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호

할리우드 사로잡은 국가대표 배우 배두나

“베드신 대역 쓴 것 부끄럽다 그때 배우의 자세 배웠다”

  • 김지영 기자 │ kjy@donga.com

    입력2013-01-23 09: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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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번 마음 열면 간, 쓸개 다 빼줘요”
    • 용돈 많이 벌려고 아르바이트로 연기 시작
    • “우등생은 아니어도 모범생이었죠”
    • ‘기술’에 익숙해지면 연기 안 늘어
    • 자상하고 존경심 드는 남자와 결혼하고파
    할리우드 사로잡은 국가대표  배우 배두나
    널찍한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배두나(34) 앞에는 우유거품만 남은 머그잔이 놓여 있었다. 달콤한 거품 향기가 코끝에 닿자 정체가 궁금했다.

    “캐러멜 마키야토예요. 달달한 걸 좋아하거든요.”

    조금 전 대용량의 고열량 커피를 마시고도 여전히 성에 차지 않는지 그는 한층 당도가 높은 초콜릿케이크를 시켰다. 이럴 때 여배우 열 중 아홉은 체중조절 차원에서 열량이 적은 메뉴를 고르는데, 예상을 깨는 ‘반전’이 어쩐지 그답다.

    배두나는 1998년 모델로 데뷔할 때부터 개성이 넘친다는 평을 들어왔다. 기계로 찍어낸 듯 이목구비 생김새가 비슷비슷한 판박이 미인이 아니라는 점에서도 그렇거니와 연예계 안팎을 넘나들며 MC, 여행작가로 활동한 이력 또한 예사롭지 않다. 영화 속 그의 캐릭터도 매번 바뀐다. 대표작으로 꼽히는 ‘복수는 나의 것’(2002, 박찬욱 감독)과 ‘괴물’(2006, 봉준호 감독), ‘공기인형’(2009,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만 놓고 보더라도 그의 폭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가늠하는 건 어렵지 않다.

    이런 비범함이 할리우드에서도 통했다. 배두나는 제작비만 1억2000만 달러(한화 1300억 원)가 들어간 블록버스터 ‘클라우드 아틀라스’의 주연을 따냈다. 데이비드 미첼의 소설이 원작인 이 영화는 동양의 윤회사상을 바탕으로 19세기부터 24세기까지 500년에 걸쳐 각기 다른 시공간에서 일어나는 6가지 이야기를 퍼즐 조각처럼 정교하게 엮은 SF 대서사시다. 배두나와 공동 주연을 맡은 톰 행크스, 휴 그랜트, 할리 베리, 수전 서랜든, 짐 스터지스 등은 6개의 에피소드에 모습을 바꿔가며 여러 배역으로 등장한다.



    공동 연출자인 ‘매트릭스’의 라나·앤디 워쇼스키 남매 감독과 ‘향수’의 톰 티크베어 감독은 “500년 세월을 관통하는 메시지를 담은 인물”로 배두나가 연기한 손미451(이하 손미)을 지목했다. 배두나는 2144년 네오 서울에 사는 복제인간 손미, 백인, 멕시코 여인까지 1인 3역을 맡았다. 국내 개봉을 앞두고 1월 3일과 7일, 두 차례에 걸쳐 그를 인터뷰했다. 3일과 달리 7일에는 몸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아픈 기색을 감추려고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방종 수준의 자유 용납 못해

    ▼ 프로필을 보니 별명이 ‘사오정’이더군요.

    “옛날 별명이에요. 말을 잘 못 알아듣는다고…. 신인 때 인터뷰에서 한 얘기를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올렸나봐요. 검색은 자주 하는데, 인터넷에 뭐가 올라와도 상관을 안 해요.”

    ▼ 좌우명이 ‘작은 찬사에 동요하지 말고 큰 비난에도 아파하지 말자’던데, 그것도 잘못된 건가요.

