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호

인사이드

박용만 상의 회장 직접 돌린 ‘제언집’ 속사정

“말은 해야겠는데, 눈치는 봐야 하고…”

  • 입력2017-12-24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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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계, 컨설팅사, 시민단체 등 각계 목소리 담아 ‘신선하다’ 평가

    • ‘적폐’ 몰린 전경련·경총…대한상의 존재감 커져

    • 상반된 시각 동시에 수록…열린 태도? 보호색?

    • “진짜 하고픈 얘기는 최저임금 인상·근로시간 단축”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정부 및 국회 리더들에게 경제 현안에 대한 전문가 제언집을 직접 전달했다. 왼쪽위부터 이정미 정의당 대표,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김동연 경제부총리, 정세균 국회의장,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 유승민 바른정당 대표에게 제언집을 전달하는 박 회장.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정부 및 국회 리더들에게 경제 현안에 대한 전문가 제언집을 직접 전달했다. 왼쪽위부터 이정미 정의당 대표,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김동연 경제부총리, 정세균 국회의장,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 유승민 바른정당 대표에게 제언집을 전달하는 박 회장.

    2017년 11월 16일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김동연 경제부총리와 간담회를 갖고 ‘최근 경제 현안에 대한 전문가 제언’(이하 제언집)을 전했다. 일주일 후인 같은 달 23일에는 국회를 찾아 정세균 국회의장,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김광림 자유한국당 정책위원회 의장,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 유승민 바른정당 대표, 이정미 정의당 대표 등 여야지도부를 각각 만나 같은 제언집을 전달했다. 

    26쪽짜리 이 소책자에는 학계, 컨설팅사, 시민단체 등 전문가 50여 명으로부터 취합한 경제 관련 제언이 담겼다. 대·중·벤처기업과 중소기업 근로자, 취업준비생 등 현장의 목소리도 실었다. 기존의 ‘소원수리형’ 건의에서 벗어나 현장과 전문가 의견을 청취해 합리적 해법을 모색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제언집은 언론으로부터 ‘신선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제언집은 대한상의 홈페이지(www.korcham.net) 메인화면에도 게재돼 있어 누구나 내려받아 볼 수 있다.

    부드럽고 산만하다

    이 제언집에 참여한 전문가 중 상당수는 대한상의 정책자문단에 소속돼 있다. 대한상의 관계자는 “정책자문단에 계신 전문가들, 그리고 외부 전문가와 시민단체 등의 의견을 취합해 만들었다”고 했다. 

    박용만 회장은 2013년 대한상의 회장 취임 이후 회장 직속 기구로 정책자문단을 만들었다. 각계의 다양한 의견을 반영해 더욱 공신력 있는 목소리를 내자는, 박용만식 소통 전략의 일환이다. 7개 분과에 40여 명의 전문가가 포진해 있는데, 재계에 상당히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는 전문가도 다수 포함돼 있다. 

    대한상의는 정책자문단 위원들이 평소 회의 때 하는 발언들을 취합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따로 찾아가 면담하는 방식으로 제언집을 만들었다. 제언집은 경기 하방리스크, 산업의 미래, 고용노동부문 선진화, 기업의 사회공공성 강화 등 4개 장(章)으로 구성됐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그 내용을 보자면 부드럽고 산만하다. ‘고용노동부문 선진화’ 파트를 보자. 

    제언집은 대기업 현장의 목소리를 이렇게 소개한다. “저임금근로자를 배려해야 한다는 건 이해해요. 하지만 연봉 4000만 원 직원까지 최저임금 수혜를 받는 건 취지가 아니지 않나요? 임금체계를 합리적으로 바꾸려 해도 노조의 반대로 못 하고 있어요.” 

    정규직 전환대상자의 목소리도 담았다. “계약연장 못 할까봐 휴가도 제대로 못 갔는데, 정규직이 되면 아이들과 함께 여름휴가를 가고 싶어요.” 

