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호

외로운 섬, 울창한 솔숲 바람결에 실려온 피냄새

‘관상’ 심적(心的) 촬영지, 강원도 영월

  • 글 · 오동진 | 영화평론가 사진 · 김성룡 | 포토그래퍼

    입력2015-04-21 16:15: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영화 ‘관상’이 촬영된 곳은 영월이 아니다. 그러나 단종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수양대군에게 쫓겨나 열일곱에 사약을 받고 죽임을 당한 임금. 결국 ‘관상’은 그 얘기를 하려던 것 아니었는가.
    외로운 섬, 울창한 솔숲 바람결에 실려온 피냄새
    생각보다 그리 크지 않은 김종서는 호랑이상(相)답게 근엄하고 꼿꼿한 자세로 밤길을 나선다. 그는 기분이 나쁘지 않다. 하루가 멀다 하고 근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종사(宗社)의 일이었다. 문종이 서거하신 후 세자가 왕위에 올랐지만 아직 너무 어리다. 거기다 권력을 찬탈하려(한다고 생각하)는 수양대군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그러나 내일이면 이런저런 걱정도 끝이다. 내일 수양대군이 명나라 사신을 맞으러 갈 때 호위가 약해진 틈을 노려 그를 없앨 것이다. 왕가의 자식이어도 어쩔 수 없다. 종묘사직의 안위를 위해서는.

    호랑이 사냥

    그러나 아뿔싸.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대문 앞에는 김종서를 노린 척살자들이 진을 치고 있다. 김종서에겐 마땅히 들고 싸울 만한 무기도 없다. 오늘은 위병들도 뿌리친 상태. 그의 목숨은 이제 경각에 걸렸다.

    쿠데타 순간만큼 드라마틱하고 영화적인 장면도 없다. 선의에서 저지른 것이든, 악의의 발로이든(대개는 이 경우지만) 역모(逆謀)에는 늘 핏빛 아드레날린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영화 ‘관상’에서 수양대군(이정재)이 김종서 장군(백윤식)을 암살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피와 살이 튀기는 처절함 그 자체였다. 우리 영화가 이 정도로 디테일이 좋구나 하는 생각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정말 잘 찍었다. 그럴듯하다. 저랬을 것 같다.

    김종서의 가슴팍에 정확하게 꽂히는 장검 한 자루. 그러나 김종서는 요지부동이다. 오히려 칼날을 부여잡고 몸을 앞으로 끌어당기며 상대에게 한 방을 날린다. 또 하나의 장검이 그의 가슴을 겨냥하며 날카롭게 파고들지만 역전의 노장군은 여전히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는다.



    그는 죽을 것이다. 그러나 장군답게 죽을 것이다. 죽어가는 사람이나 죽이는 사람이나 그걸 너무나 잘 안다. 오히려 이럴 때 죽이는 사람은 대개, 그런 그를 위해, 그런 사내 중의 사내가 고통 없이 죽어가도록 예를 갖추기 위해 더 잔인해지는 법이다. 이어서 김종서의 머리를 강타하는 철퇴. 피와 함께 그의 뇌수가 튄다. 김종서의 피와 살이 얼굴까지 튄 상태에서 수양대군은 일갈한다. 그의 입술이 흥분감과 묘한 공포감 그 엇비슷한 무엇으로 살짝 떨린다.

    “자, 이제 호랑이 사냥이 끝났다!”

    외로운 섬, 울창한 솔숲 바람결에 실려온 피냄새

    영화 ‘관상’은 수양대군과 김종서의 정쟁을 그렸다.

    세조는 단종이 그렇게 싫었을까

    강원도 영월에 가기로 한 것은 순전히 이 영화 때문이었다. 이번 취재길은 지난번 길들과 조금 다르다. ‘관상’이 촬영된 곳은 영월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글의 취지에 맞추려면 강원도가 아니라 경기도 용문으로 향해야 했다. 특히 ‘관상’의 첫 장면을 찍은 경기도 유명산 자락 설매재 고갯길의 억새밭, 그곳으로. 영화의 내용으로 보면 영월은 ‘관상’의 이후를 얘기하는 곳이어야 한다. ‘관상2’가 만들어진다면 분명 촬영지는 여기가 될 터이다.

