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실록과 선조가 묻힌 동구릉. 둘 다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그 만남을 통해 환자를 치료하면서 그간 많은 가치를 부여했던 사실들이 공허해지고 사소한 편린이 중요한 의미로 새롭게 등장하기도 한다. 한의학은 환자와 환자를 둘러싼 현재의 상황뿐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그 역사에서 질환의 근본을 파헤친다. 현재 즐겁다고 과거까지 즐거웠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조선 왕의 질병에는 그가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그 이력이 담겨 있다. 왕의 인생은 왕조시대 역사의 큰 흐름을 형성해왔다. 따라서 왕의 질환은 역사적 상황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거꾸로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어떤 일 때문에 괴로워했는지를 살펴보면 그가 앓은 질병이 왜 생겼는지도 보인다. 또한 당시 어의(御醫)나 치료자들의 의료행위가 타당한 것이었는지, 만약 타당하지 않은 의료행위를 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庶子 콤플렉스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의 선조(최철호 분)
명종 22년 6월 27일, 왕의 병세가 갑자기 위독해지자 중전과 몇몇 사대부가 임종을 지켜보기 위해 모였다. 명종은 아직 숨은 붙어 있었지만 말은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명종의 분명한 하교가 없는 가운데 영의정 이준경(李浚慶·1499~1572)이 후계자를 누구로 할 것인지를 중전에게 청하자 중전은 하성군 이균을 지명했다. 이 사람이 바로 비운의 임금, 선조였다.
선조의 아버지는 반정(反正)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과 창빈 안씨 사이에 난 덕흥군 이초(李?·1530~1559)다. 후궁의 자손으로 태어난 이균이 왕이 된 사실은 많은 풍수가의 입에 올랐다. 창빈의 묘소는 원래 경기도 장흥 땅에 있었는데 서울 동작으로 옮기고 난 후 손자가 임금 자리에 올랐다 해서 그가 묻힌 동작릉이 풍수학자 사이에서 연구대상이 될 정도였다. 후계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이뤄진 방계 왕족의 왕위 계승은 곧 벼락출세를 의미했고, 바로 이 때문에 선조는 평생 동안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치열했던 선조의 ‘서자 콤플렉스’는 질병으로 이어졌다. 마음의 병이 몸으로 옮겨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가장 많이 언급된 선조의 질병이 크게 소화불량과 귀울음(이명), 편두통으로 나뉘는 부분도 같은 맥락이다. 감기로 인한 기침과 콧물 등 흔한 증상과 근골격계 질환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질환이 마음의 병에서 생겨난 질병인 셈. 현대의학으로 말하자면 스트레스가 주원인인 질환이다.
선조시대는 사림(士林)이 장악했다. 이들은 송나라 주자학을 중심으로 한 성리학을 추종했다. 적통(嫡統)이 아닌 선조를 전격적으로 왕위에 올린 세력이 바로 이들이다. 그 때문일까. 이들 사대부의 역할이 커질수록 왕은 주눅 들고 신하는 큰소리를 쳤다. 왕권의 시대는 저물고 신권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사림들은 자신이 만든 임금인 선조의 내면세계를 뜯어고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선조를 성리학적 이상 군주로 키우려는 교육을 시작한 것. 이황, 이이, 기대승 등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성리학의 거두들이 모두 선조의 경연강사로 나섰다. 이황은 성학십도를, 이이는 성학집요를 통해 선조를 위대한 군주로 키우려 노력했다. 그들은 신하가 아닌 스승에 가까웠고, 정치적 후원자로서 충고를 쏟아냈다.
선조의 경연강사였던 이황(왼쪽)과 이이. 사림의 대표였던 이들은 선조를 성인의 반열에 올려놓기 위해 끊임없이 압박했다. 이이는 선조의 목소리 질환이 여색을 밝히기 때문이라고 직언하기도 했다.
