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호

상속의 역사

길드의 자손이여, 등 따습고 배부르나니

  • 입력2018-01-07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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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를 공부해보면 상속이 물질에 국한되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무형의 재산도 상속되어 왔는데, 그 종류가 무척 많았다. 서양 중세의 길드(guild)는 구성원에게 무형의 특권을 물려줬다는 점에서 일종의 ‘의사(擬似) 상속제도’였다.
    렘브란트의 1662년 작 ‘포목상 조합의 이사들(Syndics of the Drapers’ Guild)’. 네덜란드 포목상 길드에서 옷감의 품질을 평가하는 회의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렘브란트의 1662년 작 ‘포목상 조합의 이사들(Syndics of the Drapers’ Guild)’. 네덜란드 포목상 길드에서 옷감의 품질을 평가하는 회의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근대 이전 중국 일본·인도에도 길드, 곧 동업자 조합이 있었다. 특히 인도의 상인 길드는 동서양 간 교역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중국의 상인 길드 역시 국내외 무역에서 지배권을 행사했다. 당나라 때 등장한 ‘행(行)’이 그것인데, 명나라 이후에는 더욱 특이한 형태로 발전했다. 중국의 대외 교섭창구에 해당하는 광둥 지방에 ‘공행(公行)’이란 게 존재했다. 일종의 특허상인 길드로 국제무역을 사실상 독점했다. 

    중국과 인도의 상인 길드는 구성원 간 과도한 경쟁을 규제하는 동시에 교역권을 독점하기 위한 것이었다. 바로 그 점에서 서양의 상인 길드와 비슷하다. 조선 시대에도 이러한 성격의 동업조합이 운영됐다. 

    그런데 유럽의 길드는 여타 지역의 길드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들은 생산과 분배를 통제함으로써 길드 구성원의 이익을 도모했을 뿐만 아니라 도시 행정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유럽의 길드는 경제 조직이자 정치 조직, 아니 그 이상이었다. 

    역사상 길드가 최초로 언급된 것은 779년에 기록된 카를 대제의 문서다. 당시 길드는 대규모 술잔치를 담당하는 주체였다. 그들은 희생 제물을 바치는 종교 모임의 성격을 띠기도 했다. 길드는 공동제사와 공동주연(共同酒宴)의 조직으로 시작해 구성원의 상호부조와 친목도모, 사업독점, 내부경쟁 방지 등으로 활동 영역을 넓혀갔다.

    혼맥으로 특권 공고화

    중세 길드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일까? ‘사회적 네트워크’를 구성해 대대로 물려주는 것이다. 길드의 구성원들은 종교, 사회 및 경제적으로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했다. 그들은 자손 대대로 동일한 직업에 종사하며 밀접한 통혼권(通婚圈)을 형성했다. 자연히 그들은 자손 대대로 각종 혜택을 독점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화합을 외부에 과시하기도 했다. 예컨대 길드의 누군가가 사망하면, 모든 구성원이 장례식에 참석해 내부 결속력을 증명하는 식이다. 



    여러 종류의 길드 중에서도 가장 먼저 성장한 것은 상인 길드였다. 상인들, 특히 원거리 무역에 종사하는 상인들은 중세의 도시에서 일찌감치 시민으로 인정받았다. 그들은 도시 안의 일정 지역에 거주지를 정하고 촘촘한 인척 관계를 형성했다. 그러고는 상인 길드를 조직해 상호부조를 제도화했다. 

    상인 길드가 최초로 출현한 나라는 영국이다. 윌리엄 1세(WillamⅠ· 1028~1087)의 정복 이후 노르망디(프랑스)와 잉글랜드 사이의 무역이 활발해지자 상인 길드가 수적으로 빠르게 증가했다. 에드워드 1세(EdwardⅠ· 1239~1307) 때는 무려 92개나 되는 상인 길드가 활약했다. 

    도시의 발달은 상인 계급과 불가분의 관계였다. 상인들은 우선 성채, 수도원, 교회 부근에 자리를 잡았다. 이어 그들은 성 밖에 거주하는 수공업자들과 함께 시장 부근에 집단거주지를 형성했다. 이것이 점점 커져서 독립된 도시로 발전하는 경우도 많았다. 

    길드는 정치·사회적 출세의 도구였다. 길드를 운영하는 부유한 상인들은 도시의 재정에 기여했다. 그 때문에 상인 길드의 지도자들은 차츰 도시의 행정에 간섭하기 시작했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결국 ‘도시귀족(patrician)’으로 발돋움하는 데 성공한다. 