    이에 대한 전문가 진단으로 “기업의 경쟁력이 구성원의 희생 위에 유지되어온 측면이 있습니다. 그간 정부는 ‘어렵다’는 기업의 하소연에 얽매였습니다.”(김유선 노동사회연구소 박사), “역대 정부 모두 노동시장의 안정성과 유연성이 조화되는 유연안정성(Flexicurity)을 추구했지만, 고용불안 계층의 안정성도 확보하지 못했고, 노동시장의 유연성도 제고하지 못했습니다.”(이상희 산업기술대 교수) 등을 나란히 열거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직후 드라이브를 건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필요성을 인정하고 노동시장 이중구조에 대한 기업 책임론을 수용하는 동시에 최저임금 산입범위 조정, 노동시장 유연성 제고 등 재계의 당면 과제를 환기시킨다. 노(勞)와 사(使)의 입장이 한 그릇에 담긴 듯한 인상이다.

    박용만밖에 없다

    반면 대한상의가 2017년 5월 조기 대선을 앞두고 주요 정당에 전달한 ‘대선후보께 드리는 경제계 제언문’은 이번 제언집과 사뭇 톤이 달랐다. 40여 명의 보수-진보학자에게 두루 자문해 작성한 이 문건에서 대한상의는 노동시장 이중구조와 관련해 이렇게 발언한다. 

    ‘정규직에 대한 높은 보호 수준이 비정규직 확대의 한 원인입니다. 고령화가 진행되는 동안 연공급 임금 상승은 계속되고, 저성장시대에도 노조는 임금 인상을 우선시합니다. 기업이 청년채용 확대를 주저하고, 설비자동화나 비정규직을 선호하는 것은 이런 연유입니다.’ 

    대한상의의 ‘톤’이 대선 전과 사뭇 달라진 것에 대해 이 제언집 제작에 참여한 한 전문가는 “서슬 퍼런 정국이라도 워낙 현안이 시급하다 보니 할 말은 해야겠는데, 정권 눈치를 보지 않을 수는 없기에 정부 입맛에 맞는 얘기를 섞어가며 재계가 원하는 메시지를 담은 것”이라며 “그러한 보호색을 걷어내면 대한상의가 진짜 하고 싶은 얘기가 보인다”고 말했다. 또 다른 전문가는 “현 정부 들어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와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가 적폐로 몰린 이상, 재계 입장을 대변할 창구는 대한상의밖에 없다”며 “현 정권에서 박용만 회장을 ‘말이 통하는 개혁 보수’ 정도로 생각하기 때문에 재계는 박 회장과 대한상의에 기댈 수밖에 없는 처지”라고 전했다. 

    전경련은 2016년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이후 활동이 거의 올스톱 된 상태다. 삼성, 현대자동차, SK, LG 등 4대 그룹이 모두 탈퇴한 것도 타격이 컸다. 허창수 전경련 회장은 2017년 11월 7일 청와대에서 열린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각계 인사들이 참석한 만찬에도 초대받지 못했다. 

    경총도 ‘미운털’ 신세다. 문재인 정부 출범 초기 김영배 경총 부회장은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추진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가 문재인 대통령으로부터 “성찰이나 반성이 없다”는 질책을 받았다. 2017년 9월 경총은 고용노동부 고용보험위원회 사용자위원에서 제외됐고, 11월 대통령 직속 일자리위원회가 개최한 ‘전국 일자리위원회 워크숍’에 초대받지 못했다. 이 워크숍은 정부, 공공기관, 지방자치단체, 경제단체, 노동단체 등 140여 개 기관 400여 명이 참석한 행사로,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은 워크숍에서 인사말까지 했다. 