“그(이황)를 옛사람으로 가칭하여 말했는데, (그가 도대체) 어떠한 사람이며 옛사람의 누구에게 비교할 만한가? 이런 말로 묻는 것이 미안하지만 평소에 궁금하였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다.”
士林과의 끝없는 신경전
임진왜란이 끝난 후 벌어진 사림과의 대결은 선조를 더욱 힘들게 한다. 선조는 왜란 다음 해인 1593년(선조 26년) 10월26일 분에 못 이겨 이황과 그 제자인 유성룡을 힐난하는 발언을 한다.
“듣건대 경상도의 풍속은 누구라도 아들 형제를 두었을 경우 한 아들이 글을 잘하면 마루에 앉히고 무예를 익히면 마당에 앉혀 노예처럼 여긴다. 국가에 오늘날과 같은 일이 있게 된 것은 경상도가 오도한 소치다.”
선조는 쟁쟁한 성리학자 사이에서 기를 펴지 못하고 스트레스에 질식할 것 같은 나날을 보냈다. 성리학의 연구는 도덕성명(道德性命)에 편중돼 국가와 국민의 실제 문제에 대한 연구는 적고, 교조적이며 도덕적인 문제에 치중한 점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런 관점은 당연히 의학계에도 영향을 미쳐 도덕적 관점에서 사람의 성욕을 절제하거나 억제하는 것을 논의의 중심으로 이끌어냈다. 중국 금·원대의 명의인 주진형은 그의 저서 ‘격치여론(格致餘論)’에서 “절욕 양생 사상은 유학의 이욕(理欲) 논변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잘라 말할 정도였다.
중국과 한국을 포함해 고금의 모든 유학자는 성(性)과 건강이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지적해왔다. 중국 공자의 ‘춘추(春秋)’를 전국시대 노나라 사람 좌구명(左丘明)이 재해석한 책 ‘좌전(左傳 또는 左氏傳)’에는 전국시대 명의 의화(醫和)가 진(晉)나라 왕 진후(晉侯)의 병을 논의하면서 “그 병은 여자를 가까이하면서 절도에 맞지 않고 때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병”이라고 진단하는 대목이 나온다.
선조의 질병에 대한 기록도 여색절제에 대한 말로 시작된다. 선조 6년 1월 3일 신하들 사이에선 선조의 목소리가 끊어져 책 읽는 소리가 이상하다는 말이 조심스럽게 돌기 시작한다. “옥음이 정상이 아닌 지 이미 여러 해가 지났어도 오래 끌고 낫지 않으니 입시한 신하로서는 누구나 물러가서 조심합니다.”
이후 여러 차례 선조의 이상한 목소리에 대한 근심스러운 논의가 계속되지만 직접적인 언급은 모두 자제한다. 이런 가운데 율곡 이이가 처음 입시하자마자 포문을 열었다. 이이의 성격을 두고 실록은 “쾌직(快直)하다”고 표현한다. 거침없이 직설적이라는 뜻이다.
“소신이 병으로 오래 물러가 있다가 오늘 옥음을 듣건대 매우 통리(通利)하지 않으시니 무슨 까닭으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전하께서는 여색을 경계하는 말을 즐겨 듣지 않으신다 하니 성의(聖意)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목소리가 맑지 못한 것이 여색을 삼가 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책망이 직설적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에 대해 선조는 “그대가 전에 올린 상소에도 그렇게 말하였으나, 사람의 말소리는 원래 같지 않은 것인즉, 내 말소리가 본디 그러한데 무슨 의심할 것이 있겠는가”라고 답변한다. 실록은 “옥색이 자못 언짢아하며”라며 이때 선조의 불편한 심기를 자세히 적고 있다.
