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 연구 혹은 기록에서 나타나는 오류나 왜곡을 체계적으로 다루어보고자 한다. 크게 보자면 역사의 탐구(질문), 설명(서술), 논쟁(토론)의 범주 정도가 될 것이다. 재미있는 얘기를 듣고 싶은 것, 그것을 인간 본연의 호기심이라고 했다. 그 호기심은 질문을 수반한다. 질문은 궁금증일 수도 있고, 문제의식이라고도 할 수 있다.
- 질문 프레임에서 발견할 수 있는 오류와 왜곡을 이번 호와 다음 호에서 살펴보겠다. 우선 쉬운 것부터 보자.
이순신 장군이 각 대첩을 통해 왜군을 물리침으로써 그 패퇴에 결정적 공헌을 했다는 사실은 증명할 수 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이 그런 결과에 ‘필수불가결한’ 인물이었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추앙과 역사 서술이 갈리는 지점이다.
개별적인 것에서 일반적인 것으로 단순히 귀납(induction)할 수 있다고 보는 것, 이것을 실행 불가능한 방법이라고 하고 싶다. 과거에는 무한대의 개별 사건이 있기 때문에 개별에서 일반으로 귀납할 수가 없다. 개별 사건의 진리성은 연구자와 독립해 존재하는 객관적인 실재다. 그러나 그 개별성은 각 연구자의 탐구에 따라 분리되고 정의된다. 아무리 작은 역사 문제에 대해서라도 거기에 적합한 사건의 수에 제한이 있을까. 게다가 각각의 거짓(falsehood)은 이른바 진실에 대한 부정이기 때문에, 거짓은 언제나 진실만큼 많다.
둘째, 불가능한 목표란 전체적인 진리에 대한 요구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는 통상 세 형식 중 하나의 모습을 띤다. ① 가끔 모든 것에 대해 모든 것을 알려고 시도하는 신(神) 같은 분들이 있다. ② 때로 모든 것에 대해 어떤 측면을 알고자 하기도 한다. ③ 가장 빈번한 경우는 몇몇 관심 사실에 대한 모든 것을 조사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 세 가지 목적은 어느 것도 실현될 수 없다. 역사가는 어떤 것에 대한 어떤 부분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전제가 없다?
‘어떤 것에 대한 모든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마치 피라미드처럼 전공논문을 모으고 쌓다보면 언젠가 아이작 뉴턴 같은 존재가 나와서 전체 피라미드를 완성할 것이라고 상상한다. 그러나 역사 저술의 역사를 언뜻 살펴보기만 해도 역사 서술이 이렇게 발달해오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통상 전문논문이 먼저 나오고 일반적인 해석이 나중에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몇몇의 건축 대가가 거친 피라미드 그림을 그리고, 무수한 노동자가 거기에 맞추어 돌을 다듬는다. 그러다가 다 완성되기도 전에 패션이 갑자기 바뀐다. 피라미드에서 오벨리스크(obelisk)로! 또 다른 건축 대가가 모래 위에 스케치를 남기고, 돌 다듬기와 깎기가 시작된다. 피라미드를 쌓으려던 몇몇 돌은 재활용되겠지만, 대부분은 다시 잘라야 할 것이다.
이는 역사 연구가 상대주의적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 아니다. 인류의 필요에 시급하고 적절하며 중대하고 핵심적인 진리, 과거를 말해주는 많은 객관적인 진리가 있다. 그러나 귀납이라는 단순한 방법으로 발견되는 그런 전체적인 진리는 없다는 뜻이다. 모든 진실한 역사적 언명은 ‘한’ 역사가가 던진 질문에 대한 응답이다. 무슨 대표 질문이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어떤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백지 전제의 오류는 랑케를 떠올리게 하지만, 피스텔(Fustel de Coulanges· 1830~1889)의 경우가 더 선명하다. 어느 날 그의 강의를 듣던 학생이 강의에 감동한 나머지 열렬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자 피스텔은 “나를 칭찬하지 말게. 자네에게 말한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입을 통해서 나온 역사라네”라고 했다. 겸손한 듯한 오만함. 이 사람은 역사가는 선입관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질문이나 작업 가설조차 말이다. 그는 실수의 가능성마저 역사가의 왜곡이 아니라 그가 가진 증거의 갭 때문에 생긴다고 생각했다.
