음료수를 마시면서 담배를 피울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겨울이면 투명 비닐로 테라스를 감싸는 공간이 만들어진다. 내가 살던 파리 16구 파시의 ‘르 파시’라는 카페 앞 도로에는 언제나 서서 담배 피우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길가에는 그들이 피우고 나서 버린 담배꽁초가 수북하다. 거의 모든 실내가 금연 구역으로 지정돼 있기 때문에 흡연자들은 부득이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울 수밖에 없다.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건물 밖으로 나와 서서 처량한 모습으로 담배를 피운다.

    서울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내가 다니는 국립중앙도서관에도 야외에 흡연 장소가 열 군데 정도 지정되어 있는데 최근에는 몇 군데가 줄어들었다. 흡연자들을 구석진 장소로 몰아내고 있는 느낌이다. 사실 나 같은 비흡연자들은 도서관 앞마당 벤치나 뒤쪽 등나무 휴게소 벤치에 앉아 휴식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때 누가 옆에서 담배를 피우면 참 힘들다. 길거리를 걷다보면 여기 저기 흡연 지정 장소가 마련되어 있는데 그 안을 들여다보면 담배에 굶주린 사람들이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마주 앉아 정답게 맞담배를 피우고 있다. 20대 초의 젊은 여성과 60대 아저씨가 서로 멀뚱멀뚱 바라보면서 입에서 담배 연기를 내뿜는 모습을 보면 참 세상 많이 변했다는 느낌이 든다. 파리에서는 자연스럽게 보이던 그런 풍경이 서울에서는 왜 어색하게 보이는지 모르겠다.

    풍경 # 81 서울과 파리의 조명

    서울의 야경은 파리에 비해 훨씬 화려하다. 강남이나 강북의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 위치한 건물들은 외벽을 네온사인을 비롯한 여러 가지 조명시설로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래미안이나 자이 같은 아파트 단지들은 건물의 꼭대기에 예술적인 조명장치를 설치해서 그곳이 문화적으로 수준 높은 사람이 사는 아파트임을 과시한다. 파리 사람들이 서울에 오면 화려한 전광판과 건물의 조명 장식에 놀란다. 샹젤리제 거리의 크리스마스 조명 장치는 그 화려함과 심미성이 빼어나지만 대부분의 파리 야경은 다소 어둡고 은은한 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외적으로 매년 10월 열리는 파리의 ‘백야 축제(La Nuit Blanche)’에는 유서 깊은 건물의 외벽이나 안마당에서 밤새 다양한 조명 예술이 펼쳐진다. 광고와 보안을 위해 너무 밝게 만들어놓은 서울의 거리에는 그런 축제가 어울리지 않을 듯하다. 파리 사람들이 서울에 오면 실외 조명만이 아니라 실내조명에도 놀란다. 파리의 아파트는 일단 황색의 백열등으로 조명을 하며 여러 곳에 스탠드를 설치해 기분에 따라 상황에 따라 여러 개를 켜서 밝은 조명을 하기도 하고 은은한 분위기를 만들기도 한다. 간접 부분 조명을 좋아하는 파리사람들이 서울의 아파트 거실 천장에 붙어 있는 흰색 형광등이 만드는 지나치게 차갑고 밝은 분위기에 놀라는 것은 당연하다. 서울 아파트의 실내조명은 어쩌면 부족한 조명 아래 어둡게만 살아서 밝기만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한 가난한 시절의 유산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급 아파트들은 이미 형광등 대신 은은한 부분 조명장치들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풍경 # 82 카페 바깥 구경하기

    걷는 사람에게는 서울의 강남보다는 강북이 더 적합한 장소다. 강북의 인사동이나 삼청동 거리에 많은 사람이 몰리는 이유는 나지막한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어서 아늑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2008년 일시 귀국했을 때 일부러 북촌의 한옥에서 한 달 동안 산 적이 있다. 그곳에 살면서 북촌 구석구석을 매일 걸어 다녔다. 그래서 북촌의 지리에는 매우 익숙한 편이다. 북촌에는 이미 있던 한옥들을 보수한 경우도 있지만 새로 짓는 한옥도 늘어나고 있다.