    “그건 10여 년 전 제가 ‘아기 배우’일 때 어머니가 해주신 말씀이에요. 연극배우시거든요. 연기 시작할 때부터 그 말을 마음에 새겼는데 많은 도움이 되더라고요. 배우라는 직업이 화려하지만은 않잖아요. 내가 나를 지켜야 하는 순간도 많고요. 인기나 시류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항상 어딘가에 뿌리를 박고 서 있어야 하는데, 어머니 말씀 덕분에 늘 냉정하게 생각하게 됐어요. 누가 나를 아무리 말도 안 되게 모함해도 ‘난 그런 사람 아니야, 난 괜찮은 사람이야’ 그래요. 칭찬을 들었을 때도 ‘난 그 정도로 칭찬받을 사람 아니야’ 그러고요. 마음을 쓰는 직업이라 그러지 않으면 우울증에 빠지기 쉬워요. 작은 비난이나 칭찬에도 흔들리기 쉬워서 늘 저를 냉정하게 평가하는데, 그게 편해요.”

    ▼ 소속사에서 하기 싫은 일을 시켜도 휘둘리지 않나요.

    “소속사는 제게 많이 맞춰주는 편이에요.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어릴 때부터 독립적인 길을 걸어왔어요. 그것을 이해하는 기획사와 일해서 그런지 데뷔 후 줄곧 어떤 간섭이나 ‘교육’을 받지는 않았어요.”

    형식이나 틀에 구애되지 않아서일까. 팬들은 그를 ‘자유로운 영혼’이라 일컫는다. 배두나 하면 떠오르는 몇 가지 단상을 놓고 즉석에서 ‘진실게임’을 해봤다.

    ▼ 자유분방하다?

    “자유분방한 면도 있지만 한편으론 보수적이기도 해요. 연예인이라는 것을 의식하며 살지 않아서 버스도 곧잘 이용하고 공공장소에도 잘 가요. 다만 일상생활에서 방종 수준의 자유는 제 자신이 용납하지 못해요. 해서는 안 되는 것들은 하지 않죠. 가풍이 보수적이에요. 학창시절에도 부모님이 친구 집에서 못 자게 하셨어요. 귀가도 늦어선 안 됐고요. 그런 영향을 받은 것 같아요.”

    ▼ 고집이 세다?

    “고집이 있긴 하지만 외골수는 아니에요. 다른 사람의 조언을 새겨듣고 부모님 말씀도 잘 듣는 편이에요. 근데 작품 결정할 때는 철저히 제 위주예요. 대신 작품이 잘 되든 안 되든 남 탓하지 않죠. 그건 제가 책임질 몫이니까.”

    박지성은 친구, 스터지스는 파트너

    ▼ 친화력이 좋다?

    “낯가림이 심해서 잘 모르는 사람한테는 예의 차리고 마음을 쉽게 못 열어요. 근데 한번 마음을 열면 간, 쓸개까지 다 빼주는 것 같아요.”

    ▼ 남의 시선이나 인기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런 거 의식하면 배우생활 오래 못 해요. 다른 사람을 의식하는 게 체질적으로 안 맞아요.”

    배두나의 이런 성향은 보는 이에게 친근감과 신비감을 동시에 안겨주지만 때로 오해의 불씨가 되기도 한다. 지난해 7월 인터넷을 달군 그와 박지성의 열애설은 두 사람이 영국 런던에서 우산을 같이 쓰고 가다 찍힌 사진에서 비롯됐다. 이 소문은 그가 최근 “박지성은 친한 친구의 친구라 한국에 있을 때부터 알았다. 그냥 친구 사이고, 런던에서 만나선 라면 한 그릇 먹었을 뿐”이라고 해명하면서 해프닝으로 막을 내렸다. 그런데 지난 연말 또 다른 사진이 화제가 됐다. 지난해 12월 19일 대통령선거 투표소에서 그가 ‘클라우드 아틀라스’에서 상대역으로 호흡을 맞춘 짐 스터지스와 함께 찍은 인증 샷이다. 이날의 동행을 두고 일부 언론에서 둘 사이를 의심했지만 이것도 별일 아니었다.

    “영화 크랭크업 후 스터지스가 제 런던 관광 가이드를 자청해 보답 차원에서 한국 구경을 시켜준 거예요. 아무래도 제가 연애하기를 바라는 기자가 많은 것 같아요.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쓰는 걸 보면요. 신경 안 써요. 체념 수준이에요(웃음).”