구치(G. P. Gooch)는 “피스텔은 자신의 연구결과를 자신과 독립된 것으로 여겼고, 비판을 마치 신성모독인 듯 생각했다”고 평했다. 피스텔은 당시 호전적 민족주의자였던 동료 역사가들과는 달리 자신은 민족주의적인 왜곡을 줄이는 데 기여했다고 생각했지만, 프랑스-프러시아 간의 보불전쟁 이후 그의 주요 저술의 요점은 다른 학자들이 프랑스와 영국 제도의 발달 속에서 발견했던 튜톤(Tueton·게르만)의 영향이 갖는 중요성을 최소화하는 것이었다.
피스텔에서 이미 몇 세대가 지난 요즘 역사학자들은 물론 그렇게 노골적으로 이런 오류를 저지르는 경우가 거의 없다. 상대주의자들이 그 일처리를 맡았는데, 이것이 그들이 했던 가장 건설적인 성과였다. 그러나 이 구식 오류는 모든 역사가의 가슴속 깊은 곳에 아직 남아 있다. 이 점에 관한 한 필자 역시 자유롭지 못하다.
최근 역사학에서는 역사가의 질문이 중요하다는 언명을 거부하지 않고 원칙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지만, 실전에서는 그 원칙을 곧잘 잊는다.
역사학에는 질문, 가정, 모형에 대한 세습적인 반감 같은 것이 있다. 그 결과, 많은 역사 전공 논문에 개념 빈곤이 나타난다. 이 개념 사용 능력의 빈곤은 단순히 저자의 역량 문제가 아니다. 이는 연구의 조직화, 가정의 구체화, 의도의 명료화 등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습관적 혐오의 결과다. 이제는 이렇게 말할 때가 되었다.
“역사학에서 지혜로운 사람이란 가정을 피하는 사람이 아니다. 무엇이 가장 그럴 법한지 주장할 수 있는 사람, 그 가능성의 정도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뭘 묻는 거야?
다수 질문의 오류. 이 유형의 오류는 몇 가지로 다시 세분할 수 있다. ① 하나의 질문에서 두세 개의 질문을 섞어놓고 하나의 답변만 요구하는 방식, ② 다른 질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는 질문을 제기하는 방식, ③ 잘못된 전제를 만들어내는 질문을 설정하는 방식, ④ 복합적인 질문을 설정하고 네, 아니오 식의 단순 답변을 요구하는 방식이 그것이다.
널리 알려진 사례로 “이제 아내를 때리지 않나?”라는 질문이 대표적이다. 이 질문은 비열할 뿐만 아니라 오해할 수 있는 전제에서 시작된다. 이 질문은 “아내를 때린 적이 있는가?” “지금은 때리는가, 어떤가?”라는 두 질문을 하나의 질문으로 만들어버린 사례다. “이제 마누라를 때리지 않나?”라는 질문 자체가 많은 사람에게는 잘못된 질문일 수 있다는 말이다. 이와 유사한 사례가 있다.
영국 찰스 2세는 종종 박식한 신사들과 왕실 사교 모임에서, “왜 살아 있는 물고기를 물이 가득 찬 대야에 넣으면 물이 넘치지 않는데, 죽은 물고기를 넣으면 넘치는가?”라고 물었다고 한다. 학자들은 차마 찰스의 질문이 오류라고 지적하지는 못하고 온갖 어리석은 답변을 만들어냈다고 한다.