    정독도서관 앞 선재미술관에서 헌법재판소 쪽으로 이어지는 언덕길을 걷다보면 내리막길 왼쪽에 ‘가회헌’이라는 한옥집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 옆에는 ‘Wood · Brick(우드 앤드 브릭)’이라는 간판을 단 현대식 건물이 한옥과 조화를 이루며 서 있다. 그리고 그 맞은편에는 ‘To Go(투고)’라는 이름의 카페가 있다. 그 카페 안으로 들어가 길을 바라볼 수 있는 자리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면 이 카페야말로 서울에서 가장 프랑스적인 카페라는 생각이 든다. 파리에서는 카페에 앉아 걸어 다니는 행인을 바라보는 재미가 있는데 이 카페는 전면을 유리로 처리해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편안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했다. 거리 맞은편에 있는 ‘가회헌’ 뒤에는 현대식 건물의 갤러리가 있고 그 위에 한옥을 누각처럼 얹어놓았다. 그래서 카페에서 한옥과 현대식 건물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나는 ‘To Go’ 카페에 앉아 파리의 생쉴피스 광장에 있는 ‘카페 드 라 메리’를 생각한다. 조르주 페렉이라는 프랑스 작가는 살아생전 그 카페의 테라스 한쪽에 자리 잡고 앉아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을 다 묘사하려고 시도했다. 그 장소에서 보고 생각할 수 있는 요소는 수없이 많다. 보통 사람들은 오로지 자기가 가는 목적지만을 생각하며 그 길을 걷기 때문에 볼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유심한 관찰자 조르주 페렉의 눈에는 그런 것들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버스 정거장 앞에 있는 사람들의 표정, 지나가는 관광버스 안 사람들의 국적, 길거리에 버려진 쓰레기, 광고탑의 포스터 등이 모두 묘사의 대상이 되었다. 그 결과가 ‘파리의 한 장소를 완벽하게 묘사하려는 시도’(1975)라는 책에 담겨 있다. 파리에 살 때 어느 날 오후 나는 파리 15구에 있는 ‘바라니모’라는 카페 테라스에 앉아 조르주 페렉과 같은 시도를 한 적이 있다. 그 자세한 기록이 나의 책 ‘파리의 장소들’(2010)에 보존되어 있다.

    조르주 페렉은 파리를 새롭게 보기 위해서 또 하나의 시도를 했다. 이번에는 노트와 펜이 아니라 녹음기를 사용했다. 생쉴피스 광장에서 멀지 않은 생제르맹 데 프레 대로와 푸르 거리가 만나는 마비용 사거리에서 하루 종일 녹음기를 들고 온갖 소리를 다 녹음했다. 그리고 그 소리들을 편집해서 “파리 마비용 사거리, 몇 년 몇 월 며칠 몇 시에서 몇 시 사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어느 날 1970년대에 녹음된 그 작품을 ‘프랑스 퀼튀르’ 방송에서 들으면서 소리의 환기력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다. 한국의 시인 김경주는 여행을 할 때 카메라 대신 녹음기를 지참한다. 보통 사람들은 사진으로 추억을 기록하는데 시인은 소리를 모아 추억의 자료로 삼는다.

    풍경 #83 정선의 수성동 계곡을 거닐다

    북촌이 관광지화하면서 너무 많은 사람이 몰리고 있다. 산책은 한가한 장소에서 해야 사고를 동반한다. 요즈음 나는 둘째, 넷째 월요일 오후에 서촌으로 산책을 간다. 경복궁을 기준으로 삼아 궁궐 북쪽의 북촌이 양반들이 사는 지역이었다면 궁궐 서편의 서촌은 중인이나 예인들이 살던 곳이라 한다.

    지하철 경복궁역에서 내려 자하문 방향으로 한참 걸어올라 가다가 인왕산을 바라보며 서쪽으로 걸어 들어가면 정다운 골목길이 이어진다. 그 길을 따라 계속 서쪽 언덕길로 걸어 올라가면 바위 계곡이 나오고 폭포수가 떨어지면서 내는 물소리가 들린다. 인왕산에서 내려온 맑은 물이 작은 폭포를 이루고 시내를 이루며 흘러내린다. 어디서 많이 본 풍경이다.

    ‘우리에겐 왜 佛 퀼튀르 같은 라디오 방송이 없나’
    정수복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프랑스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 EHESS(사회학박사)

    사회운동연구소 소장

    프랑스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 객원교수

    한국문화사회학회 이사(현)

    저서: ‘파리를 생각한다’ ‘프로방스에서의 완전한 휴식’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 ‘시민의식과 시민참여’ 등


    계곡 앞에 서 있는 안내판은 이곳이 바로 겸재 정선이 그린 수성동(水聲洞)임을 알려준다. 안내판에는 정선의 그림 복사본이 붙어 있는데 300년도 넘은 그림 속 풍경과 거의 같은 모습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종로구청에서 아파트 일부를 철거하고 정선이 그린 그림과 거의 유사한 풍경을 조성해놓은 것이다. 산책로와 돌다리도 있고 정자도 있으며 이식된 나무들이 힘겹게 서 있기도 하다. 그래도 서울 한복판에 이런 장소가 있다는 건 축복이라는 생각을 하며 계곡 부근을 한 바퀴 죽 돌고 내려와 통인시장을 통해 대로로 나오니 자동차들이 씽씽 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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