    ‘관상’을 생각하면 단종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수양대군에게 쫓겨나 열일곱 살에 사약을 받고 죽임을 당한 임금. 결국 ‘관상’은 그 얘기를 하려던 게 아닌가. ‘관상’이 던진 질문에 대해 답을 구하려면 유명산보다 영월이 먼저라고 생각했다. 영월이야말로 ‘관상’의 ‘심적(心的) 촬영지’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차의 앞머리를 급커브해서 강원도로 돌린 이유다. 이럇!

    ‘관상’은 수양대군과 김종서를 양 축의 대립각으로 세우고 그 둘 사이에서 살 길을 찾는 김내경이라는 관상쟁이의 얘기로 펼쳐지지만, 이 역사의 수레바퀴의 또 다른 주인공은 분명 단종이었다. 세조는 조카가 그렇게도 싫었을까. 한양 땅에서 여기 강원도 영월 땅이 어디라고, 이 먼 곳까지 유배를 보냈을까. 지금이야 차로 달리면 고작 2시간 반 안쪽. 하지만 그때는 천리 길에 가까웠을 것이다. 오죽 산이 많은 나라인가. 고개 하나를 간신히 넘으면 또 한 고개가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를 몇 날 며칠을 해서야 겨우 당도했을 것이다.

    외로운 섬, 울창한 솔숲 바람결에 실려온 피냄새

    ‘관상’은 600년 전 이야기지만 오늘의 현실과 동떨어져 보이지 않는다.



    고립된 작은 섬, 청령포

    포토그래퍼 김성룡과 운전대를 주고받으며 나눈 얘기도 그런 것이었다. 김성룡이 말했다. 그렇게 싫었을까요? 내가 받았다. 그보다는…역모 세력이 더 두려웠겠지. 여기다 애를 데려다 놓으면 반란도 그만큼 멀어진다고 봤겠지. 김성룡이 다시 말을 받았다. 왕릉이 이렇게 먼 것도 참 특이해요. 그게 아니야, 라고 나는 속으로 말했다. 그리고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왕릉이 수도권 밖으로 이렇게 멀리 있는 건 이거 하나밖에 없어. 27대를 이어온 왕의 능 가운데 단종이 묻힌 장릉 하나만 강원도 영월에 떨어져 있어. 동구릉, 서오릉, 서삼릉, 헌릉, 선릉, 홍릉, 정릉 등등은 어릴 때 우리가 다 소풍으로 갈 만한 거리에 있잖아. 장릉은 그래서 늘 외로워 보여. 이상하게 여기에 자꾸 오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인 것 같아. 그 어린 나이에 얼마나 외롭고 무서웠을까. 그때는 정말 심산유곡이었을 텐데.

    김성룡이 짧은 침묵을 깨고 말했다. 그 27개 왕릉을 한 번 순회하는 것도 괜찮겠네요. 내가 말했다. 그거 참 괜찮아. 왕의 순서대로 능을 가는 거야. 근데 왕릉들이 더러 모여 있거든. 몇 대 임금과 몇 대 임금이 한군데에 있어. 동구릉, 서오릉이 그런 거잖아. 그걸 무시하고 같은 델 또 가더라도 왕의 순서대로 가면 좋아. 그렇게 언제 한번 가봐. 포토그래퍼의 눈이 살짝 감기는 것 같더니 갑자기 소리친다. 여주에서 빠져서 막국수 먹고 갑시다!