    그와 짐 스터지스는 6개 에피소드 중 한 이야기에서 짝을 이룬다. 배두나는 여주인공 손미로 등장한다. 손미는 복제인간이지만 ‘공기인형’에서 그가 연기한 인형과 확연히 다른 캐릭터다. 처음에는 인간에게 생각을 조종당하지만 차츰 사람처럼 자각한다. 영화에선 이를 ‘상승’이라고 표현하는데, 그러면서 한국인 해주(짐 스터지스 분)와 사랑에 빠지고 인간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 연기 호흡은 잘 맞던가요.

    “사랑 이야기가 한 축이라서 연기 호흡이 중요했는데 잘 맞았어요. 처음에는 친구도 없고 촬영장에도 혼자 갔는데 스터지스가 옆에서 많은 도움을 줬어요. 주위 사람들에게 잘하고 현장 분위기를 중시하는 배우거든요.”

    ▼ 사랑하는 상대가 외국인이라면 국제결혼 할 건가요.

    “생각을 안 해봤는데…, 국가나 인종에 대한 선입관은 없어요. 영화에도, 문화에도, 예술에도, 인간에게도 국경은 없다고 생각해요. 작품을 고를 때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일본과 할리우드 영화에 출연하고 그러니까 독특한 행보라고 보는 분이 많은데, 해외 진출을 염두에 두고 계획한 일이 아니에요. 좋은 감독과 좋은 작품을 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 ‘클라우드 아틀라스’에서 실제 이상형에 가장 가까운 사람은 누군가요. 톰 행크스? 휴 그랜트?

    “고르기가 쉽지 않네요. 굳이 말씀드리자면 제 이상형은 어떤 부분에서 조금이라도 존경심이 드는 사람이에요. 그렇게 따지면 누구라도 이상형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전 모든 사람이 저마다 특출한 점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생각하거든요.”

    ▼ 엄마가 되면 아이를 잘 키우겠네요. 특출한 면을 하찮게 보지 않을 테니까.

    “제 동생이 중학교 1학년 때 미국으로 유학을 갔어요. 그전까지는 그 아이가 뭘 잘하는지 몰랐어요. 근데 가자마자 선생님이, 얘가 미술에 소질이 있다는 거예요. 저희 가족은 ‘절대 그럴 리가 없다. 정말이냐?’ 했는데 그 아이가 미술로 대학을 갔어요. 나중에 졸업작품을 보니까 정말 뛰어난 거예요. 그렇게 공부로 평가하지 않고 재능을 찾아주는 게 좋은 것 같아요. 저도 그런 엄마가 되고 싶어요.”

    ▼ 두나 씨의 재능은 부모님이 찾아줬나요.

    “운이 좋았어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제가 뛰어난 재능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조용하고, 놀 줄 모르고, 끼도 없고, 쑥스러움 잘 타고, 가만히 앉아서 책 읽거나 공부하는, 평범한 학생이었거든요. 근데 1998년(한양대 연극영화과 1학년 때) 우연히 길거리에서 캐스팅돼 사진모델이 되고 내가 카메라를 좋아한다는 것도 알게 됐어요. 그후 CF 찍고 용돈을 많이 벌려고 하다가 영화계에까지 온 거예요. 처음엔 연기를 아르바이트로 생각했지, 배우에 대한 열망도 없었고 연기의 ‘연’자도 몰랐어요.”

    연기 재능 스무 살 넘어 알아

    할리우드 사로잡은 국가대표  배우 배두나
    ▼ 배우 하려고 연극영화과 간 게 아닌가요.

    “연출 쪽에 관심이 있어서였어요. 한양대가 연출로 유명하니까. 근데 영화를 찍으면서 연기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어요. 간절한 만큼 기회가 오더라고요. 그걸 잡아서 더 큰 열망으로 키워간 운 좋은 케이스였죠. 만일 모델로 발탁되지 않았으면 평생 연예계와 담을 쌓고 지냈을 거예요. 학창시절엔 집과 학교밖에 몰랐고 예술에 소질이 없어서 저한테는 사무직이 어울린다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저도 몰랐던 재능을 발견한 거죠. 엄마도 배우생활을 해서 저한테 끼가 있는지 눈여겨보셨을 텐데 너무 없으니까 몰랐어요.”

