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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함께하는 우리 산하 기행

시인이 꽃을 불렀다 바람이 바다의 시간을 채웠다

전북 고창

  • 최학 │우송대 한국어학과 교수 hakbong5@hanmail.net

시인이 꽃을 불렀다 바람이 바다의 시간을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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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을 키운 건 바람인데…

이제는 많이 알려져 선운사를 거친 걸음들이 꼭 그래야 한다는 듯이 찾아가는 곳들이 있다. 인근의 서정주 생가와 문학관, 그 맞은편의 돋음볕 체험마을, 인촌 김성수 생가가 바로 그곳이다. 이곳으로 가려면 선운사 진입로로 되나와 주진천 물길을 따라 곰소만 쪽으로 진행해야 한다. 주진천 냇물이 바다를 만나는 어귀, 그 산 아래 작은 마을이 미당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생가를 가려면 아무래도 미당시문학관을 먼저 거치는 것이 좋다. 교사(校舍)를 개조해 만든 문학관은 외관부터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조형미를 발산하는데, 특히 중앙의 탑 형식 건물이 인상적이다. 이 타워에 대해 시인 이문재는 선운리라는 마을에 누적돼 있는 시간은 물론이고 ‘질마재 신화’가 갖고 있는 문학적인 은유의 부피를 외면하고 있다고 비판하지만, 내가 보기엔 맞배지붕의 단층 건물 사이에 키를 달리해 올라선 두 개의 타워가 주변 풍경에서 크게 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나름 동화적 상상력을 유발하는 구실도 할 것처럼 보인다. 하교 후 빈 교실을 옮겨 다니는 듯한 걸음걸이로 전시실을 둘러보다가 중앙 타워로 올라가면 크기와 모양을 달리한 창을 통해 바깥 풍경을 내다볼 수 있다. ‘화폭 같은 풍경’이란 말도 이런 데서 가능할 성싶다.

문학관을 나와 왼편 마을로 들면 미당의 생가를 만날 수 있다. 초가지붕의 두 집채가 아래위로 나란히 서 있으며 우물과 장독대가 그 사이에 있다.

미당은 1915년 음력 5월 18일 이곳에서 태어났다. 1942년 부친이 세상을 떠나면서부터 이 집이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갔으며 1970년 이후 버려진 채 있었다. 현재의 집은 2001년 복원한 것이다. 전에 없던 초가가 생가에 이웃해 있는데, 미당의 동생인 서정태 옹이 몇 년 전부터 와서 살고 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몇 해 사이에 동네 풍경도 많이 바뀌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미당의 문학 작품에서 형체를 따온 조형물이 골목이며 빈 터 곳곳에 설치돼 있다는 점이다. 미당의 ‘곶감 이야기’에서 빌렸다면서 직접 도깨비집이며 웃돔샘까지 만들어놓았다. 찾아오는 이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고 나름의 이야기가 있는 시인의 마을을 꾸며보겠다는 의도에서 이런 것들을 만들어놓았겠지만, 내 편에서 바라보면 왠지 딱하다는 느낌만 든다. 터가 비었다면 빈 터인 채로 두고 표지석 하나만 세우면 안 되는가. 거듭 꾸미고 형상을 쌓아가는 일은 마을의 신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되레 전에 있던 얘기들마저 지워가는 작업이 됨을 왜 모르는 것일까. 시인도 말하지 않는가, 자신을 키운 건 대부분 바람이었다고. 그래, 시인의 생가엔 바람과 햇살, 풀무더기만 있어도 더 부족할 것이 없을 듯싶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지 않을란다.

- 서정주 시 ‘자화상’ 부분

미당 시문학관에서 들판 너머로 빤히 바라보이는 동리, 부안면 송현리의 돋음볕마을은 담벼락 그림으로 일찌감치 매스컴을 많이 탔다. 서정주와 그의 시를 기리기 위해 2005년부터 마을 뒷산에 국화꽃을 심고, 2006년 ‘100억 송이 국화축제’를 열어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는 데 성공한 마을에서는 좀 더 항구적인 볼거리를 제공한다는 의도에서 마을 골목의 담벼락에 벽화를 그리고 지붕을 채색했다. 담벼락 벽화 중에는 시 ‘국화 옆에서’를 적은 국화 그림도 있고 사실적으로 마을 주민들의 얼굴을 그린 것도 있어서 정겨움을 더한다.

돋음볕마을에서 734번 지방도를 타고 부안 방향으로 가다보면 이내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 생가’ 안내판을 만난다. 부안면 봉암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고택이 곧 인촌과 수당 김연수 형제가 태어나고 성장한 장소다. 김성수는 제2대 부통령을 지냈으며 정치, 언론, 교육 등 여러 분야에 걸쳐 큰 족적을 남겼다. 이들 형제가 평생을 두고 합심해 창설 혹은 육성한 기관들이 바로 동아일보사, 고려대학교, 중앙중고등학교, 삼양사, 주식회사 경방 등이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낮은 담을 경계로 나누어진 큰댁 안채며 사랑채, 작은댁, 곳간 등을 만날 수 있는데 방문객들은 이를 통해 당시 전라도 토호의 집 규모며 살림살이를 짐작할 수 있다. 이들 고택은 특이하게 북쪽을 향해 정좌해 있는데도 배산임수의 지형을 잘 이용한 덕인지 집안 분위기가 무겁기보다 되레 환한 느낌을 주는 것도 인상적이다.

조금 전, 미당의 생가를 보고 이곳에 들른 이라면 같은 시대를 산 두 인물의 태생적 환경의 극적인 대비감에 당혹스러울 수도 있지만, 인물들이 생애를 거쳐 이룩한 업적들을 보면서 초가와 기와, 대지의 넓고 좁음과 무관하게 이 땅, 이 지기(地氣)가 예사롭지 않음을 헤아릴 수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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