    우리 둘은 여주대학교 앞, 이른바 명물이라 불리는 ‘천서리 막국수’ 집에서 비빔 막국수를 훌훌 말아 먹었다. 여기 오면 꼭 먹어야 한다는 돼지보쌈도 곁들였는데 배가 고팠다면 대단한 맛이었을 것이다. 육질이 남달랐다. 백김치에 싸서 찍어 먹는 장맛이 특별했다. 차만 없었으면 퍼질러 앉아 소주 서너 병은 거뜬히 해치웠을 것이다. 그러니 맛있는 것도 적당한 선에서 그쳐야 술 생각을 멈추게 할 수 있다. 우리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강원도 영월행은 그렇게 ‘놀멘놀멘’ 하면서 오갈 수 있는 곳이다. 비운의 역사가 서려 있지만 연인들이 다녀오기 딱 좋은 곳이다. 가기 전에 이렇게 들러서 먹을 곳(고속도로 휴게소가 아닌)도 있다. 길도 잘 나 있다. 무엇보다 시간을 잘 쪼개면 볼 곳이 참 많은 동네다. 그리고 여차하면 하루를 묵고 오는 것도 나쁘지 않다. 강원도라지만 교통 요충지인 충청북도 제천에 딱 붙어 있어 옛날처럼 그리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

    영월에 가면 장릉보다 청령포에 먼저 가는 게 좋다. 물길이 10m도 안 되지만 어쨌든 뭍과 떨어져 고립된 작은 섬으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뭍과 섬 사이에 동강의 한 줄기가 흐른다. 수심이 3m쯤 된다니 조심해야 된다. 예전에 무턱대고 장릉부터 갔다가, 그 단아함에 끌려 시간을 보내다가 결국 어둠을 맞고 청령포를 포기한 적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순서’도 여기가 먼저다.

    삼촌에게 왕좌를 뺏긴 단종은 이곳 청령포로 내려보내졌다. 사육신은 단종을 다시 왕위에 앉히려고 했다. 세조는 그들을 죽이고 단종을 여기로 보냈다. 사육신은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응부·유성원, 생육신은 김시습·원호·이맹전·조여·성담수·남효온을 일컫는다.

    어릴 적 국사 시간에 은근히 사육신을 더 존경할 만한 인물로 배운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런 구분 자체가 우습다. 다들 정쟁의 주도자였을 것이다. 모두들 권력이 먼저였을 것이다. 다만 누구는 이기고, 또 누구는 졌을 뿐이었다.

    외로운 섬, 울창한 솔숲 바람결에 실려온 피냄새

    단종의 무덤 장릉.

    바람결에 듣는 역사

    청령포에 오면 울창한 소나무숲과 그 한가운데쯤 위치한 단종의 처소가 꽤나 고요하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하지만 지금 우리처럼 일종의 여행 중이라면 그렇다는 얘기다. 이것이 유배나 귀양의 와중이라면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다. 작은 강 건너편엔 늘 경비병들이 지키고 있었을 것이다. 아무리 폭이 좁아도 소리 없이 강을 건널 수는 없었을 것이다. 집 뒤쪽으로는 지금 봐도 깎아지른 절벽이다. 이쪽으로는 탈출이 절대 불가한 노릇이다.

    숨어 지내는 처지라면 그보다 더 좋은 조건도 없을 것이다. 뒤쪽 절벽으로는 자객이 절대 못 들어올 테니 앞쪽만 검객들이 잘 지키면 될 것이다. 정말 기막힌 입지가 아닐 수 없다. 청령포에서 그 고즈넉한 분위기에 취해 있다가도 소나무숲 바람결에 역사 속 풍랑 같은 얘기들을 듣고 있다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세조에게 이곳을 알려준 인물이 과연 누구였을까. 누가 한양에서 이토록 멀리 떨어진 이 구석을 그렇게 잘 알고 추천했을까. 역사는 그를 찾아내 기록했어야 한다.

    기록에는 왕방연이라는 인물이 있다고 했다. 단종을 이곳 유배지로 압송할 때 금부도사였던 모양이다. 금부도사라면 오늘날 대검찰청이나 경찰청의 내사(內査) 책임자쯤 된다. 왕방연이 시조를 남긴 모양이다. 이런 시다.