    상인 길드의 약진은 이탈리아의 무역도시에서 더욱 눈부셨다. 12∼15세기 이탈리아 중북부 도시들은 동서무역의 중계자로 막대한 부를 획득했다. 이들은 동남아시아와 인도에서 수입된 향신료를 독일 남부지방에서 출토된 은과 교환했다. 여기서 많은 이익이 발생해 이들은 신흥 부호로 성장했으며 길드의 지도자에서 도시귀족으로 신분이 상승했다. 이른바 ‘신귀족’이 탄생한 것이다.

    안티노리 對 메디치의 ‘피의 전쟁’

    상인 길드를 지휘하던 거상들은 봉건귀족과의 혼맥(婚脈) 또한 개척해나갔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노력한 결과 이들은 중세도시의 명실상부한 지배자로 떠올랐다. 이들 가운데는 도시 행정에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유력 가문도 드물지 않았다.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의 명가 ‘메디치’ 가문도 모직업 길드와 은행업 길드를 통해 권력에 다가갔다. 너무도 유명한 이야기다. 

    한마디로 부유한 상인 또는 은행가는 길드의 중심축으로서 그들이 거주하는 도시의 지배권을 확보했다. 이들은 점차 자기네 도시를 ‘도시 코뮨’(도시공동체)으로 바꿔나갔다. 이탈리아의 많은 도시가 이런 변화를 겪었다. 

    피렌체 이야기를 좀 더 해보자. 13, 14세기 피렌체에는 안티노리(Antinori)라는 명문(名門)이 있었다. 이 집안이 피렌체에 살기 시작한 것은 13세기였다. 본래 이들은 피렌체와 프라토 사이에 있는 ‘칼렌자노’라는 작은 마을의 평민이었다. 

    안티노리 일가는 피렌체로 이주한 뒤 상업에 종사했다. 1285년에는 피렌체의 비단 길드에 가입하고, 그 뒤에 은행 길드에도 가입했다. 재산이 불어나자 이들은 포도주를 생산·판매하는 사업에도 뛰어들었고, 나중에는 포도주 유통업이 이 집안의 주요 업종이 되었다. 안티노리는 피렌체의 여러 길드에 참여했고, 이로써 가문의 영향력을 강화해나갔다. 

    당시 피렌체는 도시국가였다. 명목상 공화국이었으나 몇몇 유력한 귀족 집안과 부유한 길드가 시정(市政)의 요직을 독점했다. 이들은 피렌체의 정치적·경제적 주도권을 둘러싸고 극심한 정쟁을 벌였다. 정적에 대한 음모와 모략이 난무했다. 정적을 먼 곳으로 추방하거나 체포, 구금하는 일도 빈번했다. 이따금 암살사건도 일어났다. 

    안티노리 가문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들은 경쟁 가문인 메디치가와 뒤엉켜 싸우며 여러 차례 부침을 거듭했다. 도시국가 피렌체의 지배권을 지키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대학(university)’은 중세 유럽에 처음 등장하는데, 대학도 초기에는 일종의 길드였다. 11세기 이후 유럽 각국에 길드가 본격적으로 출현하자 그 영향으로 ‘교수조합’ ‘학생조합’ 등 교육 길드가 구성됐고, 그것을 토대로 대학이 성립된 것이다. 대학의 인기는 갈수록 높아졌다. 15, 16세기 유럽에는 80개의 대학이 성업했다. 

    대학은 라틴어로 ‘universitas’로 동업조합(corporation), 즉 길드(guild)란 뜻이다. ‘universitas’는 보통 ‘일반연구소(studium generale)’라고 번역되는데, 여기서의 ‘일반’은 학문 일반을 뜻하지 않는다. ‘일반인’이라는 뜻이다. 요컨대 대학을 뜻하는 ‘일반(generale)’의 함의는, 학문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든지 이 조직에 참여할 수 있다는 의미다. 대학 곧 ‘universitas’는 학문에 관심이 있는 시민들의 동업조합, 곧 길드다. 

    대학은 본래 특권적 엘리트의 아성이 아니었다. 시민 모두에게 열린 비(非)특권적 조직이었다. 시민의 자유가 확대된 서양 근대에 이르러 대학은 ‘상아탑’이 되어 특권적 교육기관이 된다. 그러다가 현대에 이르러 대학은 다시 본연의 위치로 돌아와 일반 시민의 교육을 담당하게 되었다.