    그의 모친은 연극배우 김화영 씨고, 부친은 풀무원 부사장을 지낸 기업인 배종덕 씨다. 배두나는 2남1녀 중 둘째다.

    ▼ 연기 데뷔작이 ‘학교’(1999년에 방영된 KBS 청소년드라마) 아닌가요?

    “처음 찍은 작품은 영화 ‘링’인데 개봉이 늦어져 ‘학교’가 연기 데뷔작으로 알려졌죠.”

    ▼ 고명딸이라 사랑을 많이 받았겠네요.

    “엄마 아빠는 늘 ‘우리 딸 최고’라고 하세요. 저한테 ‘불과 얼음이 공존한다’는 이야기도 하시고요. 감정 기복이 크다는 의미일 텐데 그래서인지 어떤 역을 맡아도 감정 표현이 수월한 것 같아요.”

    ▼ 어릴 적 꿈은 뭐였나요.

    “배우는 아니었어요. 엄마 덕에 다섯살 때부터 연기하는 현장을 봤지만 연기가 내 길이라는 생각은 미처 못 했어요. 연기는 내가 감히 엄두를 낼 수 없는 세계라는 생각이 강했어요.”

    학창시절엔 스스로 인정하듯 “수줍음 많은” 여학생이었지만 그에게도 또래 친구들처럼 좋아하는 연예인이 있었다. 중학교 시절엔 배우 심은하가, 고교 때는 일본 록그룹 엑스재팬이 우상이었다. 그는 “엑스재팬 노래를 이해하려고 일어를 독학했을 정도”라며 “가수를 쫓아다니는 다른 친구들과는 좋아한다는 것을 표현하는 방식이 달랐다”고 기억했다.

    ▼ 똘똘하고 개성 강한 모범생이었나요.

    “우등생은 아니었어도 모범생이긴 했어요. 밖에 돌아다니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고, 학업에만 열중했어요. 공부를 잘하진 않아도 열심히 하고, 착실하고, 만화책을 참 좋아했어요. 조용해서 존재감이 크지 않은 학생이었죠.”

    ▼ 뭔가에 꽂히면 푹 빠지는 모습이 연기할 때 몰입하는 거랑 비슷하네요.

    “그런 재능이 있다는 걸 스무 살이 넘어서 알았어요. 데뷔 전에는 카메라 앞에 서면 달라질 수 있는 끼가 내 안에 있다는 걸 전혀 몰랐어요. 요즘은 일찍 재능을 발견하고 키우더라고요. 참 부러워요.”

    그 역시 다른 배우들에겐 부러움의 대상이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소녀가장(드라마 ‘글로리아’의 글로리아) 같은 인물도 실감나게 연기하고, ‘공기인형’의 인형이나 손미 같은 미지의 캐릭터에도 생명력을 불어넣기 때문이다.

    “사실 전 어려움 없이 자라서 힘겨운 상황에 처한 사람을 지레짐작으로 연기할 수가 없어요. 그 캐릭터와 상황에 완전히 동화돼야만 연기가 나와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몰입밖에 없어요. 그때는 다른 모든 상황을 캐릭터에 빠져서 동화시켜요. ‘글로리아’ 할 때는 감정이 흐트러질까봐 매니저의 도움도 마다했어요. 고지식하죠. 신인 때 조감독이었던 분이 나중에 감독이 돼서 절 썼는데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아직도 100%의 마음으로 연기하는 게 힘들지 않느냐고요. 그 말 들었을 때 왠지 뿌듯했어요.”

    마음으로 관객 움직이는 배우

    ▼ 감정이입을 잘하나요.

    “마음 쓰는 직업을 15년째 하고 있으니 일반인보다 감정이입이 빨리 되겠죠. 머리도 쓸수록 발달하는 것처럼요. 그렇다고 어떤 역이나 다 되는 건 아니에요. 작품을 고를 때도 시나리오를 보면서 내가 할 배역에 몰입할 수 있는지를 무척 중요시해요. 캐릭터가 아무리 좋아도 감정을 억지로 만들어내는 건 못 하거든요.”