목소리는 성호르몬의 영향을 크게 받는 게 사실이다. 남성호르몬이 분비되면서 남자의 목소리가 굵어지며 저음이 되고 여성호르몬이 분비되면서 여자의 목소리는 고음이 된다. 지금이야 성호르몬이 신장 곁에 붙은 부신에서 분비된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입증됐지만 옛날엔 그렇지 못했다. 한의학은 부신을 신장의 일부인 명문(命門)이라 규정짓고 목소리와 성호르몬의 관계를 당연시하며 생리적으로 설명해왔다.
心火가 만든 위장병, 쉰 목소리
이황의 제자인 유성룡. 선조는 분에 못 이겨 이황과 유성룡을 탓하는 말을 한다.
실제 목소리의 이상을 호소한 이후 선조는 위장장애로 위장약을 복용하거나 소화불량 증상을 지속적으로 호소해왔다. 율곡 이이를 비롯한 신하들은 한의학을 유교적 이론으로만 바라보다 실제 스트레스를 유발한 자신들의 책임은 망각했다.
동의보감은 성음문(聲音文) 첫 구절에 ‘목소리는 신장에서 나온다’고 규정한다. 현대는 자기표현의 시대다. 말을 하는 것이 직업인 사람도 부지기수다. 말로 사상과 감정을 전달하며 살다보니 성대가 피로해지는 건 당연지사. 성대를 지나치게 사용하면 목이 마르고 건조해져 결국엔 쉰 목소리가 나온다. 동의보감은 목소리를 윤택하고 탄력 있게 내는 양생법도 소개한다. ‘말하고 외우거나 읽을 때 언제나 기해(배꼽 아래 있는 혈 이름) 속에서 소리를 낸다고 생각하라’는 것이다.
고운 목소리를 내는 약물도 거론했다. 껍질을 벗긴 살구씨, 졸인 우유, 꿀을 반죽해 알약을 만들거나 곶감을 물에 담갔다가 늘 먹는 것이 좋다고 했다. 달걀의 효능에 대해서도 ‘흰자는 성질이 서늘해 인후두의 열을 식히고 염증을 없애 목소리를 좋게 한다’고 설명한다. 노래 부르기 전에 날달걀을 먹으면 좋다는 속설도 근거가 없는 게 아닌 셈이다.
하지만 정작 선조를 괴롭힌 병증은 목소리가 아니라 소화불량증이다. 즉위 7년 1월 7일 선조는 ‘자주 체한다’‘음식생각이 나지 않는다’며 괴로워한다. 사실 스트레스와 소화불량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혈관이 수축한다. 위의 소화운동을 담당하는 위장관 근육에 혈액을 공급하는 혈관들도 위축된다. 위장운동 능력이 떨어지면 잘 체하고 속이 더부룩해지는 것은 누구나 아는 상식.
‘비위를 맞춘다’거나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프다’ ‘속 좁다’라는 옛말이 생긴 것도 마음과 위장의 관계에서 비롯됐다. 내면의 상처가 얼마나 깊었는지 선조의 위장장애는 그 이듬해에도 계속된다. 실록은 좌의정 박순은이 “왕의 비위에 이상이 생겨 민망하다고 한숨을 쉬었다”고 썼다. 호남유림의 거두이자 허준을 발탁하고 후원한 미암(眉巖) 유희춘(1513~1577)은 보다 못해 이런 증세를 음식을 통해 치료하기 위한 식료단자를 지어 올린다. 중국 양생서인 연수서, 수친양로서, 명의잡서, 사림광기 등을 발췌해 만든 식사지침서인 것이다. 가미응신산, 양위진식탕 등 위장기능 개선 처방을 올렸지만 고질이 된 선조의 위장병은 쉽게 낳지 않고 평생을 괴롭힌다.
선조 34년 선조는 신하들의 그늘에 가려 속마음을 숨기고 화병을 안고 살던 자신의 모습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내 병이 다시 도져 고질이 되었는데 그중에서도 심화(心火)가 가장 치성해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심해지기만 한다.” 선조의 위장병은 노년에 극에 달하는데 선조 41년에는 “도통 입맛이 없어 무를 곁들여야 겨우 수저를 든다. 만일 약 중에 무와 맞지 않는 약재가 들어가면 그것조차 못 먹게 될 것 같다”고 말할 정도가 된다.