    공존과 독점의 교차점

    여러 길드를 통해 부를 쌓은 이탈리아 피렌체의 안티노리 가문의 문장(작은 사진)과 1506년 안티노리 가문의 성.

    여러 길드를 통해 부를 쌓은 이탈리아 피렌체의 안티노리 가문의 문장(작은 사진)과 1506년 안티노리 가문의 성.

    도시귀족이 위세를 떨치자 새로운 길드가 등장해 그 위세에 도전한다. 모직물, 견직물을 생산하는 ‘직인(職人) 길드(craft guild, Zunft)’다. 14세기 이후 북유럽의 여러 도시에서는 수공업자 길드가 귀족의 횡포에 저항하며 일종의 ‘민주화’를 꾀했다. 이들 길드는 거금을 투자해 문예를 장려하기도 했다. 

    이미 13세기부터 프랑스에서는 직인 길드가 성장해 자치권을 획득했다. 이들은 부유한 상인계급 출신 도시귀족을 견제하며 ‘참사회’에 참여해 시정을 개혁했다. 프랑스의 여러 도시에서 직인 길드는 참정권을 확보했다. 이웃 나라 네덜란드에서도 그러했다. 위트레흐트 등지에서 직인 길드의 성장이 눈부셨다. 한편 1363년 독일 뉘른베르크에는 1217명의 장인이 있었고, 이들은 약 50개의 길드에 속했다. 

    직인 길드는 내부 경쟁으로 구성원의 사업이 망하지 않도록 다양한 조치를 취했다. 특정 업종의 영업권을 독점하고 여러 규약을 제정해 구성원들에게 일정 수준의 수입을 보장했다. 또 원료를 공동 구입하고 장인(master) 휘하의 직인(職人, journeyman)과 도제(徒弟, apprentice)의 수도 1~3명으로 제한했다. 생산도구의 종류와 수도 제한하고 노동시간까지 통제했다. 완제품의 품질 검사를 의무화하고 판매가격 또한 미리 통일했다. 

    도제의 수업 기간은 나라마다 조금씩 달랐다. 영국은 7년, 독일은 3년, 그 밖의 나라에서는 5년 정도였다. 수업을 마친 직인(職人)은 장인이 되기 전에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며 풍부한 경력을 쌓았다. 

    인간의 역사는 변하기 마련이고, 불변의 제도란 존재하지 않는다. 14세기부터 길드의 세계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독립된 업체를 소유하지 못하는 직인이 많아졌고, 이들은 직인 길드에 저항하는 세력이 된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직인 길드는 기득권을 지키고자 더욱 보수적인 노선으로 나아갔다. 직인 길드는 외부인이 동종의 사업에 뛰어들지 못하게 막았고, 지역독점권을 더욱 강화해나갔다. 

    15세기 유럽 시장은 더욱 위축됐다. 수공업자들의 생계는 악화됐다. 그러자 직인 길드는 구성원들의 생존권을 보장하기 위해 생산 및 판매의 독점권을 강화했고, 길드 가입 조건을 더욱 까다롭게 만들었다. 공생과 내부의 평등을 강조하던 길드였으나, 그 내부는 양극화로 인해 갈등이 심했다. 

    한편 길드는 종교적 의무를 강요했다. 구성원과 그 가족은 길드가 정한 복잡한 의례를 준수해야 했다. 심지어 길드에 속한 장인이 사는 마을 사람들도 종교적 의무를 다해야 했다. 

    유럽 도시들을 들여다보면 장인과 도시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짐작게 하는 거리 이름을 자주 볼 수 있다. 수공업이 활기를 띠면서 도시 곳곳에 제화공, 재단사, 제빵사, 목공, 석공, 대장장이 등이 집단거주지를 형성했다. 네덜란드 곳곳에는 ‘Bakkerstraat’, 곧 ‘빵 굽는 이들의 거리’가 있다. 중세 이래 제빵업자들이 밀집해 거주하던 곳이다. ‘Zadelstraat’도 있는데, ‘말안장의 거리’란 뜻이다. 마구(馬具)업자들이 모여 살던 곳이다. 

    이처럼 일정 지역에 거주하던 수공업자들은 직인 길드를 통해 스스로의 생존을 보장하고 발전을 꾀했다. 17세기 이후 독일과 영국에서는 대장장이를 뜻하는 ‘슈미트(Schmidt)’, 또는 ‘스미스(Smith)’라는 성(姓)이 널리 사용된다. 그만큼 쇠를 다루는 수공업자가 많아졌다는 뜻이다. 

