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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록, 그 진실과 왜곡 사이

“다 나 같은 줄 알았다”

구성(composition)의 오류

  • 오항녕 │전주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hallimoh@hanmail.net

“다 나 같은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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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는 해, 지는 해

같은 충청도(충청남도)지만 정말 다른 곳이 공주와 대전이다. 본래 대전은 대전천(大田川)이 자주 범람해 취락지가 별로 없던 곳이었다. 1904년 경부철도가 부설되면서 대전은 신흥 상업도시의 면모를 띠게 됐다. 반면 경부선과 호남선이 지나지 않던 공주와 강경은 도시의 모습을 급속히 상실해갔다.

이는 화물량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대전역에 입하된 화물의 대종은 신탄진, 옥천, 논산, 무주, 보은, 공주, 문의 등지에서 들어온 미곡이었지만, 미곡 이외에 마포, 생선, 소금 등도 소달구지나 지게에 실려 무수히 들어왔다. 예전엔 금강 수계를 통해 공주나 강경으로 모이던 화물이 철도를 통해 대전으로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되자 조선총독부는 일본인 밀집지역에 특별히 설치했던 면(面)으로 대전면을 신설했다. 또한 대규모 치수 공사를 전개해 1912년 목척교, 1922년 대전교를 완성했다. 하지만 경부선 철도를 중심으로 한 천안, 논산 등의 성장에 따라 공주는 중심 시장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해갔다. 1915년 대전면과 공주면의 인구를 보면 공주가 훨씬 많았다. 그러나 1932년 무렵 대전 인구는 공주의 세 배를 넘어섰다. ‘백제 고도(古都)’만이 공주의 유일한 자존심이었다.

치열한 유치 경쟁 끝에 1932년 10월 충남도청이 대전으로 옮겨지면서 대전과 공주의 승부는 완전히 갈렸다. 대전 거주 일본인들은 요로에 진정하고 로비 활동을 벌였다. 일본인들은 유지 단체를 구성했는데, 호남선기성회, 중학교설치기성회, 금강수력전기기성회, 대전번영회, 대전도시계획위원회, 도청이전촉진회 등이 그것이다. 이름만 들어도 무슨 일을 했을지 짐작되는 이들 유지 조직을 통해 대전은 중부권 중심 도시로 거듭났다(지수걸, ‘한국의 근대와 공주사람들’, 공주문화원, 1999, 116~124쪽).



‘그쪽 사람들 다 그렇지 않나?’

이것과 형제쯤 되는 오류가 있다. 그 집단의 일반적 성격을 쏙 빼놓고 어떤 특별한 성격만 가지고 해당 집단을 개념화하는 경향이다. 만일 앞서 필자가 공주와 대전의 차이라는 점만 강조하고, 충청도라는 유(類) 개념이 갖는 ‘어떤 일반성’을 무시했다면 ‘구별 불능의 오류(the fallacy of difference)’ A형에 속한다.

서양사에서는 퓨리턴(Puritans)이라는 개념을 사용함에 이 A형 오류가 보인다. 퓨리턴 신학의 작은 부분인 캘비니즘은 ‘특별한 의미에서의 퓨리턴’이다. 그러나 퓨리턴의 대부분은 일반적 의미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앵글로색슨, 프로테스탄트, 기독교도들을 말한다. 그런데도 퓨리터니즘이라는 말은 종종 특별한 의미의 퓨리턴으로만 쓰이곤 한다.

‘구별 불능의 오류’ B형도 있다. 어떤 집단에 대해 판단할 때, 그 집단에만 특별한 것이 아닌데도, 그 집단의 성질이라 판단하고 탓하는 오류가 그것이다. 남성 중심적이거나 권위적인 어떤 남자 탓에 경상도 남자들은 다 그런 취급을 당한다. 주먹질하는 어떤 사람 탓에 전라도 사람들은 조직폭력배로 오해받는다. TV에 가정부로 자주 등장하는 탓에 충청도 처녀들은 가정부로 오해받는다. 통상 이런 잘못은 경멸적인 판단에서 자주 나타난다.

남도 나 같겠지!

“다 나 같은 줄 알았다”

땅을 팔라는 프랭클린 미 대통령의 요구에 ‘하느님의 답변’으로 대신한 시애틀 추장. 영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의 그 시애틀이 된 추장. 미국 정부가 인디언을 보호구역으로 밀어 넣는 데 성공했는지 모르지만, 과연 둘 중 누가 인류의 미래로 남을까.

‘종족 동일시의 오류(the fallacy of ethnomorphism)’와 ‘자민족중심(自民族中心)의 오류(the fallacy of ethnocentrism)’는 동전의 양면 같은 오류다. 사해동포주의의 오류는 ‘모두 나 같겠지’라는 선입관에 기초한다. 역사 서술에서 자신의 잣대로 다른 세계나 사태를 판단하는 오류는 도덕적 판단만이 아니라 행위를 이해하는 데도 나타난다.

나 어릴 때 ‘주말의 명화’에서는 백인 기병대가 잔악한 인디언을 용감하게 무찔러 이겼다. 그러나 이젠 누가 가해자이고 피해자인지, 누가 선한 사람들이고 침략자였는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세상이 됐다. 아메리카에 에스파냐와 앵글로색슨이 도착한 이래 살육의 역사라는 말마저 식상할 정도로 인디언들은 도륙당하고 추방됐다. 미국이 세워진 뒤 미국 정부와 인디언 사이에 맺은 조약 400여 건 중 지켜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 가운데 오늘의 주제에 해당되는 사례가 있어서 소개하고자 한다.

1854년 무렵, 추장 시애틀이 이끄는 인디언은 쫓기다 못해 궁지에 몰려 있었다. 이때 ‘미국 추장’이던 14대 프랭클린 피어스 대통령은 인디언들에게 땅을 팔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시애틀 추장은 다음과 같은 답장을 보냈다.

백인 대추장은 우리 땅을 사고 싶다고 제의하며 아무런 불편 없이 살 수 있도록 하겠다고 덧붙였다. 그대들은 어떻게 저 하늘이나 땅의 온기를 사고팔 수 있는가. 우리로서는 이상한 생각이다. 신선한 공기와 반짝이는 물은 우리가 소유하고 있지도 않은데 어떻게 팔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는 땅의 한 부분이고 땅은 우리의 한 부분이다. 향기로운 꽃은 형제자매이다. 사슴, 말, 큰 독수리들은 우리 형제들이다. 바위산, 풀잎의 수액, 조랑말과 인간의 체온 모두가 한 가족이다.

이 편지는 미국 독립 200주년을 기념해 해제된 고문서 중에서 발견됐다. 지금은 인터넷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고, 21세기 초입에서 아슬아슬한 근대문명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통찰과 비전을 주고 있다.

백인 추장 프랭클린 대통령은 자기들 방식대로 땅을 팔라고 요구했다. 땅은 재화, 상품이고 사고팔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유와 생활양식에서 나온 요구였다. 그러나 인디언은 달랐다. ‘신대륙’을 차지하려고 온 이방인들에게 인디언은 “나는 당신들이 우리의 땅에 온 것을 기쁘게 여기고 있다. 당신들과 우리는 모두가 이 대지(大地)의 아들들이며, 어느 한 사람 뜻 없이 태어난 사람은 없다”고 대답했다. 프랭클린은 다 자기들 방식과 같을 거라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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