이명과 편두통에 침을 선택
하지만 선조를 괴롭힌 가장 무서운 질환은 귀울음인 이명이었다. 증상은 즉위 28년 8월부터 시작돼 평생 동안 이어졌다. 동의보감에서 파악한 귀의 본질은 ‘공한(空閒)’이다. ‘고요함을 소중하게 여기고 마음이 텅 비어 한가함을 좋아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마음이 번뇌로 가득 차거나 화가 뻗치면 귀에 병이 생긴다. 귀는 고요하면서 차가운 기관이다. 우리가 뜨거운 불에 손을 데면 반사적으로 귓바퀴를 잡는 것도 그 때문이다.
공포영화에 소리가 없으면 무덤덤해지듯 귀는 어둡고 차가운 공포를 주관하는 곳이다. 생긴 모양도 외부는 넓고 내부로 갈수록 좁아진다. 소리를 모으기 좋게 생겼다. 그래서 한의학은 귀를 구심성(求心性)의 음적(陰的)기관이라 규정한다. 한의학에서 뜨겁고 팽창하는 힘은 화(火)이며 차갑고 수축하는 힘은 수(水)다. 귀는 확실히 음적이며 물과 깊은 관련이 있다. 차가운 귀에 뜨거운 화가 올라오면 귀는 달아오르면서 자기 소리를 시끄럽게 증폭한다. 이런 기전으로 스트레스는 귀울음을 유발한다. 이명이 오면 자신의 심장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들리기도 한다.
선조는 이명 치료를 위해 약물을 먹으라는 신하들의 청을 거절하는 대신, 조선 최고의 침의(鍼醫)인 허임(許任)의 침을 맞길 원했다. “귓속이 크게 울리니 침을 맞을 때 한꺼번에 맞고 싶다. 혈(穴)을 의논하는 일은 침의가 전담해서 하라. 침의가 간섭을 받으면 그 기술을 모두 발휘하지 못해 효과를 보기 어려우니 약방은 알아서 하라”고 엄포까지 놓는다. 여러 차례에 걸쳐 침을 맞은 점, 침의에게 의존한 점을 보면 침이 선조의 귀울림을 많이 개선한 것은 확실해 보인다. 선조의 질환을 치료한 공으로 양반이 되고 부사 자리에 오른 허임은 동아시아 최고의 침구 서적인 ‘침구경험방’을 쓰기도 했다.
선조는 편두통을 앓기도 했다. 침으로 편두통을 치료한 의관에게 선물을 하사한 기록도 있다. 사실 선조의 편두통은 난치의 질병에 가까운 것이었다. 명저 ‘편두통’의 저자 올리버 색스는 편두통을 ‘뚜렷한 절망과 은밀한 위로’라고 표현한다. 편두통은 크게 소화불량, 월경, 호르몬과 관련지어 일어나는데 선조의 편두통은 소화불량과 연관지어 생각할 수 있다. 색스는 “편두통이 올 때는 위가 평소처럼 편안하지 않고 먹는 것을 조심하면 증세가 줄어든다. 반대로 위장을 부담스럽게 하면 더 잦고 심각해진다”고 설파했는데 선조의 소화불량증과 딱 맞아떨어지는 부분이다. 선조의 편두통은 색스의 분류로 따지면 ‘하얀 편두통’ 유형에 속한다. 정서적 자극을 받으면 얼굴이 창백해지고 의기소침해지는 유약한 억제형이면서 미주신경 긴장증에 가깝다는 것.