역사가나 역사적으로 사유하려는 사람들도 의도하지 않게 종종 이런 오류에 빠진다. 이런 진술이 있다. 중국 세관(稅關)에서 근무했던 루이스 알링턴(Lewis Arlington)은 중국 형벌의 공개처형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중국인들은 평상시에는 얌전한 편이지만, 흥분 상태에 이르면 완전히 악마로 돌변한다. 그들은 반쯤 성장한 아이들 같아서, 곤충에 물리기라도 하는 날에는 순수하게 짓궂은 장난으로 곤충의 날개, 다리, 그리고 해부하기 편한 다른 부위를 떼어낸다…1904년 나는 쑤저우(蘇州)에서 한 모자(母子)가 근친상간과 남편 살해죄로 체포되는 것을 목격했다. 그들이 처형장으로 호송되었을 때 수천 명의 중국인이 처형장에 모여 처형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에는 아이를 안고 나온 여자도 많았다. 엄청난 교육 아닌가! 그토록 어릴 때부터 가장 가혹한 혹형을 지켜봐온 중국인들이라면 온갖 고통에 대하여 무신경한 게 당연하지 않은가?”라고 말했다.(티모시 브룩, 박소현 역, ‘능지처참’ p.398, 너머북스, 2010)
그의 말에서 우리는 바로 “정말 중국인들이 어려서부터 보아온 것이 ‘세상에서 가장 가혹한’ 혹형이었는가?”라는 질문을 할 수밖에 없다. 질문에 대한 답이 질문을 낳은 것이다.
미국 남북전쟁 이후 남부 각 주를 합중국에 통합하던 이른바 재건시대(Reconstruction ·1865~1877)의 역사 서술과 관련해, 페렌바하(Don E. Fehrenbacher)는 ‘특히 묻고 대답할 가치가 있는’ 질문을 다음과 같이 열거했다.
① 재건은 가혹했는가, 관대했는가? ② 대통령의 재건 계획은 건전한 것이었는가? ③ 존슨(Johnson)이 실패한 데서 링컨(Lincoln)은 성공할 수 있었을까? ④ 존슨은 형편없이 서툰 사람이었는가, 영웅적인 희생양이었는가? ⑤ 급진 공화파의 기본적인 동기는 무엇이었는가? ⑥ 카펫백(carpetbag) 정부는 얼마나 나빴는가? ⑦ 해방노예(freedman)들은 그들의 새로운 책임을 얼마나 잘 수행했는가? ⑧ 남부의 구세주들(the Southern Redeemers)의 궁극적인 승리에 테러리즘이 얼마나 기여했는가? ⑨ 인종차별이 언제 정교한 양상으로 강화되었는가?
페렌바하의 오류
노예를 해방시킨 링컨(오른쪽). 그러나 그는 가혹한 탈주노예법에 대한 공식적 비난을 거부했다. 존슨(왼쪽)은 아예 흑인단속법을 만들어 해방노예를 대농장 농노로 만들어버렸다.
①의 질문에서, 재건 과정이 평범하거나, 합리적일 수 있었음에도 페렌바하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말하며 다른 평가는 배제했다. ②의 질문은 대통령의 재건 계획이 마치 하나인 듯 묻고 있다. 우선 복귀한 남부 주에서 링컨 후임 대통령인 존슨 재임 기간에 흑인단속법(Black Codes)을 실시했는데, 이는 상·하원 의원들이 자유 흑인의 평등권과 투표권을 지지했던 정책과 대립했다. 결국 존슨은 흑인표 70만 표를 얻은 율리시스 그랜트(Ulysses Grant)에게 30만 표 차이로 패배했다. 이런 변화를 포함한 크고 작은 정책 변화를 고려할 가능성이 페렌바하의 질문에는 배제되어 있다. ③은 ‘허구(虛構) 질문의 오류’이므로 아래에 다시 논의한다.(앤드루 존슨은 부통령이었다가 링컨이 암살당한 뒤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는 성립할 수 없는 허구적 질문이다.)
④의 질문은 ①과 같은 오류에 빠졌다. ⑤의 질문은 링컨을 당선시켰던 신생 공화파에 무슨 명백한 ‘기본적인 동기’가 있던 것으로 가정하고 있고, 그럼으로써 역사 서술에 보통 등장하는 동기의 일원론(monism)을 부추기고 있다. ⑥의 질문은 카펫백 정부가 ‘어느 정도는’ 나빴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⑦의 질문은 해방노예들이 실제로 당면한 새로운 책임을 지니고 있었다고 전제하고 있다. ⑧의 질문은 마치 ‘남부의 구세주들’(남부 민주당 중심의 정치세력. 테러리즘이란 백인 테러단체인 KKK단의 테러)이 궁극적으로 승리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⑨의 질문은 인종차별, 또는 인종 분리가 정책으로든 실제로든 흑인들의 저항운동과의 역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했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있다. 어쩌면 이렇게 역사 공부에 도움이 될 질문들만 남겨주었을까.