    ▼ 작품에 몰입하면 캐릭터에서 빠져나오기가 힘들다던데.

    “비교적 금방 빠져나오는 스타일인데 ‘공기인형’ 때는 좀 시간이 걸렸어요. 그 작품 끝나고는 일도 몹시 하기 싫고, 제가 쓸모없어지는 기분이 들었어요. 공기인형이 죽을 때처럼. 근데 반년 노니까 괜찮아지더라고요, 하하하.”

    진지 모드로 일관하던 그가 모처럼 크게 웃는다. 장내를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웃음소리가 그의 표정처럼 맑고 밝다.

    ▼ 그동안 연기한 캐릭터 중 실제 모습과 가장 닮은꼴이라면.

    “일본 영화 ‘린다 린다 린다’에서 연기한 ‘보컬리스트 송’이 아닐까 싶어요. 노래를 잘 못하는데도 밴드 보컬이 되는, 호기심 많고 도전의식도 강한 인물이거든요.”

    ▼ 연기 욕심은 언제 생겼나요.

    “‘플란더스의 개’를 찍으면서 배우와 영화 연기에 대한 존경심이 생겼어요. 영화라는 장르가 많은 사람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지는 종합예술이라는 것을 절실히 느꼈어요. 내가 그런 작품에서 한몫할 수 있어서 기뻤고 꼭 좋은 배우가 되고 싶었어요. 그전에 ‘학교’나 ‘광끼’ ‘링’ 같은 작품을 할 때는 배우의식도 없고 연기에 큰 애정이 없었죠.”

    ▼ 연기 잘하는 건 어머니 유전자의 영향인가요.

    “그런 것 같아요. 연기력을 타고났다는 게 아니고 엄마 조언 덕을 많이 봤어요. 연기를 시작하면서 엄마에게 손을 내민 적이 있어요. 연기 선생이니 연기 잘하는 방법을 알려달라고요. 근데 엄마가 거절하셨어요. ‘기술을 먼저 쓰면 보는 이의 마음을 열 수 없다. 기술에 익숙해지면 타성에 젖기 쉽고 감동을 줄 수도 없으며 연기가 늘지 않는다’고 하시면서요. 그 말씀을 깊이 새겼어요. 그때부터 25세 때까지는 닥치는 대로 출연하면서 연기를 배웠어요. 작품의 규모나 배역의 비중, 출연료를 따지지 않고 좋은 감독이나 배우들에게서 연기를 배울 수 있는 작품이라고 판단되면 무조건 출연했어요. 그 덕에 나만의 연기 철학을 갖게 됐죠.”

    순간 라나 워쇼스키 감독이 한 얘기가 떠올랐다. 라나 감독은 “할리우드 배우들은 테크닉을 앞세우는데 배두나는 다르다. 진정성이 묻어난다”고 평가했다. 이제 배두나의 연기 철학을 들어보자.

    “배우는 마음으로 관객을 움직이는 사람이에요. 연기에 임할 때도 말보다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비록 말이 좀 서툴더라도 캐릭터에 진심을 담으면 관객도 그 진심을 느낄 수 있다고 믿어요. 제가 원어민이 아니면서 ‘클라우드 아틀라스’에 도전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믿음이 있어서예요.”

    ▼ 톰 행크스가 “두나는 우리 영화의 영혼”이라고 했어요.

    “톰 오빠에게 정말 감사한 게, 어디를 가든 매번 그렇게 절 칭찬하세요.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 손미가 감독의 메시지를 가장 직접적으로 전하는 역이라 ‘영혼’이라는 표현을 쓰신 것 같아요. 대사 자체가 메시지거든요.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타인과 연결돼 있고 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니다’ 하면서 사람의 인연에 대해서도 얘기하고 또 내가 지금 한 악행과 선행이 나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해요. 서양 문화와 어우러진 윤회사상이 영화 전체에 깔려 있죠.”

