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8년 5월 16일 열린 ‘태종대왕 전통 문화행사’에서 어연 행렬 참석자들이 태종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서울 서초구 내곡동 헌릉 입구로 들어서는 광경. 헌릉은 태종과 원경왕후의 능이다.
TV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 태종 역을 맡았던 탤런트 유동근의 후덕한 인상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다르다.
태조 3년 6월 1일, 정안군 이방원은 조선에 대한 명나라 황제의 의구심을 풀려고 사신으로 떠난다. 태조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말한다.“너의 체질이 파리하고 허약해서 만리의 길을 탈 없이 갔다가 올 수 있겠는가?”격변의 건국 현장을 누비면서 정몽주와 정도전을 죽이고 왕자의 난을 통해 형제를 살육한 태종은 의외로 파리하고 허약한 체질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성격은 강명(剛明)했다. ‘강’은 성격이 칼처럼 날카롭다는 것이고, ‘명’은 머리가 명철했다는 이야기다. 태종이 현직에서 물러난 세종 2년 10월 28일의 기록에 강명하다는 말이 나온다.
“일찍이 의원 원학(元鶴)이 상왕전(上王殿)에 시종하였으므로, 상왕이 종하가 의술에 매우 능하다는 말을 듣고, 또 양홍달(楊弘達)이란 의원이 너무 늙었으므로, 종하로 하여금 원학과 더불어 번갈아 입직하게 하려고 원학을 보내어 종하를 부르니, 종하가 상왕의 강명(剛明)함을 꺼려서 가까이 모시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자신할 만한 경험이 없다 하여 나가지 아니하니, 원학이 다시 사람을 보내서 불렀으나, 또 가지 않으므로 곧 의금부에 내려 신문한즉, 종하가 말하기를, ‘상감께서 명철하오신데 만일에 방서(方書)를 물으시면 어찌 대답하오리까. 그래서 가지 못하였나이다’ 하므로, 곧 대역으로 논죄하여 참형에 처하고 그 가산을 적몰하였다.”
실록의 기록에서 진료하길 꺼렸다가 참형에 처해진 유일한 의원이 바로 정종하다.
명철하면서 고금의 서적에 능통했던 태종의 지적 능력은 여러 차례 의학에 대한 논평으로 이어졌다. 한마디로 ‘의원들, 공부 좀 더 해라’는 오만으로 느껴질 정도다. 태종 15년 1월 16일, 궁중에서 여남은 살 되는 아이가 병이 나자 조청이라는 의원이 약을 지었는데, 그게 어른 분량이었다. 소아의 약은 성인 분량의 반만 짓게 돼 있으므로 소아를 몇 살까지로 규정하는지에 대해 묻자 조청은 5, 6세까지를 소아라고 한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태종은 ‘천금방’이란 책을 찾아 2, 3세를 영아라 하고 10세까지를 소아(小兒)라 하며, 15세는 소아(少兒)라고 구분한다는 대목을 직접 보여주면서 소아의 범위와 약 사용량에 관해 조청을 굴복시켰다.
파리하고 허약한 체질
파고지(破古紙)는 ‘동의보감’에서 신장의 기능이 떨어져 정액이 절로 나오고 허리가 아프며 무릎이 차고 음낭이 축축한 증상을 치료하는 성기능 개선 약재다. 이름 자체가 ‘오래된 문창호지를 뚫는다’는 뜻을 지녀 벽지와 착각한 사람도 있었던 것 같다. 태종은 도벽지(塗壁紙)를 파고지라고 우기는 사람도 있으니 의학자들이 약방서에 밝지 못하다고도 지적했다.
왕권을 강화해 국가 이성이 되기를 원했던 태종은 궁중 생활을 좋아했을까. 태종 2년 9월 19일의 기록은 궁중 생활이 얼마나 힘들고 답답했는지 잘 보여준다. “금년에는 종기가 열 번이나 났다. 의사 양홍달에게 물으니 말하기를, ‘깊은 궁중에 있으면서 외출하지 아니하여 기운이 막혀 그런 것이니, 탕욕(湯浴)을 해야 된다’고 하였다.” 간관(諫官)들은 왕에게 지지 않고 온천행을 반대한다. 태종의 반응은 그의 성격을 다시 한 번 잘 드러낸다. “간관들이 ‘전하는 춘추가 젊어서 반드시 병이 없을 것’이라 하였는데 그렇다면 20~30세의 젊은 사람은 반드시 병이 없는가, 간관이 내 병의 치료를 못하게 막으니 나는 가지 않겠다.”
온천행을 포기하면서 강무(講武)를 가겠다고 하자 간관들은 다시 왕의 강무를 막는다. 강무는 사냥을 통해 무예를 익히는 행사인 만큼 말달리기를 포함하는데 태종은 말을 과격하게 몰아 속력을 내는 스피드광이었기 때문이다. 이날 말미에 조영무가 나서서 신하들의 걱정을 대변한다. “여러 아랫사람이 사냥을 안 했으면 하는 것은 진실로 전하께서 마음대로 말을 달리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태종 8년의 기록은 이런 사실을 더욱 분명히 입증한다. “태상왕이 갑자기 풍질(風疾)을 얻었는데, 임금이 이때에 침구의 잘못으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다가, 이 소식을 듣고 놀라고 두려워하여 곧 편복으로 대궐 동쪽 작은 문을 나와 말을 달려가니, 시위(侍衛)하는 자들이 모두 미치지 못하였다.”
의학에 대한 논평
실록은 태종 즉위 13년이 지나도록 구체적인 병명을 기록하지 않았다. 앞에 자신이 지목한, 종기가 자주 발생했다는 것 외에 주목할 만한 질병 기록이 없다.
태종은 재위 8년이 지나면서 본격적으로 병이 나기 시작한다. 세자에게 문소전의 제사를 대행하게 하고 날씨가 음산해지자 약주를 정지하게 하는가 하면, 고기반찬을 먹도록 청하기도 한다. 13년 8월 11일 기록에선 자신의 질병을 구체적으로 밝힌다. “내가 본디 풍질이 있었는데, 근일에 다시 발작하여 통증이 심하다. 지난밤에 조금 차도가 있었으니, 경들은 우려하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