    천만 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 울어 밤길 예놋다.

    진심이었을까. 이게 알려졌다면 그 역시 살아남지 못하지 않았을까. 잘 모르겠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고 이기(利己)의 기록일 뿐이니까.

    2013년 추석 시즌에 개봉된 한재림 감독의 ‘관상’은 912만 명이라는 놀라운 흥행몰이를 했다. 왜 대중은 역도의 얘기에 환호했을까. 생각해보면 조선조의 숱한 궁중 쿠데타와 역(逆)쿠데타 이야기는 현대사회의 그 어떤 사건보다도 역동적이다. 피와 살이 튄다. 막장 드라마도 이런 막장 드라마가 없다. 친족과 친족 간에 도륙을 낸다.

    ‘관상’에서도 수양대군은 여자 점쟁이의 목에 장검을 겨누며 피를 토하듯 소리친다. “언제부터 이 조선 땅이 이씨의 것이 아니라 김씨의 것이 되었단 말이냐?” 이때 이정재의 연기는 정말 실감 난다. 그는 수양대군으로 완전히 빙의(憑依)돼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김씨’는 물론 김종서를 의미한다. 사람들이 ‘관상’에 열광한 것은 600년 전의 이야기가 그리 낯선 풍경이 아니어서였을까.

    외로운 섬, 울창한 솔숲 바람결에 실려온 피냄새

    단종의 유배지 청령포.



    ‘막장’ 중의 ‘막장’

    ‘관상’은 조선조의, 비교적 건국 초기 상황을 그린다. 500년 위용을 자랑하는 조선조는 27명의 임금이 집권했으며 그중 7대인 세조 때까지를 대개 건국 초기로 분류한다. 태조 이성계가 쿠데타로 고려조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연 후 세조 때까지 조선의 세상은 그야말로 피바다였다.

    3대인 태종 이방원은 ‘왕자의 난’을 통해 개국공신 정도전을 밀어내며 정권을 차지한다. 하지만 정정은 늘 불안했고 왕권과 신권은 대립을 거듭했다. 세조는 태종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세종의 둘째 아들로 선대의 공신 김종서에 맞서 철저한 중앙집권화를 꾀한 인물이다. 그는 형 문종이 죽자 조카인 단종을 폐위하는 쿠데타를 감행해 정권을 잡는다.

    영화 ‘관상’은 바로 이 시기, 문종(김태우)이 병으로 죽고 단종(채상우)이 즉위한 직후 나중에 세조가 되는 수양대군과 김종서 장군 간의 피비린내 나는 정쟁의 과정을 다룬다. 흔히들 계유정난이라고 하는 그것이다. 계유년인 1453년을 배경으로 한다. 영화는 여기에 수양대군의 책사이자 모사꾼인 한명회(김의성)와 김종서 측 사람으로 관상쟁이인 김내경(송강호)과 그의 처남(조정석), 그리고 그의 아들 진형(이종석)의 얘기를 씨줄 낱줄로 엮어낸다.

    이야기의 중심은 관상쟁이 김내경이다. 역적의 후손으로 산골에서 숨죽여 지내던 내경이 한양의 유명한 기생이자 사이비 관상쟁이인 연홍(김혜수)의 손에 이끌려 세상 밖으로 나오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얼굴을 흘깃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과거와 미래를 밝혀내는 신통방통한 내경의 능력은 곧장 입소문을 탄다. 그에 대한 얘기는 결국 문종의 귀에까지 들어가고, 내경은 죽어가는 임금으로부터 김종서를 도와 종묘사직을 지키라는 명을 받는다. 당연히 수양대군 측으로부터는 살벌한 위협과 견제에 시달리게 된다. 양측의 권력싸움은 절정의 순간으로 치닫는다.

    모든 일이 다 끝난 후 내경은 자신을 찾아온 한명회에게 참담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한다.

    “흐름을 봤어야 했소. 바람을 봤어야 했단 말이지. 그런데 너울대는 파도만 봤으니….”