    할리우드 특수분장의 힘

    ▼ 왜 이 작품을 선택했나요. 불교를 믿나요.

    “제가 단순해요. 종교가 없어요. 불교 교리도 몰라요. 근데 영화를 보면 아시겠지만 굉장히 예술적이고 실험적이면서도 볼거리도 풍부한,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작품이에요. 그리고 제가 선택한 게 아니라 선택을 받은 거예요. 2011년 4월 초에 워쇼스키 감독이 캐스팅 제의를 했어요. 그분은 미국 시카고에 살고 전 한국에 사니까 화상미팅을 했는데 ‘공기인형’이랑 ‘복수는 나의 것’‘괴물’에서 절 봤다며 손미 역을 제의했어요. 워쇼스키 감독의 ‘매트릭스’와 톰 티크베어 감독의 ‘향수’를 워낙 재미있게 봐서 호감을 갖고 있었는데 그런 분들이 작품을 같이 하자니 설레더군요. 각색과 배우들도 훌륭하지만 그분들 이름만 듣고도 어서 일해보고 싶었어요.

    그때 저는 ‘코리아’라는 영화에 캐스팅돼서 탁구 연습을 하고 있었어요. 2011년에 제가 내리 논 줄 아는 분이 많은데 실은 가장 바쁘게 보냈어요. 6개월 동안 탁구 연습하고 영화 오디션 보고 스크린 테스트 받느라 시카고에 다녀오고 그랬거든요. 그런 과정을 모두 거친 후 그해 6월에 출연이 확정됐죠. 본격적인 영화 촬영은 그해 9월 중순부터 12월 말까지 독일 베를린에서 했고요. 비록 영어가 능숙하진 않았지만 제 연기를 보고 감독님들이 흡족해하고 많은 배우가 존중해주고 그래서 무척 뿌듯했어요. 연기로 소통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 출연 제의를 받았는데 왜 오디션을 또 봤나요.

    “거기서는 오디션이 흔해요. 연기력으로 정평이 난 최상급 할리우드 배우가 아니면 처음 하는 캐릭터를 맡을 땐 누구나 오디션을 거쳐야 해요. 제가 알기로는 할리우드의 유명한 배우들도 처음 시도해 검증되지 않은 캐릭터에 대해서는 신인감독 앞에서도 오디션을 거치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거기서는 그게 그다지 거북한 일이 아니거든요. 우리나라에서는 어느 정도 믿음을 주는 배우들에게 오디션을 보라는 게 실례지만요. 전 영어로 연기해본 적도 없고 처음 도전하는 캐릭터라서 오디션 보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 영어로 연기하는 게 힘들진 않던가요.

    “연기할 땐 힘들지 않았어요. 대사를 배워서 하면 되니까요. 근데 일상생활에서도 영어로 해야 하니까 의사표현이 쉽지 않았어요. 오기가 나서 영화촬영 끝나고 영국에 가서 6개월 동안 영어를 배웠어요. 거침없이 말하고 들으려면 그 정도로는 턱없어요. 일상생활에서 쓰는 짧은 대화를 하는 수준이죠.”

    ▼ 1인 3역은 처음이었을 텐데.

    “굉장히 재미있었어요. 이 영화에 끌린 이유 중 하나예요. 영화에 출연한 할리우드 배우들도 혼자서 여러 배역을 해야 하는 설정에 끌렸을 거예요. 인종과 성별, 시대를 넘나드는 1인 다(多)역은 흔치 않으니까요. 저 같은 경우에는 손미 외에 멕시코 여자와 아일랜드계 미국 여자로도 나오는데 특수분장을 하고 나서 깜짝 놀랐어요. 거울로 보니 완전히 다른 사람이더라고요. 그게 참 신선하면서도 흥미로웠고, 할리우드의 특수분장 수준에 감탄했어요. 그런 경험을 언제 또 할 수 있겠어요? 그저 이 순간을 즐겨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죠.”

    슬럼프도 연기로 극복

    ▼ 일본이나 미국은 영화 찍는 스타일이 우리와 다른가요.