    2017년 9월 20일 오후 서울 여의도 산업은행 본점 앞에서 열린 ‘과로사 근절 및 장시간 노동철폐를 위한 결의대회’에서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조합원들이 장시간 노동 철폐를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스1]

    2017년 9월 20일 오후 서울 여의도 산업은행 본점 앞에서 열린 ‘과로사 근절 및 장시간 노동철폐를 위한 결의대회’에서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조합원들이 장시간 노동 철폐를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스1]

    재계에서는 문재인 정부가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 사용자 대표인 경총을 ‘패싱’하고 대한상의를 소통 창구로 선택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백운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대한상의가 경제계를 대표하는 정책 파트너로 자리매김해달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제언집은 다양한 경제 현안을 다룬다. 대한상의는 머리말에서 “중요한 것은 Status Q(현상유지)가 아닌 Future(미래)”라며 “지금의 시장을 바꾸고 미래 성장을 이끌어낼 실천 가능한 대안 마련을 위해 정부와 국회, 경제·사회 각층이 합심 노력하는 분위기가 일어나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대한상의 관계자는 “주로 산업의 미래를 논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작업에 참여한 전문가들은 “정말 하고 싶은 얘기는 당장의 현안인 최저임금 인상과 근로시간 단축 문제 등 노동 현안”이라고 말한다. 한 전문가의 말이다. 

    “문재인 정부가 일자리 정책을 중시하는데, 진정한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는 곳이 없어 보인다. 컨트롤타워로 기대했던 대통령 직속 일자리위원회는 이용섭 부위원장의 지방선거 출마설이 나돌면서 추진력을 잃어가는 분위기고, 고용노동부는 그저 근로감독부가 돼가고 있다. 한편 기획재정부는 최저임금 인상분 보조를 메우기에만 급급해 보인다. 임금을 올리고, 정규직으로 전환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고통분담 정책도 패키지로 같이 가야 하는데, 그런 얘기는 나오질 않아 답답하다.” 

    제언집에 참여한 또 다른 전문가는 “문재인 정부가 노동시장을 꼭 개혁했으면 하는 것이 개인적인 바람인데, 사회안전망 구축과 관련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어 안타깝다”며 “일자리가 아니라 사람을 보호하는 정책 추진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침묵보다는 낫다

    제언집은 재계 입장과는 차이가 있는 진보적 시각도 포함한다. 그러나 다분히 ‘제한적 선택’의 과정을 거친 것으로 보인다. 

    ‘기업의 사회공공성 강화’ 파트에는 “기업 스스로 바뀔 가능성이 낮기 때문에 사회적 약자의 재산권 보호, 소비자 집단소송제 도입 등 좀 더 강력한 제도를 도입해야 합니다”라는 경실련 재벌개혁위원장인 박상인 서울대 교수의 제언이 실렸다. 그는 대한상의 정책자문단 위원이다. 박 교수는 “대기업의 중소기업 기술 탈취를 행정력을 동원해 막는 것은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에 징벌배상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얘기했지만, 부담스러웠는지 이 내용은 제언집에서 빠졌다”며 “그래도 반대되는 이야기를 경청하는 대한상의의 자세는 좋다고 본다”고 말했다. 

    진보 성향의 한 전문가는 “대한상의에서 전화를 걸어와 평소 내가 하는 말들로 정리한 두어 문장을 불러주며 이대로 제언집에 실어도 되겠느냐고 해 그러라고 했다”며 “제언집이 그저 다양한 얘기를 한데 모은 것에 불과해 보여 아쉽지만, 대한상의가 경총보다는 상식적인 선에서 임하려고 하는 점은 좋다고 본다”고 말했다. 

    재계의 입장을 공개적으로 표명하는 ‘박용만식 행보’는 일단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한 진보 인사는 “정·재계가 밀실에서 논의하던 시절보다는 나아진 것 같다”고 평가했다. 다른 보수 인사는 “재계 입장을 속 시원하고 세게 말하지 못하는 것은 아쉽지만, 그래도 침묵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본다”고 평했다. 

    대한상의 관계자는 제언집에 대해 “정부와 국회 등이 관심을 가져주길 바라는 어젠다를 공론화하려는 노력으로 이해해달라”고 당부했다. 시민단체, 진보적 전문가 견해 등 재계 입장과 결이 다른 목소리까지 다룬 것에 대해서는 “그러한 사회적 요구가 있음을 재계가 잘 알고 있음을 알리는 차원”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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