    內鏡, 마음속의 거울

    격동과 격랑의 시대에 사람들은 선 하나의 차이를 두고 충신과 간신이 된다. 선을 넘으면 참혹한 죽음이 기다리고, 선을 넘지 않으면 삶을 지탱하긴 해도 잔인한 여생의 후회가 기다린다. 선 저쪽이나 이쪽이나 편한 곳이 없다. 역사의 소용돌이는 선택을 강요하며, 생과 사를 위한 인간의 실존적 선택에는 늘 위험과 원치 않는 결과가 뒤따른다. 그리고 돌이켜 보면 그 선택엔 언제나 허점이 따르게 마련이다.

    주인공 내경은 김종서의 편에 서지만, 그리고 그것은 올바른 선택이라고 생각했지만, 결정적으로 판을 읽어내는 데는 실패한 셈이 됐다. 역사는 승리한 자만을 위해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이어간 사람을 중심으로 기술되는 법이다. 그건 꼭 승부의 문제만이 아니다. 역사적 사건이 다 그렇지만 세조의 쿠데타 역시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그에 대한 평가가 확연히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주인공 이름이 ‘내경’인 것도 주목할 대목이다. 아마도 ‘內鏡’을 염두에 뒀을 것이다. 마음속의 거울. 진정한 관상은 얼굴의 겉모습만 보는 게 아니라 마음속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내경이 수양대군의 역모에서 보지 못한 것은 바로 그 속내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열광한 것은 바로 그 대목에서였을 것이다. 사실은 다 부질없는 짓이거늘 우리는 늘 내 편, 네 편 하며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벌인다. 어쩌면 지금도 우리의 삶은 조선 건국 초기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직도 끊이지 않는 당쟁과 정쟁이 꼭 그때부터 계속돼온 얘기인 듯 보인다.

    북한은 왕조시대 그대로인 것 같고, 남한 역시 적자(嫡子)에게 대권을 물려주는 일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편이다. 남한의 정치는 적어도 북한과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성숙했지만, 이른바 재벌로 분류되는 경제권력들은 여전히 왕조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재산만 물려주는 게 아니라 권력까지 물려준다. 많은 이가 이 땅 곳곳에 그렇듯 왕조의 특색이 면면히 이어져 왔고, 그 숱한 권력다툼의 시작과 정점이 세조가 단종을 죽이면서부터가 아닐까 하고 생각할 것이다. 사람들이 ‘관상’을 절절하면서도 재미있게 본 것은 그 때문이 아닐까.

    죽이십시오, 죽이십시오!

    영월에서 단종의 발자취를 찾아다니는 것은 시간이 갈수록 사람을 숙연하게 만든다. 청령포에서 멀지 않은 곳 그가 묻힌 장릉이 있다. 처음엔 왕릉도 아니었다. 사육신의 거사가 실패한 후 노산군으로 강등돼 청령포에서 숨죽여 살던 단종을 시대는 가만히 놔뒀어야 옳았다. 그러나 이번엔 금성대군(세종의 여섯째 아들)이 문제였다. 금성대군이 단종의 왕권 복위를 꾀한 것이다.

    중앙집권화를 꾀하며 기세가 날로 등등해지던 세조 정권이 이 기운을 간파하지 못했을 리 없다. 모든 신하가 세조 앞에 납작 엎드려 한결같이 고했을 것이다. “노산군을 처형하십시오, 역모가 끊이지 않나이다!” 세조도 그렇게 여겼을 것이다. 결국 조카에게 사약을 내리라고 명한다. 그래도 목을 베거나 능지처참을 하지 않은 것은 자신의 피붙이여서일까. 뭐, 꼭 그렇게 생각할 필요도 없다. 사약도 드라마에서 보는 것처럼 마시자마자 바로 죽지 않는다고 한다. 한참을 고통스러워하다 죽어간다는 것이다.