콩쥐-팥쥐
잘못된 이분법적 질문의 오류. 이는 극히 위험한 개념 장치의 남용에서 출발한다. 내가 평소 쓰는 학술용어로 ‘콩쥐-팥쥐론’이라고 한다. 이분법이란 하나를 두 부분으로 나누는 것이다. 두 부분은 서로 배타적이고 겹치는 데가 없다. 물론 중간지대도 없고, 양쪽 어디에도 남기거나 빠뜨리는 것이 없다.
경험에 기반을 둔 탐구에서 이러한 요건을 만족시키기는 매우 어렵다. 어떤 두 역사 용어가 이런 식으로 결합하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형식논리에서야 참과 거짓 사이에 중간이 없겠지만, 역사에서는 그 적용에서 얽히고설킨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분법은 원래 배타적이지 않은 두 답변 사이에서 하나의 선택을 요구할 때 부정확하게 사용된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은 종종 이 같은 부적절한 방식으로 이분법을 사용한다. 예를 들어보자.
① 역사란 무엇인가, 사실인가 환상인가? ② 나폴레옹 3세, 계몽 정치가인가 독재자의 선구자인가? ③ 이승만, 건국의 아버지인가 왕정적 독재자인가? ④ 조광조, 개혁인가 혁명인가? ⑤ 산업혁명, 노동자에 대한 축복인가 저주인가? ⑥ 조선 외교, 사대의 길인가 자존의 길인가?
이런 질문은 당장 몇 가지 방식에서 불만족스럽다. 공통적인 것은 대부분 매우 피상적이라는 점이다. 특히 구조적으로 보아 서로 배타적이지도 않고, 집합적으로 보아도 다 망라되지 않는 두 용어 사이의 잘못된 이분법을 제시하고 있다는 결점이 있다. 이런 질문은 부정확하다. 이러한 모호함이 문맥에서 명료하지 않기 때문에 독자는 질문을 통해 무엇을 얻어야 할지 모르거나, 휩쓸려간다.
위의 질문으로 구성된 논문이나 팸플릿에 나타난 문제점은 단지 그릇된 교육의 결과만이 아니다. 이러한 타이틀의 대부분은 우리가 다루는 주제에 대한 학술 문헌에 깊이 묻혀 있다. 이는 많은 역사학자가 가르치는 방식뿐 아니라, 역사가들이 자신의 연구를 개념화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삽화에 불과하다.
이런 잘못된 이분법에 직면해 과연 학생들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마 몇 가지 전략이 있을 것이다. 첫째, 학생은 이분법적 용어가 동시에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주려고 노력할지도 모른다. 둘째, 제3의 가능성이 있음을 증명할지도 모르겠다. 셋째, 둘 중 하나, 또는 둘 다 거부할 수도 있다. 어떤 경우든 학생들이 잘못된 개념화에 답변하도록 족쇄를 채우는 결과를 가져온다. 가장 만족스러운 반응은 이러한 질문 설정의 구조적 결함을 지적하는 것이다. 분석을 진행시키고 탄력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더 정확하고 더 열린 질문을 통해서 탐구가 이루어지도록 앞의 질문을 수정하는 일이다.
뜬구름 잡는 질문
형이상학적 질문의 오류. 이 오류는 경험될 수 없는 문제를 경험할 수 있는 수단으로 용해, 환원하려는 노력의 소산이다. 예를 들어, “사물의 본성은 무엇인가” “현실계의 내적 비밀은 무엇인가?” 같은 형이상학의 중심 문제를, 연구자가 풀기 전에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질문으로 짜 맞추는 것이다.
앞서 미국 남북전쟁(Civil War) 얘기를 했으니, 여기서도 이 주제를 다루어보겠다. “남북전쟁은 불가피했는가?”라는 질문이다. 이 질문은 미국 역사학계에서 매우 중요한 질문 중 하나였다. 마치 “1950년 6·25전쟁이 불가피했는가”라는 질문과 유사하다. 6·25전쟁도 남북전쟁과 마찬가지로 ‘내전(內戰· Civil war)’이라고 한다.