조선의 의성(醫聖)으로 평가받는 허준. 선조 사후 사림들의 상소로 유배를 당했다. 오른쪽은 드라마 ‘허준’의 한 장면
선조 당시의 어의(御醫)는 동의보감을 지은 허준이다. 선조는 허준을 어떻게 평가했을까? 실록이나 유희춘의 미암일기를 통해 드러난 그의 모습은 드라마와 많은 차이가 있다. 실록상 허준은 여러 차례에 걸쳐 탄핵을 당한다. 야사(野史)로 전해오는 허준의 ‘난리탕’ 처방 일화는 청탁을 배격하는 허준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허준이 당대의 명의로 뜨는 어의가 되자 사대부들의 왕진 청탁이 쇄도했다. 비록 어의였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사대부와 의관의 신분 격차는 엄청났다. 왕진 청탁을 거절할 명분이 필요했던 그는 각기병이 생겨 움직일 수 없다는 핑계를 댔다. 그런 와중에 임진왜란이 발발한다. 허준은 선조와 신하들이 몽진을 떠나는 상황에서 제일 앞장서 종종걸음으로 내달렸다. 오성 이항복은 그 모습을 보고 “어의 허준의 각기병에는 ‘난리탕’이 최고”라고 비꼰다.
허준은 드라마와 달리 과거시험을 거치지 않고, 평생 후원자였던 유희춘의 천거로 내의원에 들어갔다. 유희춘의 ‘미암일기’에는 많은 진료청탁과 이 부탁을 정성껏 수행하는 허준의 모습이 곳곳에 드러난다. 1569년 당시 유희춘은 나주에 사는 나사침과 그의 아들 나덕명의 병을 진찰해달라고 부탁했다. 또한 남원에 사는 신흔의 질환 치료를 부탁하는데 허준은 “병이 비록 중하지만 치료될 수 있다”고 보고한다. 유희춘은 자신의 병은 물론 부인의 고질병 치료를 부탁하기도 했다. 종기 치료를 위해 얼굴에 지렁이 즙을 바르고 토사자환(?絲子丸)을 처방한다. 호불호가 분명해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정성을 다해 진료하는 인간 허준의 또 다른 면이다. 실록은 왕의 말을 기록한 글이지만 사대부의 시각으로 쓰여졌다. 1608년 선조가 죽자 사간원은 허준을 강력히 비난한다.
“허준이 본시 음흉하고 범람한 사람으로 자신이 수의가 되어 약을 씀에 있어 많은 사람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잘못을 저질러 망녕되이 극히 찬 약을 써서 마침내 선왕께서 돌아가셨다.”
어의로서의 자질을 의심하는 비난이 쇄도하면서 결국 허준은 의주로 귀양을 가게 된다. 특히 인간적인 평가에서 모진 곤욕을 치른다. ‘음흉하고 범람한’ 사람으로 규정 당하며 사대부들의 왕진 청탁을 거절했던 대가를 톡톡히 치른다. 하지만 선조에 이어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사간원이 허준의 석방 명령 환수를 주장하자 오히려 의관으로서의 고집을 칭찬한다.
“약을 처방함에 있어 허준의 치료능력을 잘 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소신대로 옳다고 생각하면 시행하며 정성껏 처신하는 그 뜻을 감안하여 석방한다.”
“망녕되이 극히 찬 약을 썼다”는 대목은 선조도 말한 바 있다. 선조 40년 10월9일 새벽 선조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방 밖으로 나가다 넘어져 의식을 잃는다. 그러자 의관들은 한꺼번에 청심환, 소합원, 생강즙, 죽력, 계자황, 구미청심환, 조협가루, 묵은 쌀죽 등의 약을 한꺼번에 올렸다. 청심환, 구미청심환, 죽력 등은 모두 성질이 찬 약제들. 선조는 이튿날 노골적으로 불만을 토로한다.
“의관들은 풍증이라고 말하나 내 생각에는 필시 명치 사이에 담열이 있는 것 같다. 망령되이 너무 찬 약제를 쓰다가 한 번 쓰러지면 다시 떨치고 일어날 수 없을 것이다. 미음도 마실 수 없으니 몹시 우려된다. 다시는 이처럼 하지 말라.”