    장릉은 원래 장릉이 아니었다. 그렇게 죽어간 ‘노산군’ 단종의 시신은 아무 곳에나 버려질 운명이었다. 그러나 그의 시신을 수습하라는 명을 받고 간 엄홍도라는 이름의 장군이 그래도 이건 아니다라고 생각했던지, 지금의 장릉 주변에 단종의 시신을 묻고 그 사실을 숨겼다. 이곳이 장릉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중종 때였다. 왕릉으로 완전히 복원된 것은 숙종 때에 와서다. 거의 150년이 흐른 뒤였다.

    장릉에서 능을 보려면 고갯마루를 살짝 올라가야 한다. 한여름에는 땀이 흐를 거리다. 여성이라면 하이힐이 어울리지 않는 길이다. 단종이 묻힌 능을 바라보다가 저 밑 올라온 길을 내려다보면 과거에 ‘위치’라는 것이 정말 중요했구나, 사람들이 저마다 지관(地官)의 능력을 어느 정도씩은 갖고 있었구나 싶다. 아주 기가 막힌 곳에 묏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울창한 숲으로 가려져 있었겠지만 볕과 바람이 풍부한 곳이다. 여기라면 비운의 인물이긴 해도 ‘생(生) 이후의 삶’이 안락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엄홍도는 생각했을 것이다. 엄홍도도 단종을 묻으면서 지금 우리처럼 울컥했을 것이다. 어린 것이 얼마나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을까. 권력은 왜 이리 잔인한 것일까. 그럼에도 역사는 왜 여전히 사람들로 하여금 비극을 기억하게 만드는 것일까. 그것이 주는 교훈은 과연 무엇일까.

    버려진 관풍헌, 共謀의 덫

    단종의 궤적을 따라간답시고 관풍헌에 들른 것은 실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관풍헌은 완전히 버려진 곳이다. 단종이 최후로 머문 곳이고 여기 앞마당에서 사약을 받아 숨을 거둔 곳이거늘, 관풍헌은 곧 철거될 것처럼 휑뎅그렁하게 난개발된 다운타운 한가운데 서 있다. 문화유산을 어찌 이렇게 다루나 싶어 화가 난다. 포토그래퍼가 연신 렌즈를 들이대는 곳도 관풍헌 담 너머로 보이는 모텔 간판이다. 그 간판과 관풍헌은 도저히 어울리지도, 어울려서도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떡하니 저렇게 있다.

    그가 사진을 찍으며 연신 혀를 끌끌 찬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네.” 그러나 어쩌면 사람들의 마음이 이런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여기를 아예 없애버리고 싶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당시 역사의 생존자들, 그것을 잇고 이어서 여기까지 이어져 우리가 된 지금, 모두는 단종의 죽음 앞에서 공모(共謀)의 덫을 벗어날 수가 없는 노릇이다. 우리의 죄를 덮고 싶다는 마음이 이곳을 이렇게 버려두게 한 건 아닐까. 문도 안 잠그고, 청소도 안 하고, 누구나 와서 여기에 불이라도 싸지르라고.

    영화를 통해 역사의 피맛을 느끼게 되는 건 여러 의미로 시대적 각성의 순간을 경험케 한다. 여행을 통해 같은 맛을 느끼게 되는 건 일종의 강렬한 후회감 같은 것이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거늘, 같은 심정이랄까. 한번 그 맛을 느끼게 되면 영화도, 여행도 쉽게 버릴 수가 없게 된다. 그래서 영화와 여행은 늘 유의미한 관계임을 새삼 깨닫게 해준다.

    ‘관상’은 600년 전의 이야기임에도 우리를 전율케 한다. 그 짜릿함만으로도 다시 한 번 봐야 할 가치를 부여받는다. 단종이 지낸 영월의 이곳저곳은 우리가 순간순간 빠지기 쉬운 몰역사적 가치관의 함정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영화와 여행의 수레는 같이 굴러가면 감칠맛의 시너지 효과가 대단하다. 우리가 영화를 보고 길을 떠나지 않을 수 없는 건 그 때문이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