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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 한국의 명장

가장 자연스럽고 가장 인간적인 공예

완초장 이상재

  • 글·한경심 │한국문화평론가 icecreamhan@empas.com 사진·박해윤 기자

가장 자연스럽고 가장 인간적인 공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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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자연스럽고 가장 인간적인 공예

한 면을 만들 때 쉬었다 하면 결이 달라지므로 한 호흡으로 끝내야 한다. 완초 공예는 원형이 대부분인데, 이상재는 사각형 작품을 많이 창작했다.

3년 만에 경진대회 1등

그가 왕골작업을 자신의 업으로 적극 받아들이게 된 데는 당시 왕골이 잘나가던 시기였기도 하지만 다리가 불편한 점도 영향을 끼친 것 같다. 두 살 때 소아마비 열병을 앓은 뒤 그는 다리를 자유롭게 쓰지 못한다.

“앉아서 할 수 있는 이 일이 제겐 잘 맞았습니다. 하도 오래 앉아서 일하다보니 지금은 몸이 많이 아프지만요.”

왕골을 배우는 데는 솜씨도 중요하지만 인내심이 없으면 견뎌내지 못한다고 한다. 한자리에 진득이 앉아서 한 호흡으로 해나가야 하는 왕골 엮기는 그의 불편한 다리가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 일이었으니, 이 또한 운명인가 싶기도 하다.

유형식 할아버지 밑에서 3년 동안 기술을 익히면서 솜씨가 익어갈 무렵, 드디어 그의 솜씨가 빛을 발하는 순간을 맞게 된다. 당시 교동에서는 해마다 왕골경진대회를 열었는데, 그는 이 대회에 참가해 어린 10대의 나이에 당당히 1등을 차지했다.



“유 할아버지 밑에서 배울 때도 잘한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대회에서 1등을 한 것은 저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잖습니까. 그 뒤로 사람들이 제게 배우러들 많이 왔지요.”

동네사람들이 서로 어울려 왕골 일 하는 게 풍습이었던 만큼 사람들은 자연히 솜씨 좋은 그의 주변에 몰려들었다.

“처녀총각, 새댁까지 모여서 밤에 감도 먹고 무도 먹으면서 재미나게 작업을 하곤 했습니다. 저한테 어느 정도 배우면 또 자기네끼리 모여 만들기도 했고요.”

스승이나 제자라는 개념 없이 그저 솜씨 좋은 사람 곁에 모여들어 묻고 배워가며 함께 만드는 풍속은 왕골작업이 비법으로 전수돼야 하는 독점적인 기술이나 단순한 돈벌이가 아니라 동네사람이 함께 어울려 사는 방법이었음을 말해준다. 그래서 유 할아버지에게서 ‘독립’한다거나 하는 생각도 없었다.

“제가 사람들을 가르치던 시절에도 제게 부족한 점이 있으면 언제든 할아버지한테 가서 물어보곤 했습니다. 한동네 사람인데요 뭐.”

서로 솜씨는 뽐냈을지언정 다투지 않고 어울려 일하며 또 작품도 잘 팔려나가던 그때, 이상재는 젊었고 행복했다. 공예니 예술이니, 친환경이니 하는 거창한 말도 없었고 그런 의식조차 없었지만 그래도 이상재는 그때가 좋았던 것 같다. 만들기 바쁘게 팔려나가던 신 나던 시절이었으니까. 지금 국가가 인정하고 보호하는 중요무형문화재가 돼 장인으로서 최고 명예를 누리고 있지만, 사람들에 둘러싸여 젊은 지도자로 살던 그 시절과 비교할 수는 없다. 지금도 한마디씩 촌철살인의 농담을 던질 줄 아는 그는 왕년에는 술도 즐겼다고 하니 젊은 시절엔 풍류 넘치는 장인이었을 것 같다.

실력과 카리스마를 갖춘 젊은 선생님 곁에는 동네 처녀도 많이 와서 배웠다. 지금 아내인 유선옥 씨도 그에게 배우러 온 학생이었다. 두 사람은 동네 처녀 총각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스승과 제자 사이기도 한데, 어떻게 사랑이 싹텄을까?

“열네 살에 처음 배우러 왔으니 그때야 뭘 모르고, 열아홉 살에 눈이 맞아 스물두 살에 결혼했지요.”

아직도 소녀 같은 유선옥 씨는 수줍으면서도 귀여운 인상 그대로 얌전하게 있다가도 말할 때는 재치가 반짝인다. 이런 매력을 지닌 처녀와 실력파 총각 선생은 ‘눈이 맞아’ 1970년 결혼했다. 소녀가 여인이 되고, 젊은 스승이 남편이 되는 이야기는 언제나 로맨틱하다. 스승으로서 이상재가 기억하는 유선옥 씨는 ‘가르쳤던 이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제자’다. 실제로 1999년 전승공예대전에서 다과그릇 세트로 대통령상까지 받은 유선옥 씨는 이상재 완초장의 전수교육조교이기도 하다. 이 명장의 작품이 힘과 기품이 있는 데 비해 유선옥 씨의 작품은 아주 섬세하고 고와서 여자의 솜씨라는 걸 단박에 알 수 있다.

강화로 돌아오기까지

두 사람 사이에 딸 정민이가 태어나고, 딸이 네 살 되던 무렵인 1970년대 말 이상재는 처음 교동을 떠나 서울로 가게 된다.

“강화도에서 치과를 했던 할머니를 알았는데, 그 딸이 완초 공예에 관심이 있다고 소개를 해주어서 그 따님 되는 분과 일을 하게 됐습니다. 교동 애들 열댓 명 데리고 서울 안암동에서 작업을 했지요.”

이상재 부부가 제자들과 함께 살림집 겸 공방에서 작업을 하면, 물주인 치과원장 따님은 백화점에 낸 가게에서 작품을 팔았다. 이 시기 그는 새로운 작품을 많이 창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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