아무튼 역사 문서더미로 이 질문을 옮겨온 역사학자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참고자료를 통해 질문에 대한 자신의 답변을 서술해야 한다. 또 그는 사실로 드러난 명확한 증거를 가지고 자신의 형이상학적인 제안에 대해 설득력을 덧붙여야 한다. 그러나 그는 근대의 계량화 방법에 의해 결정하는 것 이상으로 경험적 연구를 통해 전쟁의 불가피성이라는 주제를 해결할 길이 없다.
스탬프(Kenneth Stampp) 같은 몇몇의 역사학자는 이러한 질문을 거부했다. 그들은 “남북전쟁이 불가피했는지를 증명하는 것은 결실도 없고 불가능한 과제”이고 이 과제로부터 빠져나와야 한다고 했다. 남북전쟁의 불가피성이라는 문제는 본질상 남북전쟁의 ‘의미’가 결여된 문제다. 안타까운 염원 또는 역사적 낭만주의일지는 몰라도.
카(E. H. Carr)는 “역사가로서 나는 ‘필연적인’ ‘피치 못할’ ‘불가피한’ 같은 말을 쓰지 않고 연구할 준비가 되어 있다. 삶이란 단조롭다. 그렇지만 그것들은 시인이나 형이상학자에게 남겨두자”고 썼다. 역사가는 결정론(決定論)이나 자의론(恣意論)의 대립, 집단주의와 개인주의, 관념론과 유물론 등 모든 형식의 일원론이나 이원론에서 생겨나는 형이상학적 문제로부터 등을 돌려야 한다. 역사학이라는 경험과학의 진보는 단호히 가능성의 감각에 의존한다. 마치 무관심한 것처럼. 카는 이를 “역사가는 무엇이 일어났고 왜 일어났는지를 단순히 설명하는 것이 자신의 일인 것처럼 연구해야 한다”고 표현했다.
한편, 데이비드 피셔는 ‘왜(why)’라는 말을 싫어한다. 부정확한 질문이라는 것이다. 왜라는 말은 원인일 때도 있고, 동기, 이유일 수도 있으며, 때로는 묘사, 때로는 과정, 때로는 목적, 때로는 정당화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왜’는 방향과 명징성을 결여하고 있고, 이는 역사가의 에너지와 관심을 분산시킨다. 그래서 누가(why), 언제(when), 어디서(where), 무엇을(what), 어떻게(how)가 중요하다. 훨씬 구체적이고 만족스러운 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질문은 경험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 거기서부터 숙련된 역사학자는 ‘왜’라는 질문에서 시작된 형이상학적 딜레마를 피하면서 더 정확하고 정합적인 프로젝트를 구성해간다.
그러나 ‘왜’라는 질문이 역사가들 사이에서 사라질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왜라는 질문은 문헌 곳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고, 대학원 과정에서 제도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 우리 동료들 대부분에게 그 질문이 없는 역사학 훈련은 한글 없는 국어학처럼 낯설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인과(因果)에 대한 집착이다. 그러나 역사가는 내적 비밀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런 것은 없기 때문이다.
했더라면…
철도에는 부동의 근대성이 담겨 있다. 그러나 ‘철도가 없었다면?’이라는 질문은 역사학의 질문이 아니다. 경험적으로 증명될 수 없기 때문이다.
허구적 구성에서는 당연히 잘못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을 수 없다. 그것이 허구 자체이거나 경험적인 문제와 선명하게 구별돼 있기 때문이다. 모든 소설은 ‘일어날 수도 있었던 일’로 짜인다. 그리고 매우 중요한 진리가 이런 외피를 쓰고 세상 사람들에게 교훈을 준다.
은유나 비유 같은 방식이 아이디어나 추론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어느 정도 허구적 질문은 발견학습이라는 점에서 역사학자에게도 도움이 된다. 그러나 그것들은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하고’, 경험적 방식으로 ‘증명될 수도 없다.’