    “일본과 미국은 서로 비슷해요. 처음부터 끝까지 정해진 일정과 장소에서 촬영이 진행돼요. 스케줄도 주말에는 쉴 수 있게 합리적으로 짜여 있고 시간을 허비하지도 않아요. 반면에 우리나라 영화는 찍는 데 좀 오래 걸리고, 약간 즉흥적인 면도 있고, 여유롭고 그렇잖아요. 촬영 시스템은 여러모로 차이가 있지만 문화적인 면은 다 비슷한 것 같아요. 영화 작업이 본래 여러 사람이 가족처럼 뭉쳐 그 힘으로 끌고 가잖아요. 그래서 베를린에도 혼자 갔어요. 미국 영화는 다르다는 선입관을 버리고 일단 가서 배우자는 생각으로요.”

    ▼ 한국이 10대 영화 강국이라던데 해외에서 우리 영화의 위상은 어느 정도인가요.

    “외국인들이 한국 영화를 좋아해요. 특히 유럽에서 인기가 좋아요. 김기덕, 박찬욱, 봉준호 감독의 작품을 많이 알고 있더군요.”

    ▼ 세계적인 스타들은 뭔가 다르긴 하던가요.

    “인격도 훌륭하고 연기력과 카리스마는 두말할 것도 없이 훌륭하죠. 명성이나 커리어에 연연하지 않고 일 그 자체로 즐기는 모습이 멋졌고 그들을 보면서 한 수 배웠습니다.”

    ▼ 영화가 좀 어렵다는 평도 있어요.

    “분석하지 말고 마음을 열고 보면 재미있어요. 배우들이 여러 모습으로 나오는 걸 가만히 즐기다보면 6가지 이야기가 어느 순간 퍼즐처럼 하나로 맞춰져요. 표면적으로는 환생과 인연을 소재로 한 불교적인 얘기지만 에피소드마다 감독들이 하고 싶은 말을 녹여놨어요. 그런 것들과 인연의 고리를 발견하는 재미도 있고요.”

    ▼ 톰 티크베어와 워쇼스키 감독을 뭘로 사로잡은 건가요.

    “자화자찬을 잘 못해서 말하기 쑥스러운데…(웃음), 평소에는 수줍음이 많지만 연기할 때는 담대하고 당찬 점을 좋게 본 게 아닌가 싶어요.”

    ▼ 영화 ‘청춘’(2000년)의 베드신에서 알몸 대역을 쓴 것도 쑥스러워서였나요.

    “그때는 너무 어렸어요. 어머니가 곽지균 감독은 영상미를 추구하는 분이니 그분께 연기를 배우면 좋다고 권하셔서 출연했는데 베드신의 노출 수위가 그땐 부담스러웠어요. 결국 대역을 썼는데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워요. 그다음부터는 내가 다 해내지 못할 작품은 하지 않아요. 내가 하지 못해 대역을 써야 한다면 그것을 할 수 있는 배우에게 기회를 주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해요. ‘청춘’은 그런 깨달음을 얻고 배우로서의 자세를 배우는 계기가 됐죠.”

    ▼ 데뷔 후 탄탄대로를 달려온 것 같은데 권태기나 슬럼프는 없었나요.

    “있었어요. 영화 ‘괴물’을 찍고 나서요. ‘내가 20대를 쏟아 부어 연기했는데 과연 난 지금 좋은 배우인가, 잘하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 힘든 시간을 보냈어요. 그러다 ‘공기인형’에 캐스팅돼 바쁘게 살다보니 괜찮아졌어요. 동굴 속에 갇혀 있으면 생각이 많아져 더 깊은 수렁에 빠지게 돼요. 배우는 심리적 괴로움도 촬영 현장에서 자연히 극복하는 것 같아요.”

    모델 출신이어서일까. 스키니 진에 흰 캐주얼 남방을 걸쳤을 뿐인데도 옷차림이 남달라 보였다. 평범한 옷도 특별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그의 패션은 어딜 가나 이목을 끈다.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패션 아이콘’이라고 하는 이유다. 옷 잘 입는 비결이라도 있는 것일까.