이런 말을 했는 데도 불구하고 2주 후인 10월26일 지속적으로 먹어오던 영신환이라는 약물을 선조가 거부하는 일이 벌어진다.
“새로 지어들인 영신환을 복용한 지 벌써 여러 날이 지났다. 그 약 속에는 용뇌 1돈이 들어 있다. 용뇌는 기운을 분산시키는 것이니 어찌 장복할 수 있는 약이겠는가. 그것도 지금처럼 추운 시기에 말이다. 요즈음 먹어보니 서늘한 느낌이 들어 좋지 않다. 의관들이 필시 오용하였을 것이다.”
12월 3일에는 허준의 이름을 직접 거명하며 진료에 노골적으로 불만을 터뜨린다.
“사당원(砂糖元)을 들이자마자 또 사미다(四味茶)를 청하니 내일은 또 무슨 약과 무슨 차를 계청하려는가. 허준은 실로 의술에 밝은 양의(良醫)인데 약을 쓰는 것이 경솔해 신중하지 못하다.”
선조를 위한 변명
반면 의관으로서의 허준에 대한 전체적인 평가는 조선 최고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고금의 의료서적에 널리 통달해 약을 쓰는 데 노련하다.”(선조)
“허준은 내가 어렸을 때 많은 공로를 세웠다. 근래 내 질병이 계속돼 그를 곁에 두고 약을 물어 쓰고 싶다.”(광해군)
의관으로서의 이런 평가와 달리 실록이 그의 인간적인 부분에 대해 혹평을 일삼은 까닭은 도대체 무엇일까. 실록은 심지어 허준에 대해 “성은을 믿고 교만을 부리므로 그를 시기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기록할 정도다. 그 시대를 살지 않아 확신할 순 없지만 역시 치료 청탁에 호의적이지 않았던 점과 호불호가 분명한 성격, 외골수적 진료 행태 때문에 생긴 부정적 결과가 아니었던가 싶다. 만약 그가 진료 청탁으로 여기저기 불려다녔다면 동의보감을 비롯한 수많은 저작이 나올 수 있었을까.
비록 많은 사대부와 권신들이 임진왜란에 허둥대면서 도망간 선조와 허준의 모습에 대해 비난하지만 그들의 나약함은 어쩌면 시대가 강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성리학을 교조적으로 숭배한 사대부와 권신들은 내성외왕의 경지를 임금에게 강요하고 허준을 자신들의 주치의로 만들려 했다. 선조에 대해서는 밖으로는 왕의 역할을 충실히 하는 한편, 안으로는 성인의 경지에 도달해야 한다며 끊임없이 압박을 가했다. 성리학의 대가인 주돈이는 성인의 경지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성인은 중정(中正)과 인의(人義)를 본성으로 삼고 주정(主靜·무욕한 까닭에 고요하다)하여 인극(人極)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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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부와 학문의 극적인 경지를 다투던 욕심 없는 사람이 과연 전쟁에 능률적으로 대처할 수 있었을까. 뿔이 강한 짐승은 강한 이빨을 타고날 수 없고 이빨이 강한 짐승은 강한 뿔을 타고날 수 없다. 오직 성리학만을 숭상하고 성인의 경지를 숭상한 사대부에 의해 만들어진 선조, 전쟁에서의 비겁함은 바로 그들이 만들어 낸 것이었다. ‘치욕의 군주’ 선조는 왜란 중 의주에서 신하들에 대한 불만을 시 한수로 읊어낸다.
“관산에 뜬 달 보며 통곡하노라/압록강 바람에 마음 쓰리다/조정 신하들은 이날 이후에도 /동인이니 서인이니 나누어 싸움을 계속할 것인가(痛哭關山月 / 傷心鴨水風 / 朝臣今日後 / 寧腹各西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