경제사가들이 ‘만일…, 그렇다면…’의 용법을 쓰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경제학 이론은 이론이라기보다 성격상 패러다임이기 때문이다. 몇몇 학자는 ‘가정해’ ‘조건적으로’ ‘만일’ 등의 표현을 가지고 경험의 계량화 기법과 연계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결과는 둥근 원에 사각형을 끼워 맞춘 듯이 오류이거나 터무니없었다. 한 문장에서 반-사실적인 것(counter-factual)과 사실적인 것이 동시에 존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철도와 경제성장(Railroads and Economic Growth)’이라는 책을 쓴 포겔(Robert W. Fogel)은 철도 운임과 비용 같은 운송체계의 ‘1차 영향요소’를 측정하고, 이를 19세기 고속도로(turnpike)나 운하 운임과 대비했다. 그는 또 공간 배분, 매뉴팩처에 대한 수요 세대 변화 등 ‘2차 영향요소’를 측정했다. 이러한 지표를 통해 그는 철도 이용에서 나오는 ‘사회적 저축’은 국민총생산(GNP)의 비율에서 볼 때 상대적으로 적다고 계산했다. 그리고 그는 철도가 실제로 19세기 미국 경제발전에 없어도 됐다고 결론 내렸다.
그러나 역사는 하나 이상의 여러 레일을 달린다. 아무튼 난파선에서 건질 것은 많다. 역사적 과제의 계량화, 명백한 질문과 가정을 세우는 결단력, 인상적인 개념적 정교성 등. 하지만 포겔의 연구에는 세 가지 결함이 있었다. 첫째, 철도가 ‘없었다면’ 작동할 수 있었던 운송망에 대한 그의 증거는 당연히 철도가 ‘존재하던’ 세계에서 뽑아낸 것이었다. 운하의 선송(船送) 비용은 단지 평가할 수 없는 많은 비용 중 하나였다. 포겔은 운하와 철도가 동시에 존재하는 상황을 근거로 해 평가를 한 것이다.
그러나 둘 사이의 경쟁은 운하 여행의 비율을 어느 정도 낮추었을 것이다. 역으로 운하가 운송체계의 중심이었다면 운하가 더 효율적이었을 것이고 그에 따라 철도의 기술 혁신을 자극했을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것이 거꾸로 운하 이용 비율을 낮추는 효과를 가져오고…. 누가 알겠는가? 이런 질문은 포겔의 논문에 치명적이다. 더욱이 운하가 산업, 이민, 국민 정서, 국내 정치, 더러 남북전쟁 같은 사건에 미칠 수 있는 제2, 제3의 영향은 고려조차 되지 않았고, 경험적 조사로 증명조차 되지 않았다.
둘째, 포겔의 논리에는 더 심각한 결점이 있었다. “철도가 실제로 경제성장 과정을 변화시킨다는 전제를 세우려면, 우리는 철도 서비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 이상을 해야 한다. 철도의 대체물이 근본적으로 같은 역할을 수행할 수 없어야 한다는 것이 증명되어야 한다”고 그는 믿었다. 그러나 이는 두 가지 분리되어 있는 질문을 혼동한 것이다. “철도가 미국 경제성장 과정을 변화시켰는가?”라는 질문 하나. “철도가 오직 철도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미국 경제성장 과정을 변화시켰는가?”라는 질문 또 하나.
첫 번째 질문은 경험적으로 검증이 가능하다. 그러나 두 번째 질문은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임진왜란 중에 이순신 장군이 한산대첩, 노량대첩을 통해 왜군을 물리침으로써 그 패퇴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는 사실은 증명할 수 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이 그런 결과에 ‘필수불가결한’ 인물이었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으며, 이순신 장군이 그 일을 했다는 사실이 당연히 ‘이순신 장군이 필수불가결한 인물’이었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추앙하는 마음에서 심정적으로 그렇게 주장할 수 있어도, 그것이 경험적으로(역사적으로) 증명되는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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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철도의 필수불가결성(indispensability)에 대한 질문은 남북전쟁의 ‘불가피성(inevitability)’이라는 문제에 필적한다. 결국 계량화로 돌아가는 것이고, 그 계량화는 너무도 낡은 방식이다.
그 성격상 인과적(因果的)이지 않은 많은 역사 논문이 현재도 제출되고 있다. 나는 결정론을 긍정하는 것도 아니고, 인간은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우리가 다룰 수 있는 범위로 논의를 정리하자는 것이다. 비역사적 질문을 막지는 않겠다. 아니 막을 수도 없다. 단지 나는 역사와 씨름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