    “다 엄마 덕분이에요. 엄마가 생후 1년 동안 마사지를 해주셨어요. 다리를 죽죽 늘려주는 베이비 마사지요. 살이 찌지 않게 소식하도록 관리도 해주셨어요. 친구들이 우리 집에 놀러와 간장종지에 밥 먹는다고 놀릴 정도였어요. 엄마가 늘 ‘여자는 아름다워야 한다, 미니스커트를 입어도 머리가 꽉 차 있어야 멋있어 보인다’고 하셔서 공부도 열심히 한 것 같아요(웃음). 패션에 관심을 가지고 접할 기회도 많았어요. 옷을 잘 입으려면 기본적으로 몸매가 날씬해야 하고 자신감이 있어야 해요. 전 딱 떨어지는 정장을 싫어해요. 드레시한 상의에 청바지라든지, 목걸이를 할 땐 귀고리를 빼는 식으로 꾸미지 않은 듯하게 입어요. 차려입은 느낌이 들면 오히려 촌스러워 보일 수 있거든요.”

    “가임기 얼마 안 남았는데…”

    보면 볼수록 여성미를 물씬 풍기는 이 여자가 왜 지금까지 미혼일까. “3년 사귄 남자친구와 2011년 10월에 헤어졌는데 그게 마지막 연애였다”고 하니 솔로로 지낸 지가 1년이 넘었다.

    ▼ 첫사랑은 언제 했나요.

    “한양대 1학년 때 캠퍼스 커플이었어요. 1년간 사귀었는데 그게 첫사랑이에요.”

    ▼ 결혼하고 싶은 상대는 어떤 타입인가요.

    “자상하고, 존경심이 드는 사람이랑 하고 싶어요. 반짝거리는 부분이 있는 사람이요. 누구에게나 반짝거리는 부분이 있는데 상대에게서 그걸 발견하는 순간 그 사람한테 빠질 것 같아요.”

    ▼ 결혼 계획은 있나요.

    “그런 거 없어요. 언제든 하고 싶을 때 할 거예요. 워낙 파격적이고 즉흥적인 구석이 있어서 이러다 갑자기 결혼하게 될지도 몰라요. 반짝거리는 부분으로 존경심이 들게 하는 사람을 만난다면 말이에요(웃음).”

    ▼ 애인 생기면 공개 연애할 건가요.

    “절대 안 할 거예요. 마지막 연애에 대해선 이미 1년도 더 지난 일이라 담담하게 밝혔지만 공개 연애는 할 게 못되더라고요. 한번 해보니까….”

    ▼ ‘클라우드 아틀라스’ 출연진이 배두나 씨한테 소주를 배웠다고들 하던데 술은 잘해요?

    “전혀 아니에요. 소주 반 병 마시면 집에 가야 해요. 그 정도 마시면 졸려서 앉아 있질 못해요. 특별한 술버릇은 없는데 술을 마시면 졸려요. 전 소주보다 청하나 와인을 좋아해요. 와인 브랜드는 안 따져요. 레드와인이면 돼요.”

    ▼ 배우가 천직이라고 생각하나요.

    “그런 것 같아요. 촬영 현장에 있으면 저도 모르는 힘이 나오거든요.”

    ▼ 다시 태어나도 배우 할 건가요.

    “아니요. 다시 태어날 수 있으면, 그리고 재능이 주어진다면 화가가 되고 싶어요. 펜과 종이만 있으면 유에서 무를 창조해내고, 생각한 것을 자유자재로 표현해낼 수 있는 직업이잖아요. 그게 부럽고 멋져요.”

    ▼ 연예인이 안 됐으면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요.

    “현모양처 아니면 아이 엄마가 돼 있지 않을까 싶어요. 아무리 일로 성공한 사람이라도 자식을 키우는 엄마보다 위대할 수는 없어요. 아이 낳아보고 싶어요. 잘 키울 수 있을 것 같아요. 근데 가임기가 얼마 안 남았어요.”

    ▼ 무슨 소리예요? 요즘은 40대에도 자연분만을 할 수 있어요. 배란만 가능하다면.

    “하하하, 의술이 좋긴 좋네요. 세상이 참 살 만한 걸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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