    각종 직인 길드마다 수호성인이 있다. 그 축일 행사에는 길드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종교 예식을 봉행했다. 길드의 수호성인이라니? 가령 화가들은 성 루가(Saint Luke)를 섬겼다. 제빵업자는 성 오노레(Saint Honore′), 금은 공방은 성 엘리기우스(Saint Eligius)를 수호성인으로 모셨다. 그들 성인의 축일에는 길드의 교회당에서 기념 미사가 집전됐다. 

    수호성인이 어떤 방식으로 결정되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성 루가는 성모상 및 그리스도의 초상을 그렸다는 전설이 있다. 이런 전설 때문에 14세기 중반부터 루가는 화가 및 공예가들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길드 가운데는 종교적 색채가 유난히 두드러지는 경우도 있었다. 길드는 정치·경제·사회적 네트워크였고, 그에 더해 종교적 의무까지 강요하는 일종의 의사 가족제도 기능도 했다는 말이다. 기독교 중심의 사회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안트베르펜 왕립 미술관 전경.

    안트베르펜 왕립 미술관 전경.

    1382년 벨기에의 ‘안트베르펜’에 사는 화가들이 길드를 조직했다. 수호성인 성 루가의 이름을 딴 ‘성 루가 길드(Guild of St. Luke)’였다. 이에 속한 화가들은 ‘화가들의 방’이라는 전시실에 모여 회의도 하고 그림도 그렸다. 그들은 자신의 대표작을 그 방에 걸어두었다. 1614년 거장 루벤스 또한 이 방에 자신의 그림 ‘앵무새와 성 가족(Holy Family with Parrot)’을 기증했다. 

    훗날 성 루가 길드는 ‘안트베르펜 아카데미’라는 미술교육기관으로 바뀌었다. 벨기에 정부는 성 루가 길드에 소장된 많은 작품을 기반으로 왕립미술관을 건립한다. 루벤스의 이 그림도 이 미술관에 있다. 유럽의 유수한 미술관 하나가 화가들의 길드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은 인상적이다.

    대항해시대가 열리자…

    15세기가 되자 유럽의 사회 변화 속도는 더욱 빨라진다. 수공업자의 수가 늘어났고, 업종은 더욱 다양해졌다. 이에 직인 길드는 분열을 거듭한다. 그때까지 길드가 형성된 적 없는 새로운 분야에서는 신종 길드가 구성됐다. 이렇게 길드의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해 독일의 경우 쾰른에 61개, 뤼베크와 뉘른베르크에 각각 50여 개의 길드가 있었다. 오스트리아 빈에도 80개쯤의 길드가 운영됐다. 

    길드가 급증하자 그들의 현실은 설립 목표로부터 멀어져갔다. 특히 일부 원거리 무역상들은 경제적으로 막대한 이익을 거두자 길드 공동체의 ‘현상 유지’ 정책과는 모순된 입장을 취한다. 이들이 도시 지배자로 성장하면 할수록 그들은 특권집단화됐다. 어쩌면 이들은 ‘시민’으로서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르나, 그들의 모습에서 ‘시민적’ 이상을 바라기는 어려웠다. 길드의 일부는 이미 귀족이 되어 있었다. 

    구성원 대부분은 연이은 추락을 경험했다. 길드 내부의 빈부 격차는 날로 커졌다. 내부 갈등이 증폭되는 가운데 장인과 도제 사이에도 이해관계가 노골적으로 충돌했다. 

    ‘대항해시대’의 개막에 이어 자본주의의 맹아가 본격적으로 꿈틀거리자 길드가 처한 상황은 더욱 어려워졌다. 중세의 수공업과는 확연히 다른 공장제도가 등장했다. 이에 수백 년 동안 길드가 목표로 삼았던 생산과 영업의 독점권은 무너지고 말았다. 동종업자의 평화로운 공생도 더 이상은 보장될 수 없었다. 마침내 길드는 역사적 사명을 다한 채 내리막길을 걷는다. 자본가의 등장과 자유 경쟁은 필연의 추세가 되었다.

    백승종
    ● 1957년 전북 전주 출생
    ● 독일 튀빙겐대 철학박사
    ● 서강대 사학과 교수, 독일 튀빙겐대 한국 및 중국학과 교수, 

       프랑스 국립고등사회과학원 초빙교수
    ● 現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 저서 : ‘백승종의 역설’, 
    ‘마흔 역사를 알아야 할 시간’  
                 ‘금서, 시대를 읽다’,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 
                 ‘조선의 아버지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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